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오빠, 최후의 만찬은 든든하게 먹었어?”

 

“괜히 불길하게 말하지 마요.”

 

“미안해. 기억재생제 투여는 나도 처음이라서 잘못했다가는 오빠 기억이 몽땅 날아갈 수도 있단 말이야.”

 

“솔직히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남의 일이라고 너무 상큼하게 말하지 마요.”

 

리마토르는 밝게 웃는 닥터를 보며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닥터는 자신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냐면서 그를 수술대 위에 눕혔다. 그가 눕자마자 구속구가 튀어나와 그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묶었고, 뭔가 상황이 잘못 돌아감을 직감한 리마토르는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잠깐만요, 닥터! 이게 지금 무슨 짓이에요!”

 

“걱정할 거 없어. 그냥 오빠가 너무 날뛸까봐 묶어둔 거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태연하게 대꾸하는 닥터의 모습에 기가 찬 리마토르는 설마 무마취로 진행될까 겁먹고 연신 닥터를 불렀다.

 

“마취제! 마취제를 놓아야죠!”

 

“마취제는 당연히 놓지. 오빠가 기억재생제를 투여받은 후에 갑자기 인격이 확 돌아서 날뛰면 안 되니까 취한 조치라고.”

 

닥터가 자신을 토모 언니와 같은 취급하지 말라고 말하며 마스크를 씌워줬으나 리마토르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믿기 힘들었다.

 

“어휴...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믿으라고. 그럼 10부터 거꾸로 세 봐.”

 

“10... 굵.”

 

“역시 이게 효과가 좋다니까.”

 

마취 상태로 곯아떨어진 리마토르를 보며 닥터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장비를 꺼내들고 중얼거렸다.

 

“현 시각 오후 1시 22분. 수술 시작.”

 

 

 

1시간 후. 닥터는 수술대에서 손을 뗐다. 정확하게 해마의 특정 시냅스에 집중하여 약물을 투여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초극세 도구를 조정한 손에 쥐가 나는 걸 느꼈다.

 

“아야야... 리마토르 오빠는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알란가 몰라.”

 

닥터는 저린 손을 주무르며 리마토르를 수복실로 옮겼다. 아직 마취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비몽사몽한 그를 보자 간호사복을 입은 리제가 칼을 들고 보호자석에 앉았다.

 

“이 햇츙. 나한테 마르쿠제를 들먹인 대가를 받아가라고.”

 

리제는 칼집에서 칼을 뽑더니 평소 가위를 쓰는 솜씨만큼이나 능숙하게 칼을 다루었다. 사과를 토끼모양으로 잘라 정갈하게 접시에 담은 그녀는 그가 잠든 걸 확인하고 새침하게 말했다.

 

“딱히 네 조언 덕분에 주인님이랑 가까워져서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그 광경을 다프네와 함께 훔쳐보던 아쿠아는 자신이 리마토르를 불러준 보람이 있었다며 뿌듯함을 느꼈다.

 

“리마토르, 문병 왔어.”

 

델x트 오렌지 주스가 가득 담긴 유리병을 든 에밀리가 아스널과 함께 그를 찾았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에밀리는 실망한 눈치였으나, 아스널이 옆에서 조금 기다려보자고 말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고 재잘거렸다.

 

“있잖아, 리마토르. <사랑의 기술>을 읽고 생각해본 건데 모든 이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거 같아. 우리는 사랑을 주면서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거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면 분명 기특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스널은 에밀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오늘 아침 회의에서 칸이 평소보다 가라앉은 모습을 보인 걸 떠올리고 그에게 속으로 물었다.

 

‘리마토르 그대와 칸 사이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대가 무슨 말을 했길래 칸이 그렇게 침울해한 건지... 나로서는 모르겠군.’

 

“권속이여!”

 

참치캔을 들고 황급히 달려온 LRL까지 가세하자 보호자석은 어느새 만석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다프네와 아쿠아는 인망이 있는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안정을 위해 보호자들을 내보냈다.

 

“정말이지 좋은 분이신가 봐요. 다들 이렇게 몰려오고 말이에요.”

 

“햇츙치고는 도움이 되었으니까.”

 

다프네는 툴툴거리는 리제를 보며 솔직하지 못하다고 살짝 놀렸다. 예전의 리제면 날카롭게 반응했겠지만, 마르쿠제 사상을 공부하고 사령관에게 부드럽게 다가가면서 진도를 상당히 많이 뺀 리제는 여유가 많이 생겼다. 리제는 피식 웃으면서 다프네에게 일이나 하라고 딱밤을 날렸다.

 

“교수님, 몸 괜찮으세요?”

 

숙취로 늦게 잠에서 일어나 휴강 공지를 본 하르페이아는 어제 자신이 저지른 짓을 떠올리며 얼굴을 잔뜩 붉히고 그를 찾아왔다. 잠들어있는 리마토르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마주해야할지 몰랐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며 한시름 놓았다.

 

“어제 토한 건 죄송해요...”

 

그녀는 잠든 그의 옆에 앉더니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일부러 말을 걸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면서 말했다.

 

“교수님께 이런 감정을 품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남성미라고 하면 사령관님이고, 같이 동침을 보낸 적도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교수님께 연심을 가지면 제가 나쁜 거겠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들어보셨나요? 교수님이라면 읽어보셨겠죠. 남편을 몇 년 전에 먼저 잃고 평범하게 살던 노부인 프란체스카 존슨이 사망하자 가족들은 장례를 치러요. 먼저 죽은 남편의 무덤에 함께 묻어줄 준비를 다 했는데, 프란체스카 부인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죽으면 매장하지 말고 화장해서 어느 다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죠. 그걸 이해하지 못한 자녀들이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유지를 존중하여 프란체스카 부인의 유해를 화장하여 다리에 뿌려드려요. 이후 유품을 정리하던 자녀들은 이상한 열쇠를 발견하고 어머니가 평생 숨겨온 다른 유품을 열게 되죠. 거기에는 어머니가 잊지 못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나흘간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어요.

 

수십 년 전 어느 날, 사진작가인 남성 로버트 킨케이드는 잡지에 실을 로즈만과 할리웰 다리의 사진을 찍기 위해 매디슨 카운티에 도착해었던 거에요. 길을 잃은 그는 잘 정돈된 한 농가 앞에 트럭을 세우고는 길을 물어봤고,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이 그녀에게 답을 해줬요. 남편과 두 아이가 나흘 동안 일리노이 주의 박람회에 참가하러 떠나고 집에 혼자 있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젊은 프란체스카였죠. 프란체스카 부인은 예의 바른 이방인에게 호기심을 느꼈어요. 애초에 결혼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데다가 아이들과 집안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살던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끌림을 느끼고 로버트를 집으로 끌어들여 불륜을 저지르죠.

 

로버트는 떠날 즈음 프란체스카에게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니 자신과 같이 떠나자고 유혹했어요.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과 일생의 단 한 번뿐일 사랑 중에서 갈등하다가, 끝내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택하죠. 그리고 죽을 때에 이르러 ‘평생 동안 가족에게 충실했으니, 죽어서는 로버트를 택하겠다’고 유품의 마지막에 적어놓았던 거죠.

 

프란체스카 부인의 행동은 잘못된 걸까요? 프란체스카 부인이 저지른 건 엄연한 불륜이니까요. 성에 대한 보수주의/중도주의/개방주의적 관점이 분류되는 것도 그렇고, 정절이나 순결을 중시하는 문화가 멸망 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는 점에서 불륜은 부정적인 걸로 여겨졌죠. 어떤 이는 이를 가리켜 승자독식의 사회가 생존에 불리하니, 성에 대해서도 평등한 분배를 추구한 진화생물학적인 결론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단순한 진화생물학의 편린으로 볼 수 있는 걸까요? 사랑이란 게 종 단위에서의 생존을 추구하는 유전자의 행위에 불과한 걸까요?

 

만약 저 말이 맞다면... 유이한 남성이 사령관님과 교수님인 현 상황에서 불륜은 당연히 이루어지는 게 맞겠죠. 아뇨, 윤리에 어긋난다는 不倫을 오히려 윤리에 부합한다는 합륜(合倫)이라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몰라요. 

 

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제가 교수님께 이런 감정을 품는 게 정말 옳은 걸까요? 윤리의 문제가 생존보다 우선시될 수 있을까요? 생존을 위해 적합한 수단으로 불륜이 쓰인다고 해도 제가 교수님께 품은 연심이 윤리적으로 옳은 걸까요?

 

나중에 깨어나면 꼭 답을 알려주세요. 교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제가 교수님께 필리아와 에로스 사이에 해당하는 감정을 갖는 건 확실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하르페이아는 리마토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르카호 내부에서 자신 외에 관심을 갖지 않던 독서라는 취미를 처음으로 이해해주었고, 책을 주제로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취미의 영역에서 자기만족을 위했던 일이 어느새 취미보다 함께하는 이가 더 좋아져서 하는 일이 되었다. 그 감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심이 되었지만, 사령관과 사랑을 하고 있는 자신이 리마토르에게도 동일한 감정을 품어도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르페이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그 후로도 레아, 팬텀, 나이트 앤젤이 찾아와서 리마토르가 언제 깨어날지 묻고 갔다. 그럴 때마다 다프네는 내일쯤 깨어날 것이라고 안내해주는 동시에 그들이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적당한 시점에서 돌려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가 그의 기억이 깨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4일이 지났음에도 리마토르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닥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칸은 온건한 그녀답지 않게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퀵카멜과 탈론 페더가 고정하시라며 그녀를 말렸음에도 칸은 침착함을 잃고 동요하고 있었다. 아스널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닥터에게 같은 질문을 묻자 닥터는 우물쭈물하면서 답했다.

 

“그... 나도 이런 시술은 처음이라... 리마토르 오빠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

 

“그게 할 말이야!”

 

칸이 자신을 붙잡고 있던 퀵카멜을 뿌리치고 손을 쳐들자 아스널은 급히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제지했다.

 

“진정하게나! 칸, 그대답지 않아!”

 

“아스널. 그래서 지금 참으라고? 이대로 죽은지도 모르는 상태로 기약없이 깨어날 날만 기다리라고?”

 

“현재로서는 그게 최선이-”

 

“닥쳐!”

 

아스널이 칸을 설득하는 동안 닥터가 불난 집에 기름을 붓자 칸은 날카롭게 응수했다. 그 대담한 워울프도 칸이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보자 뭐라 말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칸, 진정하게. 리마토르도 이런 모습을 바라지 않을 걸세.”

 

“진정? 진정하라고?

 

대답해봐, 아스널. 정말 구하고 싶었던 부대원들을 모두 잃는 고통을 겪고 난 칸이 되었어. 더 이상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데, 이번에도 구하고 싶은 이를 무력하게 놓아버려야 한다고...

 

이게... 지금 말이나 돼....?”

 

단호하게 말하다가 끝에 가서는 미세하게 울먹이는 칸의 감정을 포착한 아스널은 급히 부하들을 물렸다. 호드가 반발했으나 아스널은 이례적으로 지휘관의 계급을 내세워 그 공간에 닥터와 칸, 자신 3명만 남겼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모두를 잃어야 한다니.

 

나는 칸 그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대가 얼마나 아플지 모른다네. 하지만 그대가 어느 정도로 아픈지 최대한 공감하고자 노력할 거라네. 그러니 지금은 울어도 되네. 괜찮네.”

 

아스널은 칸을 다독여주었다. 이 상황에서 리마토르라면 어떻게 말할지 생각해서 그녀를 위로해준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칸은 말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리마토르 오빠를 들여다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침울한 분위기를 깨며 닥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말에 칸과 아스널 모두 기대에 찬 눈으로 닥터를 바라보았다.

 

“리마토르 오빠는 현재 혼수상태지만, 세부적으로 말하면 반혼수 상태라고 해서 혼수상태보다 한 단계 상태가 나은 상황이야. 흔히들 Coma라고 일컫는 의식불명은 각성-기면-혼미-반혼수-혼수 상태로 나뉘어지는데, 반혼수 상태에서는 의식이 없지만 반사적인 움직임을 보여. 다시 말해, 정상적인 수면이 아니지만 우리가 의식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거지.”

 

“닥터, 설마 리마토르의 뇌를 해부하자는 건 아니겠지?”

 

“아스널 언니, 아무리 내가 과학에 영혼을 팔아도 무고한 희생자를 내지는 않아.”

 

“몽구스팀의 스틸 드라코에게 똑똑해지는 약이라고 각성제를 함부로 처방했던 전적은?”

 

“그, 그건 의학적인 근거에 입각해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닥터, 리마토르의 내면을 들여다볼 방법을 설명해봐.”

 

“칸, 진심인가? 확실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어.”

 

“상관없어. 지금 저렇게 잠든 이유가 뭔지를 떠나 리마토르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아야겠어.”

 

칸의 굳센 모습에 아스널은 당황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가 리마토르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하는지 아스널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아스널의 속을 읽기라도 했는지 칸은 솔직하게 말했다.

 

“리마토르가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는데 선을 긋는 일은 한두 번이라도 보았겠지. 그 이유를 물을 때마다 리마토르는 자신의 과거를 들어서 반대했으니, 나는 리마토르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답을 찾고 싶어.”

 

“그런 이유라면 나도 할 말이 없군. 나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네.”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닥터, 방법이 뭐지?”

 

둘이 합의에 이른 걸 본 닥터는 수술실에서 사용했던 장비들을 들고 와 리마토르의 머리에 붙이고 꽂으면서 말했다.

 

“기억이 저장되는 해마의 시냅스에 전기 작용을 가해 읽어낼 거야. 기억재생제의 효과가 있었으니 리마토르 오빠가 과거에 겪었던 일을 알 수 있겠지. 이 헬멧을 쓰면 언니들의 의식을 오빠의 기억으로 접속할 수 있어.”

 

“접속? 자칫하다가 우리 둘의 의식이 섞이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리마토르 오빠의 기억을 영화처럼 보는 거에 불과하니까. 전쟁 영화라고 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총격이 날아오는 건 아니잖아? 오빠의 기억을 추출해서 디지털 변환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언니들의 의식이 직접 보는 게 더 빨라서 취한 방법이야.”

 

“좋아. 이걸 쓰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의식의 접속률을 높이기 위해 외부 자극을 차단할거야. 간단히 말해서 언니들이 마취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

 

“알겠어. 빨리 진행해.”

 

칸은 침상에 눕더니 닥터를 재촉했다. 아스널은 그런 칸의 모습을 보며 칸과 리마토르 사이에 연모의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닌가 추측했다. 아스널도 침대에 눕자 닥터는 헬멧을 씌워주며 말했다.

 

“마취약 들어간다. 10부터 1까지 거꾸로 세봐.”

 

“알겠어. 10, 9......”

 

“10, 구웃...”

 

다들 푹 잠든 걸 확인하자 닥터는 수술도구에 다시 손을 올렸다. 기억재생제 투여 이후 새로 형성된 시냅스의 무리를 포착한 닥터는 초극세 도구를 겨냥하더니 미약한 전기를 흘려보냈다.

 

 

 

 

 

“으음...”

 

“정신이 드나?”

 

칸은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먼저 깨어난 아스널이 그녀를 흔들어서 깨운 것이었다. 칸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려고 했으나 아스널은 그보다 먼저 손을 들어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로 나가면 될 것 같네. 잠시 저 곳을 들여다보니 리마토르의 과거가 확실한 풍경이 보이더군. 그대가 깨어날 때까지 잠시 기다렸네.”

 

“그렇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인사는 필요 없네. 자, 답을 찾으러 가보자고.”

 

아스널은 평소의 호방한 웃음을 흘리며 빛을 향해 걸어갔다. 빛 앞에 도달하자 칸은 눈부심에 눈을 질끈 감았으나 빛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환한 도시의 풍경에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환한 빛이 그녀들을 감싸고 지나가자 둘은 번화한 도시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아, 저기 현판이 있네!”

 

사람들이 오가는 멸망 전의 거리에서 아스널은 벽에 쓰인 현판을 발견하고 칸을 이끌었다. 현판에 새겨진 글자를 읽은 둘은 자신들이 어디에 와있는지 확신했다.

 

“성론대학교, 리마토르가 졸업한 대학으로 보이네.”

 

“졸업하든 안했든 모종의 관계가 있기에 이 기억이 떠올랐겠지. 여기서 어디로 가야...”

 

칸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먼발치에서 지나가는 남자를 발견하고 급히 아스널을 불렀다.

 

“아스널! 저기 봐!”

 

칸의 손가락 끝을 본 아스널은 리마토르를 닮은 남자가 대학교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현재의 모습보다 조금 젊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리마토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둘은 그 남자의 뒤를 밟았다.

 

“리마토르!”

 

칸은 그를 부르면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그의 몸을 통과해서 허공을 갈랐다. 균형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칸의 몸을 잡아준 아스널은 그녀에게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잊은 건가? 여기는 리마토르의 기억이네. 우리가 뭘 해도 이건 그저 과거의 영상일 뿐이야.”

 

“...그랬지. 내가 잠시 망각했었어.”

 

“발걸음을 옮기자고. 벌써 리마토르가 저 앞까지 갔네.”

 

아스널과 칸은 다시 부지런히 리마토르의 뒤를 밟았다. 인문사회관이라 쓰인 건물 안으로 들어간 둘은 리마토르가 들어간 강의실로 들어가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뭐지? 이 뒤는 공간이 구현되지 않았잖아?”

 

텅 빈 하얀 공간으로 자취를 감춘 리마토르의 모습에 아스널은 당황했다. 칸은 그 광경을 보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리마토르의 기억 중에서도 중요한 기억만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군. 모든 기억을 다 쫓는 게 아니라 핵심적인 기억을 추적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로 보여.”

 

“이제 어떡하지?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는데.”

 

칸은 아스널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로서도 리마토르의 어떤 기억이 중요하게 남았는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잠시 방법을 논의하던 둘은 강의실 옆에 끼워진 시간표를 보았다.

 

“이 강의실의 시간표인가? 지금 수업은... 사회철학이군.”

 

“리마토르의 전공이 사회철학이었나?”

 

“그건 기억이 안 나는데... 아! 분명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내용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했어!”

 

칸은 리마토르가 처음 발견되어 사령관에게 심문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 말을 들은 둘은 리마토르의 전공이 사회철학이라고 결론지었다.

 

“칸, 강의 교수가 누구라고 쓰여있지?”

 

“잠깐만. 성문환 교수라는데?”

 

“멀리 갈 것도 없겠군. 바로 아래층이야.”

 

아스널은 건물 배치표를 보며 성문환 교수의 이름을 찾았다. 성문환 교수의 연구실로 내려간 둘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논문지도를 받고 있는 리마토르가 있었다.

 

“우리가 맞게 찾아온 것 같군.”

 

성문환 교수로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는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그의 논문에 밑줄을 그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 부분이 롤스의 정의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실히 정의가 안 되어있어. 롤스는 분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았는데 자네가 쓴 논문 초안에는 바이오로이드를 분배의 대상으로 보면서도 바이오로이드와 사용자가 만든 라포는 분배할 수 없다는 이중적인 관점을 취했단 말이지. 이래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교수님, 제가 이 논문에서 하려는 말은 ‘바이오로이드는 도구지만 사람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제한적인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중적인 관점을 취한 게 문제라는 거지. 차라리 왈저의 복합 평등을 들고 온다면 모를까, 롤스의 주장만으로 이를 일관화하려니 논점이 꼬이는 거 같아.”

 

“하지만 교수님, 바이오로이드는 복합적인 특성을 가진 도구로-”

 

“그만. 이런 식으로는 논문 심사는커녕 초안도 통과 못 시켜줘.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다시 오도록.”

 

“...알겠습니다.”

 

리마토르가 교수에게 깨지는 모습을 보면서 칸과 아스널은 현재의 그와 많이 다른 모습에 생경함을 느꼈다.

 

“리마토르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구나.”

 

“바이오로이드도 그렇고, 인간도 성장하는 존재니까.”

 

성문환 교수는 방문을 나가려는 리마토르에게 사탕을 주면서 말을 덧붙였다.

 

“석사 논문도 좋았고, 자네가 박사학위 받으면 바로 내 뒷자리로 들어올 수 있도록 최대한 힘써보겠네.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방황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심려는 무슨 심려, 요새 유상 군 표정이 어두워서 하는 말이지.”

 

성문환 교수의 말을 들은 칸은 아스널에게 속삭였다.

 

“방금 들었지?”

 

“어. 유상 군이라고 했네.”

 

“리마토르의 이름이 유상이란 건가?”

 

성문환 교수와 리마토르가 밖으로 나가자 칸은 즉시 성문환 교수가 평가하던 논문 초안을 찾았다. 첫 장에 쓰인 이름을 확인한 칸과 아스널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소리 내어 읽었다.

 

“이유상. 생각할 유자에 항상 상자를 써서 항상 생각하라는 뜻이군.”

 

“Rimător가 연구자라는 뜻인데 딱 본인 이름 같은 삶을 살고 있네.”

 

둘은 리마토르 본인도 잊고 있던 중요한 답을 하나 찾았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 복도를 걷고 있는 그의 뒤를 밟았다. 그의 뒤를 쫓다가 갑자기 강한 빛이 비치자 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는 어디지?”

 

다시 정신을 차린 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연탄 나르기 봉사를 하고 있는 봉사단이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리마토르가 이곳에 있으리라고 짐작한 칸은 봉사단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여기야, 칸!”

 

아스널은 언덕 위에서 칸을 불렀다. 그곳으로 달려간 칸은 봉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리마토르를 발견했다.

 

“리마토르는 봉사를 꾸준히 했나봐. 봉사횟수 카드에 도장에 꽤 많이 찍혀있네.”

 

“이렇게 보니 성문환 교수에게 했던 말이 믿기지 않는군. 바이오로이드를 도구라고 말한 사람이 타인을 도구로 보지 않는 봉사에 적극적이라니, 이 무슨 모순일까.”

 

“모순은 아니지. 바이오로이드는 도구고 인간은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바이오로이드를 도구라고 주장하던 생각을 바꾼 거야?”

 

칸과 아스널은 연탄 가루를 닦고 휴식을 취하는 리마토르를 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리마토르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움직이자 둘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빠~!”

 

리마토르를 부르며 품에 안기는 여성의 모습에 칸은 얼어붙었다. 아스널 역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안긴 여성의 긴 갈색 생머리가 허공에 흩날리자 아스널이 겨우 입을 뗐다.

 

“저 사람... 생긴 모습이...”

 

“....믿을 수 없군.”

 

“칸, 너와 닮았어.”

 

워페인트를 지운 칸과 가족 관계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닮은 여성이 갈색 장발을 찰랑거리며 리마토르에게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빠! 어서 밥 먹으러 가자!”

 

“잠깐만, 이것만 정리하고 갈게.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지?”

 

“응! 빨리 와야 해!”

 

“알겠어. 이해해줘서 고마워.”

 

리마토르가 칸을 닮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칸은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그녀의 형상에 뭐라 종잡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자신의 안에서 울컥이는 걸 느꼈다.

 

“칸...”

 

“...말하지 마, 아스널. 지금은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할 때야.”

 

칸의 볼에 가늘게 흐르는 눈물방울을 본 아스널이 위로의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칸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눈물을 닦은 그녀는 붉어진 눈시울을 뒤로하고 리마토르의 형상을 보았다.

 

“유상 학생, 희연이랑 연애는 잘 되어 가?”

 

“뭐?”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 건넨 농을 들은 칸은 표정이 굳었다. 뒤에 있던 아스널도 그 말을 듣고 전에 그가 마르쿠제에 대해 강의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칸, 전에 리마토르가 내게 말한 적이 있어. 과거에 어떤 아픈 사랑을 한 거 같다고 말이야.”

 

“아무래도... 우리가 그 사랑의 대상을 찾았나 봐.”

 

칸은 아스널의 말을 받으면서 그가 자신의 고백을 밀어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애타게 사랑했던 이와 어떤 식으로든 좋게 끝나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닮은 이가 또 다시 사랑을 말하면 과거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아들러 심리학을 말한 장본인이 정작 자신은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목적 뒤에 꼭꼭 숨어있는 격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 따로 없네.

 

 

그래도 괜찮아. 당신이 내게 해준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도와줄 테니까.”

 

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결의를 다졌다. 미소를 짓는 그녀의 표정 위로 다시금 밝은 빛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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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에 깔아놨던 복선 하나 회수했다. 이번 에피소드는 칸과 아스널이 리마토르의 기억을 보면서사실을 밝혀내고, 정신을 차린 리마토르가 정리해서 말해주는 식으로 갈 거야.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에서 밝히지 못한 과거 기억이 하나 있을 텐데, 그건 이후 후반부 에피소드를 시작하는 단초가 될 예정이야.


부족한 글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