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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우리 아들은 누굴 닮았는지 밥도 잘 먹네. 장하다 장해.”

 

“읍! 읍! 어, 엄마! 나 먹던 거 좀 먹고!”

 

“에고고, 그러다가 목 막힐라.

물도 같이 먹이고 좀 그래요. 이러다가 체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 지나?”

 

 

 

교회 안쪽 다락방에 위치한 작은 원형 탁자.

어머니가 쟁반이 휘어질 만큼 푸짐하게 차린 한 상을 가지고 와 내 눈 앞에 떡 하니 놓아두셨다.

 

배추김치, 김치전, 김치찌개... 

보기만 해도 한국인의 얼이 떠오르는 시뻘건 음식들이 내 코 끝을 자극했다.

소완이 해준 음식만 먹으면서 입맛이 고급스러워진 거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나란 놈. 엄마 손맛은 못 잊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뭐 먹을래? 갈비 먹을래? 우리 아들 갈비 좋아하잖아.”

 

“그거 말고 이 게장도 먹어봐라.

엄마가 할머니가 해주던 거 배워서 직접 담가 놓은 거야. 요새 게가 아주 제철이라 살도 많다..”

 

“나... 나 입에 아직 씹고 있는데...”

 

 

 

작은 언덕처럼 푸짐하게 쌓인 쌀밥 위.

엄마는 갈비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 올려 두셨고, 아버지는 양념 게장 몸통을 손으로 잡아 쭈욱 살을 짜 놓으셨다. 

 

입에 들어간 쌀알이 아직 씹히지도 않았는데...

두 분의 사랑이 아주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절대 목이 막혀서 나온 눈물이 아니다. 절대로.

 

 

 

“거기, 아가씨는 같이 안 먹을래요? 밥 안 먹었으면 시장할 텐데.”

 

“아... 저, 저는...”

 

 

 

어머니가 마키나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우리와 같은 테이블에 겸상하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것인지, 마키나는 옆에 있는 작은 소파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가죽 소재도 옛날 거라 많이 거칠었을 텐데, 푹신한 촉감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발가락 끝으로 힘을 주어 소심하게 몸을 튕기고 있었으니까.

 

어색해도 조심스럽게 미소를 짓는 얼굴은 귀엽기 그지 없다.

 

 

 

“저는... 괜찮습니다. 인간 분들과는 다르게 바이오로이드는 안 먹어도...”

 

“하?”

 

“에... 예?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참견쟁이로 유명한 내 엄마 앞에서 밥 먹는 걸 거부하다니.

 

지금 저거, 큰 실수 한 거다.

 

 

 

“에잇, 바이오로이드인지 뭔지 모를 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서 같이 앉기라도 해요!”

 

“에... 에에? 자, 잠시만...”

 

 

 

어머니가 마키나의 손을 붙잡고 번쩍 들어 올리셨다.

그리곤 등을 떠밀며 내 옆자리 의자에 마키나를 털썩 주저 앉히셨다. 

 

나이도 지긋한 분이 대체 어디서 저런 힘이 나시는 건지...

밥 한 공기 더 가지고 오시겠다며 부엌으로 후다닥 달려가시는 어머니를 마키나는 차마 막지 못했다.

 

한껏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려는 것인지, 마키나는 고개를 떨구고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이 교회가 나에게야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장소라지만 마키나에겐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었을 장소. 

저렇게 어색하게 있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

 

 

 

“... 괘, 괜찮으신가요...?”

 

 

 

그리고 그 어색함은, 괜히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는 것으로 대체됐다.

 

 

 

“나? 나는 왜?”

 

“그게... 저희들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조금...”

 

“...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는 걸.”

 

 

 

낙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나와 낙원을 어떻게든 지키려 했던 마키나.

원래 게임 속의 흐름대로 흘러 갔더라도 마키나와 사령관의 사이는 서먹서먹했다.

 

게다가 나는 마키나의 꿈을, 마키나는 나의 악몽을 뜻 밖에 엿본 상태.

사실상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서로의 사생활을 전부 들킨 우리 둘이다. 

마키나는 그런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에 조금 어색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 아들아.”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의미를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셨던 모양이다.

 

 

 

“예, 예...?”

 

“'저희들 사이에 그런 일'?

'그런 일'?? 저게 무슨 말인지 3초 안에 설명해라.”

 

 

 

아버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시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돌리며 저 무시무시한 살기를 피하려 안간힘을 썼다.

 

아빠 이기는 자식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하물며 여자 문제에서 말이다.

 

 

 

“아,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일이 좀 복잡하게 꼬여서 설명해주기도 곤란...”

 

“원래 남녀 사이는 복잡하기 마련이지.

혹시나 네가 아주 몹쓸 짓을 하고 다닌다면...”

 

 

 

쿵! 

 

아버지의 손이 탁자 위를 강타했다.

위로 균열이 살짝 났던 건 내 기분 탓이리라...

 

 

 

“목사 된 도리로써 그냥 지켜볼 수는 없겠구나!”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긴! 이 아가씨 옷 차림 좀 봐라.”

 

 

 

아버지가 입고 계신 양복 겉옷을 마키나의 어깨에 둘러주며 괜시래 헛기침을 하셨다.

 

 

 

“살도 다 드러내고 있고, 옷도 얇아서 눈 둘 곳도 없지 않느냐!

내가 아까부터 아들의 넓은 성적 취향을 맞춰주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니?”

 

 

통이 큰 아버지의 양복이 아슬아슬한 마키나의 옷차림을 훌쩍 덮어버렸다.

 

... 그러고 보니 라스트 오리진. 이거 성인 게임이었지...

신학 대학원까지 나와 목사 교육을 받으신 아버지께서 이런 개방적인 스타일은 받아들이시기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통발폰도 안 걸리게 최대한 작은 걸로 사서 구석에 짱 박아 놓고 다녔는데...

만약 내 물건 같은 거 정리하시면서 보기라도 하셨다면...

 

 

 

‘... 도망칠까...?’

 

 

 

그래도 오랜만에 본 아버지인데 어떻게 그러겠나.

가만히 앉아서 경청하는 수 밖에 없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부모 이기는 자식 없다는 말이 참말이다.

 

 

 

“어휴... 아들아. 같이 다니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옷이라도 잘 챙겨줘야 할 것 아니니?

가만 있어봐, 교회에 남는 옷들이 몇 개 있었을 텐데...”

 

“여... 여자 친구라뇨... 제가 어떻게 인간 분의 여자 친구...”

 

 

 

여자 친구라는 말에 얼굴이 발개져서 마키나는 손부채질 속도를 두 배로 올린다.

덩달아 나도 입에 물고 있는 음식만 말없이 꿀꺽 꿀꺽 삼켰다.

 

리앤이나 미호, 하다 못해 에밀리를 데리고 왔어도 이렇게 어색하진 않았을 텐데.

서로 오해만 잔뜩 쌓아 놓은 마키나와 그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고개를 땅에 처박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

 

 

 

“읏차... 그래. 이 옷이 여기 있을 줄 알았지.

너희 엄마 물건 치우는 건 아빠가 다 해주잖아. 집에서 이거 찾겠다고 뭔 고생을 했는지...

그건 그렇고 역시 여자친구는 좀 억측이었지?”

 

“예?”

 

“우리 아들 데리고 가기엔 아가씨가 너무 아깝거든.”

 

 

 

이 아빠가 또 뭔 소리를 하는 건가.

 

 

 

“... 오랜만에 본 아들내미한테 그게 할 소리야?”

 

“말도 없이 갑자기 왠 여자랑 툭 하고 나타난 아들내미한테는 할 소리지. 심지어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말이야.

어디서 모델 하다 오셨어요? 우리 아들이 옷 같은 거는 영 관심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을 텐데...”

 

“하... 하하하... 그, 그런 일은 아니었어요.”

 

 

 

마키나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뭐야? 저 눈빛? 진짜 못 생겨서 그러는 건야?

생체 재건 장치 덕분에 몸도 좋아졌고, 얼굴도 이 정도면...

...

... 아냐. 됐다. 내가 백날 잘생겨봐야 마키나보다 하겠나.

 

왠지 베시시 웃는 마키나를 보니 얄밉게 느껴지기만 한다.

 

 

 

“자, 일단 그 얘기는 제쳐두고 이것부터 입어보세요.”

 

 

 

어디서 또 들고 온 것인지, 아버지는 기다란 코트 한 벌을 가지고 와 마키나에게 건넸다.

 

촌스러운 황토색 빛이 감도는 코트.

오드리가 이걸 봤다면 눈깔 뒤집고 수선하겠다 달려들었을 만큼 낡고 볼품 없는 옷이었다.

 

 

 

“원래 우리 애 엄마가 입고 다니는 옷이었어요. 

아니지, 입으려고 샀던 옷이지. 살 때문에 한 번도 못 입었던 거니까.

사실상 새 옷이랑 다름 없을 거에요.”

 

“살? 이거 살 때 사이즈 몇이었는데? 엄마 원래 66 입고 다니지 않았어?”

 

“글쎄, 다이어트 하겠다고 맘 먹고 55 사이즈를 사놨는데, 그게 벌써 얼마 전인지 모르겠다.

너 없어지고 아주 식음을 전폐해서 다이어트 성공하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먹방이란 거에 빠져버려서... 크흐흐.”

 

 

 

아버지가 내 옆자리로 와서 조용히 키득거리셨다.

어째 불안한데...

 

 

 

“그 얘기... 엄마가 들으면 안 되는 거지?”

 

“역시 우리 아들이 눈치 하나는 좋다니까. 

딴 데 가서 얘기하지 마라? 그랬다간 오늘도 집 가서 엄마가 바가지 박박 긁을 거야.”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속 시원하게 외치는 신하처럼, 아버지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낄낄대셨다.

 

나이 60이 넘게 자라셔도 아들 앞에서는 체통이고 뭐고 없는 아버지.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알싸하게 그리워서 나도 덩달아 같이 낄낄댔다.

 

 

 

“이... 이렇게 입어도 될까요? 이런 좋은 옷을 제가 받아도 될 지...”

 

 

 

어느새 코트의 단추를 끝까지 채워 잠근 마키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면서 자신의 몸매를 과시했다.

 

 

 

“어... 어울리나요...? 제가 괜히 어머님의 옷을 빼앗은 게 아닌지...”

 

“... 개쩔어.”

 

“... 아들아. 체통을 지켜라...”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들어가 있는 이목구비.

짧은 단발이지만 목 뒤까지 충분히 덮을 수 있는 파란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코트의 카라가 바짝 날이 서있다.

 

목덜미의 라인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충분히 솟아 오른 가슴이 두 개의 언덕을 만든다.

언덕의 꼭대기에서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코트의 라인. 허리에 있는 끈으로 옷을 조이면 그 선에 맞게 코트가 마키나의 몸에 착 달라 붙는다.

사기적인 각선미는 아무리 고개를 내려도 발 끝이 보이지 않고 시원하고 우아하게 뻗어 내리기만 한다.

 

코트의 끝 자락에는 왠지 모를 검은 잉크 자국이 있었지만 마키나의 홀로그램 생성 장치가 그 윗면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노안이 오신 아버지는 눈치채기 힘들었겠지만 그 위로 아주 약간의 지직거림이 분홍색으로 빛났다.

 

내가 왜 마키나를 좋아했는지, 다시 한 번 새삼 깨닫게 됐다.

 

 

 

“어휴, 이렇게 보니까 딱 아가씨 맞춤 옷이었네.

따뜻해 보이는 것도 그렇고. 아까는 보기만 해도 추워 보였다니까?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그런 건 보기만 해도 뼈가 아주 시큰시큰거려.”

 

 

 

그제야 평온해진 아버지. 

목사 양복 입고 다 큰 처자가 살갗을 다 드러내고 있는 게 퍽이나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아가씨도 마음에 들죠?

대신 어디 가서 티내지는 마세요. 애 엄마가 자기 꺼 뺏어갔다는 거 알면 아주 화를 내버릴 지도 모르거든요.”

 

“아... 하하하...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제부터 우리 아들내미에게 자초지종 다 들을 건데.”

 

 

 

아버지가 내 어깨를 팔로 두르며 강하게 힘을 주셨다.

 

 

 

“켁! 켁켁! 아, 아빠! 나 숨...”

 

“그래서, 우리 아들이 어디서 저렇게 미인인 아가씨를 데리고 왔을지 한 번 설명 좀 들어볼까?

맨날 방 안에 박혀 살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봐?”

 

 

 

아들이 방구석 폐인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

 

하지만... 이 상황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하나...

적어도 라스트 오리진이 뭔 게임이었는지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그 게임은 설명하는 것부터가 수치 플레이다.

그것도 엄청난... 수치.

 

 

 

“여보? 나만 쏙 빼놓고 얘기하려고 했지!”

 

 

 

어느새 밥 한 공기를 또 듬뿍 담아 가지고 오신 어머니.

 

보기만 해도 묵직한 밥 그릇을 마키나 앞에 놓으시며 바로 옆자리에 쏜살같이 착석하셨다.


퍽!


어찌나 밥을 많이 담으셨는지, 그릇을 놓을 땐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생 처음 보는 음식 양에 마키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부족하면 이따가 또 가지고 와줄 테니까 걱정 말고 먹어요.”

 

“아... 아하하... 네에, 알겠습니...”

 

“아, 맞다. 아가씨 머리 색깔을 보니까 외국에서 살다 온 것 같은데 젓가락질을 할 수 있어요?

뭐 하면 포크 가져다 줄까? 근데 또 게장은 포크로 먹기 힘들 텐데...”

 

“어휴, 그거야 우리 아들이 알아서 챙겨주겠지. 이제 우리가 챙겨줄 나이는 지났잖아.”

 

 

 

여자... 친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뭐하지만, 그래도 아들이 어디서 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게 부모님은 퍽 즐거웠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부모님의 반응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꼭 조각상으로 깎아 놓은 듯한 마키나의 얼굴은 언뜻 보기엔 불쾌할 정도로 아름답다.

예쁜 2D 캐릭터를 현실로 옮겨 놓으면 으레 그러는 것처럼.

 

하지만 부모님께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아들의 곁에 함께 있어준 친구. 그런 은인에게 자신들의 어색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던 거다.

 

 

 

“... ...”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알고 계셨던 걸 지도.

 

 

 

“아들아. 어디서 이런 아가씨를 데리고 왔니? 그거 말 좀 해봐라.

아빠가 살면서 이렇게 들떠본 적이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냐.”

 

“그래 그래. 엄마도 좀 들어보자.

맨날 친구 없다 친구 없다 노래를 불러 싸던 아들내미가 어디서 이렇게 참하고 예쁜 아가씨를 데리고 왔는지, 듣기만 하면 평생 소원이 없겠어.”

 

 

 

두 분은 잠시 말을 줄이시더니, 이내 억지로 목소리를 끌어 올려 밝은 척, 말을 이어나가셨다.

 

 

 

“어차피 네가 있던 곳으론 엄마 아빠가 같이 갈 수도 없잖니.”

 

“... ... 그렇죠.”

 

 

 

아들의 곁에 있어준, 그리고 이 세 명 중에 ‘유일하게’ 같이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마키나란 것을 알고 계셨다.

 

별의 아이가 나를 이 세계로 홀연히 돌려 보낸 것처럼, 나는 다시 홀연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부모님께서 함께 걸으실 수 없는 길일 것이다.

돌아간다 한들 기다리고 있는 건 전쟁터 한복판. 어차피 모시고 갈 수도 없다.

 

 

 

“어, 어머님? 혹시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 계신 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애 아빠가 기도하다가 뭔가 팍 하고 성령의 말씀이 있었대요.

아들을 다시 볼 수는 있는데,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라고.

그래도 귀신으로 구천을 떠도는 아들이 아니라 어디서 훌륭한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온 아들이라 다행이죠.”

 

“... ... 귀신...”

 

 

 

별의 아이가 날 여기로 보냈을 때, 나도 어렴풋이 감은 잡고 있었다.

그 녀석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오라고 나를 보낸 거였으니까.

 

결국 다시 가야 한다는 뜻이다.

날 기다리고 있는 오르카의 곁으로. 부모님을 여기 남겨둔 채.

 

 

 

“... 죄송합니다...”

 

 

 

홀로 그 세계에 떨어졌을 때부터 힘들 때마다 그리워했던 부모님이었는데,

 

반군의 앞에서 그녀들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을 때도, 성가대의 기괴한 노래 속에서도,

요정 마을에서 로버트를 마주 했을 때도, 오메가, 델타, 사향, 온갖 괴물들을 상대해야 했을 때도,

 

내가 힘들 때마다 내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분들을 다시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글펐다.

자식인 내가 이러니 부모님은 오죽하셨을까.

 

 

 

“죄송하다니?”

 

 

 

하지만 내 부모님은...

... 그래. 이렇게 표현하자.

 

부모님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셨다.

 

 

 

“우린 아들내미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됐다.

그건 그렇고, 갈 땐 가더라도 얘기는 좀 하고 가줄 수 없겠니? 엄마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야.”

 

“그래. 우리가 손주는 못 보고 가더라도 며느리 얼굴은 보고 갈 수 있게 해주렴.

소개 정도는 해줄 수 있잖니.”

 

 

 

그저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저 분들의 티끌 하나 없는 욕망이다.

 

그걸 깨달은 마키나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고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마키나...?”

 

“아버님 어머님께서 궁금해 하시잖아요. 사령관님.”

 

 

 

자기로 괜찮다면, 부디 이야기를 시작해 달라고. 나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부모님은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꺄악, 작은 비명을 지르셨다.

 

평생을 비스마르크의 드림 캡슐로만 낙원을 만들었던 마키나는 이번엔 자신의 두 손으로 내 부모님께 더할 나위 없는 낙원을 만들어 드렸다.

 

그럼, 나도 보답을 해야겠지.

 

 

 

“... 아빠. 엄마.”

 

“그래. 듣고 있단다.”

 

“... 제가 있었던 침대 맡에 작은 핸드폰이 하나 있었을 거에요.”

 

 

 

마키나의 손을 붙잡은 채, 나는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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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입에서 침이 바짝 말라 목이 마르다는 느낌이 열 번쯤 느껴지고 나서야 나는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라스트 오리진의 개략적인 설정, 세계관,

그리고 내가 그런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것,

 

그런데 하필이면 빨려 들어간 몸이 천하의 개자식이었다는 것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

그에 더해 철의 교황과 별의 아이에 대한 얘기까지 추가로 끝낸 나는 옆에 놓인 콜라 한 잔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크흐... 이렇게 길게 얘기해봤던 적은 처음이라 목이 좀 마르네...

아무튼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믿긴 힘드시겠지만...”

 

“... 그래. 솔직히 믿기 힘들긴 하구나.”

 

 

 

역시. 예상했던 바다.

갑자기 사람의 영혼이 이상한 대로 빨려 들어갔다는 걸 무턱대고 믿어줄 리가...

 

 

 

“그 야시꾸리한 게임에 그런 세계관이 있었다는 건 좀 의심스럽긴 해.”

 

 

 

... 뭐요?

 

 

 

“그러게요. 나는 또 그냥 아가씨들 옷만 벗겨놓고 파는 게임인 줄 알았죠.

애초에 게임 화면 딱 들어가면 왠 이상한 아가씨가 드레스 같지도 않은 드레스를 입고...”

 

“자, 잠깐만!”

 

 

 

내 통발폰.

그걸 설마 봤다고?

 

 

 

“엄마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 분명 그 핸드폰은 꽁꽁 숨겨놨을 텐데...”

 

“에라이 이 녀석아, 엄마 아빠가 누군데 그런 거 하나 못 찾았겠어?

네 유품이 될 만한 건 싹 다 모아서 간직하려고 했지. 

그 때 마침 핸드폰도 보였던 거고. 그런 김에 한 번 확인만 해본 거다."


"그럼 우리가 보지 말 걸 그랬나?

솔직히 내용물이 유품치곤 조금 숭하긴 했어.”

 

 

 

... 아아...

 

 

 

“그렇게 보여주기 싫었으면 잠금 설정이라도 하고 있지 그랬니.

난 또 화면이 그냥 열리길래 우리 아들에겐 별로 중요한 게 아닌가 보다 하고 아쉬워했는데, 그런 요상한 사연이 또 있었구나?”

 

 

 

... 망했다. 분명 마지막으로 로비 설정 해놨던 건 마키나 웨딩 드레스였을 텐데...?

홀로그램 웨딩 드레스 보고 눈 돌아가서 삼분할 캠으로 전신, 가슴, 다리 확대 쭉쭉 해놓고 흡족해하면서 로비 화면으로 지정해놨을 텐데...

 

... 아냐. 기다려 봐. 나 분명 평소에 실루엣 모드 켜놓고 하지 않았었나?

그럼 괜찮다. 부모님 같은 분이 그 작은 핸드폰을 놓고 플레이를 하진 않으셨을...

 

 

 

“그러고 보니 그 게임, 그림자 모드가 따로 있더라고?”

 

“... 에?

서, 설마... 그거 끄셨어요?”

 

“... ...”

 

 

 

... ...

 

 

 

“... 나 다시 돌아갈래.”

 

“야야야야야야야야 어디 가니!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 한 것을 엄마 아빠의 손이 재빠르게 저지했다.

 

... 아니, 대체 왜! 난 아무 잘못도 없다고!

애초에 아들내미 유품이라면서 이것 저것 만지고 다닌 게 이상한 거 아니야?!

 

게다가 나, 껐다 킬 때마다 랜덤 로비로 나오게 설정해놔서 마키나 웨딩 말고 다른 것도 다 보셨을 텐데...

 

괜히 데우스의 낙원에서 가짜 아빠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도 다 큰 어른이라 생각하셨을 텐데 아들이 그런 거나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시면...

 

 

 

“... 뭐, 어른이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래요? 여보?”

 

 

 

... 내 마음 읽으셨나?

 

 

 

“그럼 그럼. 그럴 수도 있지.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청년이 막 성인물도 보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어머니가 내 등을 토닥거리시며 조심스럽게 위로를 하셨다.

 

 

 

“어... 그, 왜, 요즘은 학생들도 섹스하고 그런다잖아요.

그런 거에 비하면 우리 아들은 건전한 편이지. 그게 2D 캐릭터에게 그런다는 게 조그음... 그렇긴 하지만... 크흠흠.

건전하지. 암암 그렇고 말고.”

 

“하... 하하하... 그, 그러니까 아들아.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고 고개 좀 들어봐라.

그런 게임, 어디 가서 물어보지도 못 하는 거 아니겠니. 엄마 아빠가 간만에 아는 얘기가 나와서 너무 신이 나서 그랬어."

 

 

 

어느새 자리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찰싹 달라 붙어 앉았다.

콜라 잔을 마치 찻잔처럼 들고 경직된 자세로 앉고 계신 두 분. 예상 밖의 아들의 격렬한 반응이 조금 당황스러우셨던 모양이다.

 

분위기를 조심스레 살피던 마키나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사령관님...? 지금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신 거죠?

뭔가 제가 끼어들면 안 되는 얘기인 것 같은데... ... 

...

... 헤에엑?!’

 

 

 

눈치를 살피며 내 손만 꼭 잡고 있던 마키나가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굴을 붉혔다.

 

부모님은 연신 손을 떨면서 콜라를 차처럼 홀짝이고 계신다.

마키나의 눈이 두 분에게 향해 있지는 않았으니 저러는 이유는 필시 나 때문이었을 것.

 

대체 왜 저러나 잠시 고민하던 찰나, 나는 내 음습한 욕망을 깨달아버렸다.

 

 

 

“... 미안. 잊어줘.”

 

 

 

마키나가 웨딩을 입어주면 좋겠다는 욕망을,

그것도 스킨으로 나왔던 ‘그 웨딩’을 입어주면 좋겠다는 상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해버린 것이다.

 

 

 

‘그... 그런 옷은 아무리 저라도 못 입어요!

사령관님의 욕망을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런 파렴치한 옷은...’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져 부끄러워하는 마키나.

 

그럼에도 내 머리 속이 들키지 않게 내 귓가에서만 조용히 속닥거린다.

역시 마키나... 저 천성이 아니었다면 낙원은 진작에 유기하고 도망갔겠지.

정말 천사가 따로 없구나.

 

 

 

‘뭔가 엄청 감동 받은 표정을 하고 계셔도 머리 속 욕망은 다 보이거든요...’

 

 

 

... 그래. 천사를 상대로 이런 상상이나 하고 있는 내가 나쁜 놈이다.

 

고개를 돌려 부모님의 반응을 살펴 보았다.


‘왜 그런 얘기를 꺼내서 아들을 당황하게 만드냐’ 라던가, ‘나만 했나? 당신도 같이 했지.’ 라던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가며 속닥거리시는 모습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크흐흠, 아들아.”

 

 

 

그래도 양복 입은 가장이라고, 먼저 입을 여신 것은 아버지셨다.

 

 

 

“엄마 아빠는 네가 무슨 게임을 좋아하든 다 이해한단다.

컴퓨터 게임이든 핸드폰 게임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니? 우리 아들이 좋다는데.

성경에서도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있잖아. 

아들이 비싼 음식으로 배를 채우든, 돼지 우리에서 쥐엄 열매로 끼니를 때우든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단다.”

 

“그, 그래. 엄마도 그 게임이 뭔지 궁금해서 한 번 찾아본 적은 있었다.

게임에 뭔가 이야깃거리 같은 게 되게 많았는데 나쁘지는 않더구나...

무, 물론 엄마는 잘 이해가 안 되기는 하지만...”

 

“직접 읽어보기까지 하셨어요?”

 

“그럼? 아무리 야시꾸리한 게임이라도 아들이 죽기 전까지 사랑했던 게임인데...

죽은 게 아니란 건 지금 와서 알게 됐지만 그 때는 죽은 줄만 알았으니까... 하하하...”

 

 

 

어떻게든 화재를 돌리려 안간힘을 쓰시는 부모님.

그 모습을 보고 데우스가 만들었던 낙원을 잠시 떠올렸다.

 

거기서 보았던 가짜 아빠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젠 좀 어른이 되라. 이상한 짓 하지 말고.'

 



...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쩝. 정 엄마 아빠 마음을 못 믿겠다면 얘기를 하나 해주마.

아들아. 옛날에 아빠가 설교에서 썼던 얘기 기억하니?”

 

 

 

아버지께서 가볍게 헛기침을 하시며 말씀 하셨다.

 

 

 

“아빠는 말이야, 옛날에 공부를 제법 잘했어. 시골이긴 했어도 고등학교 때 도시 대표로 경시대회에 나가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할머니가 아빠에게 기대를 참 많이 거셨지. 언젠가 우리 집안을 살릴 보물이라고.

게다가 막내 아들이기까지 하니 얼마나 예뻐해 주셨겠니.”

 

“... 네, 기억해요. 

그래서 결국 진짜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오셨잖아요. 그 옛날 시골에서.”

 

“맞아. 완전 출세였지.

하지만 아빠가 신학 대학원에 들어가겠다 하고 나서부터 그 기대는 완전 배신으로 바뀌어 버렸단다.

좋은 기업 들어가서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놈이 왠 목사가 되겠다고 했으니 할아버지께서 오죽 역정을 내셨겠어?”

 

 

 

아버지께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시며 입술을 달싹이셨다.

 

가난한 집안.

그 중에서 유일하게 희망이었던 아버지는 실제로 가족을 부양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목사가 되기 위해선 그 모든 걸 포기해야만 했고, 결국 가족과 반쯤 의절을 한 채 대학 생활을 보내야 하셨다.

그 때문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정말 많이 우셨다. 호강도 못 시켜드리고 보낸 것 같아서.

 

하지만 아버지께서 우셨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루는 아빠가 신학 대학원에서 일을 끝내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

그 날은 하루 종일 쫄쫄 굶어서 배가 등가죽에 붙을 지경이었는데 마침 집에 라면이 하나 있는 것 아니겠니.

그래서 도둑처럼 조용히 들어가 냄비에 물을 받고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단다.

가족의 원수인 놈이 버젓이 들어와 라면 끓이는 모습을 좋게 볼 리가 없었으니까.”

 

 

 

아버지의 말씀에 나도 조심스럽게 통발을 정리하던 내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미소녀가 잔뜩 나오는 이런 게임. 부모님께 들키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운이 나빴던 건지, 그 때 물을 마시러 나오신 할머니와 마주 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하니?”

 

 

 

아버지께서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그렇게나 우셨던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 김치 꺼내줄까?... 였었죠.”

 

 

 

도둑처럼 들어와 라면 하나를 축내고 있는 원수.

할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시며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다 주셨다고 했다.

 

 

 

“그래. 부모 마음이라는 게 다 그런 거야.

아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니는 걸 바라는 게 부모란다.

지금 엄마 아빠 마음도 다 그래.

아들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긴 조금 부끄러운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아버지의 말씀에 어머니가 괜시래 웃으며 화답하셨다.

길게 늘어진 주름살이 두 분의 올라온 입꼬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두 분의 말에 나는 조금 씁쓸한 침을 삼켰다.

애초에 두 분께서 이해해주실 거란 기대도 해본 적 없었다.

이런 게임. 교회 일을 하시는 부모님께서 받아주실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홀로 배배 꼬인 내가 두 분께 던진 가장 큰 불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받아주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그 불안정한 관계를 강요하는 일.

 

그럼에도 두 분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 게임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

아들을 위해 성인 게임을 공부하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목사가.

 

 

 

“그러고 보니 그 게임, 인류가 멸망한 다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 않았니?”

 

“어머, 그럼 우리 아들이 간 곳이 완전 다 멸망해버린 세계라는 거네? 완전 아담이야. 아담.

우리 아들, 이제 아빠되겠어. 아빠.  호호호.”

 

“거기 밥은 어때? 상한 거 먹고 그러진 않았지?

막 게임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참치캔만 먹고 그러면 나중에 배탈난다.”

 

“먹더라도 꼭꼭 씹어서 먹었어야지. 참치캔에 기름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데.

아니면 시간 날 때 시골 같은 데 가서 장독대에 묻힌 김치라도 찾아보지 그랬어. 우리나라라면 그런 거 하나쯤은 남아 있을 텐데.”

 

 

 

두 분께 게임에 대해 설명 드릴 때마저도, 나는 아무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환생, 게임 속 세상, 판타지 소설을 읽어도 너무 많이 읽은 탓에 나오는 헛소리라 생각하실 거라 믿었으니까.

 

그러나 두 분은 이미 멸망한 세계의 마지막 인간를 낳은, 마지막 부모셨다.

 

 

 

“... 엄마. 아빠.”

 

 

 

그래서 어쩌면, 조금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지쳐버려서.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 아빠가 나 대신 간다면... 어떨 것 같아요?”

 

“아빠가? 나이 다 먹은 노인네가 가봤자...”

 

“나... 힘들어요.”

 

“... ...”

 

 

 

문득,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아빠도 알잖아요. 나... 그렇게 막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과제도 매일 쫓겨서 하고, 학점도 좋지 않고, 그런데 휴일에는 방 안에 박혀서 소설 읽는 거나 좋아하는 그런 인간이었잖아요.”

 

 

 

내가 버텨온 지금까지의 길이 너무도 서러워서,

 

 

 

“그런데 그런 제가 어떻게 마지막 인간을 할 수 있어요...?

만약 이 게임이 연극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저는 주인공 역할을 못 할 거에요.

고작 해봐야 고블린 배역을 맡은 배우들 수십 명 중 하나 정도겠죠...”

 

 

 

그럼에도 사랑이란 이름 아래에서 버텨야 했다는 게 너무도 억울해서.

 

나는 잠시 침묵했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 친구도 없었어요. 대학교에선 맨날 혼밥하기 일수였고요 애인은커녕 같이 노래방 갈 애 하나도 없었어요.

아시잖아요. 저 카톡도 잘 안 보는 거... 왜 그랬겠어요? 연락이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랬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스스로 우스워져 옅게 웃었다.

그래, 누가 봐도 평균 미달의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웃길 수 밖에.

 

마키나가 입술을 조용히 씹으며 내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지구 상에 남은 마지막 인간이라는 게 이런 놈이니 분명 실망했을 테지.

 

 

 

“오르카로 돌아가면 못 해도 수천 명이 날 기다리고 있어요.

심지어 걔들은 데우스가 만든 악몽에 갇혀 있죠. 

고작 14명 살리는 것도 아파 죽을 것 같았는데... 제가 무슨 수로 수천 명을 살려요?”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로버트에게 손가락을 잘렸을 때도, 오메가 앞에서 떨리는 다리를 숨겨야 했을 때도, 사향에게 수십, 수백 번 죽었을 때도,

... 전부 참아야만 했어요. 나는 저 애들의 하나 뿐인 가족이니까...

근데 난 가족이 되어줄 자신이 없어요...”

 

“... 아들아...”

 

 

 

아들.

 

저 단어 한 마디에 나는 LRL을 떠올렸다.


이유 없이 아파하고, 이유 없이 외로움을 느끼던,

아버지가 필요한 아이를.

 

 

 

“... 아빠.”

 

“... ...”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아버지가 될 수 있겠어요?”

 

 

 

나 같이 못난 인간이,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인간이,

어떻게 아버지란 슈퍼맨이 될 수 있을까?

 

마키나는 자신의 드론을 키려고 하다가, 이내 다시 집어넣었다.

그저 말없이 자신의 두 손을 내 왼손 위에 포갰다.

제아무리 마키나라 한들 지금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을 테니까.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서 눈을 때려 안간힘을 썼다.

지금 그걸 느껴버렸다간 눈물 때문에 말을 못할 것 같았다.

 

 

 

“여기서 나가면... 난 또 그 데우스란 놈이랑 싸워야 해요.

주먹 한 방에 축구장 만한 땅을 부숴버릴 수 있는 괴물이고, 사람 목도 아무렇지 않게 베어버리는 놈이에요.

게다가 지금 걔가 있는 장소에서는... 신이랑 다를 바 없는 놈이라고요.”

 

 

 

광자 집속 구현기로 빛만 있다면 원하는 건 모든지 만들 수 있는 데우스.

날이 저문 지금, 유일한 광자의 공급처는 데우스가 가지고 다니는 의문의 빛 덩어리뿐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 그리고...”

 

 

 

만약 운이 좋아 데우스를 죽이고 난 다음은?

 

이미 악몽이 질량을 가진 실체로 땅 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오르카에 오기 전 펼쳐졌던 지옥이 오르카의 아이들 앞에 다시 나타났단 말이다.

 

그건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그리고 나면 또 다른 추기경은? 그 뒤에 교황은?

 

 

 

“... 난... 난 못하겠어요...”

 

 

 

나는 천장을 보았다.

낡은 조명이 좌우로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내었다.

옆에 있는 책장에는 기부 받은 책들만 조금 꽂혀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읽지 않아 먼지가 쌓인 동화책들이.

허름하고 지저분한 풍경.

하지만 개척 교회들 사이에선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다.

 

평범하게.

 

잔인하리만큼 평범하게.

 

 

 

“... 난 너무 평범하니까...”

 

 

 

해진 옷을 입고 계신 두 분을 보니 현실은 잔혹하리만큼 거침없이 나를 집어 삼켰다.

 

부모님은 슈퍼맨 같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현실.

나도 부모님처럼 그리 대단한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현실.

낙원을 깨부수는 주인공이 아니라, 낙원에 빠져 허우적대는 바이오로이드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나란 놈이다.

 

아버지도 그러셨다.

패기 좋게 청년들이 많은 대학로에서 교회를 개척하겠다 하셨지만, 돈 때문에 대학로는커녕 거기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골목의 지하방 월세나 간신히 구해 시작하셨다.

그렇다고 신도가 많이 찾아오나?

아니. TV에서 여론 몰이나 하는 쓰레기 교회들이 수천 수만 명의 헌금을 받아 배부를 때, 어머니는 교회 재정을 벌기 위해 식당일을 하셔야 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설교를 하겠다고, 그래도 돈으로 왜곡된 믿음이 아닌 진짜 하나님을 설파하겠다고 만든 교회였는데.

하나님은 무심하게도 그런 교회를 이런 지하방에 처박아 놓으셨다.

다른 개척 교회들처럼.

 

나도, 아버지도, 이 교회도.

하나님은 전부 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것들만을 허락하셨다.

 

아버지께선 잠시 고개를 떨구셨다.

 

 

 

“... 아들아.”

 

“예.”

 

“이 아빠가 왜 신앙을 시작했는지 아니?”

 

 

 

그리곤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아빠는 늘 궁금했단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럼 우리는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가는 걸까?

악인은 죽고 나면 심판을 받을까? 천국이란 건 정말로 있을까?”

 

“...”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잖니. 능력만 있다면 사람 등 처먹고 사는 게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고.

몇 백 억 사기를 쳐도 집행유예 받는 게 일상이니까, 악인이 똑똑해 보이고 의인은 멍청해 보이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로 바라는 게 그런 걸까?”

 

 

 

아버지께서 품에서 낡은 성경책을 한 권 꺼내셨다.

 

 

 

“아빠는 말이야,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정의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사기꾼을 보며 동경하는 사람보단 아직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많고, 가슴 따뜻해지는 일화의 주인공들에게 박수 보내길 아끼지 않는 사람이 많잖니.

단지 정의 같이 대단한 걸 쫓을 여유가 없을 뿐이지. 사람들은 누구나 정의에 굶주려 있단다.”

 

 

 

그리곤 안경을 써 더듬더듬, 성경책 위를 손가락으로 질주하셨다.

 

 

 

“아빠가 신앙을 시작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천국이 있길 바라니까, 지옥이 있길 바라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계셔서 의인을 천국으로 이끄시고 악인을 벌하시길 바라니까.

아빠는 그렇게 바랬기 때문에 교회로 간 거란다.”

 

“... 그러니 아들아.

네가 바라는 게 뭔지 한 번 생각해보렴. 분명 이뤄질 수 있을 거야.”

 

“... ...”

 

 

 

아버지는 능숙하게 성경책을 펼쳐 말씀들 사이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 마가복음 9:23

 

아버지의 손 끝이 멈춘 말씀은 이것이었다.

 

 

 

“... 생각해보라고요?”

 

 

 

그 모습이 너무도 기가 찼다.

바이오로이드, 철충, 별의 아이, 판타지란 판타지는 죄다 섞어서 만들어 놓은 세계에 있었던 사람에게 이게 대체 뭐 하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몇 십 년을 해온 설교뿐인 건가?

 

이 작은 교회도 부흥 시켜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란 작자가 뭐가 좋다고 저렇게 믿는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범한 인간의 말로가 이렇게 처참하다는 게 보고 있기엔 너무 힘들어서.

 

 

 

“생각 안 해봤겠어요?! 저는 매일 죽어라 생각하고 있다고요!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우리 애들이랑 같이 두 손 잡고 화목하게 살고 싶다!”

 

 

 

미호랑 같이 초콜릿을 만들고 싶다.

에밀리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나비를 구경하고 싶다.

티아멧을 위해 주먹 만한 사탕을 만들어 주고 싶다.

 

 

 

“교황! 추기경! 정체 모를 적들이랑 싸울 때마다 매일 기도를 하면서 전장에 나가요!

그래도 미래가 어떻게 일어날 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고요!

그래서... 그래서 죽어라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프네들과 함께 꽃꽂이를 하고 싶다.

칭찬이 고픈 바닐라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하루 종일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렘린이랑 같이 드라이버를 들고 탑돌이 개조도 하고 싶다.

 

그래. 결국은 나도.

 

평화롭게 살고 싶다.

빌어먹게도 그렇게 살고 싶단 말이다.

 

다만 그렇게 살기엔 내가 너무도 평범해서.

 

 

 

“... 안 된단 말이에요. 하나도.”

 

 


믿은 것만으로 될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


나는 아버지의 성경책을 모질게 쿵 덮어버렸다.

아버지와 함께 나이를 먹은 성경의 앞장이 지익, 불쾌한 소리를 내며 찢겼다.

 

 

 

“... 그래. 마음 먹은 대로 안 되지. 아빠도 잘 안 되더라.”

 

 

 

찢겨진 성경책의 페이지가 밖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아버지의 성경책은 글씨가 무지하게 컸다.

 

 

 

“이젠 안경을 쓰지 않으면 글씨를 제대로 읽을 수도 없다. 그래서 설교 준비도 여의치가 않아.

오는 성도들도 이젠 많이 줄었고... 또 많이 돌아가셨지.

기억하니? 너 어렸을 때 교회 같이 다녔던 누나. 그 애 어머니께서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

 

“... ...”

 

“아빠도 이젠 결혼식 주례보다 장례식 주례를 더 많이 하러 다닌다. 

젊은 사람들은 교회를 잘 오지 않잖니. 그러다 보니 성도 수도 줄고, 교회 운영도 어려워지고.

마음 크게 먹고 교회를 개척해도 이렇게 조용히 사라지는 게 부지기수야.

믿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 아빠도 인정한다.”

 

 


교회가 하루 아침에 부흥되는 기적 같은 건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나의 철없는 대답을 담담하게 넘기셨다.

 

‘믿는 사람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생각해보면, 나보다 이 말씀에 더 회의적이셨을 분이 내 아버지다.

 

개척 교회의 일반적인 생존률은 51%. 

그나마도 최저 생활 수준마저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51%다. 반이 개척만 하고 사라진다는 뜻이다.

 

게다가 종교라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사회.

그 중에서도 개독교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기독교.

그런 종교로 교회를 개척해 믿음을 전파한다는 아버지의 일생일대의 도전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내 아버지께,

기적은 없었다. 


평범했기에 기적을 바랬고, 기적이 없었기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사셨다. 

지극히 평범한 개척 교회의 목사 중 한 명이 내 아버지셨다.

 

 

 

“... 그런데 그 누나, 기억하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그 아이, 결국 이번에 개인 전시회를 냈다는구나.”

 

“... 네?”

 

 

 

아버지께서 품에서 사진을 몇 장 꺼내셨다.

 

풀, 나무, 그리고 조금 우중충한 노인 한 명이 그려진 그림.

거대한 화폭에 그려져 고급스런 건물벽에 걸려 있는 그림 옆엔 아직 앳된 얼굴의 아가씨 한 명이 있었다.

 

 

 

“엄마랑 단 둘이서 사는 아이가 돈도 많이 드는 예체능에서 어떻게 하나, 그 애 어머니가 아빠에게 기도 좀 많이 해달라고 정말 많이 부탁했어.

그래서 엄마랑 같이 기도했지. 네 기도를 하고 나면 그 다음으로 말이야.”

 

“그랬죠. 그 아이가 예체능 관련 고등학교를 못 나오면 대학교도 못 갈 거라면서 고등학교 불합격 증서를 가지고 엉엉 우는 게 엇그제 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됐는지...

이번에 운 좋게 좋은 후원자를 만나서 다행이었죠.”

 

“그것도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이에요. 그렇죠?”

 

 

 

사진 속 아가씨는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와 내 부모님을 양 옆에 끼고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들어 올렸다.

교회를 다닌 지 너무 오래 돼 이젠 기억도 안 나는 누나일 텐데,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기쁨은 그런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아들아.

세상에는 많은 기적이 있단다.”

 

 

 

아버지께서 말씀 하셨다.

 

 

 

“하지만 기적이라는 건, 우리 귀에 잘 들리지 않을 때가 많아.

정말로 기적이 필요한 건 당장 오늘 내일 하는 이웃들에게 필요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기적은 그렇게 거대한 것이 아니거든.”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

공부하기 위한 기회를 얻는 것.

쪽방촌에 쓸 수 있는 화장실이 생기는 것.

 

아버지가 핸드폰을 넘기며 보여주신 사진 속에는 수많은 기적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는 게 로또 맞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마치 하루 아침에 강남 건물주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달동네에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강남 아파트를 가지게 되는 건 기적이 아니라 소설이란다.

제대로 된 뭉칫돈 하나도 제대로 써본 적 없었을 사람에게 강남 아파트가 들어온다 한들, 사기꾼들에게 뺏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돈을 지혜롭게 쓰는 방법을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서 기적이란 건 강남 아파트이라기 보단, 쓸만한 화장실 같은 거란다.

변화하려는 사람의 등을 조금이라도 더 밀어주는 게 기적이지.

쪽방촌에 가본 적 있니? 그곳 사람들에겐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어. 그래서 제대로 씻을 여건도 안 돼.

아빠가 쪽방촌 봉사를 나간 것도 그것 때문이란다. 거기에 돈 몇 푼 기부하는 것보단 그게 더 뜻 깊을 것 같았거든.”

 

 

 

옛날 생각이 나신 건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뭉근히 바라보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아침에 눈 떠보니 눈 앞에 없던 화장실이 떡 하니 놓여있는 것’도 기적 같은 일 아니니?

땅 파서 10원 하나 나오지도 않는 세상에서 땅도 안 팠는데 화장실이 나온 건 엄청난 기적이지.

게다가 화장실이란 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엄청 중요하단다. 

쪽방촌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더러운 자기 얼굴을 보면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

 

“그럼요. 그럼요. 그래서 우리도 보람을 몇 번 느꼈었죠?

전에 거기 살던 청년 하나가 전에 우리한테 사과 한 상자 들고 왔었잖아요.

우리 교회에서 한 봉사 덕분에 과일 가게 하나 차릴 수 있었다고. 

그 때는 우리가 얼마나 뿌듯했었는지 몰라. 흐흐흐.”

 

 

 

어머니는 내가 먹은 샐러드 접시에 놓인 사과를 가리키시며 어깨를 으쓱거리셨다.

 

아삭하고, 단 맛이 제법 입 안에 맴돌았던 사과.

그리고 그런 사과가 버려진 쪽방촌의 청년 손에서 나왔다는 것.

 

나는 나도 모르게 기적을 씹고 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아빠는 말이다, 목사 일을 하면서 너무 많은 기적들을 봤어.

한 부모 가정에서 개인 전시회까지 하게 된 딸, 쪽방촌에서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던 청년이 만든 과일 가게,

그리고 이런 가망 없는 개척 교회를 30년도 넘게 하고 있는 아빠와 네 엄마.

그 모든 게 작지만 충분히 기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 아니니?”

 

“... 하지만 그게 저에게도 일어나리란 법은 없잖아요.”

 

“기적은 일어나는 게 아니야.”

 

 

 

아버지의 두꺼운 손바닥이 내 머리 위에 툭, 하고 얹혀졌다.

 

 

 

“만들어 가는 거지.”

 

“... 네...?”

 

“정말로 단순한 기적 덕분에 그 누나가 전시회를 열었겠니? 쪽방촌 청년은?

그리고 무엇보다, 네 아빠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서 이 교회를 유지할 수 있었겠니?”

 

 

 

부모님의 얼굴에 자글자글하게 나있는 주름이 아버지의 대답을 대신했다.

 

 

 

“기적이란 건,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도착지로 데려다 주는 자동차가 아니야.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을 도와주는 보조 바퀴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은 자기 뒷바퀴에 달린 보조 바퀴를 보지 못해. 도착하고 나서 고개를 돌려야 마침내 거기에 기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지.”

 

“하지만 사람은 자신에게 보조 바퀴가 있다는 걸 믿지 못한단다.

믿는다는 건 엄청 어려운 일이거든. 

사람의 마음은 촛불의 심지고, 믿음은 그 심지를 계속해서 태우는 과정이지.

그래서 아빠가 교회를 세웠단다. 적어도 이곳에 온 사람들의 심지는 아빠가 갈아주기 위해서.”

 

“... ...”

 

 

 

정의에 굶주린 사회.

의인이 악인에게 먹히는 게 당연시 되는 사회.

 

그런 세상에서 아버지께서 신앙을 시작하신 이유는 터무니 없는 헛소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악인이 제대로 된 벌을 받는 것. 의인이 상을 받는 것.

그게 어지간한 기적으론 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교회는 여전히 이 지하방에 있다.

비웃음 당하고, 멸시와 조롱을 받아도 아직 이곳에 있다.

기적처럼.

 

변화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거리.

무수한 기적을 경험하셨던 아버지껜 그게 그리 먼 거리가 아닐 지도 모른다.

 

 

 

“네가 어렸을 때, 네 심장에는 큰 구멍이 하나 있었단다.

하지만 의사들이 10살도 안 된 아이에게 심장 수술을 할 수는 없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지.”

 

“하지만 아빠는 너무 무서웠다.

아들이 죽을 수도 있는데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그래서 마냥 본당에 앉아 매일 기도를 드렸어. 나를 데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만은 살려달라고.”

 

 

 

아버지의 시선이 내 왼쪽 가슴을 향했다.

 

두근, 두근,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맥을 타고 흘렀다.

 

 

 

“사실, 아들 목숨이 위중한 마당에 어떤 말이 아빠에게 위로가 됐겠니.

설령 나중에 심장에 뚫린 구멍이 매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 때까지 아빠는 매일 밤잠을 설치며 지냈겠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참 지혜로운 대답을 해주셨어. 그게 뭔지 아니?”

 

"‘그 아이는 네 아들이기 이전에, 나의 아들이다.’

아빠가 새벽에 기도를 하는 와중에 그런 말을 들었단다."


 


천지를 만들었다는 신이, 전지전능한 신이,

심장에 구멍이 뚫린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 말에 아버지는 기적처럼 마음이 편안해지셨다고 한다.

말 그대로 기적처럼.

 

 

 

“미숙해도 괜찮단다. 방법을 몰라도 괜찮단다.

다만 믿으렴. 악몽에 빠진 오르카의 대원들이 일어설 수 있을 거라 믿고, 네가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어라.

기적이 일어날 거라 믿어라.”

 

“왜냐하면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단다. 기적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지.

하지만 그 효과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거야. 못 믿겠다면 네 심장에 있던 구멍을 생각하렴.”

 

 

 

아버지의 말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더치걸부터 시작해 리리스, 칸, 마리, 아스널, 레오나,

반군에 있었던 수많은 아이들과 메리, 나이트앤젤,

리앤, 시라유리, 메리, 마키나,

 

그 중 어느 누구도 기적 같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악마의 몸에 들어간 내가 포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기적이었다.

 

 

 

“아빠도 너를 찾기 위해 셀 수 없이 오랫동안 기적을 믿어 왔다.”

 

 

 

전단지 뽑는 방법도 모르는 아버지.

그걸 나눠주며 울지 않는 법도 몰랐던 어머니.

 

아버지의 미련은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이었을까, 어머니의 집착은 또 얼마나 아둔한 집념이었을까?

그럼에도 두 분은 그 긴 시간을 믿으셨다.

그게 두 분의 삶의 방식이었다.

 

이런 조그마한 지하방 교회를 만들 땐 어머니가 아버지를 믿으셨고,

어머니가 배움을 계속하고 싶다며 대학원에 가셨을 땐 학비를 대주신 아버지가 어머니를 믿으셨다.

 

 

 

“그게 아빠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던 방법이었고,

네가 앞으로 버틸 수 있는 방법이 되어줄 거다. 아들아.”

 

“...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너는 이런 평범한 아빠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잖니.”

 

 

 

아버지께선 평생을 함께 해온 자신의 성경책을 나에게 건네주시며 말하셨다.

 

... 하나님의 아들이라. 목사님이시니 위로도 저렇게 하는 게 당연하실 거다.


사실 증명도, 증거도 없는 그저 말뿐인 말. 기적이란 단어처럼 깃털보다 가벼운 문장.

믿음뿐인 말을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마지막 문장으로 택하셨다.

 

 

 

“... 고마워요. 아빠.”

 

 

 

하지만 다시 일어서기엔 부족함 없는 문장이다.


아버지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밥 다 먹었으면 말하렴. 반찬 한 봉지 싸줄 테니까 가져가서 먹고.

지금 네 대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했잖니. 엄마 아빠가 눈치 없이 계속 붙잡고 있으면 안 될 것 같구나.”

 

“어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아가씨만 해도 정말 모델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예쁠지 몰라.

우리 아들 아주 복 받았네. 복 받았어. 네 대원들이란 아가씨들 못 본 게 이 엄마의 천추의 한이다. 한이야.”

 

 

 

바지에 쌓인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신 두 분.

아버지의 손 때가 잔뜩 묻은 성경책은 내 옆자리에 말없이 놓여져 해진 가죽 커버를 반짝였다.

 

그렇게나 반짝이는 아이들이, 저 너머에 너무도 많다.

내가 다시 일어선다고 한들 그 아이들에게 좋은 사령관이 되어줄 지 여전히 의문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여쭤보기로 했다.

 

 

 

“... 아빠.”

 

 

 

지금이 아니라면 물어볼 수 없을 것 같다.

저 두 분이 아니라면 물어볼 수 없을 것 같다.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그런 아이들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내 평생의 질문을 토해냈다.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나의 아버지께.

 

그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셨다.

 

 

 

“당연하지!

누구 아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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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나는 마키나와 함께 교회의 밖으로 올라왔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 드나드는 사람은 없다.

다만 골목길 한 가운데에 우리가 들어왔던 것과 똑같이 생긴 원형의 포탈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모님께는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이제 가야 되는 거니?”

 

“... 네. 저희가 이렇게 얘기하는 동안 저쪽에서 얼마나 시간이 흐를 지도 모르고...

... 여하튼 그래요.”

 

 

 

자기 권능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별의 아이가 언제까지 시간을 멈출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걸 가지고 도박을 할 수도 없고.

최악의 경우, 여기서 보낸 시간이 별의 아이가 멈출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렸을 수도 있다.

만약 그게 맞다면 저쪽에선 지금 시간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만큼은 막아야 한다.

 

 

 

“우리 아들 거 가서 엄마 밥 못 먹어서 어떻게 해... 그러니까 이 갈비찜이라도 챙겨가라니까...”

 

“대신 레시피 잔뜩 적어서 주셨잖아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알겠다. 엄마가 챙겨준 게 가다가 괜히 상하기라도 하면 짐만 되겠지.

거기 요리 잘하는 사람은 있니? 없으면 엄마가 같이 가는 건데, 거 포탈인지 뭔지는 보이지도 않구나. 고개만이라도 살짝 넣어보고 싶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잘 하는 사람 있으니까 괜히 오려고 하지 마세요.”

 

 

 

아무리 교회 일이 힘들어도 인류가 싹 다 멸종한 세계에서 사는 것보단 할 만 하겠지.

저런 세계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건 나로 충분하다.

 

 

 

“저기 있는 애들에게 애정이 없으면 여기 있느니만 못할 거에요.”

 

“그래. 엄마 아빠도 다 안다.

옷차림도 숭한 아가씨들 사이로 주름 자글자글한 노인네들이 가는 것만큼 어울리지도 않는 것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엄마 아빠 없다고 막 아가씨들한테 엄한 옷 입히면서 괴롭히면 안 된다?

아내 될 사람은 소중히 여겨줘야 하는 거야. 

결혼식 할 거면 웨딩 드레스도 좀 제대로 된 거로 입히고. 엄마 아빠가 전에 봤던 건 영 아니었어.”

 

“하하... 네. 그렇게 할게요.”

 

 

 

오른속으로 마키나를 꼭 붙잡은 채 이런 말을 듣고 있으니 왠지 상견례라도 치르러 온 기분이다.

기분이 붕 뜨는 것 같아 숨을 쉴 때마다 손 끝이 저릿하게 떨린다.

 

무서워서 그러는 걸까? 내가 지금 돌아가야 하는 곳이 전장이라서?

평범한 사람은 죽을 수도 있는 곳이라서?

 

 

 

‘... 이미 몇 번 죽어봤잖아. 뭘 새삼스럽게 긴장하고 그래.’

 

 


뭐, 아빠가 저렇게나 기도를 많이 해주셨는데, 이번에도 기적이 따라주겠지.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있다.

 

 

 

“아들아.”

 

“네.”

 

“아버지란 가족을 등 뒤에 두고 도망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것 참, 평범한 사람은 못할 짓이네요.”

 

“하지만 세상 모든 아버지는 평범한 법이지.”

 

 

 

아버지께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단촐한 케이스에 곱게 포장된 십자가 목걸이. 그리고 성경 말씀 구절이 적힌 카드였다.

 

 

 

"너무 어려운 일을 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러면 나이 먹고 허리 아파. 적당한 일은 아내에게 부탁해라."


"자식 교육할 때는 꼭 성급해 하지 말고.

아빠가 네게 큰 소리 쳤던 일, 별로 없지? 목사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이거 자식 교육에 엄청 중요한 일이야."


"일에 치여 살지 말고.

게임 속 주인공 보니까 뭔 놈이 일과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면 가정 파탄 나기 십상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평범한 삶 속에서 얻은 지식들을 나에게 말씀 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무 열심히 사랑하려 하지 마라. 그러면 사람이 지쳐."


"딱 손톱만큼만 사랑해라.

잘리고, 부숴져도,

다시 자라나 평생을 따라오는 사랑을 해라."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말을 되새겼다.


아직도 저 밖이 무섭다. 말 몇 마디를 듣는다고 평범한 인간이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손 틈 사이로 두려움이 흘러 나와 손 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아버지는 그런 내 손을 붙잡으며 말씀 하셨다.

마치 내 두려움을 알고 계시다는 듯이.




“너무 힘이 들 때는 눈을 딱 감고, 한 번만 버텨라.

도망치고 싶을 때 딱 한 번만 더 버티겠단 마음으로 살아라.”

 

“그럼 너도 멋진 아빠가 될 수 있을 거다.

이 아빠가 보장하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어렵사리 숨기며, 아버지는 나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드셨다.

 

자식이 사라져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아버지.

교회 컴퓨터로 전단지를 뽑아 발품을 팔며 나눠주는 아버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셨던 아버지의 길을 교회 프린트 옆, 산처럼 쌓인 실종 전단지가 증명했다.

 

그런 길의 끝으로 주는, 마지막 이별 선물마저도 참 목사님답구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 갈게요.”

 

 

 

‘갔다 오겠다’가 아닌, 그저 ‘가겠다’.

지금이 마지막이란 사실을 십자가를 들고 나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결국 눈물이 먼저 터져 나온 것은 아버지가 아닌 내 쪽이었다.

 

 

 

“그래. 잘 가라.”

가서 행복하게 살아라. 아빠가 기도하고 있으마.”

 

 

 

아버지의 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끝.

짊어지지 않아도 됐을 수많은 짐을 어깨 위에 올려두고 수십 년을 걸어오신 분의 끝이다.

 

기적이 없으면 오지 못했을, 기적이 있어도 제대로 된 보상 받지 못할 길.

지하방 안에서 제대로 된 십자가 하나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지 못한 교회가 그 아버지께 남은 보상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무수한 기적이 피어 올랐다.

작은 기적들이. 세상이 눈치채기엔 너무도 보잘것없고 하찮은 기적들이.

그러나 필요한 이에겐 그 어떤 것보다 크고 위대한 기적들이, 이 지하방에서 기적처럼 피어 올랐다.

 

 

 

찰팍.

 

 

 

어머니께서 적어주신 음식 레시피들을 들고 포탈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바닥에 얕게 채워져 있는 물.

이곳으로 올 땐 거친 물살을 헤치고 들어오는 기분이었지만,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길은 잔잔한 물가였다.

 

 

 

찰팍.

 

찰팍.

 

 

 

두 발자국을 더 내딛고 고개를 돌렸다.

 

저 너머에서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주시는 아버지.

고즈넉한 골목길에서 가로등이 주황빛을 깜빡거리며 아버지의 손길을 비췄다.

 

 

 

“고마워요. 아빠.”

 

 

 

내 말이 저 분들에게 들렸을까?

작게 읊조리듯 나온 말에 찰팍이는 물결 위로 자그마한 파동이 떠올랐다.

 

 

 

“한 번만 더 일어서 볼게요.”

 

 

 

아버지. 

그리 위대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는 평범한 단어.

내가 읽은 무수한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는 질 나쁜 범죄자거나 고리타분한 늙은이로 나올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누구보다 위대한 영웅이다.

 

 

 

‘... 힘내자.’

 

 


그래. 집으로 가자.

가족들이 기다리잖아.

 

아빠는 가족에게서 도망치면 안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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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아가씨?”

 

 

 

사령관이 포탈 너머로 모습을 감춘 후, 따라가려는 마키나를 여인이 잠시 멈춰 세웠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마키나.

여인은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가씨의 낙원은 잘 있나요?”

 

“... ...”

 

 

 

예상치 못했던 여인의 질문.

마키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 다... 알고 계셨군요.”

 

 

 

사령관과 그의 부모님이 하던 얘기에서 마키나는 대략 눈치를 채고 있었다.

사령관이 했다던 게임.

그 속에 마키나가 있던 세계의 이야기가 연극 대본처럼 적혀 있었다는 것을.

 

자기 아들이 좋아하던 게임이었고 찾아보기도 했다 했으니, 여인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

다만 자신의 정체까지 알고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 게임에 단발 머리를 하고 있던 캐릭터는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요.

푸른 머리카락은 더 그랬고. 그래서 그냥 생각이 났나 봐요.”

 

“... 그랬군요.

저에 대한 이야기도... 그곳에 적혀 있었군요.”

 

 

 

어쩌면 자기는 이미 정해진 길 위에서 그저 발버둥 치고 있는 것 아닐까?

마키나는 여인의 의뭉스런 미소를 보며 고개를 떨궜다.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친 자신이 우습게 보였을까?

아니면 여인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 없는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만든 낙원이 멍청해보였을까?


사령관은 마키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말해주지 않았기에 마키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을 제치더라도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제 이야기를... 아시나요?”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아가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고 있어요.

앤 박사 얘기를 했을 때 내가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호호.”

 

“... 그럼 선생님은...”

 

 


자신의 엄마였던 사람.

바보 같고, 요령없이 살았던 사람.

 

같은 인간이 보기에 앤 박사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앤 박사님이 불쌍하신가요...?”

 

 

 

마키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보기엔 그저 바보 같이 희생만 하다 간 사람이었으니까.

 

 

 

“그럴 리가 있나요?”

 

 

 

하지만 여인은 다르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연구원 아가씨가 불쌍할 것 같았으면 여기서 이렇게 30년 동안 골목길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더 불쌍하게?”

 

“그, 그렇다고 두 분이 불쌍하다는 건 아니라...”

 

“하하, 농담이에요.

그래도 불쌍해 보이진 않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적어도 애 엄마인 내가 보기엔.”

 

“네?”

 

“엄마는 무슨 일을 겪든, 자기 자식과 함께 있을 수만 있으면 강해지는 법이거든요.”

 

 

 

여인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 마키나에게 보여주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사령관의 사진.

놀이공원에 갔을 때의 사진.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셀 수 없이 많은 아들의 사진.

 

 

 

“우리 아들을 잃어버렸어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던 덕분이에요.

앤 박사도 마찬가지였겠죠. 자신이 화가가 될 재능은 없었어도 화가가 된 메리를 보면서 행복하다고 했으니까요.”

 

“앤 박사님이... 행복하셨다고... ...”

 

“게임 속에는 비단 아가씨의 이야기만 적혀 있는 게 아니에요.

메리의 이야기. 앤 박사의 이야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죠.

그래서 이건 확답해줄 수 있어요.

앤 박사는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한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이었을까, 여인이 하는 말은 마키나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그녀가 기억하는 앤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 앤 박사님은 동료 연구원들에게 왕따를 당하셨어요. 바이오로이드를 자기 딸처럼 여기는 정신병자라고.

그런 분이 어떻게 행복하실 수 있었겠어요...?”

 

“순서가 잘못 됐네요.

왕따를 당해서 불행한 게 아니라, 왕따를 당해도 딸과 같이 있을 수 있으니 행복한 거죠.”

 

“... 메리를 만들고 나서도 윗 사람들의 명령 때문에 버려야만 했어요.”


"그래서 자기가 거둬들었잖아요? 딸이랑 같이 있을 시간이 늘어났으니 더 행복했겠네요."


"철충 때문에... 일생을 바친 낙원이 무너졌어요..."


"무너진 게 아니라 딸에게 물려준 거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마키나가 보기엔 앤 박사는 불행해야만 했던 이유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여인은 그녀가 행복했을 이유가 단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하나의 이유가, 나머지 모두를 압도한다.




"앤은 낙원을 만든 사람이기 이전에, 낙원 속에 있던 사람이었어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어요."


"... 이해가... 안 되는군요. 어떻게 박사님이..."


“이해 안 되죠? 맞아요. 저도 어렸을 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엄마에게 자식이란 건 그런 거에요.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낙원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

천사이고, 빛이며, 기적이죠.”

 

 

 

여인의 말에 마키나는 꿈 속에서 보았던 앤 박사를 떠올렸다.

 

메리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며 즐겁게 웃었던 그 때의 기억.

낙원에 온 것 같았던 그 때의 황홀했던 꿈이 마키나의 마음 속에 소용돌이쳤다.

 

 

 

“앤 박사가 남긴 유언이 뭐였는지 알아요?

‘메리와 마키나는 나에게 천사나 마찬가지야.’

나도 엄마라 그런가,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자기 자식은 언제 봐도 천사처럼 보이죠.

자식은 부모의 빛이니까요.”

 

“... ...”

 

“그러니 정말로 앤이 원했던 건 낙원 같은 게 아니었을 거에요.

아가씨가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앤의 낙원이겠죠.”

 

 

 

정말 앤 박사가 그런 말을 했을까?

게임 속에서 그냥 적당히 각색한 내용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여인이 거짓말을 했을 경우는?

무수한 가능성이 마키나의 머리 속을 스쳤다. 앤 박사가 불행해야 했던 무수한 이유들처럼.

 



"... ..."




하지만 적어도 저 여인이 하는 말이라면,

누구보다 갈무리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저 여인의 말이라면 믿어도 되리라.

 

 

 

“그러니까 아가씨. 낙원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만약 부숴진다고 해도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되고, 무엇보다 아가씨의 엄마는 그러길 바라지 않을 거에요.

대신, 어떻게 낙원을 만들어야 하는지 앤을 대신해 배워주세요. 이왕이면 우리 아들 곁에서.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는 아들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거에요.”

 

 

 

잠시 동안 이어지는 정적.


여인이 마키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앞치마가 바람에 흩날렸다.



 

“우리 아들을 잘 부탁 드려요. 마키나 양.”


 

 

늙은 몸의 입이 여인의 눈을 대신해 눈물을 조용히 읊었다.

마키나는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

바이오로이드가 어떤 이유로 창조되었는지 알고 있는 인간.


그럼에도 그런 인간이 바이오로이드에게 명령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 어머님.”

 

 

 

그랬기에 마키나도 여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드님을 지키겠습니다.”

 

“... 고마워요. 이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서.”

 

 

 

포탈 너머로 발을 내딛기 전, 마키나는 자신을 향해 인사하고 있는 여인의 마음을 보았다.

 

아주 작게나마 남아 있었던 삶에 대한 미련.

욕망. 욕심. 더 편한 삶을 살고 싶었다던 후회.

 

그러나 자신의 맹세를 들은 뒤엔, 그마저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여인은 아들을 맡기고 나서야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품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그 눈물엔 낙원 속 바이오로이드들이 지었던 그 어떤 웃음보다도 밝은 기쁨이 서려있었다.

 

한평생을 희생해온 여인의 마지막 눈물.

그것이 마키나가 보았던 낙원의 정답이었다.

 

 

 

찰팍.


찰팍.


찰팍.




포탈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령관의 모습이 보인다.

 

여인이 보여준 사진과 달리 어느덧 장성한 한 청년의 모습.


저 사람이 두 명의 낙원이구나.

 

문득, 마키나의 머리 속엔 그런 생각이 스쳤다.



 

사령관이 자신을 향해 팔을 쭉 뻗고 손짓했다.

그가 걸어간 물길 위, 자그마한 파장이 웅, 웅,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이 너무 몽환적이라 그랬던 걸까,




'... 사령관님의 욕망은 무엇인가요?'




그가 자신을 부르는 손짓에 마키나가 자기도 모르게 읊조렸다.

 

 

 

“제가 모두 이뤄드릴게요.”

 

 

 

저 손짓이야말로,

‘낙원으로부터 온 초대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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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답답한 짓 하는 건 이제 끝입니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