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스데이 23화(시즌1 完) : 복귀>


주호는 황궁 복도를 걷고 있었다. 평생 살면서 이런 곳에 들어오는 일이 생기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황궁 내부는 손상된 부분이 많았고 기술자들과 건설로봇들이 달라붙어 손상된 부분을 열심히 손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내에 따라 집무실로 통하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갈때 주호의 주변으로 한무리의 해병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푸른색 도색이 되어있는 CMC 전투복과 검과 방패의 형상을 하고있는 부대문양. 레이너 특공대의 해병들이었다. 본래 그 모습은 제국 근위대가 지키고 있어야 했던 자리였다. 최근 케리건이 황궁을 쓸고 갔다는 이야기를 감안하면 제국 근위대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지는 안봐도 비디오였다.


안내를 하러 나온 여비서를 따라 주호는 승강기에 올라섰다. 승강기에 오르자 벽이 갑자기 일렁이더니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유령이었다. 경비 한번 철저하구만. 그 분위기는 처음 오르카에 탑승했을때 블랙 리리스에게서 느껴졌던 그 분위기와 비슷했다. 위험한걸로 따지면야 유령이 더 위험하겠지만. 적어도 리리스는 사람의 마음을 읽지는 못할테니까 말이다. 쓰고있는 마스크로 인해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 저 가면을 벗겨내면 "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이라도 하면 뇌에 바람구멍 내주겠다." 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겠지. 주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령이라는 자들은 보면 볼수록 정말 꺼림칙한 존재들이었다.


승강기가 마침내 집무실이 있는 층에 멈춰섰고 비서와 유령이 먼저 내렸다. 비서가 따라오라고 말을 하고서야 주호는 발을 뗄 수 있었다. 유령은 먼저 달려가더니 황궁 문 앞에 부동자세로 멈춰섰다. 이어서 비서가 문 옆의 패널을 조작했다.


"황제 폐하. 강주호 박사가 왔습니다."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보내시오."


문이 열렸고 유령이 먼저 들어섰다. 방에 들어선 유령은 발레리안 옆으로 가서 서있었다. 이어서 주호가 들어섰다. 젊은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30대도 되지 않은 앳된 청년. 잘생긴 얼굴과 품위있는 몸짓. 그의 모습은 황제라기보단 완벽한 조각상에 가까울 것 같다고 주호는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사람 좋게 생겼다는 의미고 나쁘게 말하면 황제자리가 어울리지 않는 햇병아리같다 라는 뜻의 생각이었다. 주호는 유령쪽을 바라보며 그의 태도를 보았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읽지 못했는지 알 수는 없겠지만(읽었을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하다.) 유령이 제 자리에 있는 것을 보며 주호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와주셔서 고맙소. 나는 테란 자치령의 새 황제로 등극한 발레리안 멩스크요."


"...강주호입니다. 불러주신데에 감사드립니다."


발레리안은 웃으며 그를 옆에 있는 탁자로 안내했다. 주호가 자리에 앉자 옆방에서 잘 차려입은 남성과 여성 웨이터들이 나와 찻주전자와 다과들을 가져왔다. 주호 앞에 놓여있던 잔에 선명한 붉은색의 향기로운 차가 채워졌다. 차를 즐기지는 않는 주호지만 냄새만으로도 좋은 차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편하게 이야기 하고싶소. 필요한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시오."


그렇게 말한 발레리안은 먼저 차를 한모금 넘겼다. 주호 역시 차를 한잔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우선.... 몇가지 여쭤보고 싶소. 어떻게 살아남은거요? 시설 전체가 초토화되고 있던 와중에...."


".... 시설 구석에 숨어있었습니다. 히드라리스크 한마리에게 죽을 뻔 했었죠."


"절체절명이었군."


"어떻게든 살아남았죠. 실례지만... 나머지 연구원들은 그럼...."


발레리안은 찻잔을 내려놓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박사가 유일한 생존자요.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 된 이후에 저그는 미스테프에서 떠났고, 나 역시 정부를 재수립 한 후에 저그가 휩쓸고 갔던 핵심 행성마다 구조대를 보냈었소. 미스태프 IV에도 말이오. 모든게 초토화 되어있었다는군. 시설도 완전히 붕괴되서 어디가 어딘지도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였지."


"네... 확실히 저도 정신차려보니 쑥밭말고는 아무것도 안보이더군요."


발레리안은 다과로 놓여있던 다크 초콜릿 한조각을 입에 넣으며 물었다.


"헌데,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던거요? 방위대는 궤멸됐고 다른 연구원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소. 특별한 사이오닉 능력도 없는 박사가 어떻게 살아남은건지 우리 관계자들도 정말 궁금해한다오."


주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르카의 이야기를 한다고 믿어줄까? 정신나간 사람 취급 할 것이다. 어차피 자신도 그게 꿈이었는지 햇갈릴 정도니까. 주호가 꿈이 아니라고 느꼈던 이유는 의식을 찾았을때 주머니 속에 있었던 작은 물건 덕분이었다. 자신의 생일때 찍은 사진. 그렘린과 포츈과 닥터가 사진속에 있었다. 자신이 꿈을 꾼게 아니라는 의미겠지. 다만 그걸 누가 믿어주겠는가. 사진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게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어떻게 믿게할까.


더군다나 주호는 그런 사실은 자치령이 모르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자치령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차원 이동 장치를 기여코 완성하게 된다면(물론 만들고 있는지 포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치령이 그 지구로 쳐들어 가게 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철충이나 별의 아이 따위야 쉽게 제압할 것이다. 그럼 오르카는? 오르카를 자치령이 그냥 놔둘까? 오르카 내부를 해병들이 장악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이 아니라 바이오로이드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자치령의 인성 글러먹은 과학자들이 실험체로 써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령관은? 아마 좋은 운명을 맞지는 못하겠지. 같은 인간이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글쎄요.... 충격때문인지 저그 침공 당시의 일이 기억나지는 않는군요..."


"그럴 수 있소.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맨정신으로 있는게 이상한거 아니겠소." 


"제 머릿속을 스캔해서라도 알아낼것입니까?"


주호가 물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소. 말해줄지 말지, 잊을지 기억해낼지는 박사의 자유 아니겠소? 굳이 그걸 침해하고 싶지는 않군."


확실히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인것 같기도 하다. 아크튜러스였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머릿속을 스캔했겠지. 아니, 사실은 외곽 행성의 생존자 따위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게 아크튜러스라는 인간과 가장 잘 어울리기는 했다. 


"다만 박사에게 한가지 바라는게 있다는 건 사실이오."


"바라는 것이라면....?"


발레리안이 찻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잔에 차를 한잔 더 따라내며 말했다.


"박사가 있던 시설은 자치령의 최신 병기 개발시설이었소. 안그렇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시설에서 연구하던 신병기의 데이터는 모두 소실되었지만 박사의 머릿속엔 그것이 남아있겠지. 혹시 기억하오?"


"해방선이라는 전투기의 콩코드 포와 사이클론이라는 차량 병기의 개발에 참여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혹시 데이터가 있소?"


"있습니다."


주호가 주머니에서 데이터가 담긴 카드를 꺼내자 발레리안의 표정이 매우 밝아졌다.


"박사. 들어주시오. 자치령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었소. 이 빈자리들을 채우기 위해 나는 유능한 장군들을 새로 앉혔소. 레이너가 자치령 군의 사령관으로 있고 호너 제독이 자치령 함대를 담당하고 있지. 그 외에 많은 인사이동이 있었소. 또한 남은 병력들을 재편성해서 자치령 군의 구멍을 메워보려 노력중이오."


발레리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그걸 채우기 위해선 새로 병력도 뽑아내야 하고 신병기도 빠르게 배치해야 하오. 박사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은 그 신병기의 배치를 더욱 빠르게 할 수 있게 해주겠지. 박사. 자치령의 신무기 개발부서로 와주시오. 박사가 토르와 바이킹등을 개발할때 주도적으로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박사같은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소. 봉급도 섭섭하지 않게 줄 것이오."


주호는 대답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박사... 부탁이오. 우리 자치령은 여태껏 겪어 본 적 없는 거대한 규모의 전쟁에 대비해야 하오. 저그보다도, 아니 어쩌면 프로토스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한 적이오. 미친 소리 같지만 실제로 프로토스와 저그의 DNA를 합쳐서 만든 괴물들이 태어나고 있소. 아버지가 벌인 짓들이지. 이제 그것을 수습해야만 하오."


주호는 발레리안을 바라보았다. 발레리안은 주호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다. 명령을 해도 될 일을 부탁으로 처리하려 했다. 신병기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는데도 이렇게 부탁을 하고있다. 대체 어떤 전쟁을 준비하길래 이렇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일까? 주호는 오르카 호의 세계를 생각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철충에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멸망하고 말았다. 프로토스와 저그를 합친 괴물... 안그래도 무시무시한 그 외계인들을 합친 존재라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나오게 될까? 주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어느 시설에서 일하면 되겠습니까?"


발레리안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감사인사는 안하셔도 됩니다. 중요한건 어느 시설에서 일을 하게 되냐는 것이죠."


"이미 박사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는 시설이 많소. 목록을 드릴테니 박사가 원하는 시설로 가주시오. 정말 고맙소 박사."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최대한 빠르게 입사 절차를 마쳐야 할 것 같으니까요."


"박사. 그리고 박사를 위해 부른 사람이 한명 있소."


주호는 뒤돌아서서 말했다.


"부른 사람이요...?"


발레리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박사도 잘 아는 분이오."


발레리안에서 몇마디를 들은 주호는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와 황궁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급하게 누군가를 찾으며 사방을 둘러봤다. 찾는 사람이 보이지 않자 다시 한번 발레리안이 말한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실 암살당한 게 아니라 살아있었소."


주호는 앞만 보고 달렸다. 옆으로 지나는 풍경은 하나의 선이 된 듯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가 암살당하기 며칠 전에 우모자 보호령으로 미리 망명을 보냈었다는군. 우모자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때 만날 수 있었지. 그녀에게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소."


발레리안이 말한 방이 눈 앞에 보이자 주호는 속도를 더 높여 달렸다.


"지금은 명망있는 우주 생물학자로 일하고 있소. 당신이 살아있다고 말하자 한걸음에 날아왔더군."


주호는 방의 문을 열었다. 거칠게 문을 연 주호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내부를 둘러봤다.


"이름까지 말해주면 더욱 확실해지겠지."


자리에 앉아있던, 금발의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주호를 향해 돌아섰다. 에메랄드 빛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를 바라봤다.


"캐시 스위프트 박사가... 당신을 찾아왔소."



"캐시.....!"


"주호..... 주호...... 주호야....."


그녀는 울먹이며 그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왔다.


"정말 주호지.....? 정말 주호가 내 앞에 살아서 온거지.....?"


주호는 생각 할 것도 없이 캐시를 향해 달려갔다. 캐시 역시 주호의 품을 향해 달려왔다.


뜨거운 포옹. 주호의 품 속에서 마침내 캐시가 흐느꼈다. 흐느끼며 주호의 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사람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자들의 만남.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던 이 가슴아픈 사랑의 꽃이 마침내 봉우리를 틔우는 순간이었다. 두사람 모두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만 동시에 웃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마침내 다시 살아서 숨쉬게 된 뜻깊은 날. 이것도 한가지의 리 버스데이(Re-Birthday)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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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그분께서 어둠과 함께 오시리라....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을 피와 불로써 정화하시리라....!"


"부관. 저 자들 소속 확인이 끝났나?"


"함선 검색 결과, 얼마 전부터 통신이 두절 된 뫼비우스 경비부대 소속의 함선들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뫼비우스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순간 경보음이 들리며 화면에 붉은 불이 들어왔다. 호너는 화면에 다가갔다.


"이번엔 또 뭐야?!"


"호... 호너제독님! 뫼비우스 함선이 아군 전투순양함 이아손 호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방금 전 들어온 통신입니다! 전투순양함 테세우스 호와 페르세우스 호도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는 보고입니다!"


"제기랄.... 반격하라고 전해!"


호너는 이어서 어딘가를 향해 통신을 연결했다. 통신기의 홀로그램으로 짐 레이너의 얼굴이 나타났다.


"짐! 자치령 전 군에 데프콘 1을 발령바랍니다! 뫼비우스 녀석들이 자치령 영역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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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을 마침내 끝내는군요. 시즌 2부터는 공허의 유산 이후의 스토리로 진행됩니다.


<전 에피소드>

https://arca.live/b/lastorigin/52090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