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여기는 또 어디지?”

 

부신 눈을 찡그렸다가 밝아진 주변을 확인한 아스널은 딱딱하게 굳은 칸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가정집의 안락한 소파에 기대 유상과 희연이라는 여자가 서로 껴안고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칸, 이 장면은 굳이 안 봐도 될 법-”

 

“아니. 끝까지 봐야겠어.”

 

그저 불편한 광경을 봐서 그런 게 아니라, 수틀리면 지금 보고 있는 게 단순한 영상임에도 살인을 저지르고도 남을 칸의 눈을 본 아스널은 조심스럽게 눈을 돌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칸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유상이 과거에 보낸 행복한 시간을 자신의 눈에 똑바로 담았다.

 

“저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던 사람이었나...”

 

오르카호에서 강의를 하며 리마토르가 지은 미소가 사회적 친교를 목적으로 편안하게 보이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라면, 과거의 유상이 짓고 있는 미소는 참된 행복에서 비롯했음이 보기만 해도 바로 느껴졌다. 칸은 그의 미소가 자신이 아닌, 자신을 닮은 희연이라는 여자에게 향한 걸 보고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오빠, 우리도 바이오로이드와 같이 살면 안 돼?”

 

“음... 희연이가 그러고 싶은 이유가 뭐야?”

 

“오빠가 맨날 출근하고 나면 심심하기도 하고, 밥도 도시락만 먹어야 하고,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하니까. 바이오로이드랑 같이 살면 좋은 친구가 될 거 같아!”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겠네. 하지만 희연아, 바이오로이드는 도구에 불과하다니까. 친구라고 말하기에는 거리가 있어.”

 

아스널과 칸은 희연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한 번, 유상의 입에서 나온 말에 두 번 놀랐다.

 

“분명 리마토르가 연구하던 내용은 바이오로이드의 인간성에 대한 게 아니었나?”

 

“지금과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야. 희연이라는 여자가 무슨 영향을 끼친 거지?”

 

둘은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철학을 연구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같은 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른 유상의 모습에 둘은 그의 기억을 계속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이 말없이 유상과 희연을 지켜보는 사이 희연은 TV를 켰다. 눈을 빛내며 매지컬 모모를 보는 그녀가 함박웃음을 짓자 유상은 뒤에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스널.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아스널은 칸이 방금 전처럼 표정을 굳힐까 우려하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칸은 그녀의 걱정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놓치고 있던 의문을 제기했다.

 

“리마토르가 박사학위를 밟는다고 하면 나이는 보통 27,8이겠지. 희연이라는 여자와 나이차가 난다고 가정해도 20대 초반일 텐데 성인 여성이 드라마가 아닌 매지컬 모모를 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스카이 나이츠의 흐레스벨그도 열렬한 매지컬 모모 신봉자야. 겨우 그런 걸로 트집을 잡을 수는 없어.”

 

“주변을 둘러봐. 현관의 신발이 두 쌍, 방도 2개, 가재도구도 2인용이 많아. 이로 미루어보아 리마토르와 희연이라는 여자는 동거 관계임을 추측할 수 있지. 그런데 성인 2명이 사는 집의 문에 손 끼임 방지용 안전장치가 달려 있는 게 자연스러운가? 뭔가 이상하지 않아?”

 

“처음부터 시공을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일부러 설치하지 않을 이유도 명확하지 않아.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

 

아스널은 칸이 지나치게 날을 세운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토닥였다. 칸은 그녀의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의문을 던졌다.

 

“잘 생각해봐. 리마토르가 출근한 뒤에 혼자 집에 있어야 한다는 점, 밥은 도시락만 먹어야 한다는 점, 혼자서 외출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전부 수상쩍어.

 

왜 성인 여성이 혼자 나갈 수 없는 거지? 마땅한 직업이 없는 거야 실업률이 치솟는 시대니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요리를 하지 않고 도시락만 먹어야 한다는 것도 이상해.”

 

“칸! 정신 차려, 아무리 리마토르에게 연심을 품었다고 해도 이런 건 지나친 흠집 내기야. 냉정하게 생각하라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수상해. 리마토르가 말하는 내용을 곱씹어 보라고. 성인 대 성인의 대화가 아니라 어린아이를 어르는 말투잖아.”

 

“그만해. 이렇게 사소한 거에도 과민반응하면 모든 게 이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이야.”

 

아스널은 슬슬 칸의 정신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자신 역시 사령관을 향한 상사병을 앓은 적이 있기에 경쟁자를 색안경을 쓰고 보는 심정은 이해했다. 당장 오르카호에서 리제가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현재 칸의 행동은 점점 도를 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칸에게 한 마디를 더 보태려는 순간, 유상이 말문을 열었다.

 

“맞다, 오빠 취직했어.”

 

“취직? 이미 한 거 아니었어?”

 

“지금은 대학원에 다니는 거야. 곧 졸업인데, 졸업하는 즉시 삼안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됐어.”

 

“삼안이면 그 바이오로이드 만드는 곳이잖아! 오빠가 바이오로이드 만드는 거야?”

 

“오빠가 만드는 건 아니고, 연구를 같이 하는 거지.”

 

“우와! 오빠가 바이오로이드 연구하는구나!”

 

둘의 대화를 듣자 이번에는 아스널이 먼저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사고 수준으로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혼잣말로 내뱉었다.

 

“놀랍군. 철학 박사가 삼안에 취직하는 게 가능하다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삼안에서도 철학을 쓸 수도 있는 일이야.”

 

“철학 박사가 교수가 되는 게 아니라 산업체의 연구원으로 들어가는 일이 평범하지는 않잖나. 이례적인 일이지.”

 

칸과 아스널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다시 빛이 덮쳐왔다. 빛이 걷히자 이번에는 하얀 방 안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유상의 모습이 나타났다. 둘은 그가 작성하는 글에 호기심을 느끼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이오로이드의 노동 효율성...”

 

“바이오로이드의 기저 사상에서 감정을 배제해야한다. 최대 30살 정도의 정신연령을 설정하고 이성에 따른 움직임만이 가능해야 더욱 효율적인 노동이 가능하다...

 

하, 가당치도 않은 소리만 쓰고 있네.”

 

그가 작성하는 보고서의 내용을 소리 내서 읽은 아스널은 짜게 식은 눈으로 유상을 바라보았다. 칸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자 아스널은 그녀의 표현까지 대신해주었다.

 

“감정을 박탈하고 이성에 따라 살면 그게 기계가 아니면 뭐겠나. 사이코패스의 인생을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는 소리를 쓰고 있다니, 정말이지 같잖기 그지없군.”

 

“...아스널. 리마토르의 진심이 정말 이거일까? 우리에게는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 다르지 않다고 말했잖아.”

 

“모를 일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우리를 열등하다고 경멸하는 구 인류와 다르지 않은 족속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은 그리 했지만 아스널도 속으로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다. 리마토르가 정말 구 인류와 같은 부류라면 자신들에게 명령권 행사를 암암리에 했을 터였다. 고도의 처세술을 쓸 정도로 머리가 좋은 그라면 가스라이팅을 통해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의 아래라고 세뇌를 시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터였다.

 

하지만 여태까지 리마토르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에밀리에게 해준 사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신에게 해준 실존주의 이야기, 리제에게 해준 마르쿠제 이야기를 떠올려 봐도 그런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현재의 리마토르와 과거의 이유상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도 궁금하군. 바이오로이드를 도구 취급하던 인간이 뭘 해야 180도 생각을 뒤집는 걸까.’

 

아스널이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칸은 그가 쓴 걸로 추정되는 다른 보고서의 제목을 하나씩 살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인 보고서들의 목차를 눈으로 훑던 그녀는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바이오로이드 장기적출의 윤리적 정당성, 바이오로이드 통제의 효율성을 위한 공리주의적 제안, 판옵티콘형 바이오로이드 중앙집권 통제제도의 이해...”

 

칸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꼈다. 믿을 수 없다고 입으로 연신 되뇌이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어둠을 목도하는 자신의 현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 부정을 멈추고 처음부터 리마토르가 그런 악인이었다고,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것도 전부 유희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고 합리화를 시도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가진 사랑의 감정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눈물이 나오다 못해 눈의 실핏줄이 터져 피가 흘렀다. 바닥에 스며드는 붉은 핏자국을 보면서도 칸은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이 공황에 빠진 지옥 같은 기억에서 손을 잡아준 리마토르를 사랑하고 있어서였다.

 

“오빠~ 나 왔어!”

 

그녀들이 각자 심란해하는 사이 뜻밖의 방문객이 유상을 불렀다. 유상은 자뭇 진지한 표정에서 푸근한 미소로 표정을 바꾸며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맞았다.

 

“희연이 왔어?”

 

“응!”

 

자신의 일터에 그녀가 막 찾아왔음에도 유상은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희연을 반겼다. 그 상황을 보자 아스널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깨닫고 칸에게 말했다.

 

“칸, 아까 예민하게 군다고 말한 점 사과하지.”

 

“아니야. 너도 느낀 거지? 아무리 연인이라고 해도 일터에 불쑥 찾아오는 게 이상하다는 점 말이야.”

 

그녀들이 어색한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데, 아스널의 귀에 밖에서 들리는 말소리가 들어왔다. 방음이 어느 정도 되는 방이라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유상 씨 여자친구 또 찾아왔어?”

 

“냅둬요, 휴식실에 있는 거보다 유상 씨 개인실에 있는 게 더 낫죠.”

 

“우리 회사는 다 좋은데 애들 놀이방이 없어. 그거 하나 있으면 유상 씨에게 여자친구 하루 종일 맡겨두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선배도 너무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놀이방이 뭐에요? 출생률도 낮은데 한 사람을 위해서 그런 거 만들 시간에 그냥 외부인 출입금지 때리는 게 더 편하죠.”

 

“나라고 그런 얘기 안 해봤겠냐. 처음에는 외부인이 들락날락거리는 게 신경 쓰였는데, 지적장애가 있으면 그냥 어린애나 다름없다고 상부에서 묵인해주더라. 그 대신 유상 씨가 전부 책임지라고 하는 거고.”

 

“상부에서 그걸 용케도 봐주네요. 유상 씨가 윗줄에 연이라도 있나?”

 

“몰랐어? 유상 씨 부모가 지역노동위원회 위원이야.”

 

“그게 뭐가 대수라고요. 기업전쟁에서 삼안이 이긴 게 언젠데, 그런 허울뿐인 감투가 뭔 상관이에요.”

 

“허울은 뭔 놈의 허울. 정부가 통치한다는 보여주기 식이지만 실제로는 간부 승진보직이라고. 그 정도면 여기 연구소 부소장이랑 같은 급인데 충분히 큰 자리지.”

 

“뭐야, 그럼 낙하산이잖아요. 어쩐지... 생명공학도 아니고 철학 전공인 시점에서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비둬. 우리야 알고리즘 짜는 일 덜어서 좋은 거지. 불평불만 그만하고 다시 일이나 들어가자.”

 

밖에서 들린 대화소리에 아스널은 전후 사정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리마토르의 부모가 삼안과 연관이 있었군. 그래서 삼안 연구소에 취직한 거고, 바이오로이드를 도구로만 본 것도 이해가 돼.”

 

“그리고... 희연이라는 여자는 지적장애라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지. 리마토르가 왜 저런 인간을 만난 건지.”

 

자신의 혼잣말에 칸이 한 줄을 더하자 아스널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듣던 내용을 칸도 전부 듣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로 유상의 품에 안긴 희연을 노려보고 있는 칸의 모습이 더욱 놀랄 일이었다.

 

“저 자리에 있는 게 나였어야 했는데...!”

 

워페인트와 평소의 이성적인 인상만 빼면 희연은 칸을 빼다 박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칸과 닮았었다. 그랬기에 더욱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며 칸이 이를 갈자 아스널은 그녀를 말렸다.

 

“진정해! 이건 그저 과거의 영상일 뿐이야!”

 

그녀가 칸이 감정에 도취되어 막 나갈까봐 제지하는 순간, 붉은빛이 연구소 전체에 비치며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모두의 귀를 때렸다.

 

「비상 상황 발생! 비상 상황 발생!」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둘이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며 건물이 흔들렸다. 상당히 강한 충격이었기에 비틀거리던 그녀들이 중심을 잡자 사이렌의 말이 추가로 들려왔다.

 

「외부의 공격 발생! 모든 연구원들은 즉각 퇴거하라!」

 

“뭔 소리지?”

 

아스널이 분주히 뛰어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보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칸은 유상을 보고 있었다. 덜덜 떠는 희연을 달래며 경비대에 전화를 걸던 그는 곧 표정을 구기더니 수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제기랄! 본사 방어를 위해 먼저 퇴각하니 자율적으로 대피하라는 게 할 말이냐고!”

 

유상은 날카롭게 짜증을 내며 희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건물 밖 비상구로 향하는 유상을 쫓던 칸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아스널을 발견하고 빨리 따라오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아스널은 오히려 칸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유상이 리마토르가 된 계기를 하나 찾은 것 같군.”

 

“바쁜데 지금 뭔 소리를-!”

 

아스널에게 핀잔을 주려던 칸은 무너진 건물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말을 멈췄다. 푸른 하늘이 붉게 물들고 곳곳에서 포탈이 열려 검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철충이 침공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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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지.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야.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있지. 인간은 바뀔 수 있다는 뜻이야.


인간은 큰 사건을 겪고 바뀐다고 하지만 그게 과연 타고난 본성까지 전부 바꿀 수 있는 걸까?


개인적으로는 확답이 없는 문제라고 봐. 바뀌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게 인간이니까. 이건 내 의견일 뿐이니 라붕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


부족한 글 읽어줘서 모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