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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눈이 내려 롱패딩을 적시던 차가운 겨울날이었다.

"형님, 그 이프리트 정말 데리고 있을 거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런 말 해드리긴 뭐한데, 그 애 맡겠다고 한 게 형님아가 처음이요. 어찌나 지랄발광이 심하던지... 대체 어떻게 휘어잡은거요?"

"잘."

"...그러니까, 아무튼 고맙다는 거지 형님. 젠장, 분위기가 왜 이래."

난 대꾸하지 않았다. 녀석은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가 말을 머금었다. 그러나 결국 삼키지 못했다.

"형님, 형님 취향이 흑장발이라 그러지 않았었나?"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아니, 그랬다.

"형님아, 솔직히 내가 형님 덕분에 도움받은 거 꽤 크다 이거야. 내가 얘기했었나? 저번 건 덕 좀 크게 봤어. 불량품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이 가져가는 거고? 폐기 비용이 다 얼마나 될 지 도저히 상상도 안 된단 말이지... 나 참. 대체 뭐야?"

별 관심은 없었다. 그래봐야 성인이다. 그렇게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내가 궁금하다.

"젠장, 이 망할놈의 세상 그렇게 살면 오래 못 살아. 들어보셔, 내가 그 뭐냐 딱 들으면 귀가 솔깃할 만한 거 하나 업어왔지."

"뭐?"

"봐봐, 아무리 남자 혼자 안 산다고 바로 그냥 마법처럼 홀아비 냄새 안 나고 그런 건 아녀. 그 몸뚱이로는 그것들 다 조교하는 것도 벅차지 않어? 솔직히 나이라는 게 좀 그런 게 있잖아."

"..."

"진짜 괜찮은 애야, 내가 돈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는 거지. 함 키워봐."

금붕어 하나 분양하듯이 말하는 그런 태도가 나에게는 껄끄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못 되었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

아이는 눈발의 어귀에서 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방팔방 피튀기는 발할라에서마저 니플헤임의 권태를 느낀 듯한 냉엄함.

안드바리.

그 아이가 우리 집에 당도했다.

"당신이 제 아버지 되실 분이겠군요."

부정했어야 했는데.

"반가워요. 안드바리예요."


빛조차 아름다움을 경외하여 물고늘어지지 못해 한 올 자락도 반사되지 못하는 반타블랙의 머리카락

그것이 길고 길게 늘어진다
어깻죽지에,
가슴팍에,
허리에.







그 뒤로는 어떻게 지냈는지를 모르겠다.

"아버지. 이번 달 가계부예요. 쓸데없는 장난감 구매는 조금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좌 땡깡을 그렇게 많이 들어주시면 돈이 남아나질 않을 거예요."

"손 씻기 전에 물 틀어놓는 버릇 고치세요, 그냥 찬 물로 씻으세요. 애도 아니고."

"고개 펴세요! 허리도! 관리 안 하다가 훅 가요!"

그 아이랑 너무나 비슷해
나는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

똑 부러지고
말 잘 듣고
영리하고
귀여운

그 아이처럼
꼭 그 아이인 것만 같아
자꾸 그 아이가 생각나

안 된다

하지만 아버지라고 불러질 때마다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안드바리는 바리가 되었다.

"짧고 알아듣기 쉽겠네요, 괜찮아요. 저는 계속 아버지라 부를 거지만."




바리가 바라는 것은 많지 않았

"지저분한 방은 지저분한 정신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 영수증들 정리하는 거 좀 도와주시죠!"

"아버지의 지난 한 달간의 콜라 소비량이예요. 무슨 거의 하루 한 통을 마시니까, 봐봐요! 카페인 중독 기준표 이거 보이시죠? 매우 위험! 이제 줄이셔야 돼요! 지금까지 당뇨가 안 온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어요! 적어도 제로로 바꾸세요!"

"어, 어어. 응."

많았다.

그러나 확신하건데 나는 얼빠진 얼굴로 그것을 전부 따랐다.

"휴우, 애들 앞에서 술담배는 안 하시니 그건 칭찬해드려야 할까요."

"지금은 너희들 때문에 술 대신 콜라를 마시니까..."

"그건 잘 하셨네요."










"어이."

빨래를 하기 전 더치의 팬티 냄새를 맡고 있는데 이프리트가 대뜸 나를 불러왔다.

"너."

"엉?"

"뭐 하고 있냐."

"빨 옷이 맞나 확인하고 있었지."

"말이나 못하면. 이거 잠깐 봐봐."

"뭐야, 전단지?"

"집 앞에 붙어 있더라."

"얼씨구, 무슨 이런 구닥다리같은..."

"요즘 애들한테는 레트로 감성이라고 어필하는 모양이야. 오프라인으로 다 붙이고 다녀야 하는 일이라 온라인 광고랑은 다르게 정성스러워 보인다고 반응도 좋던데?"

"허어, 꽤 신기한데 그건."

유행은 돈다는 건가.

"백화점 자체도 버추얼 매장과는 다르게 몸을 직접 움직이다 보니 데이트 코스로도 유행한다더라고."

"잘 이해는 안 되네."

"그런 건 이해를 하는 게 아니지. 늙었어, 늙었어. 그냥 즐기란 말야. 아무튼, 애들 트렌드를 놓쳐선 안 되지 않아?"

"나도 노력은 해, 쉽지가 않은 거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슬슬 버거우셔?"

"헛 참."

"아무튼, 너도 외출 좀 해야 하지 않겠어?"

"음. 별로..."

"늙어서 가만 있으면 좀이 쑤신다더니 별로 그렇지도 않나 보네. 그래도 말이야, 햇볕도 좀 쐬고. 어... 그래. 그 머리도 좀 깎고 해야 하지 않겠어?"

"벌써 그럴 때가 됐나?"

아닌 게 아니라 오래되긴 했다. 머리를 쓸어 보니 꽤 수더분한 것도 같고?

"아냐, 됐어. 혼자 하지 뭐. 아, 맞다. 마침 바리 유치원 등록했던 거 유치원복 사러 가야 했어. 가는 김에 사자."

"유치원복?"

"바리가 제조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일반상식이 좀 부족해서 그렇게 됐어."

"...그래?"

"어. 저번에 들어보니 베이비파우더가 뭔지도 모르고, IPTV 켤 줄도 모르고 심지어 가족이 뭔지도 모르고 해서."

"헤. 몸은 그래도 정신은 유치원 수준이 맞나 보네?"

"하긴 키만 보면 초등학생 정도긴 하지. 아무튼 바리 허락은 다 맡았어."

"완전 잡혀 사시는구만."

"어쩌다 보니."

"그러셔. 그리고 이건 바리가 얘기한 건데, 영화관이라는 곳에 가 보면 좋겠네요! 라더라."

"..."

아.

어째서 이렇게나 똑같은지.

"그래서, 어쩔 거야?"

"가야지."










"도착이구나!"

"꽤 근사한걸."

"뭐어... 이건 거의 실내 공원이나 수목원 같은 느낌 아니야?"

"그런 느낌도 드네."

"좋아요! 저희, 건전한 문화생활을 하자고요. 집구석에만 있지 말고!"

나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백화점이 아닌가.

"집에서 좀 멀긴 했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외출하니까 좋지 않아?"

"나?"

"응. 파파는 거의 항상 1층에만 있잖아? 밖에도 안 나가고."

"그래, 좀 움직여야 한다고. 늙으면 사람이 몸을 자주 움직여줘야 하는 거야."

"동감이네요!"

우좌는 나를 힐끗 봤다.

"윽, 총 공격이냐. 내 편은 코코밖에 없어?!"

"아빠..."

"엉?"

코코를 안아올려 귀를 가져다 댔다.

"배고파..."

"...야!"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알아봐둔 적당한 뷔페가 있다.

"우아!!!"

"인당 가격대는 나쁘지 않군요, 아버지. 좋은 판단입니다."

"종류도 엄청 많은걸, 파파."

"랍스터 같은 거 있을라나~"

"에이, 그건 약간 무리일걸. 아무튼, 자리부터 정하자."

"6인 테이블이..."

"테이블은 저기하고 저기 둘 밖에 안 남았다! 음식이랑 가까운 자리로 가는거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이불아 이거 먹어봐라."

"응? 연어 아냐?"

"맞아, 저거 맛있더라."

"엥?! 이거 어딨었던 것이냐!?"

"음료수 기계 뒤쪽에."

"아이, 왜 못 봤지!"

"응?"

바리가 메뉴판을 보고 있다.
보고 있는 건...

...



"뭐 봐?"

"네?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음. 여기요!"

"네?"

"여기 자몽 에이드 한 잔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니, 아니! 시켜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응, 누가 뭐래? 내가 마시려고."

"..."

"바리도 한 입 마실래?"

"아, 네! 한 입만이라면..."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분홍빛 음료가 나온다.

에이드를 바리에게 넘겨주고, 한 입 마시는 걸 확인한 뒤 고개를 돌린다.

"그래, 바리 일단 마셔. 잠깐만 우좌야, 입에 다 묻었다."

"히히~"

다시 보면, 잔의 수위가 또 명백히 바뀌어 있다.

"앗. 게임 알림이."

고개를 숙이고 폰을 보는 척 곁눈질로 바리를 본다. "딱 한 입만 더"라는 듯이 빠르게 에이드를 빨아마시고 모른척 하는 바리. 폰을 보는 그대로 부른다.

"바리야. 주스 좀 줘봐."

"앗, 네! 여기 있어요."

"바리는 마신 거지?"

"네!"

"그러면 간접 키스네, 이거."

쭈욱 들이마셨다.

"에이 진짜! 무슨 소리예요!"

"풹! 마시고 있는데 머리를 때리면 어떡해!"

"아하하... 파파, 괜찮아?"

"목구멍에 빨대 안 박혔으면 된 거지 뭐~"

"으윽, 이불아 무섭다 그 발언."







"후아아, 잘 먹었다."

"요리해보고 싶은 것도 몇 가지 있었어."

"그 와중에 그럴 생각을 한 것이냐?!"

"응. 자세한 건 찾아봐야겠지만, 겉보기에는 해볼 만 해서 도전해보고 싶었거든."

"뭐, 뭐어... 인건비가 포함된 외식비보다는 쌀 테니 장기적 관점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 정도에는 투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하, 더 먹고 싶어서가 아니고?"

"아버지는 조용하세욧!"

"억!"

"아하하..."

"와하하! 바리가 훨씬 작은데 완전 당했구나!"

"야 너네 손 되게 매워!"

"아무튼, 다음은 옷이다!"

"음. 나는 옷 잘 모르는데."

"나도 잘 몰라, 파파."

"그래도 같이 가는 거지, 재밌잖아?"

"헤헤."











"그러니까, 다르다니까?"

"...미안. 나는 잘 모르겠네."

아무리 봐도 그냥 비슷한 색인데 우좌는 이것들이 매우 크게 다르다고 주장하는 중인 모양이다.

"이 유치원복은 러버더키 옐로우고 이건 머스타드 옐로유라고!"

"...그렇구나."

더치랑 코코는 멀뚱히 살랑거리는 옷들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바리는 또 가격을 가지고 우좌에게 따지는 것이었다. 이불이는 모든 과정을 그저 실실 웃으면서 지켜볼 뿐이었다.

"난 이게 더 취향인 것 같은데, 바리는 어때?"

"제가 제시해드린 두 개는 모두 실용성과 내구성이 뛰어난 재질이예요. 뭘 고르셔도 상관없어요."

"그럼 드디어 결정한 것이냐! 후우, 내가 다 힘드네."

"우좌야, 너는 안 사니?"

"알겠다! 좋아, 이제부터는 본좌도 고르는 것이다!

"꼭 사주는 건 아니야?"

당부하고 나니 더치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처음 선물했던 드레스에만 집착하는 증세는 없어진 것 같던데...

"더치, 너도 골라보지 그래?"

"아, 아냐. 난 파파가 골라주는 게 좋아."

"에이, 스스로 고를 수도 있지."

"괘, 괜찮다니까!"

이런. 집착이 나한테 옮겨붙었구나.

"미안."

"아, 아냐, 내가 소리질러서 미안..."

더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이건 어떻느냐!"

"뭐, 뭐야 이거?"

"응?"

"어린애가 레깅스는 무슨! 안 돼!"

"요즘 유행하는 거다! 지나다니면서 못 봤느냐!"

"아니, 너네만 보느라 다른 집 애들은 못 보긴 했는데... 아무튼 안 돼!"

"이, 이익..."

"치마는 또 뭐가 이렇게 짧아?!"

"그런 생각 권속밖에 안 할 거다!"

"무슨 애들 치마를 다 비치게 만들어? 미친 거 아냐?"

"너 말이야, 이 매장에서 제일 이질적인 건 오히려 너라는 사실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그건?"

"아무것도 아냐~"

"아니, 난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를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






"...여기 진짜 백화점 맞나? 별 게 다 있네."

"...요."

"응?"

"그러게요..."

"응, 그러게."

정식 어트랙션이라기보다는 통로에 배치된 기믹에 가까운 아쿠아리움을 방금 지나온 참이다.

굉장히 짧았고, 그 때문에 커다란 물고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지만.

"아! 저기예요, 저기! 이제 영화 보러 가죠!"

"우리, 영화도 보는 거야?"

"나쁘지는 않잖아?"

"그건 그렇지."

우좌는 벌써 팝콘 파는 기계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우좌야, 뭐 먹고 싶은데?"

"갈릭하고 치즈 중에서 아직 고민 중이다..."

"그럼 바리랑 표 사고 있을게. 조금 있다가 애들 데려올테니까 그때까지는 정해둬?"

"알겠다는 것이다!"






"바리야. 영화는 고른 거야?"

"네!"

예매된 건 뜬금없이 히어로 영화

"또 히어로 영화가 유행인가 봐?"

"아뇨, 아버지! 제가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골랐어요!"

"아... 그래."

"아앗! 치사하다! 내가 권속 옆에 앉을 건데!"

"와, 지가 예매한다고 배치를 이래놨어?"

"얘들아 싸우지 말고."

"너네 팝콘 맛 정했니?"

"나는 치즈로."

"으응, 나는 갈릭."

"저는 카라멜로 하겠습니다."

"오케이."








"우좌야, 정했어?"

"그렇다! 본좌는 갈릭이다!"

"코코는 치즈였지?"

'...네.'

"좋아, 다 정했군."







다 같이 양 손에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천천히, 발목이 짓물러져라 눌러오는 족쇄를 느끼며 버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매번 아이들의 뒤를 따르는 것은 관찰하고 이탈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분명 있었지만 나의 문제도 원인 중 하나였다.

기나긴 광고 동안 심경은 복잡하기만 하다

...







옆자리에는 안드바리

나의 아이










영화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여자앤데도 어벤져스를 좋아했었지
씨발놈의 좆도 재미없는 영화
볼 만한 부분은 후반에 5분 10분은 되나?
액션씬밖에 없는 천치같은 영화
그걸 내가 백 번 천 번 만 번은 봤을 거야

포르노의 그것과 같이
하나 쓰잘데기없는 스토리
그렇게 이죽이죽 멀건 암광 속에서
버러지같은 빛을 견뎌내게 한 건

찰나의 암간 중

그 아이의 해맑은 얼굴




그 아이
그 아이였다
생물학적으로 내 아이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했다

정말



너무 많이



겹쳐있다.





안드바리
우리 바리,
다시는 버리지 않을
사랑스러운 나의 바리데기






후회했다
후회한다
후회할 것이다

사무치게 쓰라리게



"아이언 맨을 국가에 귀속시켜라!"



응, 그때 항소라도 해볼걸
멍청하게 앉아 판결을 기다리고

눈앞의 상황에 질려 포기했었지
생각을 멈추고 그저 안일했었지





가끔씩은 그 아이가 내게 찾아온다

꿈이라는 것을 대번에 아는데
가위눌린 것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예요."



얼어붙은 심장에 괴여 있던
강산성 가연성 사랑이 녹아
나를 녹이고 태우려 흐른다




액션씬인가.












"하아아... 좋은 영화였네요, 아버지."

"쿠키 영상 기달려야징!"

"그건 뭐야?"

"모르는 것이냐!"

"아, 으응..."

"크레딧 끝나고 나오는 짤막한 영상이야. 다음 영화 예고나 떡밥 같은 거 좀 넣는거지 뭐."

"아앗! 본좌가 할 말을 해버리면 어떡하냐는 거다?!"

이 아이들은 충분히 영리한데, 내가 없어도 잘 살지 않을까?

"어... 파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별 거 아냐. 오늘 저녁 생각하고 있었어. 외식하고 난 뒤라 너희 입맛 수준이 너무 올라가진 않았을까 걱정되네."

"그건 내가 걱정해야 할 부분이라구, 파파. 헤헤..."

"하하... 걱정은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

"저, 저는 급해서 화장실 좀 먼저 가볼게요!"

"무하하! 그러게 컨디션 관리를 잘 했어야지!"

"근데 우좌야, 나도 오래 못 참을 것 같다 야."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제가 보고, 알려드릴게요..."

"응, 고마워 코코."

코코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예상대로 오래 못 버텼다.

이놈의 나이, 이놈의 오줌발. 소변기에 몸 딱 붙이는 사람들을 이해 못 했던 시절이 그리운걸.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음. 그렇다면 정말로 좋았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고!"

"그..."

이거 바리 목소리 아닌가?

과연 파티션을 돌아 여자 화장실 쪽을 보니 바리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뒤룩뒤룩 살이 찐 여자가 씩씩대고 있었다.

사고하기 이전에 발이 움직였다.

"바리? 바리야, 무슨 일이야."

"그, 그게... 제가, 부딫혀서..."

"울어도 돼. 내가 해결할 테니까. 기다려."

아니, 나는 오히려 울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행히도 바리는 부은 뺨을 자그마한 손으로 애써 가리면서 펑펑 울어 주었다.
디테일을 위해 안드바리를 살짝 내던지듯 밀쳐냈다.

"아 시끄러워, 자. 이건 대화가 안 될 테니 제쳐둡시다. 혹시 무슨 상황인가요 지금?"

바닥에 물기가 꽤 많구나.

"아니 글쎄, 이 좆만한 바이오로이드 년이 나를 밀쳐서 넘어질 뻔 했다고요! 씨발, 방금 산 백인데... 당신이 이 바이오로이드 주인인가요?"

무례하시군.

"아유 사모님, 얘가 집안에서도 그렇게 사고를 쳐댑니다. 어휴, 참 죄송해서 어째.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단속을 잘 했어야 하는데."

내가 여자 다룰 줄 알지. 여자란 건 허영심의 동물이라 몸과 마음의 자세만 잠깐 낮춰주면 일이 정말 쉽거든?

"흠, 흠!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아까 분명 CCTV는 남자화장실 파티션 쪽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었지?

"아유, 살펴가십쇼."

여자화장실은 원래 사람이 많은 편이니, 마침 목격자가 없는 지금 바로 실행해야 한다.

내 발까지는 찍히고 있을 테니 자연스럽게 약간 돈다. 동시에 뒤룩뒤룩한 지방질의 하복부를 깊게, 그리고 천천히 밀듯이 올려찌른다.

무게중심이 흔들리고 첫째로는 튀어나온 복부가, 둘째로는 신체 부위 중 상대적으로 무게가 무거운 머리가 지면에 닿는다. 정확히 이론대로 되어주니 고맙군.

인간의 반응속도로 반응했다는 점을 음성 데이터에 어필해야 하니 넘어지는 소리가 시작하고 난 뒤에 반응한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진짜 개같은 년한테 한 번 데여보면 누구나 법률적인 부분에는 자신이 있게 되지. 무지랭이 썅년아, 이게 완전범죄란다.

"여, 여기 누가 구급차를... 젠장!"

내 손으로 119에 신고했다. 그래, 백화점 화장실인 것까지 상세히.

어지간히 세게 부딫힌 모양이군,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기절하다니. 다이어트 좀 하지 그러셨나. 배에 자국은 안 남았겠지?





나는 이제야 바리를 챙겨주러 고개를 돌렸다. 너무 늦어진 것 같지만 세상과 사람들을 속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히, 히이..."

그래, 우는 데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못 봤구나. 즉흥적인 계획에 비자발적으로 협력해줘서 너무 고마운걸.

자발적으로 협력했다면 그건 내가 싫었을 걸.

"괜찮아 바리야, 다 끝났어."
'아까는 밀쳐서 미안, 연기였던 거 알지?'

울음은 어느 정도 그쳤다. 눈물을 닦아 준다. 맹독성 눈물이 피부에 스며든다. 바리는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다.

맹독은 입술을 마비시켰다.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건 안아주는 것밖에 없다.

"오, 오지 마세요!"

무릎을 꿇으려는 황급히 나를 밀쳐냈다.
미처 왜 그럴까 생각해보려 하기도 전에 젖어들어가고 있는 치마가 보였다.

바리도 그것을 알고 애써 손바닥으로 가려보려 했지만, 이내 무용함을 깨닫고 울상 그대로 일어나지를 못 했다.

"아으..."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후흐흐, 아냐. 더럽긴 무슨. 난 바리 오줌 마실 수도 있어."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었다.

"......"

"아니, 왜. 오줌이 갓 배출되었을 때는 무균 상태라는 말도 있고, 어디 원시 부족에서는 서로 축제 때 노나먹고 그랬다던데."

차라리 당당하게 나가는 게 개그같을 터다.

바리는 워낙 어이가 없어서인지, 웃으려는 건가 화내려는 건가 이제야 눈물을 뚝 그쳤다.

"정말, 아버지는..."

"어이어이, 상황은 종료된 거야?"

"이불아 마침 잘 왔다. 내가 바리 닦아주고 있을 테니까 아까 샀던 바리 새 바지 좀 가져와봐봐."

"보통은 같은 여자애가 닦는 걸 도와주게 할 텐데 말이야, 너도 참 한결같다. 그지?"

"사람이 갑자기 바뀌는 건 죽을 징조라지."

"그래, 그래야지. 다녀올게."





뒷처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구급대원들이 그 썅년을 잘 운반해갔고, 나는 화장실 앞에 있던 물기 때문에 바닥에 미끄러진 것 같다고 구급대원들에게 일러주었다.

아주 만족스럽다.





살짝 흔들릴 뻔 했지만, 적당하게 마무리된 소풍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바리의 시선을 맞았다.

사실 내가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을 봤을지도 모른다. 더더욱 스스로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왁자지껄 애들이 떠드는 와중에, 옆자리에 앉은 바리가 조용히 말했다.

"저기..."

"응?"

"감사해요..."

"뭐라고?"

"영화 재밌었다고요!"

"운전하는 동안에 말 시키면 나 잘 못 들어,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거면 집에 가서 꼭 얘기해줘야 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