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이런 젠장.”

 


칸은 나직이 뇌까리더니 유상이 뛰어나간 곳으로 향했다. 무너진 틈 사이로 철충이 들어와 보안용 AGS를 장악하자 미처 대피하지 못한 연구소 직원들은 조각난 고기 덩어리가 되었다. 케시크였던 순간에 큰 충격을 받았던 광경이 눈앞에 겹쳐지자 칸은 일순간 그 자리에 발이 박힌 것처럼 굳어버렸다. 아스널이 그녀를 붙잡고 건물을 나가기 않았더라면 칸은 그 자리에서 계속 움직이지 못했을 터였다.

 

“칸, 괜찮은가?”

 

“...그럭저럭. 그보다 리마토르는 어디에 있지?”

 

숨을 고른 칸은 즉시 도피한 유상의 자취를 눈으로 쫓았다. 아수라장이 된 도시에서 자동차로 대피하는 이들은 철충의 좋은 먹이가 되었기에 유상은 몸을 숨겨가며 발로 뛰는 선택지를 골랐다. 썩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이동속도가 느리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기에 그는 연구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못했었다. 칸에게는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그녀는 유상의 영상 옆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아직까지 무사해서 다행이...”

 

분명 기억의 한 조각일 뿐인데, 그녀가 보고 있는 모습은 영화처럼 영상에 불과한데도 칸은 유상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이내 표정이 굳었다. 와이셔츠는 온갖 먼지가 묻어 더러워지고 넥타이는 찢어져 너덜너덜한 그가 오들오들 떠는 희연을 한 팔로 끌어안으며 철충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오빠, 우리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희연아.”

 

둘의 대화를 듣던 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과거의 기억을 질투한다는 게 추한 일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반작용으로 돌아오는 감정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그녀가 눈에 담으려는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눈에 담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사랑을 거부했다.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넘어, 소중한 이를 안으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그녀에게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칸은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동시에 갖고 싶어졌다. 자신의 마음을 밀어내는 그를 끌어당겨 오롯이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칸의 안에서 어두운 감정이 꿈틀거리는 무렵, 뒤처졌던 아스널은 칸을 뒤쫓아 와 손목을 잡았다.

 

“칸! 정신차려!”

 

“내 정신은 멀쩡해.”

 

“네 표정을 봐. 그게 어딜 봐서 멀쩡하다는 거지?”

 

아스널은 바닥에 떨어진 깨진 거울 조각을 들어 칸을 비췄다. 거울 안에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녀가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모습에 칸 본인도 몸서리치며 정신을 차렸다.

 

“뭐야! 방금 그건... 대체 뭐야?!”

 

“그대로 두면 살인은 경범죄로 보일 정도로 막 나갈 거 같은 표정이더군. 대체 뭘 본 거야?”

 

 

아스널은 그런 말을 하면서 다시 움직이는 유상의 모습으로 눈을 돌렸다. 끽해야 300m 남짓하게 움직인 그는 희연이 넘어지자 본인이 직접 업고 달렸다. 극도의 이기주의가 만연하던 멸망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헌신에 아스널은 흥미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이트 칙 한 기가 유상의 모습을 포착하고 몸을 틀었다. 칸과 아스널은 동시에 좋지 않은 결말을 예감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더 이상 도망도 못 치는지, 유상은 건물 잔해 사이에서 희연을 뒤로 숨기고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의 눈빛은 심지가 굵었지만 여전히 두려운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이트 칙은 일부러 그를 놀리는 것 마냥 천천히 걸어왔다. 기관포도 아니고 기관총이 장전되는 묵직한 소리가 들리자 유상은 눈을 감았다.

 

“안 돼-!!!!!!!!!!!”

 

칸은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목숨이 붙어있어서 현재 이런 기억을 남겼다고 해도, 그가 걸레짝이 되는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나이트 칙의 총구가 유상을 향하는 순간, 그의 뒤에서 희연이 뛰쳐나와 그를 밀쳤다. 기관총은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수발의 총탄을 발사해 희연의 몸을 관통했다. 뜻밖의 광경에 칸도 아스널도 경악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

 

유상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희연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으나, 사람이 너무 놀라면 입이 굳어진다는 말대로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의 선을 넘자 그는 입도 벌리지 못했다. 그런 그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는 나이트 칙이 유상을 향해 다시 총구를 겨누는 순간 급파된 시티가드가 나이트 칙을 향해 산탄총을 쏘았다. 슬러그탄에 몸통이 관통된 나이트 칙은 그 자리에서 작동을 정지하고 쓰러졌다. 기능이 정지해있던 유상은 총성에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쓰러진 희연을 부여잡았다.

 

“아아... 으아아아!!!”

 

“오... 빠...”

 

유상은 말을 하지 못했다. 복부에서 피가 흥건히 흘러나오는 희연을 안고 굵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게 전부였다. 그의 입이 움찔거리면서 무슨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말이 아닌 울음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조금이라도 출혈을 줄여보려고 유상이 자신의 와이셔츠를 벗어 희연의 상처를 지혈했으나 이미 그녀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바람 앞의 등잔 같은 처지에 놓인 희연의 안색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완연했다. 그녀는 피곤한지 눈을 깜빡이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괜찮...아... 이걸로... 오빠...한테... 상냥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유상은 더욱 서럽게 울부짖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누르며 그런 말 말라며 고개를 저었으나 희연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게...도... 영...혼...ㅇ.....”

 

말을 끝마치고 전에 그녀의 영혼은 부서진 육신을 떠났다. 동공이 풀린 그녀의 눈을 보고 안 좋은 결말을 예감한 유상은 희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마치 잠에 빠진 사람을 깨우려는 듯한 손놀림이었으나, 살아있는 자의 온기가 식어가는 것만 돌아오자 그는 모든 감정을 토해내며 오열했다. 희연의 시신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짐승이 포효하는 광경 같았다. 겨우 몇십m 거리에서 모든 걸 본 칸과 아스널은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갔다.

 

“....”

 

한참동안 그러고 있던 둘은 그 후로도 유상이 혼을 토해내는 내내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아스널은 리마토르와 복도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기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사랑을 시작하라고 조언을 건넨 자신의 생각이 지나치게 짧았다는 결론에 그녀는 속으로 괴로워했다. 칸 또한 마찬가지였다. 뼈에 새길 정도로 깊은 사랑을 했다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사랑을 밀어붙였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유상과 희연이 사랑한 모든 과정을 보지 못했으나 상대방을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한 모습에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희연의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졌다, 희연.’

 

칸은 속으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녀의 사랑보다 희연이 주었던 사랑이 더 컸다는 생각에 칸은 끝내 소중한 이를 잡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했다. 심장이 부서진다 해도 이토록 아프지는 않을 터인데, 칸은 자신의 온몸을 달군 쇠사슬로 묶어 화산에 매달아놓아 천천히 익히는 형벌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

 

둘은 한참동안 말로 하지 않았을 뿐 그의 모습을 보며 슬픈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눈물줄기가 옷을 흥건히 적실 정도임에도 그녀들은 유상의 모습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한참 뒤 시티가드가 병력과 장비를 증원해서 도시를 탈환하기 전까지 그는 희연의 시신을 각혈까지 하며 지켰다.

 

 

“.....”

 

빛이 환하게 비쳐 시야를 가렸다. 아스널과 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력이 돌아왔을 때 그들이 본 모습은 블랙리버가 세운 군사기지에서 유상이 면접을 보는 장면이었다. 한눈에 봐도 피폐해진 그의 얼굴은 그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음을 제3자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스널은 안타까워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삼안에서 근무하셨다고요?”

 

“...네.”

 

유상은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했다. 군복을 입고 블랙리버의 완장을 찬 남자는 유상에 대한 서류를 뒤적이더니 흥미롭다는 투로 물었다.

 

“철학 연구원이라, 바이오로이드의 사상을 연구하셨네요. 이거 많이 눈에 띄는 이력입니다. 저희 블랙리버 사에서 최근 연구하고 있는 분야에서 사상 조정이 많이 필요한데, 마침 이런 분이 나타나셔서 저희로서는 무척이나 행운이군요. 한 번 저희 측에서 근무해볼 생각 없으신가요?”

 

스카우트 제의. 군사기업인 블랙리버가 군사학이나 공학이 아닌 철학 전공자를 채용한다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비상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귀한 기회였으나 유상은 혼이 빠져나간 껍데기처럼 말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적당히 끄덕였다. 동의의 대답을 들은 블랙리버의 관계자는 그를 안쪽으로 따로 안내해서 다른 관계자에게 인계했다.

 

“저희가 원산에서 연구를 진행하다가 서울로 이전한 거라 이곳의 시설이 더 최신입니다. 외부의 공격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며, 연구시설은 대부분 지하에 위치해있으니 시름은 놓으시고 편히 연구만 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상을 인계받은 관계자는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거나 말거나 유상은 초췌한 몰골이었으나 관계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를 사무실로 데려가서 하얀 가운과 카드키를 주었다.

 

“연구원은 무조건 하얀 가운을 입는 게 저희 원칙입니다. 카드키는 개인실과 3등급 보안단계 공용실을 돌아다니실 때 쓰시면 됩니다. 2등급 보안단계 공용실 이상부터는 따로 방문 목적을 고지하고 허가를 받아야하니 알아두세요.

 

아, 이걸 빼먹을 뻔했네요. 여기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모두 코드 네임으로 부릅니다. 이유상 씨의 코드네임은 Rimátor입니다.”

 

설명을 전부 들은 유상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과 침대, 텅 빈 책장만 있는 휑한 방에 개인물건이라고는 방금 받은 흰 가운이 전부라는 사실이 그가 이 공간에 섞이지 못하는 이물질이라고 말해주었다.

 

“.....”

 

유상은 말없이 가운을 의자에 걸쳐두고 침대에 누웠다. 졸린 것도 피로한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서 있을 정신적 기력이 없어서였다. 단 며칠 사이에 연인을 잃고 삶의 기반까지 파괴당한 그는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유상은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생존하는 중이었다.

 

“아스널, 궁금하지 않아? 대체 그 희연이라는 여자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슬퍼하는 걸까?”

 

“나도 모르겠네. 일반적인 연인 관계가 저렇게 깊어지려면 교제가 장기간 이어졌거나,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특정한 사건이 있었다는 뜻인데 우리가 본 기억에는 그 부분이 없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칸이 침묵을 깨고 아스널에게 질문을 던졌으나 아스널도 딱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여태까지 리마토르의 기억은 모두 유상의 기억이었다. 블랙리버에 이르러 리마토르라는 코드 네임을 받았으나, 오르카호에서 보여준 진지하면서도 밝은 그의 모습과 폐인이 되다 시피한 유상의 모습은 연속성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본 기억들이 끊겨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곳에 답이 있을지도 몰라. 닥터에게 그 부분을 보여 달라고 하자.”

 

칸은 결론을 내리고 닥터에게 연락을 취했다. 칸의 이야기를 들은 닥터는 기겁하면서 바로 반대했다.

 

“안 돼! 기억이 끊겨있다는 건 그 기억을 잇는 시냅스의 연결이 강하지 않다는 거야. 약한 연결을 가진 시냅스의 기억을 읽으려면 오빠의 무의식으로 더 내려가야 하는데, 무의식에는 다양한 자아가 잠재되어 있어서 자칫 휩쓸리면 언니들의 자아가 붙잡힐지도 몰라. 너무 위험한 도박이야.”

 

닥터가 위험성을 설명했음에도 칸의 의지는 결연했다. 굳은 뜻을 내비치며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 부분을 보지 않으면 기억의 조각이 맞춰지지 않아.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어.”

 

“안된다고! 너무 위험해!”

 

“내려가는 건 나 혼자야. 돌아오든 말든 내가 책임을 지겠어.”

 

칸의 말에 아스널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자신이 동행하려고 했는데, 도와줄 이도 하나 없는 곳으로 혼자 간다는 칸의 결정은 당황스러울 만했다.

 

“아스널. 여기서 남은 리마토르의 기억을 봐주길 부탁할게. 리마토르가 이곳에서 동면을 들었을 테니 남은 기억은 그리 길지 않을 거야.”

 

“하지만 칸, 그런 위험한 일을 혼자 하겠다는 건 부담이 너무 커. 차라리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나아.”

 

“돌아오지 못할 경우도 생각해야지. 장성급 장교를 두 명이나 잃을 바에야 한 명만 잃는 게 더 나아.

 

그리고 난 리마토르가 가르쳐 준 걸 따라야 해서 말이야. 지금보다 행복해지는 걸 목적으로 걸고 나아갈 용기를 내보려고 해.”

 

칸은 그가 자신에게 해준 아들러 심리학 이야기를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가 그녀들을 도와줬으니 이제는 그녀들이 그를 유상의 시간에서 리마토르의 시간으로 잡아주겠다는 칸의 뜻에 아스널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보내줘야지. 단, 멀쩡하게 돌아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리마토르의 동정은 내가 가져가겠네.”

 

“하하, 리마토르랑 공부하면서 철학자가 다 되어가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색욕의 아스널이었어?

 

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특유의 야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북돋는 아스널의 모습에 칸은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칸의 모습은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더 깊은 무의식으로 들어간 칸을 뒤로하고 아스널은 유상이 리마토르가 된 남은 이야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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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갑자기 할 일이 늘어서 글 쓸 시간이 많지가 않네. 분량이 많이 줄은 건 미안하다.


내가 이번 에피소드에서 목표로 한 건 사람의 멘탈이 갈려나가 인격이 망가지기 직전의 극한상황에서 발생하는 인격적인 도야였는데, 막상 쓰고 보니 너무 분위기가 평범한 거 같아. 더 어둡고 맵게 묘사가 안 되는 거 같아서 자꾸 아쉬운 뒷맛이 남네.


다음 편에서는 매운맛을 올릴 수 있도록 구 인류의 ㅈ간 짓을 어느 정도 묘사할 예정이야. 수위 조절을 하겠지만 맵다고 느낄 정도는 들어갈 테니 면역이 없는 사람들은 미리 알아두길 바래.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