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다음 날 아침. 그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일어났다.

 

“닥터? 왜 이리 일찍 왔어?”

 

졸린 눈을 비비며 닥터를 맞이하려 했으나 그를 찾아온 이는 닥터가 아니었다. 주황색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는 청아한 벽안을 하고 일부분이 얼어붙은 바디슈트를 입은 여성에게 뭐라 부탁했다.

 

“확인. 교수자님의 잠을 깨웁니다.”

 

“잠시만요, 이게 뭔-”

 

바디슈트를 입은 그녀는 손에 냉기를 모으더니 그의 뺨에 갖다 댔다. 뼛속까지 전해지는 시린 감각에 리마토르는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허억!!!!!!”

 

“교수자님이 완전히 정신을 차리신 걸로 추정됩니다.”

 

“이제 일어났네. 반가워, 난 더치 걸이야.”

 

“본 개체는 므네모시네라고 호칭됩니다.”

 

“아, 예...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것도 이렇게 이른 아침에...”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므네모시네와 더치 걸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에게 되물었다.

 

“이른 아침?”

 

“본 개체는 교수자님께서 아침 11시를 ‘이르다’고 판단한 사고 체계가 궁금합니다.”

 

“11시에요?!”

 

둘의 대답을 들은 리마토르는 오히려 더 놀랐다. 잠자리에 늦게 들었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늦게 일어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지금 불편하면 나중에 올까?”

 

“아뇨, 들어오셔도 돼요. 이거 많이 지저분해서 죄송합니다.”

 

더치 걸이 조심스럽게 묻자 리마토르는 괜찮다며 둘을 안으로 들였다. 어제 칸과 대화했던 그 자리가 그대로였기에 그는 지난 기억을 손으로 문질러 닦으려는 듯 일부러 책을 옮기고 의자를 하나 더 놓았다.

 

냉장고에서 초코우유와 다과를 꺼낸 그는 급히 화장실로 가서 세수와 양치를 했다. 드라이 샴푸를 머리에 뿌리고 탈탈 털어내며 그는 자신이 괜히 늦게 일어났다며 속으로 자책했다. 동시에 칸의 고백이 귀에 맴도는 것 같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본 개체야말로 사전 예고 없이 찾아와서 당황하신 교수자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므네모시네의 무감정한 말투에 리마토르는 여전히 오르카호에는 개성적인 이들이 많다고 느꼈다. 초코우유를 마시던 더치 걸은 그를 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공연 잘 봤어.”

 

“감사합니다. 연기는 본업이 아니라 많이 어색했을 텐데 끝까지 봐주셨네요.”

 

“솔직히 미숙한 부분도 있었지만 줄거리가 재미있었어.”

 

“줄거리가요? 뭐... 멸망 전의 뮤지컬을 각색한 거지만 주제에 철학적인 논쟁이 들어가 있었죠. 그게 재밌게 느껴졌을 줄은 몰랐습니다.”

 

“응. 그 말대로야.”

 

“네?”

 

더치 걸의 말에 리마토르는 이해를 못하고 되물었다. 더치 걸은 쓸쓸한 표정을 짓더니 리마토르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인간은 힘을 쥐게 되면 다른 존재를 억누르려고 해. 그런 위험한 존재를 되살려도 되는 걸까?”

 

“본 개체 역시 동감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혐오하고 배척합니다. 그렇게 혐오로 가득 찬 세계를 지향할만한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더치 걸의 어린 얼굴 뒤에 자리 잡은 인간혐오의 모습을 확인한 리마토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므네모시네의 무감각한 말투에서는 컴퓨터가 인간을 되살릴 논리적인 이유를 묻는 것이라 느껴 그나마 충격이 덜했으나, 더치 걸은 신체나이가 LRL이나 안드바리와 비슷할진대 심연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니 더욱 큰 충격이 느껴졌다.

 

“인간을 되살려야할 이유라...”

 

그로서도 뭐라 답해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던 지론에서든 연구를 진행한 내용에서든 인간을 되살려야할 ‘당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철충을 몰아내기 위해 인간의 적극적인 명령이 필요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사령관이 발견되자 자연스레 인류 부흥이 목표로 설정되었던 상황이었다.

 

‘뭘 고민해? 대답해주면 되잖아. 칸이랑 롤스, 왈저를 주제로 처음 이야기했을 때를 잊은 거야? 그때 얘기했던 그대로만 말해주면 문제없어.’

 

‘안 돼. 연구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고 해도 아직은 민감한 주제야. 얼핏 보아도 뿌리 깊은 인간혐오를 가진 걸로 보이는 더치 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는 건 역효과만 날 거야.’

 

리마토르의 내부에서 찬반이 격렬하게 대립할 때, 더치 걸은 고민하는 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철학자라는 직함을 달고 많은 질문에 답을 찾아준 그가 답하지 못하는 문제라면, 인간을 부활시켜야할 이유는 하등 없는 것이었다. 나아가 더치 걸 자신이 좋아하고 따르는 사령관이 꿈꾸는 목표가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꼴이었기에 그녀는 괜히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만들까 싶어 질문을 무르려고 했다.

 

“답하기 힘들면 안해도 괜찮아.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께 해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어요.”

 

“교수자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리마토르는 므네모시네의 질문에 대답 대신 책 한권을 내밀었다. 므네모시네는 헤이하치 컷을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불쾌감이 9% 증가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리마토르는 쓴 웃음을 지으며 둘에게 말했다.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철학 사조가 훗날 니체로 넘어가 영원회귀사상과 아모르 파티(Amor fati)로 이어졌죠. 제가 여러분께 오늘 말씀드릴 이야기의 주제는 쇼펜하우어가 본 인간혐오입니다.”

 

“인간혐오? 본 개체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동족을 혐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인간이 동족혐오를 가지고 있으면 멸망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미 멸망했잖아.”

 

므네모시네의 말에 더치 걸이 태클을 걸자 므네모시네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리마토르는 고통 속에서 살며 세상을 바라본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말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 이야기는 조금 깁니다. 점심 먹기 전까지는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만, 저는 여러분이 이해하실 수 있는 걸 목표로 하기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셨나요?”

 

“응.”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죠.

 

쇼펜하우어라고 하면 괴팍한 철학자라는 인상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인데, 맞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평생을 우울증과 의심증에 시달렸으며 어머니와는 의절까지 했었. 그러다보니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의 인생사만큼이나 공격적이고 날카롭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잠시 윗세대 철학자인 칸트의 관념론을 보고 가죠.

 

칸트의 등장으로 철학사의 판도가 바뀌었음은 들은 적이 있으실 겁니다. 광범위한 철학의 영역 전반에 그의 입김이 닿았고, 그 중 한 분야가 인식론입니다. 칸트는 실제로 존재하는 물건을 물자체우리가 보고 인식하는 형상을 인식계라고 구분했습니다. 물자체와 인식계는 섞일 수 없으며, 인간은 물자체가 인식계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동일한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죠.”

 

“음? 이해가 안 돼. 인식하는 거랑 보여 지는 거랑 같으면 동일한 거 아니야?”

 

“VR을 생각해보세요. VR기기를 쓰고 영상에서 사과를 보여주면 우리는 눈앞에 사과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눈앞에 참외가 있다면 어떨까요? 실제 존재하는 물자체와 우리가 받아들이는 인식계에 차이가 생깁니다. 칸트는 이런 상황이 있기에 물자체가 인간의 의식에 들어오는 모습과 동일한 건지, 더 나아가 물자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알 수 없다고 말한 겁니다.”

 

“음... 이거 어렵네...”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이런 칸트의 물자체-인식계라는 이분법적 주장에 비판을 가한 이는 늘 있었죠. 그 중 한 명이 칸트보다 후대의 철학자이자, 쇼펜하우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리드리히 헤겔입니다. 

 

헤겔은 칸트가 나눈 물자체와 인식계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습니다. 플라톤 이래로 쭉 내려온 서양 철학의 기조는 ‘이성이 감정과 욕망을 통제한다’였습니다. 헤겔 역시 이 기조를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물자체와 인식계는 따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이라는 이성을 거친 과정으로 관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이야기하면 이 에피소드 제목을 쇼펜하우어가 아니라 헤겔로 고쳐야하니 여기서 끊지만, 요약하면 헤겔은 절대정신으로 물자체와 인식계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본 개체는 현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안해요, 므네모시네 씨. 헤겔 철학은 방대하고 난해한 걸로 악명이 높아서 이렇게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니지만 쇼펜하우어를 설명할 때 헤겔을 빼놓을 수는 없어서 이렇게라도 다룬 거에요.”

 

머리를 싸매 쥔 더치 걸과 안 그래도 무표정한 므네모시네의 얼굴에서 점점 더 감정이 지워져가자 리마토르는 더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한탄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초코우유를 따라주며 어려운 설명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쇼펜하우어 이런 헤겔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자기가 키우던 개의 이름을 헤겔이라 붙일 정도로 헤겔에게 반감을 가졌던 쇼펜하우어는 헤겔이 칸트의 철학을 왜곡하고 있다고 거세게 비판했죠.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 철학을 완벽히 이해하여 계승했다고 자신하면서 물자체-인식계가 이분법적으로 나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어요. 칸트가 물자체의 실재를 알 수 없다고 한 반면, 쇼펜하우어는 물자체는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의지? 그러면 인간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이해한다는 거 아니야?”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는 욕망이라고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해요. 단, 무엇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방향성이 없이 그냥 날뛰는 욕망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가 힘을 향한 욕망이라고 보았어요. 인간은 힘을 향한 욕망을 인식하고, 그게 곧 인생이라고 주장한 거죠.”

 

“뭔가... 알 거 같아. 인간들도 그래서 우리를...”

 

더치 걸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운지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리마토르의 말을 들으며 더치 걸은 ‘압도적인 지위를 갖기 위한 욕망’에 인간이 자신들을 지옥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했다. 무너져 내린 갱도 속에서 몇 번이고 중얼거린 질문,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짓을 하냐는 질문에 비로소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본 개체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힘을 향한 욕망은 무력과 같은 경쟁적 수단에서만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 전체를 힘을 향한 욕망에 의한 것이라 재단한 겁니까?”

 

“음... 이게 말로 하기 어려운데, 거칠게 말해서 쇼펜하우어가 말한 힘을 향한 욕망은 생존하기 위한 생물학적 욕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 발전해야하고, 발전하기 위해 힘을 추구한다고 받아들이시면 이해가 될 거에요.

 

므네모시네 씨가 관리하던 기억의 방주도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내용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어요. 살아남기 위해 미래에 종자를 기를 힘을 목표로 삼은 거니까요.”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므네모시네는 여전히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이 급하면서 답답한 감정을 도출해냈다. 그녀는 이 감정이 ‘초조함’임을 학습하며 이해하기 위한 고민을 이어갔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존재하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인간이 삶을 산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과정은 끝없는 고통이라고 했죠.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핍의 고통이, 욕망이 충족되면 권태의 고통이 찾아옵니다. 욕망을 만족하든 못하든 결핍과 권태를 오가며 삶은 고통에 놓인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죠. 

 

그러면서 쇼펜하우어는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이 세계는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지옥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바로 말할 수 있지만, 천국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추상적인 내용만 떠올린다는 점에서 우리의 세계가 천국보다 지옥에 더 가깝다고 말한 겁니다.”

 

“...난 맞는 거 같아. 인간들이 있던 세계나, 철충에게 쫓기는 세계나 지옥이 아니면 뭐겠어.”

 

더치 걸이 나이에 맞지 않는 냉소를 날리며 말하자 리마토르는 알비스에게 주려고 쟁여놨던 초코바를 꺼내 주면서 설명을 이었다.

 

“쇼펜하우어가 이런 주장을 한 건 자신의 삶에서 기인한 걸지도 몰라요. 제가 앞에서 쇼펜하우어는 거의 평생을 우울증과 의심증에 시달렸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교수자님께서는 헤겔에 대해서도 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맞아요. 쇼펜하우어는 사는 내내 헤겔을 비판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헤겔이 칸트의 주장을 호도하고 있다며 격렬하게 비판했죠. 자신이 칸트의 주장을 바르게 재해석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찬 쇼펜하우어는 헤겔이 교수로 일하고 있던 베를린 대학교에 시간강사로 들어갑니다. 일부러 헤겔의 강의 시간과 자신의 강의 시간과 겹치게 설강한 쇼펜하우어는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를 들으러 넘치듯이 몰릴 거라고 예상했죠.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당대의 석학이었던 헤겔의 강의를 들으려고 몰렸고, 쇼펜하우어의 강의에는 고작해야 한 자리 수의 학생들이 왔다고 합니다. 자신이 비판한 헤겔에게 보기 좋은 참패를 당한 쇼펜하우어는 한 학기만에 베를린 대학교 시간강사 자리에서 사표를 쓰고 나오죠. 쇼펜하우어 입장에서 더 분통이 터지는 건, 정작 헤겔은 쇼펜하우어라는 학자를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 헤겔을 비판한다고 말하는 쇼펜하우어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죠.

 

이렇게 자신이 사상적으로 격렬히 비판한 상대에게 참패와 무시를 당하고, 어머니하고는 의절하고, 지병인 정신질환까지 삶을 옥죄니 쇼펜하우어의 삶이 평탄할 리는 만무했죠.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인 사상이 여기서 그의 삶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는 겁니다.”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더치 걸은 황당한 투로 대꾸했다.

 

“자기 인생이 안 좋다고 연구한 끝에 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거야? 말도 안 돼.”

 

“믿기 어렵지만 쇼펜하우어의 삶과 사상이 연결되는 측면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죠. 자신의 끔찍한 삶에서 출구를 바라서 그런지, 아니면 철학 연구를 하다 보니 도달한 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벗어날 수단이 2가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음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빠르고 경쾌한, 감각적인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바흐의 작곡처럼 수학적인 미를 가진 음악을 가리킵니다. 미학적인 조건을 충족하는 음악을 통해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죠.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두 번째 방법으로 열반을 제시했습니다.”

 

“열반? 불교에서 말하는 Nirvana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대답에 므네모시네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되물었다. 그녀는 ‘형이 왜 거기서 나와?’의 표정으로 리마토르를 바라보며 지금 자신이 뭘 들었나 의심했다.

 

“네, 놀랄만합니다. 서양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동양철학의 열반이 툭 튀어나왔으니까요. 쇼펜하우어가 말한 열반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 맞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찾기 위해서는 금욕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들어야 한다고 말한 겁니다.

 

이런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쇼펜하우어가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불교를 접한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이 찾던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전혀 배경이 다른 두 개의 사상이 동일한 결론에 동일하다니,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일이죠.”

 

“쇼펜하우어도 안타깝네. 연구를 통해 도달한 답이 이미 존재하는 거였다니. 평생 고생만 하다가 가난하게 죽은 거잖아.”

 

“아뇨, 쇼펜하우어의 말년은 밝았습니다.”

 

더치 걸이 쇼펜하우어의 삶을 두고 안타깝다는 말을 하자 리마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더치 걸은 무슨 말이냐며, 평생 고생만 하다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반문했으나 리마토르는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저는 쇼펜하우어가 거의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렸다고 했지 고생만하다 죽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저희가 이야기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속편이라 볼 수 있는 <여록과 보유>라는 수필을 죽기 9년 전인 1851년에 출판합니다. 이게 대박이 나서 쇼펜하우어는 유명인이 되죠.

 

이후 사망하기 3년 전인 1857년에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개설되고,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영국과 프랑스로 번역되어 수출됩니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회원으로 추대하겠다고 연락이 왔으나 쇼펜하우어 본인이 고령을 이유로 거절할 정도로 쇼펜하우어의 말년은 운이 트였습니다.”

 

“참나, 본인은 삶이 지옥이라고 해놓고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은 거야? 이래서 인간들은... 이중적이야. 믿을 수가 없어.”

 

더치 걸은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꼈다. 그녀가 평소에는 안 그러는 행동을 보이자 리마토르는 자신과 대화하며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괜히 그녀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건 아닐까 우려가 되었던 리마토르는 말을 덧붙였다.


“그건 아니에요. 쇼펜하우어는 그 전까지 삶이 결코 윤택하지 않았잖아요. 그 삶이 자신의 사상을 구축하는데 반영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된 삶을 살았던 사상가가 만년에 이르러 고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삶 전체를 깎아내리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교수자님. 이 강의를 통해서 본 개체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의 말을 듣던 므네모시네는 정곡을 찔렀다. 인간혐오를 극복하면서까지 인류를 부흥시켜야하는가 묻던 그녀들의 질문을 떠올린 리마토르는 머릿속에 떠도는 답을 정리해서 말했다.

 

“인간의 삶은 고통과 번뇌로 가득 차 있어요. 그 세계 역시 지옥이죠.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쇼펜하우어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리킨 것처럼, 새로운 인류가 만들 세계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이를 타파할 방법을 만들 수 있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있는 시간대입니다. 신인류가 탄생하기 전이니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할 수 있죠. 지금 안전장치를 삼중사중으로 철저히 만들어두면 걱정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신인류가 타락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더치 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마토르는 그녀의 과거가 얼마나 강하게 그녀를 구속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며 말을 덧붙였다.

 

“타락한다면 갈아엎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죠. 다만, 저는 구조적으로 신인류가 타락할 수 없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호감을 갖고 명령에 복종해야합니다. 하지만 이 원칙은 특정한 코드나 시스템이 아니에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본 개체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리마토르는 등을 돌려 책장에 꽂혀 있는 자신의 논문 원고를 바라보았다. 새벽에 칸에게 말해주었던 내용과 논문에 적으려는 내용이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조각이 맞춰졌다.

 

“바이오로이드는 뇌파로 인간을 구별합니다. 그럼 인간과 뇌파가 유사한 철충에게 무의식적인 호감을 갖나요? 그러지 않죠. 조건이 갖더라도 받아들이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 더, 비서 레모네이드 개체 중 델타는 명령을 왜곡하여 마리오네트를 생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에 대한 조항은 절대적이지 않아요.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상대적인 것이죠.

 

생각해봅시다.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바이오로이드와 인간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되면, 그런 규칙들이 작동할 수 있을까요?”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더치 걸은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므네모시네가 옆에서 냉기를 뿜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리마토르라는 학자가 갖고 있는 사상의 편린을 본 느낌에, 그 편린이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두려울 정도로 큰 직감을 느껴서였다.

 

“뭐, 아직 연구 중입니다. 이런 철학적인 명제를 검증하는데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을 사용하다보니 쉽지는 않네요.”

 

리마토르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어깨를 으쓱하며 편하게 말했다. 그러나 더치 걸은 작게 덜덜 떨었고, 므네모시네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벌써 시간이 12시 10분이네요. 강의 듣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점심 드시러 가시죠.”

 

더 있다가는 자신도 어색함에 물들 것 같아 리마토르는 점심을 핑계로 자리를 정리했다. 말없이 자신을 따라 식당으로 오는 둘을 보며 그는 자신이 마지막 이야기는 괜히 꺼냈나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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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찾아보니 헤겔이랑 철학적으로 대치되는 부분이 많아서 부득이하게 헤겔 철학 일부를 끌어왔어. 헤겔 철학은 보면 볼수록 참 난해하더라. 이런 걸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진다.


부족한 글을 읽어준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다.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