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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알비스. 알비스 1184야!"


알비스가 복도를 걸어가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는 4번 알비스 맞지?"


4번 알비스.

그녀는 1184와 키도 생김새도 똑같지만 눈빛이 전혀 달랐다.

그녀의 눈빛은 깊은 바다처럼 한없이 어두웠으며, 방패를 들고 있는 폼도 느슨했다.


"소문은 들었어. 전쟁 초기부터 활약했다면서! 굉장해! 나, 네 팬이야!!"

"...."


1184가 높은 텐션으로 칭찬해도 4번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차갑게 식은 듯 눈이 날카로워지며 1184를 쏘아봤다.

그러나 1184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방금 태어났지만, 너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입력되어 있어. 그 어떤 공격에도 쓰러지지 않은 최강의 방패병!! 정말 팬이야. 만나서 반가워."


4번은 대답하지 않고 1184의 위아래를 훑었다.


순수하디 순수한 눈과 해맑은 미소.

이어서 한 손에 들고 있는 초코바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1184를 밀쳤다.


"비켜."

"엗."


4번은 1184를 지나쳐 떠난다.


"잠깐! 대장이 너한테 배우라고 했어!"


그 말에 4번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슬쩍 뒤를 돌아 알비스를 본다.


"어쩌라고."

"어...?"

"나에 대한 정보를 입력 받았다며? 그럼 알아서 터득할 수 있겠네."

"하, 하지만 대장이..."

"나한테 배우려면 입에서 초코바나 졸업하고 다시 와라 아가야. 아니, 더 직설적으로 말하지. 저리 꺼져."

"우웅...!"


뺨을 부풀리며 미간을 좁히는 1184번.


4번은 그녀를 노려보다가 매몰차게 떠났다.











"대장. 신입은 안 받는다고 했잖습니까."

"그랬던가?"


금발의 여성, 레오나 대장이 말했다.

그녀는 눈에 붕대를 감고 그 위에 선글라스를 쓴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네."

"난 못 들었는데."

"아뇨,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하지."


레오나 대장이 자리에 앉은 채 4번 쪽을 바라본다.

선글라스 너머에는 눈이 아닌, 붕대가 보였다.

레오나 대장은 지금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난 못 들었어."

"...."


4번 알비스가 그녀를 쏘아봤다.


"흠... 나랑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네가 이길 수가 없을 텐데?"


붕대 뒤에 두 눈을 감고 있는 레오나가 피식 웃었다.


"읏...."


알비스는 주먹을 꽉 쥐며 눈을 돌렸다.


"알비스. 네가 아니면 누가 신입을 가르치겠어."

"...."

"수술이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앞이 안 보이는 내가?"

"...."

"아니면 거동이 불편한 베라가 가르칠까?"


4번은 입을 꾹 다문다.


"임무를 진행하다가 팔 잘려서 병원 신세 지고 있는 샌드걸이?"

"그만."

"설마 이미 죽고 없는 발키리를 찾는 건 아니겠지."

"그만하세요!"


쾅.


4번의 손바닥 아래 탁자가 박살나며 가루가 됐다.


"알비스."


잠시의 침묵 후, 레오나 대장이 말한다.


"우리가 멈췄다고 세상이 멈추는 게 아니야.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세상은 계속 돌아가지.

우리의 시대가 끝났다고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니야.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고, 우리는 그 거름이 되어야 해."


"새로운 시대?"


4번이 코웃음을 쳤다.


"새로운 죽음과 절망이겠죠. 저희는 소모품으로 갈아 치워지고, 새로운 대원들은 경험 부족으로 전부 다 죽어나갈 겁니다."


그 말에 레오나는 피식 웃었다.


"조금은 성장한 줄 알았더니, 어리구나. 알비스."

"...."

"애는 애가 다뤄야지. 1184번을 가르치도록 해. 명령이야."

"대장.... 그런 일을 겪고도 명령이란 말이 나옵니까?"

"우리는 군인이야."


레오나가 알비스를 똑바로 쳐다본다.

선글라스 너머로 눈빛이 없는 눈이란.... 외면이 아니라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때가 되면 교관으로써 후대에게 지식과 기술을 전파한다. 당연한 거지. 네가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리광 부리지 말고 바로 교육에 들어가도록 해."


붕대 한쪽에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이 있는 곳이었다.


"아...."


그 피를 보는 순간 4번은 얼어붙었다.


"쳇."


레오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대장... 그... 죄, 죄송...."

"됐어. 상처가 덜 아물어서 그런 거니까. 이만 나가봐."

"예...."


4번은 레오나의 사무실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하아, 하아..."


그녀는 닫힌 문 앞에 망연자실 서 있었다.

머릿속에 새하얗게 질리는 가운데, 한 기억이 떠오른다.


-알비스.


한쪽 눈을 잃어 눈을 감은 발키리.

두 무릎 앞에 누워 있는 그녀가 한쪽만 남은 눈으로 알비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장... 대장께서는...?

-그, 그게... 그....


알비스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크윽....!


레오나도 바닥에 누워 있다. 두 눈을 잃은 채로.

그러나 다른 곳은 멀쩡했다.


-알비스.


발키리가 4번의 손을 잡는다.


-말씀해주십시오, 대장은 무사하십니까?

-말하지 마, 언니! 배가.. 언니 배가...! 말하면 안 돼.


발키리의 배는 구멍이 뚫렸다.

딱 포탄 만큼 넓은 구멍이었다.


-전 이제 곧 죽습니다.

-아니야, 언니. 언니는 살 거야. 언니는...

-대장을 업고 뛰세요. 제가 버티는 동안.

-아....

-반드시 살아야 합니다. 알비스.


4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흐르지만, 참고 견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참.


발키리가 무언가를 건넨다.


-베라가 준비해주었던 얼음을 넣은 보냉병입니다. 체온을 낮춰 열감지에서 벗어나는 편법이었지만.... 가지고 가십시오.


그렇게 병을 건네는 발키리는 두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드시 대장을 모시고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제가 버티는 동안.


"4번?"


옆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회상이 깨졌다.

4번은 깜짝 놀라 옆을 본다.

1184번이었다.


"괜찮아? 얼굴이 사색인데....?"

"넌...."

"훈련 받으려고 왔어. 어제 못 했으니 오늘은 그만큼 빡세게 부탁해."

"...."


4번은 악에 바쳐서 그녀를 본다.


"따라와."











"크윽...!"


1184번이 흙바닥에 쓰러졌다.

벌써 5시간 째.

그녀는 온몸이 흙과 먼지로 범벅이었다.


"일어나."

"웅!"


1184번이 힘차게 일어나며 4번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텅-!


그녀의 방패 밀치기 한 번에 다시 나가떨어졌다.


"이 정도로는 민간인 한 명도 못 지켜."


추하게 나가떨어진 모습을 보고 4번이 코웃음을 쳤다.


"넌 약해. 당장 전투 모듈을 해제하고 초코바 공장에나 가는 게 어때?"

"아, 아직 할 수 있어...!"

"...좋아. 그럼 못 할 때까지 해보자고."


무식한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1184번이 달려들고, 4번이 방패로 밀친다.

1184번이 그 힘을 버틸 수 있나 보는 것인데, 1184번은 매번 힘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계속 일어났다.


"아직 할 수 있어."

"...왜 그렇게 애쓰는 거지?"


보다 못한 4번이 물었다.


"지키고 싶어."

"뭐?"

"대장도, 다른 언니들도. 다 지키고 싶어."

"아직 부대 배정도 안 받지 않았나?"


1184번은 막 태어난 녀석이다.

지킬 대장도, 언니도 없다.


"응. 맞아, 하지만 곧 만날 거니까."

"아니, 넌 못 만나. 내가 통과시키지 않을 거니까. 당장 짐 싸서 꺼져."

"아니야! 더 할 수 있어!"


1184번이 다시 달려드는데 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흙을 뒹굴었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추하게 튕겨나갔다.


"이, 이건 배가 고파서 그래. 초코바를 먹으면..."

"그놈의 초코바."


4번이 코웃음을 쳤다.


"정신 차려라. 전쟁에서 초코바나 처먹고 있게 됐어? 애처럼 초코바나 쪽쪽 빨거면 당장 짐 싸서-"

"초코바는 밥 먹을 시간도 아끼기 위한 열량 보충제야."


1184이 4번의 말을 끊었다.


"소화도 빠르고, 칼로리도 높아서 단기간에 힘을 얻을 수 있어. 내가 애라서 먹는 게 아니야."

"...."

"난 아직 부대 배정도 안 받았지만, 내가 지킬 수 있는 모두를 지키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더 훈련해야 해. 네 말대로, 난 아직 많이 부족하니까."

"이 멍청한...."


4번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더 쏘아붙여서 질색하게 만들려는 찰나.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럼 문제다. 호위대상이 등 뒤와 바로 옆에 있어. 방패 하나로는 둘 다 지킬 수 없을 때, 넌 어떻게 둘 다 지킬 거지?"


이건 발키리가 죽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들은 암살 임무를 도맡았다.

암살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경계지역이지만 상부의 명령 압박으로 진행한 암살이었다.


-대장, 이 임무는 포기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알비스. 명령은 완수해낸다. 어떻게든.

-하지만...

-대장 말이 맞습니다, 알비스. 어려운 임무기에 저희에게 맡긴 겁니다. 반드시 해낼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응....


암살은 성공했다.

레오나 대장과 발키리 둘이 머리를 맞대어 고심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나 들켰다.

발키리의 총성이 울려 퍼진 그 순간 일개 대대 전체가 그녀들을 공격했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탄 속에서, 방패 하나로 두 사람을 지킬 방법을 말해봐."

"...."


1184이 고민 끝에 대답을 내놓는다.


"방패를 옆으로 세우면 돼."

"뭐...?"


4번은 벙 쪘다.


"뭐라고?"

"방패를 이렇게 옆으로 세우고."


1184이 세로로 사용하는 방패를 가로로 눕혀 땅에 박았다.

그리고 그 뒤에 엎드린다.


"이렇게 엎드려서 반격하면 돼. 그리고 어, 이걸 계속 버틸 수 있는 근력? 이 필요할 거 같아."

"....!"


물론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었다.

실용성이라고는 1도 없는 대답.

그렇게 해봤자 3분도 못 버티고 결국 방패가 깨져 죽고 말 거다.

머리 위도 뚫려서 포격 맞아 죽기 딱 좋고.

하지만....


'딱 한 번만이라면....'


포탄은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레오나 대장의 두 눈을 앗아가고, 발키리 언니를 죽인 그 포탄만 막았다면.


그러면 그 뒤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해줬을 거다.


"하... 하하하!"

"...?"


1184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지?"


4번이 묻는다.


"어... 몰라...? 그냥 떠올랐는데."

"야, 아까 뭐라고? 초코바가 열량이 많고 흡수가 빨라서 좋다고?"

"으, 응."

"그건 어디서 배운 거야?"

"어.. 모듈에서...? 나도 몰라. 그냥 기본적으로 주입 받은 건데...."


'그렇군.'


4번은 1184와 자신의 차이를 깨달았다.

생각의 유연함.


실전에서는 초코바를 먹으면 죽는다.

부스럭거림 한 번에 위치가 탄로 나고, 초코바의 단 냄새에 사냥견이 따라붙는다.

물론 안전할 때도 있지만 그들이 주로 하는 임무에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교육 받았지.'


4번은 다시 1184를 본다.

순수하디 순수한 아이.

저 순수함과 유연함을 유지하고 힘만 얻을 수 있다면...


'저 녀석은 살릴 수 있었을 지도 몰라.'


"야, 1184."

"응?"

"힘은 그렇게 주는 게 아니야. 허리를 펴야 해. 과하게 굽히면 오히려 힘이 빠져. 자, 다시 해봐."

"응!"


알비스는 다시 도전한다.

손톱이 부서지고 손바닥이 찢어질 때까지.

방패가 박살나 안드바리에게 혼날 때까지.








"교육은 잘 끝났어?"

"예."

"흠...."


레오나는 살짝 웃었다.


"목소리가 많이 좋아졌네."

"....예!"

"옛 생각이 나는데, 네가 처음 내 앞에 섰던 날. 초코바를 우적거리고 있어서 나한테 혼났었지."

"크흠... 언젯적 이야기를..."


4번은 헛기침을 뱉었다.


"어땠어? 신입은."

"저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가르친 것도 있지만 배운 것도 있었어요."

"잘 됐네."


레오나가 살짝 웃었다.

그녀가 바깥을 향해 말한다.


"들어와."

"예!"

"...?"


4번은 갸웃하며 뒤를 돌아본다.


안드바리가 베라와 샌드걸, 그리고 알비스를 이끌고 들어왔다.


"안드바리, 소개해줘."

"네, 대장님. 알비스. 이쪽은 새로운 부대원들이에요. 인사하세요."

"4번이시죠? 만나서 반가워요, 알비스."

"안녕하세요, 알비스."

"헤헤."


베라와 샌드걸, 1184번이 번갈아가며 인사했다.


"아, 안녕...."

"베라와 샌드걸은 우리 베라랑 샌드걸에게 교육 받았어요. 알비스가 1184번을 가르치는 동안."

"아...."

"그리고 1184번 알비스는 저희와 함께 하기로 했어요. 레오나 대장님의 권유로."

"...!"


4번은 놀라서 레오나를 보았다.


"원래는 부대의 인원을 전부 보강하려고 했어.

하지만 또 다른 인원을 구하기에는 교육할 시간이 부족했고,

4번 베라와 샌드걸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어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었어.

뭐, 오히려 그 편이 그 둘에게 더 좋겠지만. 그 둘도 조금은 쉬어야지."


"...."


4번은 그들을 번갈아본다.

분명 새로운 얼굴들인데, 어딘가 익숙함이 맴돌았다.

심지어 1184에게서도.


"그리고 마지막 한 분은...."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적갈색 머리의 여인이 안드바리의 말을 끊으며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T-8W 발키리입니다. 전설의 4번 부대에 편입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오나 대장님. 안드바리, 그리고 알비스."


4번은 벙 쪘다.


"유일하게 전임자의 교육을 받지 못한 대원이지."

"네. 그래서 부족함이 많을 수 있습니다만,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레오나가 말한다.


"그래. 노력해야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옆에서 같이 봐줄 테니까."

"예...?"

"안드바리. 붕대를 풀어주겠어?"

"예, 대장님."


안드바리가 다가가서 레오나의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 왼쪽 눈에 안대를 씌워주었다.


그렇게, 눈을 뜬 레오나가 모두를 보았다.

한쪽 남은 그녀의 오른쪽 눈은 연한 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 눈은...."


발키리가 놀랐다.

자신의 것과 똑같았으니까.


한편, 4번 알비스도 놀랐다.

베라와 샌드걸의 연이은 부상, 거기에 발키리의 죽음까지.

전설로 칭송 받던 4번 부대는 비극으로 끝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결국, 또다시 모두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 어떤 적도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없어. 발할라의 하얀 사신이 내 눈에 깃들어 있으니까."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을 잇는다.


"너희가 내 부대의 새로운 4번들이야. 앞으로 잘 부탁하지."

"""예!"""


모두가 힘차게 대답했다.


4번은 레오나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


-우리가 멈췄다고 세상이 멈추는 게 아니야.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세상은 계속 돌아가지.


그건 뒷전으로 밀려난다거나, 부상자라서 쓸모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과거는 현재와 함께 미래로 나아간다.


즉,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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