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전우들의 마지막 모습. 그것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지 못했다.


"지휘관이란 책임을 진 주제에, 수많은 부하들을 사지에 몰아넣어 살아남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고, 지휘관이 살아 있어야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직도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있다. 살아남았다. 그녀들의 희생으로 피의 값을 치뤘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각하와 마주한다.


"분명, 먼저 떠나간 자매들은 긍지를 갖고 희생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나를 돌려보냈고, 그녀들의 염원은 나에게 이어져 지금도 살아있다. 그렇기에 더욱 앞으로의 전쟁에서 질 수 없다. 여기서 쓰러지고 만다면 당장 각하의 안위가 위험해지며, 먼저 떠나간 자매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기에 그 책임감으로 하루 하루를 이겨나갔다.


"죄송합니다, 각하. 이런 차림으로 불쑥 찾아와 이런 어두운 이야기나 하는 여성이란, 분명 매력 없겠지요."

"아니야,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아."

"감사한 말씀이군요.. 그럼 조금만 더, 각하께 어리광을 부려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하면서도 입은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과거의 상처를 풀어놓는다. 의지할 곳이 생겨서 일까? 아니면, 각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스스로의 나약함이 드러나는 것 뿐일까?


그럼에도 썩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스스로의 상처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가끔. 아니, 매일같이 생각하고는 합니다.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제가, 각하께 기대어 행복을 누려도 되는 것인지."


하늘로 떠나간 자매들이 내려본다면 필시, 저런 나약한 녀석은 스틸라인의 대장에 어울리지 않는다 질책하겠지.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의 손길을 느끼며 마음속에 묶어두었던 상처를 풀어 언어라는 수단으로 그에게 털어놓는다. 이렇게 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해서 일까.


"그녀들이 저를 떠나보내기 전에 말하더군요. 엘랑 비탈의 정신이 있으니, 자신들은 죽어도 그 의지는 이어져 내려갈 것이라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의지가 있다면 그 전쟁은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남겨진 사람의 무게란 대단히 무거운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남겨졌습니다. 떠나간 자매들의 염원을 이어받아, 오늘 각하를 찾아왔습니다."


행복할 권리는 누구나 있는 법이다. 떠나간 자매들이 응당 누렸어야 할 행복을, 대장이 홀로 남아 대신 누린다는 것은 그녀들이 바라던 염원을 조금이나마 이루는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염치를 불구하고, 뜨거운 낯짝을 이겨내고, 남겨진 이의 죄책감을 털어내며 지금 이 장소에 도달했다.


마음속에 깊게 박힌 가시를 뽑아내면, 그 상처에서 흘린 피로 괴로워질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각하와 마주하며 책임을 다한다.


"떠나간 자매들의 몫 대신이라는 핑계는 대지 않겠습니다. 스스로도 바라는 바니까요." 


각하의 손길과 사랑을 원하면서도 죄책감이란 족쇄에 묶여 고뇌 했던 나였지만, 새로운 부하들의 응원과 먼저 떠나간 부하들의 염원이 내 발걸음을 인도했기에. 지금의 나는 각하와 마주할 수 있었다.


"각하의 위로를 원하는 저는, 어쩌면 스틸라인의 자긍심을 대표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진흙을 기며 온몸이 더럽혀지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발걸음을 남겼다. 살아남아 염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치욕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불굴의 마리니까요."


'불굴'의 칭호를 갖은 이상, 이 정도의 치욕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떠나간 부하들을 대신해서 염원을 이어받았기에, 두려움은 떨쳐낼 수 있었다.

한 명의 여성으로서 각하의 사랑을 원하고, 스틸라인의 대장으로써 염원을 이어받았기에.


"그러니 안아주십시오. 한명의 여성으로서, 스틸라인의 대장으로써 각하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말 없이 안아주는 각하의 손길에 여성의 마음이 녹아든다. 말 없이 품어주는 각하의 품에 스틸라인의 대장으로써 갖던 죄책감이 덜어진다. 모두의 염원이 지금으로 이어져, 새로운 부하들의 염원과 더해지며 내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염원이 지금 이루어진다.


"그리고.. 제 억지스러운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하하.. 분명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 정도야 뭐.."


역시, 각하의 육체는 어린 소년이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이자, 나의 염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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