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주의: 이번 편은 조금 매울 수 있습니다.




아스널은 그 후로 몇 주나 되는 시간을 보았다. 빛에 휩싸였다가 다시 정신을 차릴 때마다 시간이 며칠씩 흘러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체감한 시간은 서너 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스널은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유상의 행보를 보며 그의 광기에 두려움을 느꼈다.

 

“아주 훌륭하군, 리마토르 연구원. 어떻게 이런 발상을 매번 하는지 모르겠어.”

 

“고평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체 일부를 폭탄으로 만들어 철충과 자폭시키고 남은 신체는 고기방패로 활용하여 지원부대가 올 때까지 버틸 저지선을 만들다니, 예산과 시간을 대폭 아낄 수 있게 되었어.”

 

“어디 그뿐인가? 인격 모듈을 제거하고 나니 작전 효율성이 이전보다 40% 이상 증가했네. 굉장히 고무적이야.”

 

이사진의 칭찬에 고개를 숙이는 유상을 보며 아스널은 치를 떨었다. 그가 처음 내놓은 인격 말살 계획 이후로 바이오로이드를 철저히 소모품으로 보는 계획이 척척 진행되었다. 브라우니의 신체 일부를 폭탄으로 만들어서 작전 실패 시 자폭을 기본 기조로 만든다거나, 식량 보급을 줄이기 위해 바이오로이드의 신체를 구성하는 배양육의 질을 높여서 동족 포식이나 자가 포식을 식량 확보의 방안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철저한 세뇌가 있었다. 새로 생산되는 부대는 인격이 없는 로봇이나 다름없었으나 기존에 존재하는 부대는 단 몇 줄의 문장으로 논리구조를 재편성해서 자폭을 영광스러운 일로, 동족 포식을 약육강식의 당연한 원칙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이 문장을 복창한다. 

 

우리의 뒤에는 민간인이 있다, 군인은 민간인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군인이다!

 

군인은 죽음까지 각오해서 민간인을 지킨다. 민간인을 지키는 건 군인의 본분이다. 자신을 희생하는 모든 방법이 곧 군인의 본분이다!”

 

아스널은 그가 말하는 내용을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따라 외치는 걸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삼단논증에 오류를 일으켜 자폭을 미덕으로 내세웠음에도 다들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유상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일관성을 내세우는 군대의 특성을 대단히 잘 이용했다. 몇 명만 동조해도 분위기가 형성되어 다수의 생각을 조작하는 여론조작은 폐쇄적인 스틸라인 군부대에서 마치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제군들! 우리가 누구인가!”

 

“군인입니다!”

 

“군인은 누구를 지켜야 하는가!”

 

“민간인입니다!”

 

“군인은 민간인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죽음으로 지켜야합니다!”

 

“그렇다! 우리의 죽음은 민간인들의 삶이 된다!”

 

“와아아아!!!!!!!!!”

 

유상의 말이 끝나자 다들 함성을 내질렀다. 그는 뒤돌아 단상에서 내려오면서 전선으로 나가는 길을 소리 나는 계단으로 바꾼 결과를 바라보았다. 이제 죽으러 가는 그녀들의 얼굴은 결의에 차있으면서도 두려움이 보였으나 계단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더니 곧 공포의 기색이 가셨다. 반대로 전선에서 이탈을 택한 이들이 내려가는 계단은 한 칸을 밟을 때마다 꾸짖는 호통이 들리게 만들어놓아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이탈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필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에 내려가는 계단을 만들어놓아 대비되는 효과를 노린 것도 성과를 거두었다.

 

“넛지와 비교 효과. 이것도 나쁘지 않네.”

 

유상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떴다. 아스널은 그가 점점 악마로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이들의 죽음을 초래하는데 쓰는 유상은 과거 나치의 괴벨스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이봐, 세루스(Servus-하인을 뜻하는 라틴어). 14연대에 적용한 능력주의와 승자독식주의 선동 결과를 보고해라.”

 

“가장 많은 철충을 사살하고 생환한 브라우니에게 모든 보급품을 몰아주고 치하하자 부대 분위기가 안 좋아졌습니다. 억울하면 능력을 기르라고 말했더니 부대의 불만도가 높아졌습니다.”

 

“그럴 때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저지르면 되지. 이 모든 게 다 침공한 철충의 탓이라고 돌려. 철충만 없으면 너희가 이런 고생을 안 해도 된다고 못 박아둬. 어차피 소모품들이니까 깊게 생각할 능력이 없어.”

 

“알겠습니다. 빅 브라더 자극은 계속할까요?”

 

“이탈자가 많이 나온 7연대에만 시행하고, 바로 옆 부대인 8연대에는 포상과 함께 소마 자극을 시행해. 거기에 능력주의 선동을 추가하면 ‘능력이 있으면 보상을 받고 아니면 감시를 당하는구나’라는 생각의 틀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낼 거야.”

 

“말씀하신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유상은 연락을 마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가 자신에게 설명해주었던 인문학적 지식들이 통제당하는 이들을 늪에 빠뜨리고 조여 오는 올가미가 되는 광경을 본 아스널은 도덕성이 결여될 때의 위험성을 몸으로 느꼈다. 유상은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내더니 봉투에서 메스암페타민염산염 결정을 덜어서 주사기 안에 넣었다. 여러 번 해본 솜씨로 정맥에 주사바늘을 꽂은 그는 피스톤을 위로 뽑았다. 몸에서 끌어올려진 붉은 피가 가루형태의 각성제를 녹이자 유상은 피스톤을 몇 번이고 눌러 그것들을 부숴 몸 안에 집어넣었다.

 

“크으...”

 

한순간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온몸에 짜릿한 전기자극이 퍼지면서 문자 그대로 쾌락이 몸을 잠식하자 유상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침을 흘렸다. 쾌락의 절정에 이르러 몸을 침대에 뉘인 뒤, 그는 미친 듯이 천장을 보면서 웃었다. 동공이 확장되어 흰자를 절반이나 가린 상태로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덜덜 떠는 유상은 웃고 있었다.

 

아스널은 그런 그를 보면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뇌가 과부하 되어 인간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저속한 그의 모습을 칸이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빛이 밝아졌다가 가시자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되어 있었다. 필로폰의 효과가 끝난 유상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침대에 앉아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거지?”

 

유상은 찌뿌둥한 몸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짧은 바늘이 12와 1 사이를 가리키고 긴 바늘이 6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밤 12시 30분 정도인가.”

 

아스널은 그의 말을 듣고 빠르게 계산했다. 그가 아침 10시에 출병하는 부대의 사기를 독려하는 연설을 진행했으니 단순하게 계산해도 유상은 14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약에 취해있었다. 처음 주사했던 주사기 외에도 빈 주사기가 하나 더 있는 걸로 보아 유상은 필로폰의 영향으로 맛이 간 상태에서도 투약을 한 번 더했던 걸로 보였다. 아스널은 진심으로 유상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저런 중증 약쟁이로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사는 자가 연구원이었다니. 이래서 구 인류들은 재활용도 못할 폐기물만도 못하다니까.”

 

시계를 보고 머리를 괴던 유상은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밖으로 나왔다. 필로폰의 영향으로 식욕도 생리욕도 마비된 채 쾌락만을 맛보았지만, 과부하가 걸렸던 뇌가 식으면 밀렸던 욕구가 해일처럼 밀려들었기에 그나마 상태가 좋을 때 배를 채워둘 요량이었다.

 

“이래서 약쟁이들이 한 번 약을 시작하면 못 끊어. 미래의 쾌락을 싹 다 끌어와서 현재에 때려 박으니까 약효가 지나가면 바로 폐인이 된단 말이지. 다시 약을 해야 그나마 마이너스에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쉴 새 없이 마약을 주사하고, 그러다가 뇌가 맛이 가서 사망.

 

나란들 이런 딜레마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나는 반동을 견뎌내는 용기를 갖고 있으니 조금 더 연명할 수는 있겠지.”

 

필로폰이 든 앰플을 만지작거리면서 혼잣말을 하는 유상의 모습에 아스널은 사령관에게 마약 단속을 건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컴패니언의 포이가 캣닙 가루를 코로 빨아들이면서 헤롱대는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기는 했는데 마침 유상의 사례를 보자 캣닙 단속을 하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닥치리라는 예견이 들었다.

 

“실례, 뭐 조금 먹을 거 있나?”

 

그 사이 유상은 식당에 도착했다. 불 켜진 식당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직원들은 뭔가를 손질하다 말고 그에게 대답했다.

 

“또 왔습니까? 이 시간에 식사는 불가능하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까.”

 

“누가 식사를 하자고 그랬나, 간단히 요기만 하자는 거지.

 

아, 육회 뜨고 있었어? 한 점만 맛본다.”

 

그는 능글맞은 반응으로 직원의 공격을 흘리면서 직원이 부지런히 손질하던 붉은 살코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날고기의 비린 맛에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이거 맛있네! 몇 점만 먹어도 될까?”

 

“안 됩니다! 장군님들 주안상에 올라갈 안주인데 이렇게 손대시면 곤란합니다.”

 

“씁, 높으신 분들 몫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근데 이 머리카락은 뭐야? 장성들 목구멍에 들어간다면서 위생관리를 이따위로 해도 되는 거야?”

 

유상이 해체되던 고기 옆에 떨어진 기다란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자 직원은 표정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서 머리카락을 뺏어 쓰레기통에 넣은 직원은 칼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그런 건 또 언제 보신 겁니까? 하여튼 눈썰미만 좋아가지고. 아직 손질이 안 끝났습니다. 새김질하는 광경 좋아하시면 계속 보십시오.”

 

“됐어, 스너프 필름은 안 좋아한다고. 그보다 샌드위치 같은 건 없어?”

 

“참나... 냉장고에 맛살이랑 소시지 있으니까 갖고 가서 데쳐 드시든 날로 드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다 챙겨 주는구만. 배려 고마워~”

 

“밤마다 오지 마시고 제발 낮에 제대로 드십시오!”

 

직원의 짜증을 뒤로하고 유상은 냉장고를 열었다. 비닐 포장된 맛살 3개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소시지를 찾던 그는 뼈가 붙어있는 덩어리 고기 사이로 랩에 싸여있는 둥근 고기덩이를 보았다.

 

“뭐야, 이건 소시지가 아니라 햄인데? 짜식... 슬쩍 돌려 말하는 센스하고는.”

 

유상은 랩을 벗기더니 싱크대에서 칼을 꺼내 햄 몇 점을 얇게 썰었다. 하얗고 말랑말랑한 껍질이 붙어있는 햄은 냉장고에서 시간을 보낸 만큼 차갑고 단단했다. 유상은 썰던 햄 한 점을 입에 집어넣고 인덕션을 켰다. 후라이팬에 햄을 후다닥 굽고 설거지까지 마친 그는 약물 후유증이 오기 전에 빠른 입가심을 마치러 방으로 들어갔다.

 

“음~ 이 구수한 냄새. 아무래도 난 채식주의자는 못해먹겠어.”

 

햄의 향을 코로 깊숙이 들이마시면서 그는 육즙을 느끼려고 꼭꼭 씹었다. 비닐포장을 벗긴 맛살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던 그는 직원들의 염장 실력이 영 미숙하다고 느꼈다.

 

“훈제는 기대하지 않아도 염장은 제대로 해야 햄이 먹을 만하지. 이렇게 쓴맛이 짠맛 사이에 섞여서 떫은맛까지 끌어내면 뭔 맛으로 먹으란 거야. 김치가 있어도 어렵다고.”

 

투정을 부리면서 식사를 마친 그는 오한이 찾아오는 걸 느끼고 바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썼다. 몸이 덜덜 떨리면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자 그는 이를 딱딱거리면서 혼잣말을 뱉었다.

 

“빌어먹을, 또 시작인가.”

 

필로폰 투약의 반동이 온몸을 덮치자 그는 일부러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아스널은 그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도 그가 먹었던 햄이 이상하게 석연치 않았다.

 

“전시 상황에 여유롭게 고기를 먹을 상황이 된다고? 여기서 축산연구까지 하는 게 아닌 이상, 가축을 도축해서 육회를 뜰 정도로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는 없을 텐데.”

 

배양육이라든가 냉동육이라든가 하는 설명을 붙이면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으나 아스널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빛이 강렬하게 비쳐 시야를 강탈했다가 돌려주었다. 시야가 돌아왔음에도 유상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앓고 있는 장면이 들어오자 아스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분명 시간이 흘렀을 텐데?”

 

그녀는 그리 말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시계바늘이 11시 정각을 가리키자 그녀는 시간이 안 흐른 게 아니라 하루가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유상의 방에 걸린 달력에 하나 더 늘어난 X표를 보고 생각을 확신한 아스널은 유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후... 이제야 조금 나아지네...”

 

후유증이 서서히 가시는지 유상은 다 죽어가지만 조금 활기를 띠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한이 전부 가시지 않아서 몸을 떨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전날처럼 식당으로 향했다.

 

“여~ 신세 좀 지러 왔어.”

 

“아, 또 온 겁니까?”

 

유상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직원이 또 짜증을 냈다. 하지만 유상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쉭쉭 소리를 내며 증기를 내뿜는 찜기를 보더니 오늘은 순대라도 만드냐고 질문을 던졌다.

 

“예예,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허파랑 간 찌고 있는데 또 달라고 하실 거 다 압니다.”

 

“잘 아네. 한입만!”

 

직원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찜통에서 허파와 간을 몇 점 꺼내 그에게 주었다. 소금을 꺼내 간을 해서 맛보던 유상은 직원이 손에 들고 있던 내장을 보면서 물었다.

 

“피순대 만들어? 아주 피가 흥건하네.”

 

“피도 들어가고, 적당히 남은 부위 갈아서 채우려고 합니다. 고기순대로 들고 오라고 윗분들이 지시하셨습니다.”

 

“고기 순대 좋지. 그것도 한입 줄 거지?”

 

“안됩니다! 그건 한입도 못 드립니다!”

 

유상은 능구렁이처럼 화제를 돌리려다가 한쪽으로 빠져있는 혀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 절반도 안 되는 혓조각을 들더니 직원에게 물었다.

 

“혀는 윗분들이 안 드신대?”

 

“그건 폐기 대상입니다.”

 

“잘 됐네. 이건 내가 먹는다.”

 

“예? 혀를 드신다고요?”

 

직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유상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뭐가 문제냐고 반문했다.

 

“우설(牛舌)이라고 해서 소 혀도 고급 식재료로 쓰였고, 탈무드에도 랍비와 혀로 된 요리를 주제로 하는 설화가 실릴 정도로 혀 요리는 역사 속에서 폭넓게 등장했다고. 옆 동네 일본에 위치한 S시 모리오초에서는 소혀 된장절임이 특산물이라더라.”

 

“예예, 마음대로 하십시오.”

 

직원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상은 다진 마늘을 혀에 바르고 달궈진 후라이팬에 올렸다. 치익 소리를 내며 고기가 익자 그는 소금과 후추를 뿌려 간을 하고 입에 넣었다.

 

“음~ 이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 아주 훌륭하단 말이야. 그런데 이거 나이가 어린 돼지를 도축했나봐? 고기가 많이 연하네.”

 

“사람으로 치면 10살 전후인 새끼를 잡았으니 고기도 연할 겁니다.”

 

“애저찜 같은 어린 동물 요리가 등장한데는 다 이유가 있단 말이지. 오늘도 잘 먹었다.”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제발 낮에 식사를 하십시오!”

 

날카로운 직원의 말을 피해 유상은 또 밖으로 나왔다. 그가 자신의 숙소로 걸어가는 동안 아스널은 그를 쫓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그가 먹은 고기를 보며 의심에 깊이를 더했다.

 

“그나마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소도 아니고 기르는데 많은 자원을 요구하는 돼지를 양식한다고? 역시 수상해. 저 고기는 왠지 무언가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어.”

 

아스널이 고기를 조사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식당 안으로 들이는 순간, 다시 빛이 그녀를 덮쳤다. 눈을 뜨자 이번에는 오후 5시에 저녁을 먹으러 들어오는 유상이 보였다. 웬일로 그가 약을 안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던 그녀의 생각과 동일하게 식당 직원이 감탄사를 입밖으로 꺼냈다.

 

“오늘은 일찍 오셨습니까?”

 

“하루 종일 처리할 보고서가 밀렸거든. 지금 안 먹으면 밤에 못 먹을 것 같아서 왔어.”

 

“참나, 원래 이 시간 아니면 식사 못하는 게 원칙입니다.”

 

직원은 실소하면서도 오늘 식사는 제육볶음이라며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 소식에 싱글벙글 웃으면서 배식을 받으려던 유상은 직원의 손에 들린 굵직한 줄에 시선이 갔다.

 

“넌 뭔 줄을 들고 있냐?”

 

“아, 오늘 장군님들 술상에 올라갈 안주입니다. 며칠씩 맛보셨으니 오늘은 한 번 보시죠.”

 

직원은 줄을 세게 당겼다. 식당 안쪽에서 줄에 묶여 끌려오는 대상에 아스널은 비명을 질렀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온갖 참상은 다 보았기에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구 인류의 참사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직원이 당긴 줄 끝에는 부스스한 산발을 한 초췌한 얼굴의 LRL이 있었다.

 

“이, 이게 뭐냐?!”

 

당황한 건 유상도 마찬가지였다. 안줏감이 나온다길래 냉동육을 큼직하게 들고 올 줄 알았는데, 막상 따라온 건 자기 허리춤 정도밖에 안 오는 어린 LRL 개체였다. 언제부터 안주가 LRL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언어의 사회성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에이, 뭘 놀라시고 그러십니까. 그제도 어제도 드셔놓고선.”

 

“뭐?!”

 

직원은 그가 엄살을 떤다는 투로 장난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상과 아스널은 자신의 상식이 뒤집어지는 직원의 말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인지는 해도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엄살 그만 부리십시오. 바이오로이드는 도구에 불과하잖습니까.”

 

“....그렇지. 그래, 도구지. 그렇고 말고...”

 

유상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아스널도 황망한 표정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직원이 식사 맛있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LRL을 끌고 들어간 뒤에도 유상은 밥 먹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식당에서 발을 돌려 나왔다.

 

그 날 유상은 제육볶음을 먹지 않았다.

 

 

2시간 뒤. 저녁 7시가 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유상의 모습에 아스널은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평소처럼 마약을 하려고 필로폰을 꺼내다가 갑자기 쓰레기통에 뚜껑을 딴 앰플을 넣어 버린 유상은 그 뒤로 내리 2시간을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가? 바이오로이드는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 전장에 나가 죽으라며 강요하던 그대가, LRL이 식용으로 쓰인다는 광경에 양심이 아파오는가?”

 

아스널은 혐오스러운 유상의 모습에 비아냥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도 독설을 날리고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침대에 누워 고민에 잠긴 유상의 표정은 리마토르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상은 허공에 혼잣말을 흩뿌렸다.

 

“희연아, 나한테 상냥한 사람이 되었다고 그랬지?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죽기 전에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희연이 죽은 순간을 떠올린 유상은 희연의 유언을 곱씹었다. 그 모습을 본 아스널은 자신이 보지 못한 유상과 희연의 관계에 중요한 사실이 잠재되어있다는 생각에 칸의 역할이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그녀가 고심에 빠진 그를 지켜보던 사이, 유상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상냥한 사람은 영혼이 천국에 갈 거야. 희연이 네가 그렇게 바란 일이었잖아.

 

나도... 죽어서라도 널 다시 만나려면 천국에 가야겠지.”

 

유상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젖은 말을 허공에 뿌리자 그 말들은 가라앉아 눈물이 되었다. 한 방울이 땅에 떨어지고, 또 다시 한 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수분을 주었지만 그는 세 방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은 유상은 직원을 찾았다. 뜻밖의 방문에 직원은 무슨 일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별 건 아니야. 내가 지금 아동심리학에 기반한 아동자폭병 모델을 구상하고 있는데 표본이 필요해서. 이 애 데려가도 될까?”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새벽에 장군님들이 드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너도 새김질하느라 힘들잖아. 생산실에 가면 배양육 한 덩어리 구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그거 가져다 써.”

 

“장군님들에게 걸리면 저희 둘 다 총살입니다! 저는 그런 짓 못합니다.”

 

“야야, 생각해봐. 너도 윗대가리들이 고기 맛 하나하나를 구분할 정도로 절대미각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잖아. 10살 전후의 나이를 설정하고 만들어낸 배양육은 생물학적으로 얘랑 별 차이가 없다고.

 

게다가 얘 몰골 좀 봐라. 딱 봐도 밖에서 구르던 애를 잡아서 식량낭비하기 전에 처리하는 거 같은데, 외부에서 안 좋은 거 잔뜩 먹고 들어온 고기랑 무균실에서 갓 배양되어 깨끗한 고기랑 뭐가 더 상태가 좋겠냐?”

 

유상은 특유의 입담을 발휘해서 직원을 구워삶았다.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던 직원도 그가 끈질기게 설득하자 조금씩 넘어가는 눈치였다.

 

“게다가 너 얘 남은 부위 처리하는 것도 일이야. 배양육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기 덩어리니까 썰기만 하면 끝이라고. 뼈도 없어서 처리할 부산물도 없어. 오늘은 빨리 잘 수 있다니까?”

 

“나 참... 알겠습니다. 대신 모든 책임은 연구원님이 지시는 겁니다.”

 

“고럼 고럼. 당연한 말씀.”

 

직원이 못 이기겠다며 끈을 넘기자 유상은 끈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뒤에서 손이 묶여 끌려가는 LRL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표정이었다. 복도에서 그 광경을 본 다른 연구원들은 ‘저 위험한 놈이 또 실험체를 찾았다’라고 수군거렸다. 아스널도 그가 LRL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직원에게 말한 대로 자폭병으로 써먹을 생각이 진짜인 건 아닌지 우려했다. 방에 들어간 그는 LRL이 들어온 걸 확인하자 문을 잠갔다. 자신을 보며 덜덜 떠는 LRL에게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많이 아프지? 줄 풀어줄게.”

 

LRL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공포에 짓눌려 다리를 덜덜 떠는 LRL의 모습에 아스널은 오르카호의 LRL을 떠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유상이 가위로 줄을 자르자 LRL은 바닥에 엎드리면서 외쳤다.

 

“살려주세요! 제발 죽이지 마세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코맹맹이 소리로 비는 LRL의 말에 유상은 표정을 굳혔다. LRL의 작은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아주면서 말문을 열었다.

 

“걱정 마려무나. 널 죽이거나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나도 내가 널 왜 구했는지 모르겠다. 대체 뭐 때문에 널 구했는지...”

 

심란한 표정으로 LRL의 얼굴을 닦아준 그는 LRL의 눈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불빛을 내뿜지 못하도록 안구를 적출당해 텅 비어있는 LRL의 왼쪽 눈을 오른손으로 어루만지던 그는 서랍에서 의안을 꺼냈다.

 

“가만히 두면 세균감염이 이뤄질 수 있으니 소독하고 의안을 넣자. 아플 수도 있는데 참을 수 있겠니?”

 

“...네.”

 

LRL은 코를 훌쩍이더니 대답했다. 유상은 포비돈을 꺼내 LRL의 눈 안에 잘 바르고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잘 닦은 의안을 끼우고 안대까지 둘러주자 아까보다는 보기 좋았다.

 

“어때? 느낌은 괜찮니?”

 

“네... 괜찮아요.”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의안의 감촉이 어색한지 LRL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유상은 LRL을 물끄러미 보더니 주사기와 앰플, 봉투를 전부 쓰레기통에 넣었다. LRL은 여전히 움츠러든 채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유상이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자 움찔 떨면서 빌었다.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그 말에 오히려 유상이 더 놀랐다. 작은 동물이 맹수를 만나 두려움에 질린 모습에 그는 슬픈 눈빛으로 LRL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구나. 난 너를 절대 때리거나 아프게 할 생각이 없단다.”

 

유상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레 사탕을 꺼내 꽃을 건네듯 LRL에게 주었다. LRL은 여전히 그를 완전히 못 믿는다는 눈치로 조심스럽게 흘낏흘낏 쳐다보다가 쭈뼛거리면서 사탕을 받았다. 어린 병아리가 고양이를 피해 웅크리는 인상을 받은 그는 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은 이유상이란다. 그냥 연구원님이라고 부르면 돼. 너는 이름이 뭐니?”

 

LRL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유상이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자 LRL은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투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골랐다.

 

“저, 저는 연구원님이 조, 좋아하는 거면 뭐든 상관없어요...”

 

이름을 물어봤는데 자신에게 공을 넘기는 LRL의 대답은 그에게 더 아프게 다가왔다. 얼마나 아픈 일을 많이 겪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LRL이 겪은 고통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았던 유상은 질문을 바꾸었다.

 

“네 이름은 내가 좋아하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네가 갖고 있는 이름이 궁금해서 그래.”

 

“저... 저는...”

 

유상의 질문에 LRL은 다시 대답을 꺼내지 못하고 입안에서 오물거렸다. 한참동안 그렇게 말을 고르던 LRL은 아까보다는 긴장이 약간 풀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Long Range Light에요...”

 

LRL의 대답을 들은 유상은 손을 뻗어 LRL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놀라 움츠러든 LRL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고개를 들고 그의 쓰다듬을 받았다.

 

“이름을 갖는다는 건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겠다는 거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게 이름이니까. 나는 네가 누구인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그래서 네가 이름을 새로 받고 기억했으면 하는구나.

 

이제부터 네 이름은 연(緣)이란다.”

 

“연...이요...?”

 

“그래. 빛나는 인연(熙緣)이 이어지기를 바라서 지은 이름이란다. 마음에 드니?”

 

유상의 말에 LRL은 볼을 붉히면서 처음으로 아이다운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LRL은 연이로서의 삶에 첫 장을 기록했다.

 

“네!”

 

“그래, 잘 부탁한단다.”

 

유상은 과거를 현재에 이어내면서 말없이 연이를 바라보았다. 연이도 경계심이 풀렸는지 그의 손을 자신의 머리 위에 얹더니 말했다.

 

“조금만... 더 쓰다듬어 주세요.”

 

빛나는 눈빛으로 자신이 쓰다듬어주기를 바라는 순수한 모습에 유상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스널은 이제야 유상이 리마토르로 거듭나는 순간이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광기에 찼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감돌자 아스널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름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고 했지. 리마토르, 그대가 리마토르로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네. 과거의 아픈 기억을 끊고 연이랑 출발하는 순간 그대가 썼던 이름은 리마토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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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에서 나왔던 떡밥 하나 더 회수 성공. 바이오로이드를 도구로 멸시하던 유상이 갑자기 LRL을 거두는 장면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칸이 본 유상과 희연의 과거 이야기에서 설명이 더 이루어질 거야. 이번 편에서  희연이 유상에게 남긴 말이 복선이야.

이번 편은 C구역을 감안해서 쓰기는 했는데, 생각만큼 아주 맵지는 않은 거 같아. 극한의 매운맛을 바라고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올린다. 맵게 쓴다고 썼는데 아이디어가 잘 안 떠오르네.


자... 이제 행복했으니까 다시 불행해지러 가야지. 리마토르는 행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유상은 행복할 수가 없어.



부족한 긴 글을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의 인삿말을 남긴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