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충과의 전쟁이 끝난 승전일을 이르게 잡는 이들은 연결체들의 연결체이자 철충의 두뇌 역할을 하던 "마스터마인드"가 파괴된 날로 잡고, 늦게 잡는 이들은 L-481171 이라 명명된 최후로 발견된 철충이 박제 신세가 된 때로 잡는다. 공식적인 승전일이야 마지막 철충 연결체인 위그드라실이 파괴된 때이지만, 다들 마음 속에서 생각하는 승전일은 다르다. 그리고, 승전일이 다른 만큼이나 그들 마음속에 감춰진 승전에 대한 기억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우리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기억하도록 주입한 내용들과는 상이했다. 우리들의 삶은 잘 짜여진 동화나 기승전결이 완벽한 서사시가 아니다. 그리고 모두 잘 살았답니다와, 그리고 위대한 영웅의 인도 아래 국가는 번영했답니다, 같은 말로 넘어갈 수 없다. 모두 잘 살았다는 삶의 이면에는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한 고뇌가 있었고, 위대한 영웅의 인도 아래 번영하는 국가에는 갈 곳 잃은 방황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덮기에 서사시와 동화의 결말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2주간 포탄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어. 위그드라실, 그래, 그놈 잡자고 난리였지. 마지막으로 버섯구름이 일어났어. 그리고는 우리를 부르던데... 그 놈이 진짜 뒤졌는지, 뒤진 척하는지 알아보라는 거야. 낙진이 그치지도 않은 폭심지에 발을 딛는 걸 좋다고 할 놈이 어딨냐. 명령이라서 가는 거지. 그래도 명령을 받아들일 수는 있었던 게, 요오드 알약을 토할 정도로 먹고 방사능 방호복에 호흡기, 열화우라늄 장갑판을덧댄 NBC 워커, 뭐 그런 거까지 줬거든. 좆됐다고 생각하면서 전진했어. 워낙에 많이 쏴서 그런지 빗나간 포탄만으로도 주변이 화성마냥 크레이터로 움푹 파여있더라고. 마치 외계행성에 온 거 같았지... 폭심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쌓인 낙진이 두터워지는데 워커를 탔는데도 허리까지 오더라고. 어떻게든 위그드라실한테 가까이 갔어. 낙진으로 덮였는데... 마치 괴물한테 회색 담요를 덮어준 느낌이었어. 그래서 낙진도 좀 청소할 겸 포탄을 한발 쏴봤는데 정말로 조용하더군. 그냥 죽었다고 보고하기도 뭣한 거야. 그래서 지도용으로 들고 다니던 하얀 마커펜을 꺼내서 내 이름을 적었어.
 책 낼 때 내 이름 적을 필요도 없어. 난 위그드라실에 낙서를 했고, 그 죄목으로 죽어도 기록보관소에서 영원히 살게 될 테니까.
 A-54 칼리스타-113, 기갑정찰대장


 교과서나 전쟁소설을 보면 위그드라실이 쓰러졌을 때 마치 우리가 전부 다 환호했던 것처럼 말하던데 말이지... 지금에서나 위그드라실이 마지막 연결체다 뭐다 그래서 이때가 공식적인 승전일이다 그러는거지, 그때만 해도 철충들이 우리네들 쪽수만큼이나 많은 상황이었어. 나는 평소처럼 싸워야 했고, 평소처럼 전우들이 죽는 걸 봤다고. 나중에 재정비 명령을 받고 후방으로 갔는데, 공식적인 승전일이 위그드라실이 죽은 날로 정해졌다더군. 그 방송을 듣고 PX에서 술 한병 깠어.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죽였던 철충은 뭐가 되고, 하다못해 나는 살기라도 했지 내 옆에서 죽어나갔던 자매들은 뭐냐고.
 실피드-3815, 전투기 조종사


 오늘부로 인류가 철충에게 승리했다고 라디오가 울리더라고. 그래서 우리들도 나와서 30분간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고, 30분 동안 전쟁 때문에 스러져간 영혼들을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지. 그리고 다시 일하러 갔어.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놓고 이런 얘기밖에 못해서 미안하지만, 진짜 그랬어. 그게 내 승리였어.
 더치-887, 광업지원대원



 우리가 이겼다! 다들 신나서 총을 막 쏘아댔어. 나는 비교적 자제했지만, 워울프는 신나서 아주 날아다니고, 탈론페더는 이런 날에 돈을 벌러 가야 한다면서 다른 부대에 사령관 야동을 판매하러 날아갔지. 난리도 아니였어. 그날 깨진 유리창만 해도 10개는 될 거야. 그때 대장은 혼자서 평정을 지키고 있었어. 나는 그냥 속이 안 좋은갑다, 하면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는데, 대충 술판 치우고 나서 대장이 말했어.

 "몽골에서 철충 공장이 발견되었단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거기를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지."

 전쟁이 끝났다고? 글쎄... 내 전쟁은 그러고도 1년 뒤에야 끝났어.
 퀵 카멜-111, 기동타격대원



 사실 우리 부대의 시간은 공식적인 승전일이랑은 좀 달랐어요. 승전 몇년 전부터 우리 부대는 후방으로 돌려져서 철충은 구경도 못했고, 몇달 전부터는 아예 실탄도 금고에 재워두고 공포탄만 지급했거든요. 그리고는 속칭 "사회"라는 것에 나가서 살 병사들을 모집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문명을 되살리려면 일할 사람, 소비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 숫자가 부족하니 군대에서 때우겠다는 거였죠. 병사들은 서로 먼저 신청하려고 난리였지만 어느정도 교통정리가 된 다음에는 이프리트부터 먼저 보내려 했어요. 하지만 이프리트는 한사코 거부하고, 자기 바로 밑에 애들부터 짬순으로 양보했죠. 실키 상병이 PX 관리병 일 때려치고 편의점 점장 하러 가고, 노움 상병이 부대 코흘리개 짬찌들 똥오줌 받아주는 대신 사회에서 진짜 애들 똥오줌 받아주러 가는 동안에도 이프리트는 그냥 부대에 남는걸 계속 택했어요. 그러다가 브라우니들까지 차례가 돌아갈 때쯤에 공식적인 승전일이 위그드라실 파괴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들렸고, 우리 부대는 해체되기 시작했어요. 저도 군대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서 먹고 살려는데, 그렇게 내버려두질 않는다니 뭐 어쩝니까. 나가라면 나가야지. 그런데 그날, 이프리트만 혼자 생활관에 남아서 밤하늘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걔 깨어있는 모습을 아침에나 밤에나 본 적이 없었는데, 깨어있는 김에 대화를 나눴어요.

 "나가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프리트는 태어나서부터 저랑 함께했어요. 1세대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  때 기준으로 한 100년을 같이 복무했었죠. 100년 동안 일하다가, 이제는 아무런 교육도 없이 갑자기 사회로 꺼지라니. 이프리트 입장에서는 날벼락이었겠죠. 그나마 그녀가 군대에서 유지하던 병장이라는 직위마저도 소용없는 채로... 
 임펫-481231, 화기반장



 

 

 저는 정말로 늦게 생산됐어요. 그래서 부끄럽지만... 전투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어요. 훈련소에서 12주 훈련을 마치고 나온 뒤에 새로 편성된 부대에 배치됐어요. 전쟁요? 이라크 전선에 배치됐는데, 항상 헛발만 찼죠. 최전방에서는 죽도록 싸우는 동안 저는 참호 파기, 부식 추진하기, 뭐 그런 것만 했어요. 그래도 열심히 했다고요. 참호를 팔 때 항상 남들보다 무릎 반 씩 더 팠고, 총을 강박적으로 닦았어요.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요. 아, 일이 있었어요. 갑자기 공습경보가 울리더니 로켓이 쏟아졌어요... 그때 다들 혼비백산해서 숨어들어갔는데, 솔직히 저는 그때가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참호 위에서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덩어리들을 전부 받았죠. 마치 세례를 받는 거 같았다니까요... 그런데 포격이 잦아들고 보니까, 지휘관이 무전기에 대고 온갖 욕을 하는게 보이더라고요. 어느나라 철충이 참호를 파고 텐트를 치냐, 사령관이랑 섹스할 때 눈구멍이랑 귓구멍에도 좆이 박혔냐, 눈알에 좆물 묻은거 안 닦고 뭐했냐... 뭐 그런 원색적인 욕설이었는데, 저를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어요.

 "너 바지 갈아입어라."

 바지를 내려다봤는데 축축하게 젖어있었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줌싸개가 됐지만, 다행히도 다른 애들도 많이 쌌던데다가 누구는 똥도 지렸기 때문에 오줌싸개 같은 모욕적인 별명은 안 붙었어요. 그리고... 최전방 부대가 이탈하면서 제가 속한 부대가 교대하게 됐어요. 행군하면서 최전방에서 오는 부대와 마주치게 됐는데 몇명은 부상당해서 들것에 실려오고, 누구는 실키의 등 뒤에 얹혔죠. 장구류가 전투 때문에 싹 다 해져 있었어요.  걸어오던 레프리콘이 저한테 담배 한까치를 부탁했어요. 담배를 물려주니까 고맙다면서 자기 몸에 걸렸던 부적을 주더라고요.

 "이거랑 같이 100년을 싸웠어. 이것만 있으면 별일 없을 거야."

 그걸 받았는데... 진짜로 별일이 없었어요. 아무런 일도요. 처음에는 긴장하다가, 나중에 가니까 지휘관이 주변에 널린 시체들 좀 치우고, 참호 좀 다시 파자고 그랬어요. 거기까지 가서도 또 땅만 파댄 거죠. 그러다가 제 옆에서 일하던 자매가 곡괭이로 땅을 팠다가 터져서 사방팔방으로 날아갔어요. 인수인계 받은 지뢰지대 지도가 잘못됐던 모양이에요. 그게 우리 부대의 공식적인 첫 사망자였죠. 그랬어요. 첫 부상자는 아군 오폭 때문에 생기고, 첫 사망자는 우리 편이 깔아놓은 지뢰 때문에 생겼어요. 우리 부대에서는 죽음도 부상도 철충이랑 일절 관계가 없었다고요! 이번 생에 전쟁 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격 임무가 떨어졌어요. 이라크 전선에서 발견된 철충 연결체 위그드라실의 코어를 파괴해야 하니까 총 잘 쏘는 저격수가 많이 필요하다고 한 거에요. 그런데 저격수들이 전투 도중에 너무 손실되어서 저까지 불려가게 됐어요. 기뻤냐고요? 당연하죠! 첫 트로피가 다른 것도 아니고 철충 연결체가 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자리를 잡고, 위그드라실의 코어가 열리기를 기다렸어요. 그 붉은색 코어가 보였죠. 제 옆에 서 있던 관측수도 신이 나서 사격제원을 불러주는데, 갑자기 무전기에서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어요. 아예 하던거 다 접고 빨리 대피하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는데, 곧 핵폭격이 시작될 테니까 빨리 도망치라는 거였어요. 관측수가 총알 한발이면 끝인데 무슨 핵까지 쏘냐고 따졌지만, 상부에서는 빨리 대피하라고 했어요... 그때 저는 약간... 미쳤던 거 같아요. 명령이고 뭐고 그냥 쏴버리기로 하고, 다시 숨을 가다듬고 조준했어요. 

 하지만 코어에 집중한 나머지 위그드라실 머리 위로 핵미사일이 떨어지고 있던 건 몰랐죠. 핵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폭풍에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모래바닥에 낙진이랑 사이좋게 처박혔어요. 척추 골절, 전신 3도 화상, 일시적 시력 상실, 비가역적 청각 손상... 네. 좆될 수 있는 모든게 좆됐어요. 그 상태로 병원에 후송되어서 가만히 누워있는데, 내가 쏘려다가 못 쏜 그 위그드라실이 죽은 날이 승전이라 하더라고요. 네. 그게 제 전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그게 제 전쟁이었어요...
 미호-53124, 저격수


우리 부대에는 화력지원으로 배속된 스프리건이 있었어. 모두가 "트로피"라고 불렀어. 킬마크를 그리는데 빅 칙이나 하베스터 정도가 아니면 킬마크도 안 그리는 기준이 확실한 여자였지. 타란툴라를 일격에 격추한 것도 작다고 안 넣었더라니까. 그런데 그 친구한테 불행한 소식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이기고 철충이 져가고 있다는 거였지. 철충을 사냥하는 야전군이 군단으로 감축되고, 군단이 사단으로 감축되고, 사단이 연대로, 연대도 모자라 아예 업체로 밀어버렸어. 뭐 그래도 지구 어딘가에는 철충이 있었고, 스프리건은 감축과정에서 살아남았어. 그런데... 철충들이 더 이상 안 보이기 시작했어. 2년 동안이나 안 보이다가 마지막으로 나타난 게 L-481171이었지. 우리는 트로피에게 마지막 킬마크를 그릴 기회를 양보했어. 트로피가 정말로 슬퍼보였어. 본능적으로 안거지. 이게 마지막이라고. 트로피는 한숨을 쉬면서 물었어.

"이제 뭘 해야지?"
바바리아나-6, 돌격병

 
 나는 1세대 바이오로이드였고, 몇백년을 싸운 역전의 용사였어. 하지만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전우들... 너무 많은 전우들이 죽으니까, 살기가 싫어졌어. 가끔씩은 놓아버리고 싶었어... 매일밤 꿈마다, 얼굴도 이름도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이 와달라고 말했어. 몇번은 갈 뻔도 했어. 그런데 나한테 붕대를 감아준 동료하며, 날 야전병원으로 업고 간 실키하며, 수술해준 야전병원하며... 셋 중 누구라도 삐끗했다면 죽을 수 있었을텐데 다들 야속하게 어떻게든 살려놨어. 가끔씩은 자살도 생각했는데 잘 되진 않았어... 참 끔찍했어. 남들은 다 죽어나가는 게 전쟁인데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고, 그냥 속 편하게 자살해버리기에는 또 무섭고... 웃기지. 그런데 진짜 그래. 전쟁이 끝나갈 때쯤 되면 내가 총을 쏘는지, 총이 나를 쏘는지 모를 지경이 됐어. 그렇게 죽지 못해서 살아있는데 전쟁이 끝났다는 거야. 

 정신과 의사가 내 상태가 안 좋다고 한달 동안 휴가를 보내서, 도시에 들렀어. 다들 열심히 살고 있었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찾으려는 것처럼. 부대로 복귀하기 바로 전날에 누가 부탁한 걸 들어주려고 대박났다는 케이크 맛집에 갔어. 스틸 드라코가 운영하는데 드라코 아니랄까봐 동작 속도는 끝내주더군. 미호랑 찍은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거기 주변에 적혀있는 글하며 조화들을 보니까 미호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방 알 수 있었어. 케이크를 포장하던 드라코가 이야기해줬어. 미호는 정말 최고의 친구였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케이크 가게를 열었다고... 거기서 뭔가 마음이 편안해졌어.  삶은 계속된다는 걸 몇백년 살아서야 깨달은 거지. 그랬던 거야. 내 전우들 수천명이 저 세상에 간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겠어. 산 사람은 사는 거지... 부대로 복귀해서 케이크를 나누고, 바로 잠에 들었어... 그날은 아무 꿈도 안 꾸고, 그냥 푹 잤어. 정신과 의사가 예후를 봐야 한다고 나를 불렀지. 그리고는 내 표정을 보더니 웃었어. 

 그래. 난 살아남은 거야. 스틸라인이 죽어서도 버티건 뭐건, 난 살았어. 그거면 된 거야. 그거면 됐어. 
 실키-213 선행생산형, 돌격병



 다들 전쟁이 끝나면 뭘 해야 할지가 문제였지만, 그 중 제일 문제는 에밀리였어요. 망할 인간 새끼들. 만들 거면 제대로 만들어놓고 뒤지지, 무기 사용법만 입력해놓고 나머지는 싹 백지상태로 만드니까 애가 멀쩡하지가 않았거든요. 사실 전쟁때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걔가 가진 제녹스 레일건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건 걔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전쟁이 끝났네요? 철충들은 전부 고철더미가 되었고, 폐도시들도 전부 에밀리 덕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네요? 철충들은 없고, 같은 바이오로이드들밖에 없으니 에밀리랑 그 제녹스는... 네, 위험요인이었어요. 결국 제녹스는 사령관 며느리도 모르고 마누라도 모른다는 어디에 보관처리됐고, 에밀리는 이제 제녹스 버튼 누르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던 아이에서 그냥 할 수 있는게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어요. 뭘 도우려 해도, 에밀리가 도와보기도 전에 일이 다 끝났고, 오래 걸리는 일은 에밀리가 오히려 방해만 될 지경이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너무 바빠서 에밀리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면 안 됐는데...

 "에밀리, 그냥 저기 가서 앉아 있을래?"

 에밀리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서 있다가, 진짜로 가서 앉았어요. 나중에 가서 보니까 울고 있더라고요. 그러면 안 됐는데... 에밀리를 꼭 안아줬어요. 승전을 했다지만, 그때는 모든 게 좆같았어요. 전쟁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애였다고요.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몰라, 몇십년간 좋을대로 써먹어놓고... 에밀리랑 약속했어요. 에밀리를 지켜주겠다고. 에밀리와 끝까지 함께해주겠다고. 
파니-131, 포병



 살아남았다는 건 좋은 일이야. 자매들도 함께 살았더라면, 아니, 한 명이라도 함께 살아남았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피닉스-431, 스틸라인 화력통제관



 다들 몇백년 동안 구경도 못한 승리라는 개념이 생소했겠지만... 그 개념이 제일 생소한 건 역시 밴시였을 겁니다. 그 누구도 전쟁이 없는 삶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위해 죽으려고 태어났고, 몇백년간 계속 그래왔으니까요. 땅에 박힐 듯 강하하고, 폭탄을 투하하고 이탈한다. 그 과정에서 죽는다. 그게 밴시의 삶이었습니다. 물론 손실을 줄여야 하니, 최대한 차가운 이성을 유지해서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유도했습니다. 하지만 승전 이후에는 달랐습니다. 죽일 철충도 없고 무너뜨릴 요새도 없는데 급강하폭격이 무슨 소용입니까. 전쟁이 한창일 때는 만들어진 이유가 곧 살아야 할 이유였지만, 이제는 아니었죠. 많은 자매들이 고층건물에
서 마지막 "급강하"를 했던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야 할 이유를 논증하지 못하게 된 이상, 차가운 이성과 논리는 자살 충동을 부추기는 적으로 다가왔을 뿐입니다. 저는 그래도 상황이 낫습니다. 살아있기에 사는 것이지, 살아가는 데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감정을 이성이 받아들였고, 그 덕분에 다른 자매들을 돕고 있죠. 그래도 삶이 녹록지는 않습니다. 매 10초마다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모든 것들을 강박적으로 계산했습니다. 저 전봇대에서 떨어진 전선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을까? 저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나를 뭉개버리지 않을까? 저 자동차에 치이면 시체를 숟가락으로 떠내야겠군. 예를 들어 그런 식입니다. 만약에 밴시를 본다면 그 차가운 외견에 속지 말고, 그 안에 숨어있는 여린 마음을 보듬어주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전쟁을 위해 태어났고, 전쟁을 위해 살았지만,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는 신세가 된 우리들을 위해서....




 한반도에서 싸웠고, 중국에서 싸웠고, 시베리아에서 싸웠어. 싸울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인류의 명운을 놓고 싸웠고, 결국 이겼지. 알아. 내가 뭔 말을 하더라도, 죽은 이들은 들을 귀도, 대답할 입도 없다는 걸. 하지만 그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어... 우리 모두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어.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어. 그건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헛되었는가? 하면 난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룬 것들을 봐... 다시 피어나는 문명을 보라고. 우리가 이 전쟁에서 졌다면 모든 게 철충의 아가리 속에서 공허로 돌아갔을 거야. 하지만 우리와, 우리의 문명은, 우리를 대신해 죽은 모든 이들의 피와 시체로 다시금 일어나게 되었어. 어디 선전매체에서나 나오는 말 같다면 그건 인정해. 하지만 당신마저도 이게 사실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 어쩔 거야,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겠어. 그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다시 쌓아올리는 수밖에.
 레오나-15, 야전군 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