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유의사항: 이번 편은 뮤지컬 <데스노트>의 패러디입니다. 원본과 초반부를 제외한 나머지 스토리를 대폭 다르게 했으나, 문제가 될 경우 내용을 수정하겠습니다. 이번 편에 나온 노래는 전부 <데스노트> 뮤지컬에 쓰인 넘버임을 미리 밝힙니다. 또한 영상과 사진이 다른 편보다 많이 쓰여 데이터의 압박이 있을 수 있으니 유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편은 음악감상과 함께 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필요에 따라 음정조정을 가했으나, 저의 조정실력 미숙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실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미리 양해를 부탁드겠습니다.




 

아스널과의 대화 이후 리마토르는 다시 탄력을 되찾았다. 하루 18시간이라는 강행군이 체력 소모를 부르는 건 변함없었으나, 정신적으로 탈진하지는 않았기에 그는 큰 문제없이 공연 당일 날까지 준비를 마쳤다.

 

공연 시작 15분 전. 그는 오드리가 준비한 복장을 입으며 거울을 자꾸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칸이 웃음을 터뜨리며 셔츠 옷깃을 정리해주었다.

 

“왜 자꾸 거울을 들여다 봐. 안 그래도 충분히 잘생겼어.”

 

“무대에 서는 건 처음이어서요. 제대로 꾸몄는지 모르겠네요.”

 

“참나, 오르카호 인원 전체 앞에서 몇 번이고 강연을 한 사람이 무대에 올라간다고 긴장해?”

 

“앞에 서는 목적이 다르니 어쩔 수 없죠.”

 

칸은 옷매무새 정리를 마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양손을 뻗어 그의 볼을 살살 어루만지며 그녀는 말했다.

 

“내가 해주는 주문이야. 떨지 말고 잘하고 와.”

 

“...알겠어요.”

 

칸의 손이 생각보다 세게 문질러서 그런지, 리마토르는 발그스레하게 볼에 색을 입히고 답했다. 그를 바라보는 칸도 볼에 홍조를 띠고 그를 보내주었다.

 

“10분 후 공연 시작합니다! 모두 준비하세요!”

 

“네, 갑니다!”

 

그리폰의 말에 리마토르는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모와 백토, 뽀끄루와 골타리온까지 무대에 오를 배우가 모두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 잘해보자며 하이파이브를 한 후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카메라가 비추는 객석을 살폈다.

 

“진짜 많이도 왔네요.”

 

“그러니까요. 교수님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오르카호의 바이오로이드는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그래도 매지컬 모모 뮤지컬이라고 해서 그런가, 아이들이 보는 건 줄 알고 앞줄에는 어린이들이 앉았네.”

 

“괜찮아요. 저희는 평소처럼 꿈과 희망을 담아 마법을 보여주면 되니까요!”

 

객석 앞에서 눈빛을 빛내는 LRL과 안드바리, 더치 걸, 코코, 아쿠아, 에밀리, 흐레스벨그를 보며 리마토르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동안 연습한 게 아까운 걸 넘어, 기대에 찬 아이들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오늘 공연에서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됐다.

 

“공연 시작합니다!”

 

스태프인 그리폰의 말과 함께 무대가 암전되더니 내레이션이 울려퍼졌다.

 

「이제 공연이 시작됩니다. 모두 뜨거운 박수로 맞아주세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진 후, 홀로그램이 뮤지컬의 제목을 비추었다. 마키나가 가진 뛰어난 가상현실 구현능력이 여지없이 빛을 발해 마치 현실같은 홀로그램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제목이 지나가자 홀로그램으로 맞춘 배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대학의 강의실을 비춘 배경에 맞추어 리마토르와 등장인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과 자신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를 보며, 리마토르는 호흡을 준비하며 연습의 결실을 꺼내들었다.

 

“오늘 강연 주제는 ‘정의’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요?

 

역사를 통틀어 많은 학자들이 정의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트라시마코스라는 철학자는 강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정의라고 했고, 플라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에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보았죠.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른바, 정의의 정의를 찾고 있는 중이죠.”

 

“푸흡!”

 

별 의미 없는 대사였음에도 관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의 주인공인 우르는 주변을 황급히 살피더니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째서 법이 존재하는 것이죠?”

 

수강생 역할을 맡은 하르페이아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리마토르는 현 상황을 그저 강의의 한순간일 뿐이라 생각하며 상황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좋은 질문이에요. 정의는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사람이 100명 존재하면 정의도 100개죠. 이렇게 정의가 모두 다 다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분쟁이 벌어져도 조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생각이 안 통하니 결국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고,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가 되죠. 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개의 정의 중에서도 최대한의 공통분모를 찾았습니다. 그것이 도덕이며, 도덕 중에서도 지키지 않으면 공동체가 붕괴될 수 있는 중요한 도덕률을 지정한 것이 법입니다.

 

혹시 여기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리마토르는 관객석을 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관객 참여형 뮤지컬이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참여를 유도하고자 뭔가 아는 게 있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바이오로이드 한 명을 지목했다.

 

“네, 거기 은발 땋은 머리를 하신 분. 답을 말씀해주시겠어요?”

 

“나? 나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 그게... 잘 모르겠다...”

 

레이스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는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옆자리에 앉은 나이트 앤젤이 다독여주는 모습을 보아 둠 브링어 소속이라고 판단한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메이를 지목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옆에 앉으신 빨간 트윈테일을 하신 분은 답을 알고 계신가요?”

 

“뭐? 나?”

 

“그렇습니다.”

 

“뭐 그런 걸 물어보고 있어!”

 

“대장, 모르잖아요.”

 

“시끄러워! 난 답을 알고 있다고!”

 

“좋아요, 그럼 답을 말씀해주세요!”

 

“그, 그건... 함무라비 법전이야!”

 

메이는 자신의 머리색만큼이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정답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리마토르는 가차 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쉽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무라비 법전이 가장 오래된 법전으로 아시겠지만 사실 그것보다 300년이 앞선 법전이 있습니다.

 

바로 우르남무 법전입니다.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우르의 왕이었던 우르 남무 왕 때 제정되었죠. 무려 기원전 2100년에 만들어진, 지금부터 족히 5000년은 된 이 법전에는 왜 법이 만들어졌는지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공정하고 불변하는 책임 기준을 만들기 위해

고아가 부자의 먹이가 되지 않고

미망인이 강한 자의 먹이가 되지 않으며

1세켈을 가진 이가 60세켈을 가진 이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법전을 만들었다.

 

 

흥미롭지 않나요? 5천년도 더 된 법전에 현대의 인권법이 목적으로 하는 내용들이 적혀있는 겁니다. 이 법이 제정되고 4천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등장한 정의 철학자 존 롤스가 정의를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몇 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변치 않는 정의의 기준을 제시한 겁니다.”

 

“교수님, 그럼 그게 정의의 의미가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하르페이아.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 정말 공정한 일일까요? 각자의 몫이라는 건 누가 정하는 거죠? 얼마만큼의 몫이 공정한 몫이죠?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정의는 트라시마코스의 말대로 강자들의 이익에 불과한 말장난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더 나아가 정의가 쓸데없는 이론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대체 정의란 뭐죠? 정의란 어디에 있는 거죠?”

 

리마토르는 관객을 보며 외쳤다. 관객이 바늘 떨어뜨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조용하자 그는 흘러나오는 MR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정의는 어디에 _ 한지상.m4a


"아무런 의미 없는 논쟁일 뿐이야. 정의는 쓸데없는 이론일 뿐이야.

 

정의는 인간 사회의 기준이 되지, 그저 편한대로 아무데나 갖다 붙이지.


전쟁을 생각하면 알 수가 있어. 정의의 깃발들고 달려나가서, 서로의 목숨 걸고 총을 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의미없는 죽음일 뿐이야.


그렇다면 이 나라의 정의란 뭘까? 바보같은 권력의 도구!


정의라는 건 과연 누가 정한 걸까? 저 눈먼 권력 가진 놈이 정해놓은 기준.


제대로 된 정의! 진정 원한다면!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해)


그게 가능한 걸까, 절대 불가능해.


인간은 그 사회의 정의를 위해 법으로 엄격하게 단속을 하지


어차피 법이란 건 구멍투성이 악이 활개쳐도 속수무책 바라만 볼뿐.


자신만의 정의를 찾아보는 거야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눈에 띄지 않게 상황을 파악하고)


 그저 그늘 속에 숨죽인채 살아가야지 


(자신만의 정의를 주장하는 놈이)


누구라도 별 수 없이 바보처럼 무시당하지



그게 정의란 거야. 이 시대의 정의!


(정의란) 어디에 있나 (진정한) 어디에 있나 (정의는) 어디에 있나 


정의란 그저 허무한 꿈인가, 정의란 무언가!

 

(돈을 버는 건 정의라 할 수 있나) 


(정직한 것은 정의라 할 수 있나)


(복수하는 건 정의라할 수 있나, 그냥 세계평화 기원하면 그게 정의인가)


미친듯이 따분한 이 세상 속에서, 정의란 건 보이지 않아! 


자신만의 정의! 찾아낼 수 있어! 저 넓은 세상 바라보며 시야를 넓혀.


그 무언가 나의 마음을 채운다면! 그것이 정의라고 할 수가 있어, 그게 답이야! 


나의 정의는 어디에-!


난 찾아낼 거야


정의는 어디에-!"




노래가 끝나자 전등이 암전되었다. 어둠이 걷히고 다시 드러난 무대에서 뽀끄루가 골타리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표지의 책을 한쪽씩 넘기던 뽀끄루는 혀를 쯧 소리가 나게 차더니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집어던졌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내 계획을 성공시킬만하면 그 놈의 마법소녀, 마법소녀, 마법소녀!!

 

전부 짜증나. 마의 여왕을 방해하는 것들은 전부!”

 

그녀가 쾅 소리가 울리게 오른손으로 옥좌를 내리치자 검은 안개의 홀로그램이 관객석을 덮쳤다. LRL과 알비스는 손을 꼬옥 잡고 부들부들 떨었고, 안드바리도 용감한 척 했으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고정하시옵소서. 저, 골타리온 XIII세가 대마왕님께서 하사하신 군단장의 이름에 걸맞게 간악한 마법 소녀들을 소멸시키겠사옵니다.”

 

“아니, 접근 방법을 바꿔야겠어. 지금까지 본좌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마법소녀들이 찾아온 이유가 뭐지?”

 

“글쎄요... 저희가 사용하는 마력을 감지한 것 아닙니까?”

 

“정답이야. 마법소녀가 사용하는 마법의 힘은 순수한 빛. 하지만 본좌가 사용하는 마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둘은 완벽하게 반대되기 때문에 마법소녀들이 쉽게 추적할 수 있었던 거야.”

 

“그렇군요! 그럼 저희도 빛의 힘을 사용하면 되겠군요!”

 

“그게 되면 본좌는 이미 마법소녀가 되었겠지!

 

직접적으로 어둠의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빛의 힘에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해.”

 

“흐음... 하지만 과연 그런 게 존재할까요?”

 

“그럼, 바로 인간의 마음을 본좌가 이용하는 것이다. 순수한 정의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이면 빛의 힘과 근원이 같기 때문에 추적이 쉽지 않겠지. 어둠의 마력이 깃든 물건이라도 순수한 정의를 가진 이의 손에 들어가면 그 기척을 감출 수 있을 거야.”

 

“대마왕님, 순수한 정의를 가진 인간이면 저희와 상극 아닙니까?”

 

골타리온 XIII세의 질문에 뽀끄루는 쾌활한 웃음소리를 감추지 않고 실컷 웃은 뒤 답했다.

 

“크하하하하하!!! 그래, 일반적인 이야기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정의는 악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어. 정의는 스스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점검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수틀릴 수 있거든.

 

그리고 보통 그런 일은 힘을 쥔 자에게 더욱 쉽게 일어나지!”

 

뽀끄루는 손에서 검은 불꽃을 일으켰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사그라들자 검은 표지의 공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이름을 쓰면 누구든지 원하는 상태로 조종할 수 있는 ‘데빌노트’. 이걸 가장 순수한 정의관을 가진 인간에게 던져주는 거다.”

 

“역시 대마왕님의 혜안은 하해와 같이 넓군요! 군단장 골타리온 XIII세! 대마왕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골타리온 XIII세는 데빌노트를 받자마자 인간계로 향했다. 검은 게이트가 열렸다 닫힌 뒤, 왕좌에 앉은 뽀끄루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후후후... 어디 잘해보라고, 마법소녀.”




화면은 다시 바뀌어 지하철역을 그렸다. 홀로그램이 만든 시계가 가리킨 시간은 저녁 6시. 수많은 사람들이 귀가를 위해 탑승하는 지하철역에 리마토르 역시 서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한 콩나물시루 안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 넣으면서도, 생각만큼은 넓은 공간 속에서 자유로웠기에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개의치 않았다. 지하철이 덜컹거리는 충격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낮에 있었던 강의를 곱씹어보았다.

 

“정의라...”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며 생계를 잇고 있지만 그에게 정의라는 문제는 영 낯설게 다가왔다. 정의는 분명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 주제어로 명시된 단어였지만, 어느새 정의는 공허한 목소리로 들려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 오후 3시, 삼안 본사에서 바이오로이드 인권운동가들의 폭탄 테러가 발생해 17명이 숨졌습니다.」

 

「블랙리버 사옥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70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해-」

 

「인간도 먹고 살기 힘들다며 바이오로이드를 사회에서 추방하라는 운동이 힘을 얻고 있습니-」

 

「차기 대권이 유력한 정치인이 바이오로이드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후 실종 상태에 빠져-」

 

「삼안 기업 김지석 회장이 자신의 경영에 방해가 되는 20명 이상의 인물을 살해한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습니-」

 

 

지하철에서 틀어주는 온갖 뉴스가 섞이자 그는 이내 정의를 고민한 자신을 자조했다. 애꾸눈의 나라에서는 양 눈을 모두 가진 사람이 비정상인 것처럼, 온갖 부정의가 판치고 있는 세상에서 정의를 말하는 이가 바보가 되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정의에 대해 고민해도 바뀌는 것은 먼지 한 톨만큼도 없는 상황에서 정의를 생각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릎까지 오는 유행이 지난 긴 코트가 세상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리마토르는 거울 안의 자신에게 쓴웃음을 지어주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말이지, 가능하기만 하면 내가 바꿔보고 싶군.

 

정의가 살아 숨쉬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다면...

 

아니, 나도 참 웃기는 생각을 하고 있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가능할 리가 있지.”

 

속으로 생각하는 혼잣말에 거스르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당황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혼자였기에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생각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닐세. 나는 지금 너에게 말하고 있네.”

 

“뭐?!”

 

리마토르는 고개를 휙휙 젓더니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급히 달려나왔다. 괴한이 따라붙었다는 생각에 그는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삼중으로 추가 잠금장치를 걸었다. 턱 밑까지 올라와 헐떡이는 숨을 고르러 거실로 간 순간, 그는 하마터면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다네.”

 

머리에 뿔이 돋아난 보랏빛 거체가 거실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달라붙은 입을 떼고 겨우겨우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냐?”

 

“내 이름은 골타리온 XIII세. 세계를 지배할 뽀끄루 대마왕님의 충직한 수족이지.”

 

“뭐...? 대마왕?”

 

리마토르는 자신이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가 의심했다. 골타리온 XIII세는 그의 혼란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하더군. ‘힘이 있으면 세계를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라...”

 

“...그래. 뭐가 문제지?”

 

“그 힘을 대마왕님께서 하사하신다면, 너는 네가 원하는 정의를 실현시킬 것이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문자 그대로다. 네가 원하는 힘을 주도록 하지.”

 

골타리온 XIII세의 말에 리마토르는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자신의 거실에 나타나더니 하는 소리가 힘을 주겠다는 말이라니. 무슨 만화도 아니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하니 묘하게 구미가 당겼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골타리온 XIII에게 되물었다.

 

“그 힘이라는 게 대체 뭐지?”

 

“하하하, 관심이 생겼는가 보군. 받아라.”

 

골타리온 XIII세는 그에게 데빌노트를 넘겼다. 공책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는 리마토르에게 골타리온 XIII세는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그 공책은 마왕님의 마력이 깃든 도구다. 얼굴을 아는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은 악마에 씌게 되지. 기생하는 악마는 바로 너다.

 

네가 이름 옆에 적는 대로 그 사람은 움직이게 되고, 이름을 지우지 않으면 3일 후에 자동으로 사망한다. 사인(死因)을 기재하지 않으면 심장마비로 죽게 되지.”

 

“뭐야, 생각보다 단순한 물건이잖아?”

 

“단순해? 하하하하하!!!! 단순한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골타리온 XIII세는 돌풍을 일으키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리마토르는 방금 전까지 마주했던 비상식적인 상황이 진실이었는지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의 손에 들린 데빌노트가 방금 전까지의 일이 모두 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시험 삼아 공책에 누구를 적을까 고민하던 중, 아까 지하철 안에서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래, 김지석. 넌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리마토르는 데빌노트에 김지석의 이름을 적었다. 그순간 글씨가 잠시 검붉게 바뀌었으나, 그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옆에 조종할 행동을 적어내렸다.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 하층민 복지에 넘기고, 바이오로이드의 인권을 해방시키고, 자신이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자백한다. 이 모든 일을 3시간 안에 행한 뒤 권총으로 자살한다.”

 

내용을 다 적은 그는 펜을 내려놓은 뒤 시계를 바라봤다. 현재 시각 6시 41분. 늦어도 3시간 뒤인 9시 41분에 소식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는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저녁식사까지 깔끔하게 해치운 그는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하나 꺼냈다. 시계는 저녁 8시 26분을 가리켰으나, 아까 자신이 적었던 글의 효력이 어디까지 미쳤을까 궁금했던 그는 TV를 켰다. TV를 켜니 아까 자신이 적었던 내용이 모두 효력을 발했는지 김지석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었다.

 

“이 시간부로 저는 바이오로이드라는 하나의 생명을 부품화하여 사회를 호도한 잘못된 기업인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바이오로이드 역시 하나의 생명입니다.”

 

“호오, 이거 재밌는데?”

 

TV에 나오는 김지석의 모습을 실실 웃으면서 바라보던 그는 다음 순간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말을 마친 김지석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발사했었던 것이다. 삼안이라는 대기업의 수장이 사망하는 광경이 전국에 생중계되자 그는 데빌노트의 위력을 실감했다.

 

리마토르는 떨리는 손을 누르며 데빌노트에 쓴 내용을 다시 읽어보았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입을 열었다.




뮤지컬 데스노트 MV_Death Note(홍광호).m4a




"믿을 수가 없어, 꿈을 꾸는 걸까

 

정말 죽였잖아 나의 손으로

 

믿을 수가 없어, 꿈을 꾸는 걸까

 

태워버려야 해 불길한 노트

 

그렇지만 결국 썩은 인간들은

 

언젠가는 제거해야 해

 


이상하다, 온 세상이 다 아름답게 빛나고

 

거리에는 환한 미소 넘치네

 

이 노트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이건 꿈이 아냐 이젠 믿어야 해

 

썩은 인간들은 없애는 거야

 

이건 꿈이 아냐 지옥같은 세상

 

뒤엎을 수 있어 심판의 시간

 

사로잡힌 영혼 비명을 질러도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각오했어 나의 희생

 

난 정의로운 세상을 내 손으로 만들 거야 끝까지

 

작은 아픔 뛰어 넘어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이젠 나의 손에 맡겨진 정의의 심판

 

세상을 내 뜻대로 세워 볼까

 

 

각오했어 작은 희생

 

난 정의로운 세상을 내 손으로 만들 거야 끝까지-!

 

정의로운 이 세상과 이 사람들을 위해서

 

썩은 세상 두고 보지 않겠어

 

오직 나만 할 수 있어 새로운 세상의 신이 되리라!!



그래, 난 신세계의 신이 되겠어! 나만이 할 수 있다고!"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모습은 흡사 세상에 자신의 포부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리마토르는 데빌노트로 눈을 돌리더니 펜을 들었다. 그리고 써내려갔다. 데빌노트의 한쪽 면에 여백이 부족할 정도로 빽빽이.


 

 

며칠 뒤라는 글자와 함께 무대가 다시 어둠에 잠겼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드러난 배경은 분홍색이 감도는 어떤 몽실몽실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모모는 열심히 마법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매지컬 문라이트 파워!

 

휴, 아직 고난이도 마법을 이끌어 내는 건 쉽지 않구나.”

 

모모가 이마에 옥구슬처럼 맺힌 땀을 닦으며 목을 축이려는 찰나, 백토가 급히 모모를 불렀다.

 

“모모, 이것 좀 봐!”

 

“무슨 일이야?”

 

백토는 말을 더 잇지 않고 그녀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에서는 블랙리버의 총수인 앙헬 리오보로스가 담화를 하고 있었다.

 

“앙헬 리오보로스? 백토, 잊어버린 거야?

 

우리는 뽀끄루 대마왕과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 함부로 나설 수 없어. 나쁜 사람이라도 우리가 직접적으로 혼내주면 사람들은 마법의 존재를 의심할 거라고. 마법은 조금 신비한 분위기로 있어야 믿게 돼.”

 

“그게 아니야. 내용을 들어봐!”

 

백토의 말에 모모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앙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은 모모는 자신의 청력에 이상이 생겼는지 순간 의심했다.

 

“...따라서 나, 키라는 이 시간부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없애겠다. 앙헬 리오보로스는 김지석에 이어 두 번째 제거대상이며, 다음은 펙스의 회장들이 될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모든 자는 두려워하라, 자신들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뭐야, 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모모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백토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백토는 자신이 본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키라라는 인물이 모든 악인을 하나씩 제거하겠다고 선포했어. 그 증거로 김지석이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악행을 자백하더니 자살했고, 앙헬도 갑자기 블랙리버 휘하의 모든 바이오로이드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더니 저렇게 담화를 연 거야.”

 

“사람을 조종하는 건가? 일단 좀 더 확인을-”

 

모모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순간, 영상 속 앙헬이 스스로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쏘았다. 총알이 관통한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광경에 두 마법소녀는 허망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모모, 이건 뽀끄루 대마왕의 짓이야. 그런 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어.”

 

백토는 그렇게 말하고 화면 너머 앙헬의 시체에 빛의 마법을 집중시켰다. 뽀끄루 대마왕의 짓이면 틀림없이 어둠의 마력이 검출될 터였으나, 그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자 백토는 흠칫 놀랐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아무런 흔적도 없는 거지?!”

 

“그럼 뽀끄루 대마왕의 짓이 아니라는 건가?”

 

“그럴 리가 없어. 이건 틀림없이 뽀끄루 대마왕의 짓이라고!”

 

누가 봐도 어둠의 마법이 개입한 일이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두 마법소녀는 현재의 상황을 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모모는 키라라는 자가 앙헬의 입을 빌려 한 말을 떠올렸다.

 

“백토, 다음 목표는 펙스 회장단이라고 했어. 우선 그쪽으로 이동하자.”

 

“그게 좋겠어.”

 

백토는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꺼내들어 공간을 갈랐다. 갈라진 공간을 넘어 펙스 회장단의 연구실에 들어간 둘은 은신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연유로 몸을 피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노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탐욕을 밀가루처럼 뭉쳐서 빚은 듯한 얼굴의 노인은 옆에 서있던 레모네이드 오메가에게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노인의 뜻을 파악한 오메가는 그 남자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멍청한 놈. 내가 몸이나 피하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비싼 돈 들여서 너 같은 버러지를 경호대장에 앉혀놓은 줄 알아?”

 

“그렇다고 해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메가 회장.”

 

“베타 회장, 그게 무슨 말이요? 우리가 왜 물러나야 합니까?”

 

“저 키라라는 놈은 김지석과 앙헬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조종해서 죽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허허... 전화위복이라 생각하죠. 이번 기회에 삼안과 블랙리버의 지분까지 우리가 싹쓸이하는 겁니다.”

 

실감나는 홀로그램 영상 덕분에 모모와 백토도 상황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모모는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혐오의 감정을 고스란히 연기로 끌어냈다.

 

“백토, 우리가 저런 사람들을 지켜도 되는 걸까?”

 

“...어쩔 수 없어. 뽀끄루 대마왕이 개입한 일이라면 우리는 막아야 해. 그게 마법소녀잖아.”

 

“그렇지만 악인들도 우리가 구해야할까...”

 

백토는 모모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모모는 자신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백토는 모모를 다독여주며 말했다.

 

“왜 그래 모모. 너답지 않아. 어서 보호 마법을 사용하자.

 

매지컬 프로텍터!”

 

백토가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들어 주문을 외치자 빛의 보호막이 퍼져나갔다. 주저하던 모모도 마법봉을 들어 보호마법을 걸었다. 마법소녀의 눈에만 보이는 보호장벽이 펙스 회장들 주변에 세워지자 모모는 눈에 띄게 안절부절 못했다.

 

“...저기, 있잖아.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 백토?”

 

“고민하지마 모모. 뽀끄루 대마왕의 악은 어떤 경우에도 뿌리 뽑혀야 해.”

 

백토는 모모를 격려해주며 마법에 박차를 가했다. 언제 키라가 공격을 개시할지 몰랐기에 백토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오메가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렇게 죗값을 다 갚고 가는군요.”

 

“뭐?!”

 

오메가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백토는 경악했다. 죗값을 갚는다는 말은 김지석과 앙헬의 죽음 때도 키라가 언급한 말이었다. 그 말이 펙스 회장들의 입에서 나오자 백토는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습니다. 전 재산을 복지 사업으로 넘기고 저희와 관계된 모든 정보를 영구 파기하라고 지시했으니 앞으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죠.”

 

“이걸로 된 겁니다. 오메가, 그럼 버튼을 눌러라.”

 

“버튼...?”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뚜벅뚜벅 걸어와 붉은 버튼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 버튼을 본 백토는 불길한 예감을 직감하며 소리 질렀다.

 

“안 돼!”

 

하지만 백토의 절규에도 폭발은 멈추지 않았다. 폭탄이 설치된 곳이 펙스 회장들의 의자 아래였고, 백토의 보호마법 안에서 폭발이 일어나 역으로 폭발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키라를 도와 살인을 저지른 백토는 아연실색해서 비틀거렸다.

 

“이럴 수가...”

 

“백토!”

 

모모는 자리에 쓰러지는 백토를 붙잡아 세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키라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꼴이었기에 둘은 자신들이 늦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모는 왠지 모르게 속에서 드는 통쾌함과 정의롭다는 생각에 자신을 의심했다.

 

‘뭐지?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분명 사람이 죽은 건데... 어째서 잘 죽은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모모는 혼란스러웠다. 여지껏 사람을 살리고자 했고, 뽀끄루 대마왕이 행하던 살육을 멈추려 했던 자신이 오히려 사람이 죽는 광경을 보고 희열을 느낀다니. 마치 자신이 어둠에 물드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어. 난 아니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모? 일단 후퇴하자.”

 

백토는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재빠르게 휘둘러 처음처럼 공간을 갈랐다. 자신들의 쉼터로 돌아온 마법소녀들은 거친 숨을 골랐다. 숨이 가라앉고 머리가 식어 다시 이성이 돌아오자 백토는 분노가 자신을 달구는 걸 느꼈다.

 

“나쁜 녀석!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

 

“...백토. 그 사람들 전부 나쁜 사람이었잖아. 오히려 정의를 행한 게 아닐까?”

 

“모모! 아까부터 계속 왜 그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는 건 허락되지 않아! 너도 잘 알잖아!”

 

“그럼 사형제도는 뭐야? 국가는 왜 사람을 죽이는 거지?”

 

백토는 모모의 눈을 보았다. 흔들리지 않던 정의를 바라보던 눈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백토는 자신이 모모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에 힘을 주고 말했다.

 

“국가는 처벌 권한을 넘겨받았잖아.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는 사람들은 모두 그만한 죄를 지었고.”

 

“국가의 권한은 누가 정하는 거지? 사형을 선고받는다고 해서 죄가 100% 확실한 것도 아니야. 인혁당 사건처럼 조작된 사법살인도 있다고.”

 

“이러지 마, 모모. 너답지 않아. 국가는 사람들이 합의한 영역에서 처벌권한을 넘겨받아 법으로 정한 거라고. 재판이라는 제도로 최대한의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백토, 나다운 게 뭔데? 재판 역시 사람이 하는 거라 완전하지 않아. 그럼 키라가 행하는 정의와 다를 게 뭐가 있지?”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주도하는 처벌을 믿지 못해 사적인 복수를 행할 수 있어. 그건 이해해,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해서라도 보상받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법 제도와 한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봐 주관성이 많이 들어간 사적 제재는 그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어.

 

키라가 옳다고? 결국에는 키라가 죽이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은 전부 키라 혼자서 결정한 거잖아. 그럼 만에 하나라도 무고할 오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키라가 죽인 사람을 봐. 김지석, 앙헬, 펙스 회장들. 기존의 제도가 그들을 제대로 처벌했어? 그렇지 않아. 이 시대에 필요한 정의는 키라가 세울 수 있어!”

 

모모의 말을 들은 백토는 반박을 하려다가 순간 모모의 마법봉을 보고 흠칫 놀랐다. 순수한 꿈과 희망에서 힘을 얻는 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잘못했다가는 모모가 타락할 수도 있었기에 백토는 모모를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구속 마법을 준비했다.

 

“모모! 미안해!”

 

하지만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파트너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모모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모모는 카타나를 재빠르게 휘둘러 백토의 구속 마법을 끊었다. 백토가 매지컬 전기톱으로 카타나를 튕겨내자 둘 사이에는 새빨간 스파크가 튀었다.

 

“...미안해, 백토. 난 키라가 옳다고 생각해.”

 

“그러지 마. 가지 마, 모모!”

 

모모는 백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뒤 이동 주문을 사용해 모습을 감추었다. 백토는 입자화되어 사라지는 모모를 잡으려고 했으나 이미 모모는 인간계로 이동한 후였다.

 

“모모... 네가 그런 선택을 할 줄은...

 

그래, 이게 전부 키라 때문이야. 자신만이 정의라고 믿는 오만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호도하고 있어. 반드시 내 손으로 잡을 거야!”

 

백토는 몸을 결의를 다지며 무대 중심에 섰다. 배경음악에 맞춰 백토는 연습한대로 빼어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뮤지컬 데스노트 게임의 시작- 김준수 (5키 up).m4a



“분노는 마음을 비추는 투명한 유리창

 

정의를 외치는 목소린 공허한 말장난

 

순교자 행세를 해봤자 너는 위선자야

 

품 속엔 거짓된 십자가뿐

 


 

어둠에 가려진 두 눈은 볼 수가 없는데

 

알지도 못하는 세상을 멋대로 색칠해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잘난 척을 하면서

 

구세주 행세를 하고 있어

 


 

내가 상대해주지 게임 한 판 즐겨볼까

 

그림자를 조심해 밟힌 순간 죽게 되는 게임이야

 


 

거창한 이상을 내세운 건방진 멍청이

 

생명을 가지고 놀면서, 하! 착각에 빠졌어

 

세상에 겁날 게 없겠지 신이 된 것처럼

 

너에게 지옥을 보여줄게

 


 

숫자들과 데이터 그래프를 분석해서

 

이 세상의 규칙을 뼈저리게 알려주지

 

끝을 알 수 없는 게임, 이제 시작하는 거야

 

인정사정 없는 게임, 주사윈 던져진 거야

 


 

시작할까!”



 

 

백토의 노래가 끝나자 다시 배경이 어둠에 빠졌다. 객석에서는 평소와 다른 공연에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흐레스벨그는 모모의 연기가 훌륭했다며 뱅뱅이 안경을 쓰고 좋아했고, 칸과 아스널은 뮤지컬도 즐길만하다며 아직까지는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난이도가 높은 부분이었는지 더치걸과 코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무슨 내용인지 속닥거렸으나 덴세츠 엔터테인먼트는 그 상황까지 예측하고 각본을 썼었다.

 

밝아진 무대로 비 내리는 거리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와중에 모모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힘이 빠졌는지 터덜터덜 걷는 모모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亭子)가 나오자 그 안에 잠시 앉았다.

 

“후우...”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자신의 처지를 보던 모모는 옷에 스며든 물기부터 짜냈다. 물을 잔뜩 머금었던 옷은 그녀의 압력이 가해지자 한 움큼 가득 물을 뱉어냈다. 모모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넋두리를 시작했다.

 

“마법소녀는 뽀끄루 대마왕이 보내는 악의 무리에 맞서 싸워야 해. 그 대신 나쁜 사람이 있더라도 어둠의 힘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면 공격할 수 없어. 그게 마법소녀와 인간의 계약이야. 인간이 스스로 악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마법소녀는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이니까.

 

하지만 정말 나쁜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도 혼내주면 안 되는 걸까? 죄 없는 사람을 기분이 나쁘다고 공격하는 사람도 뽀끄루 대마왕과 관련이 없으면 마법소녀는 그냥 지나쳐야하는 걸까? 그럼 마법소녀와 인간의 계약은 대체 왜 있는 거지?”

 

모모의 말에 아이들은 그제야 연극의 주제가 이해가 되었는지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지자 모모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사를 이어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쁜 사람을 혼내줄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다면, 정의는 승리하는 걸까? 난 잘 모르겠어. 나쁜 사람들을 심판하는 키라야 말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모모는 고개를 돌려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추적거리며 온 세상을 적시는 비가 세상의 모든 악을 씻어 가길 바라며 그녀는 모모 스티커를 바라보았다.

 

“내가 키라에게 칭찬을 해도 되는 걸까?”

 

혼란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몸이 마르길 기다렸다. 그녀는 그러는 사이 자신의 등에서 조금씩 작고 검은 날개가 돋아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홀로그램은 그녀의 모습을 지나쳐 리마토르의 방을 비추었다. 그는 방 안에서 데빌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펜을 들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그의 앞에 골타리온 XIII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네. 대마왕님의 선물은 어땠는가?”

 

“아주 쓸 만해. 상대방의 행동을 조종하는 것만으로 그칠 수 있으면서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니. 데빌노트는 완벽한 도구야.”

 

“호오... 벌써 이렇게나 많은 이름을 적은 건가. 너는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군.”

 

“글쎄, 난 그저 처벌해야만 하는 악인들을 제거하는 것뿐이야. 내가 세운 기준에 따라 사형/영구장애/중상해/경상해를 나누어서 처벌을 내릴 뿐이지.”

 

"훌륭하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가? 게다가 이 키라라는 건 또 뭐지?"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아. 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굉장히 신중한 결정을 내리거든. 그런 나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Killing Identity of Real Assasin. 진짜 암살자가 가진 죽음의 인격이랄까."


“크하하하하하! 아주 재밌어. 대마왕님께서 원하시는 광경이군. 자신을 정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니!”

 

골타리온 XIII세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시작했다. 야성미 넘치는 굵은 목소리가 선율을 따라 어우러졌다.




“어떤 자극이나 변화도 없는 죽음같은 권태로움

 

가끔 여기 내려와서 인간들을 구경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멀쩡했던 놈은 없었어

 


 

키라, 키라, 이건 뭐야

 

가짜 구세주 키라, 키라

 

숨겨진 그의 정체, 그냥 어린 아이

 


 

우리 사신들의 머리 속에는 야심이나 꿈은 없어

 

어떤 철학적인 질문도 없어 죽음같은 권태로움

 

이제서야 봐줄만한 구경거릴 만났어

 

칼날같은 너의 심판 모두 헤매이며 쇼한다 

 


 

키라, 키라, 악마인걸까

 

신일까, 키라, 키라

 

숨겨진 그의 정체, 그냥 너란 녀석

 


 

너 혼자 이세상을 바꾼 줄 안다면

 

진실을 알려주지 사실 바뀐 건 네 이름뿐이야

 

그렇지!

 


 

키라, 키라, 넌 구세주가 아니야

 

키라, 키라, 멍청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야!”


노래를 마친 골타리온 XIII세는 리마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얼굴임에도 리마토르는 골타리온 XIII세가 흡족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대마왕님께서 널 만나고 싶어 하신다. 다음에 널 찾아올 때는 모시고 오도록 하지. 인간 주제에 대마왕님을 알현하는 영광을 뼛속 깊이 느껴라."

 

“이거 아주 고맙군. 정의를 외치지만 철학쟁이의 나부랭이로 여겨지던 나를 이렇게 인정해주다니.”

 

리마토르의 말에 골타리온 XIII세는 다시 호탕하게 웃으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리마토르는 데빌노트를 덮고 기지개를 폈다. 굳은 어깨와 목을 풀어주던 그는 벌써 밤 11시가 되었음을 확인했다. 데빌노트를 받은 후, 며칠 동안 키라 활동을 하느라 시간관념이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목이 마르는데 맥주라도 마실까.”

 

그는 쌉쌀한 알콜의 맛을 떠올리며 가볍게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키라 생활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오간 조용한 거리였지만 데빌노트를 손에 넣고 난 후로는 자신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에 거리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고양된 감정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상하다, 온 세상이 다 아름답게 빛나고 거리에는 환한 미소 넘치네~”

 

편의점으로 향하는 중, 그는 아파트 앞에 있는 정자를 보았다. 흰 옷을 입은 어떤 여인이 그곳에 쓰러진 걸 본 리마토르는 헐레벌떡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봐요, 괜찮으세요!”

 

그는 여인이 숨을 쉬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호흡과 맥박은 정상이었고 리마토르가 그녀를 몇 번 흔들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으으... 누구시죠...?”

 

“아, 정신이 드세요? 잠시만요!”

 

리마토르는 그녀를 잠시 두더니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물을 사왔다. 그는 그녀에게 물을 먹이면서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했다.

 

“자... 그러니까 모모 씨라고 하셨죠? 길거리를 걷다가 기절하셨다고요?”

 

“네, 비를 피하려고 왔는데 그만 정신을 잃었어요.”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참... 구급차 안 불러드려도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알겠어요. 몸 조심하세요.”

 

리마토르는 별 특이한 사람을 다 본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모모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순수한 정의감을 보며 중얼거렸다.

 

“리마토르라는 분, 굉장히 순수한 정의의 마음을 가지셨네. 저런 분이 있을 줄은 몰랐어.”

 

모모는 왠지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도 밤을 보낼 곳을 찾아 떠났다.

 

집에 돌아온 리마토르는 자신의 거실보다도 먼저 골타리온 XIII세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나갔던 그가 몇 분 사이에 다시 돌아와 있자 리마토르는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대마왕님께서 널 바로 보고 싶어 하시는군. 고개를 조아려라! 위대하신 뽀끄루 대왕님께서 강림하신다!”

 

골타리온 XIII세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실에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차더니 바닥에 검은 포탈이 열렸다. 옥좌에 앉은 뽀끄루가 공중으로 떠올라 그를 거만한 눈길로 쳐다보자 리마토르도 예우를 갖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네가 리마토르라는 인간이냐?”

 

“그렇습니다.”

 

“...마법소녀와 접촉했군. 그것도 방금 전에.”

 

“네?”

 

뽀끄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째려봤다. 그 말에 골타리온 XIII세가 바로 대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내리치려고 했으나, 그의 기억을 투시해서 읽은 뽀끄루는 손가락을 움직여 골타리온 XIII세를 제지했다.

 

“그 녀석이 마법소녀인줄도 모르고 만났다니, 이거 아주 재밌는 걸?

 

내가 하사한 데빌노트를 이용해서 인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법소녀 녀석들이 손도 못 쓰고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주 즐거워!

 

그래서 네게 친히 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감사히 여기도록.”

 

“알현의 기회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리마토르는 뽀끄루의 눈치를 살피며 정중하게 답했다.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든 뽀끄루는 그의 몸에서 읽은 마법소녀의 흔적을 두고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고무적인 성과를 낸 너에게 내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주도록 하마.

 

데빌노트는 내 마력의 일부로 만든 것으로, 마법소녀들과는 상극의 성격을 띠고 있지. 그래서 마법소녀들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네가 접촉했던 마법소녀는 힘이 상당히 약해져 있는 상태라서 데빌노트의 영향을 받을 거다.

 

내가 이걸 왜 말해주는지는 잘 알겠지?”

 

“...그 마법소녀를 포섭하라는 뜻이군요.”

 

“잘 알고 있군! 마법소녀 2명 중 1명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남은 하나는 자신의 동료를 공격하지 못할 거야. 그럼 마법소녀들을 해치우는 건 시간문제지.

 

계속해서 나를 즐겁게 해주거라. 아주 큰 상을 내리도록 하지.”

 

뽀끄루는 그 말을 남기고 포탈을 통해 다시 마계로 돌아갔다. 리마토르는 뽀끄루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골타리온 XIII세에게 물었다.

 

“골타리온, 데빌노트에 적용가능한 시간은 최대 몇 시간이라고 했지?”

 

“이름을 쓰고 지우지 않으면 3일 안에 사망한다.”

 

“그럼 사망하기 전에 이름을 지우고 다시 쓰면?”

 

“그래도 3일이다. 시간은 소급 적용되지 않아.”

 

“그렇군. 좋아, 어디 한 번 해볼까?”

 

그는 데빌노트를 펴더니 모모라는 이름을 적었다. 이름 옆에 적어 내려가는 상세한 시나리오는 그가 반드시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날, 리마토르는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역의 벤치를 둘러보았다. 데빌노트에 적은대로라면 모모가 벤치 중 하나에 앉아있을 터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역 끝부분에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 모모 씨 아니세요?”

 

“...리마토르 씨?”

 

노트에 시나리오를 적어둔 덕분인지, 아니면 그녀가 진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몰랐으나 리마토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시지는 않으신 거죠?”

 

“네, 괜찮아요. 퇴근하는 길이신가 봐요.”

 

“오늘도 일하고 오는 길이죠, 뭐. 모모 씨는 여기서 뭐하고 계셨어요?”

 

“아... 잠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럼 이거 죄송하네요, 저 때문에 지하철을 놓치신 건 아니죠?”

 

“괜찮아요. 다음에도 지하철은 또 오니까요.”

 

“이거 죄송합니다. 들어가세요!”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는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1일차 시나리오와 100% 동일한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그녀에게 데빌노트가 확실한 영향력을 발휘함을 확인한 그는 앞으로 이틀 간 공을 들이기로 했다.

 

2일차. 리마토르는 으슥한 새벽에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산 그는 취식대로 향했다. 그곳에는 라면을 먹고 있던 모모가 있었다. 리마토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어, 모모 씨!”

 

“리마토르 씨?”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그는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으며 친근함을 표했다. 노트에 적어둔 시나리오 덕분에 그는 상황이 수틀릴 염려를 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대화를 주도할 수 있었다.

 

“새벽인데 안 졸리세요?”

 

“전 밤잠이 없는 편이어서요. 리마토르 씨는요?”

 

“논문을 쓰다보니 오늘 밤은 왠지 알콜이 당겨서요.”

 

“논문이요? 대학원생이신가요?”

 

“대학원생은 아니고 교수입니다. 부교수 단 지 얼마 안 된 초보죠.”

 

“그래도 교수면 정말 대단한 거죠! 무슨 과 교수신가요?”

 

“철학과에요. 많이 마이너하죠?”

 

“우와, 철학이라니 멋져요! 어려운 학문을 깊이 있게 탐구하신 거잖아요.”

 

“하하, 그리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안 그래도 요새 키라의 윤리적 정당성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데, 소재가 소재다보니 머리가 지끈지끔 아프네요.”

 

리마토르는 웃으면서 진짜 주제를 흘렸다. 그의 말을 들은 모모는 표정이 미묘하게 굳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괜한 의심을 사서 좋은 건 없었기에 그는 맥주를 마시며 답을 할 상황을 피했다.

 

“리마토르 씨는... 키라가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저요? 음... 일단은 옳다고 생각해요.”

 

모모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당당히 답했다. 자기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말은 이미 숱하게 생각해두었으나, 막상 말로 꺼내려고 하니 어색하게 다가왔다.

 

“가급적이면 법에 따라 모든 범죄자들이 죗값을 치르는 게 좋죠. 하지만 지금 그게 제대로 되는 상황이 아니고, 오히려 가진 자들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사회적 특권을 내세워서 도망치죠. 그런 사람들에게 인과응보를 느끼게 해줄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모모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그렇네요. 그럼 키라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까요?”

 

“글쎼요... 그래도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다는 낫겠죠.”

 

“그럼 키라를 만났을 때 말해주고 싶네요. 당신을 돕고 싶다고요.”

 

“하하, 키라는 모모 씨처럼 훌륭한 조수를 둬서 좋겠네요.”

 

리마토르는 거기까지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집에 돌아가 마지막 한 줄을 수정했다.

 

“죽일 이유가 없어졌어. 확실하게 포섭할 수 있으니까.”

 

그는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내일이면 그녀는 완벽한 그의 편이 될 예정이었다.

 

다음 날, 데빌노트에 모모의 이름을 적은지 3일이 되던 날. 그는 일부러 자신의 대학 근처로 자리를 잡았다. 점심시간 때 식사를 마치고 들어가다가 만났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후식으로 커피를 사겠다는 말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나리오에 따라 이번에도 모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마토르 씨!”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모모가 먼저 그를 불렀다. 리마토르는 길을 가다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상황의 연기를 무리 없이 해내며 인사를 건넸다.

 

“모모 씨,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그냥 산책하다가 들렀는데 리마토르 씨가 여기서 교수로 일하실 줄은 몰랐어요.”

 

“전 또, 혹시 제 뒤를 캐신 줄 아셨죠. 점심 드셨어요?”

 

“네, 점심은 먹었어요.”

 

“그럼 커피 한 잔 하시죠.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가 사겠습니다.”

 

“정말요? 감사해요!”

 

둘은 자연스럽게 카페로 향했다. 점심시간의 카페인만큼 카페인을 보충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리마토르는 교수 우대 혜택을 통해 순서를 앞질러 제일 먼저 커피를 받았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둘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어제 뉴스 보셨어요? 키라가 또 범죄자를 제거했더라고요.”

 

“맞아요. 이번에는 살인 전과 11범이었죠?”

 

“바이오로이드의 인권을 무시하며 살해를 저지른 놈이니 죽어도 쌌어요.”

 

리마토르는 그리 말하며 모모의 동향을 살폈다. 이 말 뒤에 모모가 자신의 말에 긍정하는 반응을 보이면 최종국면으로 넘어가고, 부정하는 반응을 보이면 다음 수를 두어야 했다. 그가 그녀의 입에 시선을 집중할 때 모모는 그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 놈들을 심판하라고 키라가 있는 거겠죠.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긍정의 반응. 리마토르는 속으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방법이야 있겠죠. 그를 직접 만나시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시려고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래야 정의가 실현되니까요.”

 

“하하, 그 포부가 아주 보기 좋네요. 모모 씨가 좋은 배짱을 보여주셨으니 저도 하나 말씀드릴게요.”

 

그는 그러면서 손으로 귀를 갖다 대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모가 한쪽 귀를 기울이자 그는 오직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말했다.

 

“제가 키라에요.”

 

정적. 그의 말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그가 계산한 내용의 일부였다. 처음부터 맹목적으로 믿으면 이름을 지워 데빌노트의 효과가 끝난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그는 그녀의 내면을 서서히 자신으로 침식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저 진지합니다. 제가 예언 하나 해볼까요? 오늘 저녁 6시에는 테마파크 C구역 건설을 지시한 계열사 사장이 죽을 거에요.”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모모는 여전히 장난치는 거냐며 말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보려는 모습에 라마토르는 그녀가 투시를 충분히 마칠 때까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정의를 행할 수 있어요.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범죄자들을 저와 모모 씨, 둘이 잡는 거라고요.

 

평화로운 세상, 아름다운 세상, 올바른 세상이 우리 손으로 만들 미래입니다. 오직 모모 씨와 저만 할 수 있어요.”

 

그는 확고하게 뜻을 전달하기 위해 그녀의 귀에 대고 말을 추가로 해주었다. 그 말까지 들은 모모는 한참동안 고민에 빠졌다. 리마토르는 아주 조금만 더 밀어주면 자신의 편으로 확실히 넘어올 그녀에게 머릿속을 고르고 골라 말했다.

 

“정의가 우리 손 안에 있어요.”

 

“...!”

 

그 말에 모모는 완전히 함락 당했다. 마법소녀로서 정의를 행하지 못하는 모순 때문에 괴로워했던 그녀가 정의를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다니, 이는 그녀가 스스로 고민하던 콤플렉스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녀는 키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의 말을 믿겠어요. 저를 조수로 써주세요.”

 

“저를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마토르는 감사 인사를 남기고 강의에 들어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카페를 나와 연구실에 들어간 그는 데빌노트에서 모모의 이름을 지워 없애면서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야!”

 

그의 계획은 적중했다. 두 명의 마법소녀 중 한 명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는데 성공한 이상 남은 한 명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제약이 걸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의를 관철시킬 수 있음에 그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C구역 건설을 지시한 계열사 사장의 이름을 데빌노트에 적었다.

 

한편, 모모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뽀끄루와 연관되지 않더라도 죄를 지은 악인들에게 벌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그녀가 정의를 행하는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빨리 뛰어 온몸의 피가 점점 더 빨리 흐르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녀의 몸은 어둠에 물들었다.

 




“이, 이건...!”

 

등에 돋아난 한 쌍의 날개. 검은 시스루로 도배된 고딕 드레스와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문양. 과거 뽀끄루 대마왕에게 세뇌 당했을 시절의 모습이었다.

 

“나... 타락하고 만 거야? 이럴 수가...”

 

정의를 행하려고 한 자신이 타락했다니, 모모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타락의 조건을 뇌까리며 생각을 뒤집었다.

 

“마법소녀가 타락하는 조건은 어둠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와, 모두의 마법소녀가 아닌 한 사람만의 마법소녀가 되었을 때.

 

뽀끄루 대마왕과 관련되지 않은 악에 맞서는 게 어둠의 힘이란 거야? 그렇지 않아. 악에 맞선다면 누구나 정의야.


지금 이 세상에 진정한 정의를 행하는 건 키라 뿐이야!”

 

모모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악인에게 평등하게 처벌을 내려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건 키라 뿐이라는 굳건한 믿음이었다. 동시에 직감했다. 자신은 키라만의 마법소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키라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은 리마토르에게서 느껴졌던 순수한 정의감으로 타파되었다. 그녀에게 키라는, 리마토르는 정의였다.


 

모모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자신을 묶고 있던 족쇄가 풀린 기분에 그녀는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러 길가로 나섰다. 새로 생긴 날개를 펴서 날아오르려는 순간, 충격에 빠진 백토가 그녀를 불렀다.

 

“모모...?”

 

있을 수 없는 일을 본 것처럼 백토의 눈동자는 수축하고 심하게 떨렸다. 모모는 백토를 보며 싱긋 웃더니 발랄할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백토!”

 

“모모! 너 그 모습... 타락한 거야...?”

 

“타락? 아니지, 진정한 정의를 행할 수 있게 된 거지.”

 

모모의 말에 백토는 으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더니 분노에 찬 목소리로 반박했다.

 

“웃기지 마! 뽀끄루 대마왕과 같은 어둠의 힘이 어떻게 정의란 거야!”

 

“백토, 뽀끄루 대마왕과 관련된 일에만 움직일 수 있는 마법소녀가 진짜 정의일까? 어둠의 힘과 관련되지 않더라도 악을 행하는 이들이 판치는 걸 두고만 보는 건 정의가 아니야.

 

키라를 만나고 깨달았어. 빛의 마법소녀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던 거지. 그러니 이건 타락이 아니라 각성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겠어?”

 

백토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겠다며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꺼내들어 휘둘렀다. 모모는 카타나를 꺼내 공격을 받아치면서 외쳤다.

 

“그래, 난 틀리지 않았어!”

 

“웃기지 마! 내가 널 막겠어!”

 

백토는 광선 마법을 모모에게 발사했다. 모모는 방어 마법으로 막아내더니 폭발 마법을 시전했다. 백토는 방어 마법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폭발을 역이용하여 표창 마법으로 마법을 전환해 모모에게 던졌다. 모모는 가소롭다는 듯 카타나로 표창 마법을 두 동강내며 입을 열었다.

 

“백토. 너처럼 나약한 정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렇지 않아, 우리에게는 지켜야 하는 선이 있어. 그 선을 넘는 순간 돌아오지 못해!”

 

“선? 그런 거에 얽매여 있으니까 세상에 악인이 넘쳐나는 거야!”

 

“...모모, 나에게는 믿음이 있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지. 선인과 악인,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선을, 정도를 따라야 해. 아무리 느슨해져도 절대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백토는 말을 마치자마자 구속마법을 전개했다. 모모를 제압해서 타락 이전으로 되돌릴 생각이었으나 모모는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백토에게 폭발마법을 시전했다.

 

“크윽-!!”

 

모모가 구속마법을 무시하고 바로 자신을 공격할 줄은 몰랐기에 백토는 무방비하게 공격에 노출되었다. 폭발을 정통으로 맞은 백토는 썩은 나무처럼 쓰러졌다. 모모는 마지막 자비라며 치유마법을 걸어주고 한 마디를 남겼다.

 

“넌 너무 물러.”

 

“모모...”

 

상처가 치료되었지만 백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치유 마법은 육신의 상처는 치료해줄지언정 마음의 상처까지는 보듬어주지 않아서였다. 백토는 안간힘을 써서 상체만 일으키고 중얼거렸다.

 

“...네가 지금 정의라고 믿어도, 키라는 잘못된 존재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니 자신이 신이라도 된 줄 알고 착각하는 멍청이라고.

 

진실은 변하지 않아. 내가... 반드시, 반드시 키라의 정체를 밝혀내서 널 구하겠어!”

 

백토는 목소리에 의지를 가득 채워 소리쳤다. 그 모습은 흡사 세상에 자신의 뜻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에 맞춰 백토는 노래를 시작했다.

 



데스노트 뮤지컬-변함없는 진실 6키 up.m4a



“밝은 태양처럼 빛나던 진실들이 빛을 잃고

 

의심의 여지가 없던 사실들조차 무너진다

 

눈앞에서 증발해 사라져간다

 

이것이 현실인가 혹은 허상인가

 


 

나의 무의식은 몸부림치고 있다 소리친다

 

헛된 망상들과 현실이 뒤엉킨다 섞인다

 

나 스스로도 혼돈에 빠져버렸어

 

모두 미궁속에 갇혀버렸다면

 


 

그래 좋아, 인정하지, 이 모든 걸

 

말도 안 되는 현실들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변함없는 진실만은 포기 못해

 

찾아낸다

 


 

작은 이물질이 슬며시 침투하여 증식을 하면

 

차츰 거대해져 본체를 밀어내고 정복해버려

 

낯선 이물질이 정복한 광란의 자리

 

본질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았네

 


 

그래 좋아, 인정하지, 사신의 존재

 

하지만 신은 삶의 의미 판단하지 않아

 

삶과 죽음 그 의미를 판단하고 따지는 건

 

인간이지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포착해

 

사느냐 죽느냐 갈리는 경계선

 


 

그래 좋아, 인정하지, 이 모든 걸

 

어둠을 뚫고 어둠 너머 저 편에서

 

오직 하나 변함없는 그 진실이 떠오른다

 

사신의 그림자 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너의 존재!”


 

백토의 노래가 끝나자 무대의 전등이 모두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홀로그램은 어둠을 뚫고 리마토르의 집에 그와 모모가 함께 있는 장면을 비추었다. 리마토르는 모모에게 커피를 타주며 말했다. 그녀를 조수로 받아들인 그는 편하게 말을 놓았다.

 

“내가 키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데빌노트 덕분이야. 이름을 적는 자는 모두 죽게 되고, 죽는 순간의 상황을 조작할 수 있지. 마침 6시니 TV나 한 번 볼까?”

 

TV를 켜자 6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앵커는 긴급속보라는 자막을 띄우고 어느 건설사 사장의 담화를 발표하고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를 살처분하는 곳을 자신이 만들라 지시했으며, 그 죗값은 죽음으로 치르겠다는 말이 사장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키라의 심판’이라는 자막이 달렸다. 말을 마친 사장이 권총을 입에 대고 쏘려고 하자 주변 경호원들이 뛰어들어 막았다. 건장한 경호원 여럿이 능숙한 솜씨로 권총을 후려쳐 손에서 떼어냈으나 권총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발사되어 그의 머리를 관통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기에 현장에 나가있던 아나운서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말하는 순간, 키라의 심판이 이뤄졌습니다!”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본 모모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데빌노트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네요...

 

이런 물건은 대체 어디서 구하신 거에요?”

 

“길가에 떨어진 걸 주웠어.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고 김지석의 이름을 적었는데 정말 공책에 적은 그대로 이뤄지더라. 

 

그 순간에는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두려웠지만 곧 깨달았어. 이것만 있으면 세상에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게 가능하겠더라고.”

 

“흐음... 혹시 제가 이걸 만져봐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모모는 뽀끄루가 개입한 것이 아닌가 싶어 공책을 만져보았다. 어둠의 마력이 검출되면 이 모든 것이 뽀끄루가 짠 판이라는 게 증명되었으나, 데빌노트에서는 아주 적은 어둠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중립적인 마력이 느껴지는 물건에 모모는 신기함을 느꼈다.

 

“이거 놀라운데요? 빛의 힘도 어둠의 힘도 느껴지지 않은데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니... 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이걸로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리마토르는 데빌노트를 펴고 펜을 들었다. 만약을 대비해 모모의 페이지는 찢어서 태워버렸고, 자신의 순수한 정의로 공책의 마력을 중화하고자 한 방법이 모두 효과를 발했다. 그는 오늘은 누구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릴지 생각해보자며 모모에게 말했다.

 

“음... 이 사람은 어때요? 바이오로이드 11명을 성적으로 학대한 걸로도 모자라 스너프 필름까지 찍었대요. 그런데도 형량이 고작 5년 밖에 안 나왔네요.”

 

“좋아. 오늘은 이 놈을 시작으로 딱 6명만 더 심판하자.”

 

“하루에 7명밖에 안 죽이는 거에요?”

 

“데빌노트의 진정한 위력은 범죄를 예방하는 데 있어.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전부 죽거나 다쳐서 죽음에 이르는 걸 보고 사람들은 키라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자연스럽게 범죄를 저지르려는 생각을 바꿔서 정의를 준수하는 거야.

 

키라의 심판을 받아 죽는 누군가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그 상징성만 심어준다면 하루에 몇 명을 죽이든 중요치 않아. 내가 범죄자들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을 위주로 처리한 것도 그 때문이야.

 

이제 웬만한 기업 총수 범죄자들은 다 지옥으로 가서 누구를 심판해야 고민하고 있었는데 네 덕분에 좋은 목표를 찾았네. 고마워, 모모.”

 

“아니에요. 정의를 행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요.”

 

모모가 배시시 웃는 모습에 리마토르는 한 번 그녀를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공책 한 장을 찢어주며 말했다.

 

“좋아, 네게 정의를 행할 기회를 줄게. 여기에 네가 심판하고 싶은 악인들을 마음대로 적어서 내일 이 시간에 내게 가져와줘.”

 

“데빌노트의 힘을 제게...? 고마워요! 꼭 그렇게 할게요!”

 

모모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리마토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덧붙였다.

 

“잊지 마. 누가 정의를 행하는지.”

 

 

리마토르가 말을 마치자 홀로그램 무대가 한쪽으로 넘어가며 백토가 나왔다. 백토는 멀리서 모모의 흔적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모모가 키라의 편에 넘어갔다면 둘이 함께 활동할 확률이 높아. 그렇다는 건 모모를 잡는 순간 키라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는 거지. 키라의 살해방법조차 추적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모를 반드시 잡아야 해.”

 

백토는 손 위에서 돌아가는 빛의 나침반을 따라 길을 걸었다. 마침내 리마토르가 머무르는 아파트를 발견한 백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곳에 진실이 있는 건가.”

 

백토는 무력 충돌이 있으리라 예상하며 오른팔에 마법진을 둘렀다. 실내에서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휘두를 공간이 부족할 수도 있었기에 체술로 끝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 백토의 기척을 모모가 읽지 못한 서도 아니었다. 모모는 지근거리에서 느껴지는 백토의 기운을 읽고 씨익 웃었다.

 

“백토가 오고 있어요.”

 

“백토?”

 

“저랑 과거부터 함께한 동료였어요. 이제는 걸림돌이죠.”

 

“또 한 명의 마법소녀가 백토였군. 꼬리를 밟힌 건가?”

 

“걱정 마세요. 이미 백토를 한 번 쓰러뜨린 경험이 있으니까요.”

 

모모의 말에 리마토르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한 번 패배했음에도 다시 덤벼든다는 건 백토가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한 대비를 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을 빨리 뜨는 편이 충돌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판단했다.

 

“아니. 지금 여기를 떠야 해. 괜히 분쟁의 씨앗을 남기는 건 좋지 않아.”

 

“뭐야, 지금 제가 질까 걱정하시는 거에요? 절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정의집행일 뿐이죠.”

 

“흠...”

 

리마토르는 고민했다. 이곳에서 백토를 확실히 제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모와 달리 빛의 힘이 약해지지 않은 백토는 데빌노트의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 순수한 무력으로 처리해야했다. 그 역할을 모모가 제대로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던 그는 곧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모모, 어떤 마법을 증폭하는 마법도 있어?”

 

“증폭 마법 말씀하시나요? 당연히 있죠. 합체기에 주로 쓰인답니다.”

 

“그럼 데빌노트에 담긴 마력을 증폭할 수도 있어?”

 

“아하, 노트에 담긴 마력으로 백토를 쓰러뜨리자는 말씀이군요.”

 

“그래. 데빌노트에 이름을 적으면 백토도 별 수 없겠지.”

 

“좋아요. 한 번 해보죠.”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모모는 그가 찢어준 노트 조각을 잡더니 기운을 집중했다. 몸 안을 떠도는 어둠의 마력을 모아 노트의 마력과 공명시키던 모모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노트 조각에서 스파크가 튀다가 급기야 모모의 바닥 주변을 검게 태워버리자 리마토르는 모모를 다급하게 불렀다.

 

“모모!”

 

“하아... 하아... 이거 만만한 일이 아니었네요...”

 

“괜찮아?”

 

모모는 숨을 고르며 자신의 주변에 새겨진 둥근 원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리마토르의 모습에 약간 희열을 느끼며 모모는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제 마력과 노트의 마력이 가진 파장이 안 맞아요. 그래서 힘을 증폭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노트의 마력을 복사해서 마법진으로 구현하는 데는 성공했어요.”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이야?”

 

“데빌노트에 그냥 백토의 이름을 적으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지만, 백토가 이 마법진 안에 들어온 상태로 이름을 적으면 두 개의 마법이 직렬 연결되어 강한 힘을 발휘할 거에요.”

 

“그렇군. 그거면 확실하겠어.”

 

리마토르는 모모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법진의 크기가 방석 정도로 작은 게 흠이었지만, 어차피 그 안에만 들어오면 백토의 명줄은 끝장이었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모모는 웃으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마법소녀가 승리를 갖고 올게요. 그러니 그때까지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으세요.”

 

“뭐? 그건 무슨 말-”

 

모모는 손가락을 까딱하여 순간이동 마법을 그에게 걸었다. 리마토르가 어둠에 휩싸여 다른 곳으로 사라지자 모모는 자신을 찾아온 불청객을 마주할 준비를 했다.

 

“어서 와, 백토.”

 

그녀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철문이 붉은 열기와 함께 깔끔하게 절반으로 토막 나 열리며 백토가 들어왔다. 백토는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모모를 향해 겨누며 말했다.

 

“모모, 데리러 왔어.”

 

“글쎄? 이번에도 꺾이는 건 너야.”

 

모모는 말을 마치면서 카타나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카타나에 검은 기운을 담아 휘두르자 검의 파동이 백토에게 날아들었다. 백토는 배면뛰기로 공격을 피하면서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휘둘렀다. 그러나 복도의 폭이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보다 좁았기에 공격보다 날아오는 모모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더 가까운 모양새가 되었다. 백토는 시간을 끌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오른손에 두른 마법진에 마력을 모았다.

 

“하지만 그 전에-”

 

백토는 구속마법을 이끌어내 모모를 묶으려고 했다. 모모는 그런 백토에게 냉소를 날리며 말했다.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하려고? 학습능력이 없나 봐!”

 

모모는 그때처럼 구속마법을 무시하고 폭발마법을 터뜨리려고 했으나 백토가 그 행동을 예측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백토는 자신이 먼저 구속마법을 해체해 모모가 자신 쪽으로 끌려오게 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반동으로 모모는 폭발마법의 좌표를 잘못 설정하여 백토를 빗겨 맞혔다. 백토는 자신의 옆에서 일어난 폭발의 흐름을 타고 오른손에 모은 마력을 개방했다.

 

“두 번은 안 당해!”

 

백토의 오른손에서 빛의 힘이 뿜어져 나오는 동시에 그녀의 주먹이 모모의 얼굴을 강타했다. 상극의 힘과 물리적인 공격이 겹친 모모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끄으윽...”

 

“많이 아플 거야. 빛의 힘을 최대한 많이 응축한 거니까.”

 

백토는 손을 움직여 구속마법으로 모모를 꽁꽁 묶었다. 모모를 끌고 가려 발걸음을 옮기던 백토는 자신의 발밑에 새겨진 검은 마법진을 보았다.

 

“음? 또 무슨 짓을 꾸미는-”

 

“잘가, 백토.”

 

모모는 백토가 마법진에 올라선 틈을 타서 손 안쪽에 구기고 있던 데빌노트에 백토의 이름을 적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로 글자를 쓴 모모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백토는 아무런 이상도 없는 자신을 보며 그녀가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녀에게 꿀밤을 먹였다.

 

“쓸데없는 짓 그만해!”

 

“어?! 이거 왜 안 먹히는 거야!”

 

예상과 다른 상황에 당황한 모모가 몇 번이고 이름을 다시 적었지만 백토에게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토는 모모에게 꿀밤을 한 대 더 먹여준 뒤 노트 조각을 뺏었다.

 

“이게 대체 뭐길래 그래?”

 

백토는 그녀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보고자 노트에 빛의 힘을 집중했다. 그 순간, 노트 조각에서 불이 피어오르더니 그대로 타버렸다. 어둠의 마력이 빛의 힘에 정화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본 백토는 그대로 표정이 굳었다.

 

“어둠의 마력...? 그럼 뽀끄루가 키라와 연관이 되어있다는 거야?!”

 

백토는 다급히 모모를 돌아보았다. 모모는 자신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앙 다물었다. 그녀에게서 충분한 정보를 더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백토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모모. 네가 아는 모든 걸 말해줘야겠어.”

 

백토의 말이 끝나자 무대가 잠시 암전되었다. 불이 다시 들어오자 리마토르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골타리온 XIII세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골타리온 XIII세, 갑자기 왜 찾아온 거야?”

 

“대마왕님께서 알려주셨다. 네가 포섭한 마법소녀가 당했으니 속히 대비하라는 말씀을 전하시라고 덧붙이셨지.”

 

“...그래, 결국 모모가 진 건가.”

 

“그리고 하나 더. 그 마법소녀가 또 다른 마법소녀의 이름을 데빌노트에 적는데 성공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대가로 데빌노트의 존재가 또 다른 마법소녀에게 알려졌다.”

 

골타리온 XIII세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데빌노트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백토가 자신을 추격해올 일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데빌노트에 이름이 적힌 이상 3일만 지나면 백토는 사망할 것이기에, 뒤집어 말하면 3일간 몸을 피할 궁리만 하면 됐었다. 그런 그를 보던 골타리온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왜 포섭한 마법소녀에게 데빌노트의 사용법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은 거지? 보아하니 이름만 적으면 3일 후에 죽는다는 걸 말해주지 않은 것 같은데.”

 

“뭐야, 이제는 사람 마음도 읽는 거야?”

 

“그런 능력은 없지만 그 마법소녀가 데빌노트의 정확한 사용방법을 알았으면 다른 마법소녀를 바로 죽였으리라는 추측 정도는 가능하지. 왜 그러지 않았나?”

 

골타리온 XIII세의 질문에 리마토르는 비릿한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잘 파악했네. 그 이유는 딱 하나, 이용하기 위해서였어. 키라는 한 명만 있으면 돼. 정의를 집행하는 이가 많아질수록 평가기준은 복잡해지고 이해관계가 들어가니까. 모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나를 돕는 조수인 거지, 나와 동등한 지위에서 심판을 같이 하는 키라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를 최선을 다해 ‘도울’ 수 있게 한 거지.”

 

그의 말을 들은 골타리온 XIII세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역시 인간은 재미있군. 대마왕님 말씀이 딱 맞아. 마음대로 잘해봐라. 네가 원하는 세계를 구현하는 건 그것대로 재미있을 테니까. 

 

다만, 너의 정의감이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는 것만 알아두도록.”

 

“허, 무슨 말이야? 내 정의감은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아.”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골타리온 XIII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리마토르는 자신의 확고한 정의를 다시 확인하며 백토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했다. 이내 무슨 수를 떠올린 리마토르는 펜을 들고 데빌노트에 빠르게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홀로그램은 리마토르를 지나 마법소녀들의 공간을 그렸다. 백토는 모모를 십자가에 묶어놓고 심문하고 있었다. 모모가 조금이라도 도망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안대까지 씌워놓았고 영구적인 진술거부 목적으로 혀를 깨물 것을 대비해 제압 마법까지 준비해두었다. 백토는 모모에게 질문을 던졌다.

 

“키라는 어떤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살해한 거지?”

 

“피해자가 아니야! 범죄자지!”

 

그 말에 모모는 발끈하며 답했다. 백토가 웃기지 말라고 윽박지르자 모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가 키라에게 감사하고 있어. 법으로 심판할 수 없는 사회의 악을 없애주었다고.”

 

백토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모모를 보며 자신도 강하게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즉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입으로 꺼냈다.

 

“아무리 정의를 위해서였다고 해도 살인은 살인이야.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놀았다고!”

 

“키라는 신이 아니야!

 

그저 범죄자의 죽음을 결정한 것뿐이라고. 마땅히 벌을 받을 이들에게 합당한 결과를 준 게 어째서 잘못이지?”

 

“제대로 된 시스템과 규칙이 있어. 그걸 깡그리 무시하면서 마음대로 개인이 처벌을 내리는 게 정말 옳아? 각자가 각자의 정의를 주장하면 사회는 필연적으로 무너져 내린다고.”

 

 

배경음악이 깔리기 시작하자 모모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온몸이 구속당한 상태에서도 모모는 뛰어난 가창력을 끌어내서 노래를 시작했다.

 


뮤지컬 데스노트 생명의 가치 가사.m4a


 


“나를 묶어놔도 나를 협박해도

 

나를 짓밟아도 아무 소용없어

 

높은 절벽에서 등을 떠밀어도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 거야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영원히

 

내 사랑을 위한 일이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아

 

이 사랑을 빼앗을 수는 없어 누구라도

 

기억해둬 생명의 가치는

 

사는 동안 사랑했던 만큼의 무게인거야

 

 

나를 가둬놓고 약을 먹여도 돼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소용 없어

 

눈을 가려놓고 나를 고문해봐

 

어떤 고통에도 나는 굴복하지 않아

 

난 분명히 이길 거야 나는 알아

 

내 사랑을 위한 일이라면

 

조금도 두렵지 않아

 

이 사랑을 빼앗을 수는 없어 누구라도

 

기억해둬 생명의 가치는

 

사는 동안 사랑했던 만큼의 무게인거야

 

 

 

노래하고 춤을 추고

 

한숨 쉬는 순간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져

 

이 세상에 내가 사라져도

 

변하는 건 전혀 없어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와

 

누구라도 

 


 

부질없는 생명의 가치는 

 

사는 동안 사랑했던 만큼

 

사랑했던 만큼의

 

무게인 거야-!!”

 

 

모모의 노래가 끝나자 백토는 다시 날카로운 말투로 반박했다.

 

“백토, 잘 생각해. 어느 쪽이 옳은 거지? 키라는 이 세상을 아름답고 안심할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드는 거야. 그 누구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세상, 사랑이 넘치고 어둠도 공포도 없는 세상이라고.

 

그래. 빛으로 가득 찬 세상이지!”

 

모모의 말을 들은 백토는 점점 더 가관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일갈했다.

 

“빛으로 가득 찬 세상? 그럼 우리가 쓰는 이 힘은 뭐지?”

 

“우리의 빛은 어둠의 힘과 관계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어. 정의를 밝히는 마법소녀가 제한적인 정의를 휘두르는 상황이 코미디잖아.”

 

“그렇지 않아! 모든 정의는 검증받아야 해. 우리가 어둠의 힘에 관해서만 개입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정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순간, 정의를 외치는 자들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어. KKK단도 다에쉬도 자신들의 행동이 정의라고 믿은 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어?”

 

“키라는 그런 범죄자들과 달라! 아니, 틀리다고 해야 맞겠지. 처음부터 세워진 정의의 기준에 어긋난 이들을 정의에 부합하는 키라의 비교선상에 세우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모모, 넌 정말 보지 못하는 거야? 키라가 만든 건 진정한 정의가 아니야.”

 

아무리 말을 해도 바뀌지 않는 모모의 모습에 백토는 말이 통하지 않음을 직감하고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말로 알아듣지 못하면 실력 행사에 들어가야겠다며 백토는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에 빛의 힘을 끌어 모았다.

 

“너를 정화해줄게. 빛의 힘을 받아들이고 나면 생각도 맑아지겠지.”


 

백토의 빛이 모모의 몸에 들어오자 모모는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모모의 몸을 잠식한 어둠이 저항했지만 백토가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 붓자 어둠은 서서히 밀려났다. 모모의 날개가 사라지며 다시 마법소녀의 옷으로 돌아오자 백토는 확실한 정화를 위해 더욱 박차를 가했다. 어둠에서 완전히 해방된 모모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모모....!”

 

백토는 탈진 직전의 몸을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에 기대며 모모를 받쳤다. 모모의 체중조차 이기지 못하고 같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백토는 다시 마법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모모를 보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빛의 힘으로 정화될 정도면 아직 완전히 잠식된 건 아니었구나...”

 

“백토... 데빌노트를... 조심... 해... 이름...이 적... 혀...”

 

“뭐?”

 

백토는 모모가 웅얼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데빌노트’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손이 닿자마자 타오른 종잇조각을 떠올렸다.

 

“뽀끄루 대마왕이 만든 도구였던 건가? 그럼 앞뒤가 맞아떨어져. 어둠의 마력이 담긴 도구를 키라가 손에 넣어서 살인을 저질렀다...

 

모모, 키라는 누구야?”

 

“....”

 

백토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모모에게 키라의 정체를 물었다. 그러나 이미 기절한 모모는 더 답을 주지 못했다. 백토는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짜 맞추어보았다.

 

“모모가 아까 있었던 장소가... 맞아, 아파트였어. 그 아파트에 있을 이유는 키라와 관련된 것밖에 없지. 아파트를 조사해보면 키라가 누구인지 특정이 가능할 거야.”

 

백토는 공간절단 마법을 사용하려 마력을 모았다. 그러나 마법은 고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기에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정화 마법에 힘을 너무 많이 썼어...”

 

백토는 체력이 돌아올 때까지 꼼짝없이 자리에 묶이고만 자신을 한탄하면서 자신의 늦은 대응이 키라가 활개 칠 시간만 주는 게 아닌가 우려했다. 하지만 점점 드러나는 키라의 윤곽에 포기할 수 없다는 끈기를 다지며 백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모모를 타락시키고 마음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키라. 거의 다 왔어. 내가 널 반드시 처단하고 말겠어!”

 

 

무대는 이후 반으로 갈라졌다. 왼쪽에는 백토가 키라의 흔적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오른쪽에는 리마토르가 백토의 추적을 피해 키라 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 번이고 스쳐지나가면서도 백토는 좀처럼 리마토르를 잡지 못했다. 마침내 백토가 그를 추적한지 3일째 되던 날, 리마토르는 인적이 드문 폐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그가 시계를 보며 혼잣말을 하자 그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누군가 공장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방문객의 얼굴이 밝아지자 리마토르는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정말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대단하군!”

 

“어제 저녁에 범죄자를 죽이면서 마법소녀에게 남긴 메시지가 진짜였을 줄은 몰랐는데.”

 

백토는 자신을 불러낸 키라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광선 마법을 이용했다. 공장 전체로 빛이 퍼져나가며 어둠이 걷히자 리마토르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그래, 내가 바로 키라다.”

 

“대량살인마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백토는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꺼내들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리마토르는 그런 그녀를 막지 않으며 역으로 자신이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백토는 단 1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와 마주했다.

 

“키라 당신이 뽀끄루 대마왕과 얽혀있는 이상 마법소녀가 개입할 이유는 넘치지.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매지컬 전기톱!”

 

백토는 리마토르를 향해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휘둘렀다. 리마토르를 가로로 토막 내려 했던 매지컬 전기톱은 그를 정확히 비껴나갔다.

 

“뭐?”

 

“왜 그래? 다시 해보라고.”

 

백토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 매지컬 전기톱을 다시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그의 목 앞에서 매지컬 전기톱이 우뚝 멈춰 섰다. 백토는 남아있는 힘을 비틀어 짜내어 전기톱을 전진시키려했으나 그 자리에서 단 1mm도 움직이지 않았다. 리마토르는 웃으며 백토에게 말했다.

 

“소용없어. 모모가 네 이름을 데빌노트에 적은 이상 그 효과는 지속된다고. 넌 종이를 태웠으니 효력이 사라졌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데빌노트에 적힌 이름은 ‘지우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어. 게다가 데빌노트는 이름을 적은 자를 죽기 전까지 조종할 수 있지. 한 번 들어볼래?”

 

리마토르는 품속에서 데빌노트를 꺼내 백토에게 펼쳐주었다. 백토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공책 옆 여백에 쓰인 행동을 눈으로 쫓았다. 리마토르는 친절하게 내용을 또박또박 불러 읽어주었다.

 

“매지컬 백토. 키라를 추적하지만 이틀 동안 그의 정보를 모을 뿐 결정적인 단서는 잡지 못함. 3일째 되는 날 키라의 예고를 받고 폐공장으로 찾아옴. 주변에 방어 마법을 걸어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함. 키라와 대면하여 그를 죽이기 위해 전기톱을 휘두르지만 단 한 대도 맞히지 못하고 그 앞에서 멈춰 섬. 멈춰선 상태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키라의 설명을 들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백토는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그를 추적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키라의 손에서 계획된 일이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토는 그의 말을 부정하려고 매지컬 전기톱을 휘두르려고 했으나 데빌노트에 적힌 대로 그녀의 온몸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 기분이 어때? 정의를 행하려는 이를 정의의 이름으로 방해하다가 죽는 기분은. 마지막 한 줄을 지금 적어주도록 하지.”

 

리마토르는 백토를 조롱하며 펜을 들었다. 그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데빌노트에 글씨를 썼다.

 

“키라로부터 모든 설명을 들은 지 20초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걸로 내 승리다, 잘 가라 마법소녀.”

 

“입 다물어!!!!!!!!”

 

백토는 그에게 격노하며 매지컬 전기톱을 휘두르려 했으나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리마토르는 그녀에게 이제 시간이 많이 안 남았으니 유언이나 남기라고 냉소를 날렸다. 백토는 그를 노려보며 단언했다.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방해하는 이까지 모두 죽이는 너는 신도 정의도 아니야. 그저 악마일 뿐이지.”

 

“그래? 앞으로 9초 남았네. 시간을 세주도록 하지. 6, 5, 4, 3...”

 

심장에 기묘한 감각이 느껴지자 백토는 죽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최후의 단말마를 입 밖으로 터뜨렸다. 그건 하나의 흔적과도 같았다.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

 

백토는 심장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녀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리마토르는 스물스물 웃음을 흘리더니 곧 꾹꾹 억눌러 왔던 모든 웃음을 개방했다.

 

“하하... 크하하하하하!!!

 

이걸로 다 끝났어. 마법소녀가 날 방해할 일은 없어졌고, 시티가드가 수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날 잡을 수는 없겠지. 이제 다시 신세계를 만드는 일을 진행해볼까.”


리마토르는 일부러 백토의 시신을 그 자리에 방치하고 떠나려 했다. 만약 이곳을 찾은 이가 마법소녀의 패배를 본다면 키라가 승리했다는 훌륭한 증거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문으로 향할 때,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음?”

 

뜻밖의 손님에 리마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토에게 끌려갔던 모모가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와 동일한 마법소녀 복장을 입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모, 여기는 무슨 일이야?”

 

“...백토의 흔적을... 쫓았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모모는 체력이 부치는 지 말을 하면서도 헐떡였다. 리마토르는 타락했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돌아온 걸 통해 백토가 무슨 수를 썼을 것이라 추측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정의를 행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걸 치운 것뿐이야. 원래 네가 하려고 했던 일이 아닌가?”

 

“...그렇죠.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뭐가? 정의를 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전 아직도 정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는 게 정의라고 생각했지만, 백토가 말했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정의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고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키라가 행하는 건 올바른 정의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을 도구로 쓰면서까지 정의를 이루려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어디서부터 본 거야?”

 

“백토가 공장에 들어간 직후부터 전부요.”

 

모모의 말에 리마토르는 미소를 지우며 생각했다. 현 상황에서 모모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상, 얼마든지 백토처럼 방해물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다다른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펜을 쥐며 말했다.

 

“그래, 모모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이지.

 

원래 네 역할은 백토를 제거해주는 걸로 끝이었어. 거기서 퇴장해주기를 바랬는데 끝까지 살아서 날 막으러 왔구나. 키라의 뜻에 동조한다고 해서 기대를 품었지만, 역시 작은 희생을 넘어가며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두 명씩 있기는 어려웠겠지.

 

모모, 작별이다.”

 

그는 말을 마치는 동시에 주머니에 넣어뒀던 데빌노트를 꺼내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갈겨쓴다는 표현이 그토록 더 어울릴 수 없는 글씨로 그는 매지컬 모모의 이름을 적었다. 그 순간, 모모는 자신이 들고 있던 카타나를 뽑아 그에게 던졌다. 카타나의 예리한 칼날은 펜을 들고 있던 리마토르의 오른손을 관통했다.

 

“이... 이.... 모모!!!!! 누굴 찌르는 거냐!!!!!! 죽고 싶어!!!!!!”

 

예상 밖의 상황과 오른손이 칼에 뚫리는 고통에 리마토르는 분노와 절규를 섞어서 소리 질렀다. 모모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정의라고 믿었는데... 당신에게 반대하면 모두 악이라는 거에요?”

 

모모는 자신의 마법봉을 AK-47로 변형시켰다. 리마토르는 독기를 품은 눈을 치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내란죄라는 게 괜히 있는 거야? 국가가 내거는 정의에 반대하면 모두 악이잖아! 그래서 범죄자를 처벌하고 법이라는 정의를 세우지!

 

하지만 그 법이 강자들을 처벌한 적 있어? 힘 있는 자들은 법망을 빠져나가 죄를 짓고도 당당히 살아간다고. 난 그걸 처벌해서 진정한 정의를 바로 세웠을 뿐이야! 그래, 모모! 넌 그런 더러운 세상이 좋아?”

 

모모는 총구를 세워 그를 향했다. 가늠쇠와 가늠자에 눈을 맞추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그녀는 그를 경멸의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범죄자를 죽이는 건 찬성한다고 해도, 자신의 정의에 반대하는 무고한 이들을 죽여 놓고 궤변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에요?”

 

리마토르는 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름이 적힌 데빌노트를 곁눈질로 슬쩍 본 후 오른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았다. 그는 재빨리 모모의 이름 옆에 손으로 숫자 10을 적었다.

 

“그만둬!”

 

모모는 총알을 난사했다. 수 발의 총알이 그에게 날아가 양팔에 박히자 리마토르는 총알의 반동으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당신은... 당신은 정의가 아니야!”

 

모모가 바닥에 떨어진 카타나를 주워들고 그를 찌르려는 순간, 바닥에 검은 포탈이 열리며 어둠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모모는 카타나로 공격을 흘리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아주 재밌어. 키라를 추종하던 마법소녀가 자신의 손으로 키라를 죽이려 한다니!”

 

“뽀끄루... 대마왕...?”

 

리마토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고통이 자신을 물어뜯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었다. 채찍을 손에 든 뽀끄루 대마왕이 거만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즐거운 광경을 여럿 보았다. 마법소녀 하나는 키라의 손에 죽고, 다른 하나는 키라에게 감화된다. 마법소녀를 멸하려는 내 계획에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성과는 없었어. 고맙다, 키라.”

 

뽀끄루의 말을 들은 모모는 그녀가 리마토르를 도우러 왔다고 판단하여 지체 없이 알라의 마법봉을 발사했다. 뽀끄루는 방어진을 펴서 폭발을 상처 하나 없이 막아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을 허술하게 처리해서 궁지에 몰려서야 쓰나. 내가 친히 이곳에 강림할 이유를 만든 인간은 네가 최초구나.”

 

“그럼... 어서 모모를 죽여주세요!”

 

리마토르는 구세주를 만난 표정으로 뽀끄루에게 애원했다. 뽀끄루는 씩 웃으며 그의 손에서 데빌노트를 받아가더니 말했다.

 

“그래, 적어주지.”

 

“뽀끄루, 당장 그만둬!!”

 

모모가 매지컬 사시미를 꺼내들며 뽀끄루에게 덤볐지만 포탈에서 튀어나온 골타리온 XIII세의 대검에 저지당했다. 골타리온 XIII세가 모모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뽀끄루는 데빌노트에 이름을 다 적었다.

 

“이걸로 다 됐어. 앞으로 40초 뒤면 편해질 거다.”

 

“그래, 넌 패배했어 모모! 나의 승리라고!”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리마토르는 모모를 신랄하게 비웃었다. 광소를 터뜨리는 그의 모습을 본 뽀끄루는 얼굴에 어둠을 드리우며 그를 부정했다.

 

“아니, 죽는 건 너다 리마토르.”

 

“주... 죽는다고?! 내가 죽는단 말이야?!”

 

자신에게 떨어진 사형선고에 리마토르는 존대하는 것도 잊고 뽀끄루에게 물었다. 뽀끄루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이 상황을 빠져나간다면 데빌노트를 계속 써도 상관없겠지만, 아무리 봐도 네가 살아나갈 일은 없겠어. 내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데빌노트가 마법소녀의 손에 넘어갔을 거고,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귀찮은 일만 벌어졌겠지. 넌 끝났다, 이제 죽어.”

 

“무슨 말이야... 싫어! 죽고 싶지 않아! 난 아직 죽을 수 없어! 어서... 어서 내 이름을 지워줘!!”

 

리마토르는 뽀끄루의 발목을 붙잡고 애원했다. 뽀끄루는 그런 그를 걷어차면서 말했다.

 

“전에 골타리온이 말했을 텐데. 네 정의는 이미 순수하지 않다고. 데빌노트로 악인만을 처벌하겠다는 네가 너에게 반대하는 마법소녀를 죽이려고 한 시점에서 더 이상 너의 정의는 순수하지 않았어.

 

그랬기에 순수한 정의감으로 감출 수 있었던 데빌노트의 기척이 새어나가 마법소녀에게 닿은 거지. 백토가 데빌노트 조각을 만지고 내 흔적을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잘못된 건 아니잖아! 난 데빌노트로 깨끗한 세상을 세우려 했어!”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야. 어차피 네가 데빌노트로 마법소녀들을 혼란에 빠뜨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했거든. 그 뒤에는 내가 지구를 정복할 생각이었으니, 너의 하찮은 신세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리고 아주 중대한 착각을 하는군. ‘순수하다’는 말이 꼭 옳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지. 순수한 염산이 몸에 해로운 것처럼, 너의 순수한 정의는 처음부터 악이었어. 개인의 주관에 의존하여 살인을 저지르겠다니, 누구보다 악한 일 아닌가?”

 

뽀끄루는 남은 시간을 셌다. 앞으로 10초 남짓. 그 후면 리마토르의 숨은 끊어질 예정이었다.

 

“앞으로 10초다. 잘 가라, 키라 리마토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난 데빌노트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거야, 끝까지!

 

작은 아픔 따위... 뛰어넘어서,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뽀끄루를 바라보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뽀끄루는 손가락으로 5부터 세어주더니 마지막으로 남은 1의 손가락을 내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려가자마자 리마토르의 심장은 뜨거운 고통과 함께 작동을 멈췄다. 리마토르는 몸부림치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비... 빌어먹을...”

 

눈도 감지 못한 채 절명한 그의 모습을 본 뽀끄루는 데빌노트를 불살랐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오른 불꽃에 데빌노트는 재가 되어 다시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신이 된 것처럼 인간을 막 죽이더니, 죽는 순간에는 인간처럼 죽는군.”

 

그녀는 아직까지도 모모와 맞붙고 있는 골타리온 XIII세를 불러들였다. 리마토르의 시신을 본 모모는 카타나를 들고 뽀끄루에게 덤벼들었다.

 

“뽀끄루 대마왕!!!!!!”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뽀끄루가 개입한 일이었기에 모모는 백토의 죽음에 분노하여 칼에 빛의 힘을 실었다. 뽀끄루는 어둠의 포탈로 몸을 숨기며 그녀에게 조소를 남겼다.

 

“이걸로 나의 승리다. 남은 네 목숨은 나중에 받도록 하지!”

 

뽀끄루는 베지 못하고 뽀끄루가 서 있던 자리만 지나고 넘어간 그녀의 카타나가 바닥에 박혔다. 모모는 폭풍이 모두 지나간 자리에 황망히 서 있다가 쓰러진 백토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백토의 시신 앞에서 그녀는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결국... 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거잖아... 미안해 백토... 처음부터 너의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모모는 손을 들어 빛의 힘을 모았다. 백토가 자신에게 해준 것처럼 자신이 백토에게 빛의 힘을 쏟아부으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모모는 객석을 보며 말했다.

 

“부탁해, 백토를 위해 빛의 힘을 모아줘!”

 

모모의 손에서 하얀 빛이 나가자 앞줄에 앉은 아이들은 손을 뻗었다. 흐레스벨그는 양손을 모두 뻗었고, 하나 둘 손을 뻗는 모습에 모두 손을 들었다. 마키나의 홀로그램으로 모두의 손에서 빛이 나왔다. 한데 모여진 빛이 백토에게 닿자 마법소녀의 주제가와 함께 백토의 몸이 점점 떠올랐다.

 

「용감한 마법소녀, 슬프고 힘든 일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사랑의 힘으로 해치우리라. 우리는 악에 굴복하지 않아,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랑이 있으니까-」

 

빛이 걷히고 백토가 눈을 떴다. 백토는 모모를 보며 말했다.

 

“모모, 괜찮아?”

 

자신을 더 걱정해주는 백토의 모습에 모모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모모는 백토를 끌어안으며 눈물과 함께 사과했다.

 

“미안해, 백토! 나 때문에... 네가 키라의 손에...”

 

“괜찮아. 마법소녀는 모두의 희망이 있으면 몇 번이나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니까.”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 생각했어...”

 

“울지 마. 이걸로 또 하나 배우면 되는 거야.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몰라. 하지만 죄가 없는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희생시키면서까지 정의를 만들겠다는 건 잘못된 일임을 이번에 알았잖아. 그렇게 정의의 모습을 하나씩 찾아가면 돼.”

 

“응...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백토는 모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백토와 모모가 함께 마법소녀의 포즈를 잡으며 무대의 불이 꺼지고 THE END라는 글자가 새겨지자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다시 무대가 밝아지자 리마토르를 포함해 공연에 출연한 모든 이들이 관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리마토르는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을 향해 말했다.

 

“저희가 준비한 뮤지컬은 재밌게 보셨나요? 정의를 주제로 쓴 대본이라 어렵게 다가온 부분도 있을 텐데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뮤지컬에서 주연을 맡아주신 모모와 백토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와!!!!!”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나오자 모모와 백토는 환하게 웃으면서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모모는 발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마법소녀들의 공연은 어땠나요?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 덕분에 키라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은 좋은 방향이야. 그렇지, 프로페서?”

 

“암요. 그렇고 말고요.”

 

백토는 리마토르를 보며 웃었다. 리마토르가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하자 뽀끄루도 웃으면서 마이크를 들었다.

 

“교수님! 그러고 보니 골타리온에게는 단독 노래 주셨으면서 저는 왜 안주셨어요!”

 

“아차, 이거 미안해요. 원작에서 뽀끄루 씨에게 줄만한 넘버가 없었거든요. 그 대신이라고 말하기에는 뭣하지만, 마지막으로 제가 불렀던 <데스노트>를 불러보시면서 끝내실래요?”

 

“좋아요! 그거 엄청 멋진데 잘 됐네요!”

 


뮤지컬 데스노트 Death Note(홍광호) 6키 up.m4a


뽀끄루는 소품으로 썼던 데빌노트를 들고 근엄한 대마왕의 표정을 잡았다. 그 모습에 리마토르와 모모, 백토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백토는 관객석을 보며 말했다.

 

“모두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출연자들이 모두 손을 흔들며 뽀끄루가 부르는 노래에 호응했다. 객석에서도 뽀끄루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불안한 상황에서 시작되었던 뮤지컬은 성공리에 끝을 맺었다.


 

모두가 웃으면서 공연장을 나올 때, 무거운 표정으로 빈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2명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푸른 눈을 가진 여인과 주황색 양갈래머리를 한 둘은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으나 동일한 질문을 말했다.

 

“본 개체는 궁금합니다. 혐오의 감정이란 무엇인가요.”

 

“인간이 저렇게 추악한데... 우리는 꼭 부활시켜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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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뮤지컬 에피소드는 끝. 다 쓰고 나니까 45000자가 넘는 분량이네... 다음 편 예고를 미리 하자면 저 둘과 리마토르가 쇼펜하우어를 주제로 이야기 할 거야. 그리고 리마토르는 닥터의 기억재생제를 투여받고 잃어버렸던 자신의 과거와 대면할 예정이야.


길고 불편한 글을 여기까지 읽어줘서 모두 고맙다. 장마가 시작될 것 같은데 모두 건강 조심하고, 이번 편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으면 조치를 취하도록 할게. 모두 좋은 일만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