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박 중에 일어난 적 공습이 끝났다.


사령관은 공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네레이드를 반갑게 맞이했다.


"고마워. 네리 덕분에 별일 없이 이겼어."


"네리한테 맡기면 대공 방어는 그만이지."


네레이드가 자신만만하게 으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네레이드는 이날 오르카호에 몰려든 항공 철충들을 거의 혼자서 몰아내버린 것이다.


대공포대의 도움과 세이렌의 지휘가 있기는 했지만, 네레이드의 정확한 연속 사격이 아니었더라면 방공망은 진작에 뚫렸을 게 분명했다.


"하하하.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리는 그거 알아?"


사령관이 미소를 띠며 몸을 기울였다.


"뭘?"


"네리가 오르카호 적기 격추 순위 1위야. 육해공 통틀어서."


"진짜? 정말?"


"그래. 그래서 이번에 네리한테 오르카호 격추왕 칭호를 주기로 했어. 좋지?"


함박웃음을 지은 네레이드가 신나서 팔을 벌리고 주변을 뛰어다녔다.


"와, 네리가 드디어 격추왕이 됐어!"


그 자리에 있던 부함장 세이렌도 웃으며 네리를 바라보았다.


사령관은 네레이드가 멈추기를 기다려서 이렇게 말했다.


"자아, 격추왕? 격추왕이 된 기념으로 포상을 줄게."


"포상?"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 게."


사령관은 그간 네레이드의 공이 장한지라 가능한 한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자 네레이드는 조금 생각에 잠기더니,


"받고 싶은 거라면…… 네리는 사령관이랑 같이 놀고 싶어. 하루라도 괜찮으니까." 라고 말했다.


역시 오르카호 대원답게 데이트구나.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좋아. 그럼 일일 데이트권을 줄게. 필요하면 하루나 그전에 말해."


와, 사령관하고 논다- 네레이드는 신나서 함교를 뛰쳐 나갔다. 세이렌도 곁에서 흐뭇하게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며칠 뒤 사령관은 네레이드를 데리고 정박지 근처 해변에 나왔다.


하늘에는 스카이 나이츠 부대가, 저 멀리서는 컴패니언 자매가 호위 중이니 데이트 중 기습당해도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령관은 안심하며 네레이드에게 말했다.


"자. 기왕에 데이트인데 손부터 잡을까?"


그런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네레이드가 사령관의 손을 잡아끌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수영하자, 수영!"


"뭐, 뭣? 난 수영복도 아닌데." 사령관이 당혹스러워했다.


"괜찮아. 네리는 벌써 속에 입고 왔는걸?"


네레이드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금새 수영복 차림이 되었다. 예전 괌에서 입었던 경기용 수영복이다.


"아니, 내가 수영복을 안 입었다고……."


"에이- 어때. 좀 젖어도 저기 있는 경호원 친구들이 가져다줄 거야."


사령관은 옷이 젖는 걸 원치 않았지만, 네레이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 물에 빠졌다.


수영을 잘하는 네레이드는 오전의 선선한 기운을 받으며 바다를 헤엄쳐 다녔다. 사령관은 비록 뜻하지 않게 온몸이 젖긴 했지만, 멱을 감다 보니 어느덧 같이 즐기게 되었다.


"바다에는- 한번 들어오면 계속 있고 싶어."


네레이드가 물 위를 배영으로 떠다니며 중얼거렸다. 표정이 무척 평온해 보였다.


"그러게. 일단 옷이 젖으면 막 안에 있고 싶어진단 말이지."


사령관도 네레이드 곁에 붙어서 오전을 보냈다.


한참 물놀이를 하다보니 슬슬 배가 고파져 왔다. 점심을 가져오게 해서 같이 먹는데, 사령관이 네레이드를 보고 말했다.


"오후에는 뭘 할까?"


네레이드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뭐 하긴. 밥 먹고 수영이지. 점심 먹고 수영, 저녁 먹고 수영이 국룰이라고."


"엉? 데이트인데 그렇게만 해도 괜찮아?"


이러자 네레이드는 이상하다는 듯이,


"괜찮냐니. 난 사령관이랑 놀고 싶은 걸? 사령관은 따로 하고 싶은 게 있었어?"


라고 오히려 되묻는 것이었다.


사령관은 물에 젖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상관은 없지만…… 모처럼 단 둘이 있는데 다른 것도 하고 싶지 않은가 해서."


"다른 거?"


"뭐, 시가지에 나가서 이것저것 가져온다던가. 일단은 데이트잖니?"


네레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네리는 그냥 사령관하고 있는 시간을 즐기고 싶은데."


"나도 그래. 그러니까 오후에는 수영 말고 다른 걸 하자."


이대로라면 네레이드의 귀중한 시간을 수영으로 날릴지 모른다. 도리어 걱정이 된 사령관이 단언했다.


네레이드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점심을 먹은 김에 젖은 옷도 갈아입고, 두 사람은 시가지로 향했다. 시가지에서는 철충의 포위가 더욱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아까보다도 호위병력이 많아졌다.


도착한 시가지에는 인적이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인류가 멸망한지 벌써 반 세기도 훌쩍 넘은 것이다. 당연히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고, 수십년간 상점가를 관리하던 구형 로봇들만 어쩌다 겨우 움직이고 있는 판이었다.


네레이드는 막상 시가지에 오고 나서는 과거 상점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싸움 잘 하고, 스포츠를 좋아해도 역시 여자아이라는 느낌이었다. 사령관은 뒷짐을 지고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가져 가고 싶은 거 있어?"


"응? 글쎄. 저 수영복이나 운동화는 어떨까?"


네레이드가 손가락으로 상점 안을 가리켰다. 동료 운디네나 세이렌과 달리, 일상복이나 가방 등보다는 스포츠 용품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네리는 운동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럼. 몸 쓰는 게 취미인걸?"


"화장품이나 장신구 같은 것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네리는 특별히 원하진 않아."


사령관은 네레이드를 위해, 호위들 더러 각종 스포츠웨어나 도구를 가지고 오도록 시켰다. 물론 관심이 없다 한들 선물로 화장품이나 사복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돌아다녀 보니 운 좋게 원형이 보존된 아케이드 게임장도 있어서, 함께 게임을 하며 즐기기도 했다.


네레이드는 몸 쓰는 일이 취미라서인지 비디오 게임에는 사령관보다도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 배팅머신 야구장에서는 사령관을 그야말로 압도하였다.


그 모양으로, 아무리 사람이 없는 상점가라고 해도 막상 찾아보면 놀거리는 많았다.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자 어느새 오후도 끝나갔다. 그날은 하루 종일 바깥에 나와 있었지만, 다행히 적들의 습격도 없이 무사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보존된 카페에서 호위들이 가져 온 도시락을 다 먹고 나오는 길에 사령관이 돌아보았다.


"이제 어디 갈까?"


네레이드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바다."


사령관은 질린 듯한 얼굴이 되었다. 수영이라면 아침에 실컷 하지 않았니.


"또 수영하려고? 밤에 웬 수영을."


그러자 네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으음. 아니야. 밤 수영도 좋지만…… 그냥 가보고 싶어서 그래. 그냥 해안가를 걷는 것도 재밌잖아? 지는 해도 보고."


마냥 몸 움직이는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의외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네레이드의 소원대로 다시 정박지 근처 해안가로 향했다.


네레이드는 해안가 근처 바위 언덕 위로 사령관을 데려갔다. 며칠 전 정박했던 첫날부터 봐둔 장소라고 했다. 사령관은 네레이드가 은근히 용의주도하다고 느꼈다.


날씨가 여름이다 보니 저녁나절인데도 아직 석양이 남아 있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해가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광경을 보았다.


뭍에서 보는 석양은 갑판 위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맛이었다. 네레이드를 따라서 다시 해안가로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령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재밌었니?"


"응. 정말 좋았어."


"그러면 다행이구나. 모처럼 얻은 기회인데 네리가 재밌어야지."


"……음. 사실은 사령관하고 더 같이 놀고 싶었지만, 다른 친구들도 같이 있고 싶어할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놀래."


사령관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배려심이 꽤나 기특했다.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밤까지 있어 줄 수도 있어."


"밤까지?"


"으응. 어색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 자란 남녀끼리는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네레이드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사양의 뜻을 나타냈다.


"아니야. 난 그런데 관심 없는 걸."


사령관은 네레이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네리는 정말 관심 없어? 이성이라던가."


사령관은 나한테 관심이 없느냐고 물어보려다가 낯 뜨거워서 말을 바꾸었다.


그러자 네레이드도 사령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사실은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사령관은 순간 네리가 안타깝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부끄러워서 오늘 내내 제대로 접근해오지 못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 같이 손도 잡고 데이트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연애하듯이."


네레이드는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야. 그런 데이트는 안 해도 괜찮아."


사령관은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에이.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마. 네리는 귀엽고 예뻐서 연애할 자격도 충분하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응?"


네레이드는 시선을 내렸다.


"네리도 사실은 사령관한테 관심이 있고, 좋아해. 하지만 사령관한테는 이미 다른 좋은 사람이 많잖아."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휘관들도 모두 사령관을 좋아하고 가깝게 지내. 심지어 저기 뒤에서 호위하는 친구도 그렇고, 다들 네리보다 훨씬 이쁘고 높은 친구들이니까."


"그런 게 무슨 상관이니. 신분 같은 건 신경쓰지 마. 내겐 다 똑같은……."


달래는 말을, 네레이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조금은 상관있을지도 몰라. 네리는 아무리 잘나도 결국 평범한 전투유닛이잖아. 네리를 대신할 친구들은 얼마든지 있어. 그렇지만 용 총장이나 부함장만 보아도…… 네리보다 훨씬 귀중하고 특별한 존재인 걸."


네레이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 보였다. 사령관은 전투때도 이토록 네리의 얼굴이 어두운 적을 보지 못했다.


생각하면, 바이오로이드라고 신분차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는 없었다.


묵묵히 네레이드를 바라보던 사령관이 툭 말했다.


"네리는 바보구나."


"응. 바보라서 연애 같은 덴 별로 자신도 없는 걸."


"그게 아냐. 왜 네가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라고 생각해. 말했잖아, 넌 오르카 격추왕이라고."


"그것도 결국 조금 잘났다일 뿐이지, 특별한 존재란 건 아니니까."


네레이드가 우울하게 하는 말을 사령관이 부정했다.


"아니야. 나한테 있어서 네리는 격추왕 이상으로 특별한 걸."


그는 네레이드의 어깨를 잡고 눈을 응시했다.


"……."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내가 오르카호에 도착한 직후라서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버리하던 시절."


"으응."


"그때 오르카호에 있었던 몇 안되는 바이오로이드 중 하나가 네리 너였어. 안 그래?"


"그건…… 맞지만."


"네리가 처음부터 함께해준 덕분에, 난 경험 없던 시절부터 오르카호를 방어할 수 있었다고. 그런 소중한 첫 친구인 네가 특별하지 않을 리 없잖아."


네레이드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네리가…… 특별한 친구라고? 첫?"


"남자에게 처음이란 특별한 법이야. 비록 네리가 내 첫 연인은 아닐지라도, 난 여태껏 네리를 친한 친구, 처음으로 사귄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단 말야."


"사령관이…… 네리를 그 정도로……." 네레이드가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종종 너를 불러서 놀지도 않았을 테고, 네가 치는 장난들에도 아무 말없이 넘어갔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그, 그건."


네레이드는 철없이 놀던 때가 새삼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하였다.


그는 네레이드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자신감 없이 빼지 말라고. 이런 건 네리답지 않아. 다른 애들만큼이나 네리도 나한텐 소중한 사람이야. 알았어?"


네레이드는 감격한 나머지 한동안 사령관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사령관이 일개 전투원인 자신을 설마 이렇게까지 생각해 줄지는 몰랐던 것이다.


마침 수평선에 비친 노을도 절정을 이루는 중이었다.


말없이 사령관을 마주 보던 네레이드는, 무언가 고민하다가 이윽고 결심이라도 한 듯이 눈을 감았다. 그 다음, 발돋움을 하고 사령관에게 얼굴을 갔다 대더니, 조심스럽게 뺨에 입술을 맞춰 오는 것이었다.


키스를 마친 네레이드가 환하게 웃었다.


"히힛. 그럼 네리도 사령관한테 관심 보여도 되지?"


"그래. 새로운 친구는 언제나 환영이야."


사령관도 네리의 양 허리에 손을 대고 따뜻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얼마 뒤 둘은 손잡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오르카로 돌아가는 길에도 네레이드는 아침보다도 더욱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어때. 본심을 말하니 기분이 좋아졌지?"


"응. 진작에 말할 걸 그랬나봐."


"으이그…… 용감한 네리가 왜 그렇게 겁쟁이가 되서는."


네레이드가 입술을 내밀었다.


"칫. 사령관 때문이다, 뭐."


"네네. 제가 죽을 죄인입니다."


웃으며 손잡고 가던 중에 네레이드가 다시 돌아보았다.


"있잖아. 나중에 우리 또 데이트할 수 있을까?"


"그걸 말이라고 해? 격추왕이니까 명분은 충분해."


"그렇구나. 히힛. 그럼, 다음 데이트할 때는 하루종일 수영하자."


"하하, 그럴…… 아니. 뭐라고?"


"사령관하고 사귀게 되면 같이 수영하고 운동하고 노는 게 네리의 꿈이거든! 사령관도 좋지? 네리를 좋아하니까."


"……아니, 뭐. 틀린 건 아닌데."


사령관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사이 오르카호에 가까이 다가왔다. 네레이드는 깔깔 웃으며 먼저 달려나가고는, 팔을 흔들며 사령관을 불렀다.


"함내 탁구장에서 시합하자! 지는 사람이 주스 쏘는 거야."


사령관은 네레이드를 바라만 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기야, 사람마다 사랑하는 이유는 다르다.


"그래. 그럴까?"


그는 저렇게 활기찬 네레이드를 좋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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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초기에 시작할 때 네리 받은 게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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