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주의: 이번 편은 고어한 묘사가 있습니다. 진짜 많이 맵습니다. 내성이 없으신 분들은 노란 글씨에서 파란 글씨가 나오는 부분까지 내려주세요.



빛과 함께 시간은 또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아보려고 달력을 본 아스널은 한 달이 지나갔음에 무언가 중요한 사건이 있었음을 예감했다. 여태까지 짧으면 몇 시간, 길어도 하루 정도만이 지났는데 갑자기 한 달 후의 기억으로 넘어간다는 건 한 달간의 기억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함을 의미했다.

 

“유상은 어디 있는 거지?”

 

그의 방이었음에도 유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약을 하던 침대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보고서를 쓰던 책상은 아기자기한 인형과 그림책이 놓여있었다. 유상이 거두어 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LRL이 그의 책상에서 재미있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아스널은 유상이 현재의 리마토르에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어? 하늘색 어딨지?”

 

연이가 책상에 아무렇게나 펼쳐둔 크레파스 중 하늘색을 찾는 사이, 아스널은 연이가 그리던 그림을 쓱 들여다보았다. 하얀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푸른 장발에 안대를 쓴 소녀가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들여다보는 사이 유상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 왔어.”

 

“아! 오빠 왔어?”

 

연이는 그림을 들더니 유상에게 총총 달려가서 그림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허리 정도에 오는 아이가 폴짝 폴짝 뛰면서 그림을 설명하는 일이 귀찮을 수도 있음에도 유상은 연이를 무릎에 앉히고 경청했다.

 

“우리 연이 그림 그렸구나?”

 

“응! 오빠랑 나 그렸어!

 

봐봐. 이건 구름이구, 이건 나무, 그리고 이건 또...”

 

아스널은 유상의 모습에서 리마토르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인문학 스터디가 끝나고도 LRL이 질문을 하면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던 자상한 미소가 유상에게도 걸려있었다.

 

“한 달 만에 저렇게 가까워지다니. 많은 노력을 기울였나보군.”

 

그녀는 연이에게 과자를 먹이는 유상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희연에게 지어주던 미소가 연이를 향하고 있는 점에서 아스널은 유상의 상처가 연이를 통해 치유되고 있다고 추측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을 대하듯이 연이와 화기애애하게 놀던 유상은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연이야, 과자 맛있어?”

 

“응! 오빠가 주면 다 맛있어!”

 

“그래, 그래. 오빠 또 일하러 가야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어?”

 

“할 수 있어! 연이는 착한 아이니까.”

 

“아이구, 우리 연이 착하다 착해. 2시간만 기다려줘. 오빠가 6시에 다시 올게.”

 

“잘 다녀와 오빠!”

 

연이가 손을 흔들자 유상도 따라 손을 흔들면서 방을 나섰다. 자동으로 잠긴 문을 뒤로 하고 연이는 과자를 고사리손으로 오물거리면서 다시 그림을 그렸다. 아스널은 부대의 막내인 에밀리가 떠올라 투명하게 통과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이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이내 문을 통과하여 유상의 뒤를 밟았다.

 

“전에 갔을 때는 출병식에서 연설을 담당했었지. 이번에는 무슨 일을 맡고 있나.”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유상이 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상은 뽀얀 먼지가 수북히 앉은 인문학 서가로 향했다. 블랙리버 군사기지에서 철학 연구를 전담하는 인원은 그가 유일했고, 그의 명령을 받는 세루스는 연구를 설계하지는 않았기에 이 오래된 책들을 찾는 곳은 그밖에 없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다들 전자책을 읽지만 난 여전히 종이책이 편하단 말이지. 내가 시대를 못 따라가는 건가. 아니, 못 따라가는 게 확실하네. 그렇지 않고서야 연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유상은 혼잣말을 하면서 논문 한 권을 골라서 폈다. 목차를 보고 자신이 필요한 부분을 찾던 그는 한 구절에서 잠시 종이를 넘기는 일을 멈추었다.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

-데이비드 흄

 

 

“...인간으로 남아있어야지. 그런데, 대체 인간이란 뭘까.”

 

유상은 씁쓸하게 그 말을 눈으로 천천히 되새겼다. 모르고 그런 거지만 바이오로이드를 짐승처럼 도축한 고기를 맛보며 즐거워한 자신을 흄이 몇백 년의 시간을 젖히고 꾸짖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 내 안에서 윤리라는 게 이렇게 희미해져있었나.”

 

유상은 한숨을 내쉬면서 노랗게 변색된 표지의 논문을 한 권 더 꺼내들었다. 출판되었던 책이 해체되어 집게로 집힌 채 간신히 보존되고 있었던지라 종이는 전반적으로 닳아있었으나 유상은 그런 걸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오래 전에 활자로 찍힌 글자를 눈으로 더듬었다.

 

<A Theory of Justice>

 

“존 롤스, 당신이 현재의 세계를 보면 절규할 겁니다. 공동의 정의가 지켜지기는커녕 철충이라는 놈들에게서 생존하려고 가진 놈들이 가난한 이들의 쓸개도 빨아먹는 시대가 왔어요.”

 

유상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길로 정의론을 바라보더니 논문 두 권을 들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자신이 있던 층으로 올라간 그는 금발 태닝남과 마주쳤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던 그는 마침 잘 되었다는 표정으로 한국어를 사용해 유상에게 말을 걸었다.

 

“유상, 같이 축구 안 할래? 마침 후반전을 시작하려 했거든.”

 

“난 괜찮아. 지금 써야할 보고서가 있어서.”

 

“그거 아쉽네. 그래도 구경이라도 하지 그래?”

 

유상은 시계를 곁눈질로 슬쩍 보았다. 30분 정도는 구경하고 가도 보고서를 다 쓰고 6시까지 연이에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그래볼까.”

 

유상은 금발 태닝남과 함께 운동실로 들어갔다. 널찍한 공간에서 골대를 세워놓고 벽에 기대어 앉아 쉬던 연구원들은 수석 철학 연구원인 유상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면서 관중석에 앉았다. 10분 후면 후반전이 시작할 예정이었기에 선수로 뛰려던 연구원들은 물을 마시면서 땀을 닦고 있었다.

 

“어이, 공 준비됐어?”

 

“준비됐어!”

 

어떤 연구원이 신발 끈을 졸라매며 던진 질문에 운동실 직원이 대답했다. 직원은 손에 쥔 줄을 끌어당겨 LRL 개체를 안으로 들였다. 그 모습에 유상은 순간적으로 연이의 모습을 겹쳐보며 숨이 멎는 듯 했다.

 

“이봐, 대체 LRL 개체는 어디서 계속 수급해오는 거야?”

 

“근처가 해안가잖아. 널린 게 등대니 그 안에서 하나씩 끌고 와서 쓰는 거지.”

 

유상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고 물은 질문에도 금발 태닝남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대충 답했다. 그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수건을 나누어주다가 직원을 불렀다.

 

“여기 손 좀 빌려줘!”

 

“잠깐, 손을 빌려달라고?”

 

그의 말을 들은 직원 옆의 연구원은 짓궂은 웃음을 짓더니 품에서 자신이 연구하던 단분자 단도를 꺼내 LRL의 오른팔을 잘랐다. 붉은 피가 허공에 솟구치면서 LRL은 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아스널은 그 자리에서 눈을 꼭 감았다. 유상은 그 광경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팔을 자른 연구원은 LRL의 비명을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LRL의 오른팔을 금발 태닝남에게 던졌다.

 

“손 빌려줬어! 쓰고 갚아!”

 

“에라이 ㅋㅋㅋㅋㅋ”

 

금발 태닝남은 웃더니 품에서 펜치를 꺼내 LRL의 손가락을 비틀었다. 그는 힘없이 손에서 분리된 가냘픈 손가락을 자신의 팀원들에게 주면서 낄낄 웃었다.

 

“소시지 하나씩 먹고 다음 판은 이기자!”

 

“미친 소리하고 있네 ㅋㅋㅋㅋㅋ”

 

아스널은 더 듣지 못하고 운동실을 나갔고, 유상은 온몸이 굳었다. 자신이 부정하려고 했던 모든 일이 그들에게는 일상의 사소한 장난으로 치부되자 유상은 자신의 신념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이제 경기 시작한다! 공 준비해!”

 

금발 태닝남이 필드로 나가면서 직원에게 외치자 직원은 품에서 레이저 커터를 꺼내 전원을 넣었다. 붉은빛을 내뿜는 레이저 커터는 LRL의 목을 깔끔하게 관통했다. 직원은 순식간에 몸에서 분리되어 떨어진 LRL의 머리를 금발 태닝남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LRL의 머리를 발로 툭툭 굴려 중앙에 두었다.

 

“잠깐만, 아직 시작하지 마.”

 

“왜?”

 

“이거 끝나고 탁구 해야지. 탁구공은 따로 빼놔.”

 

“그래야겠네.”

 

상대편 팀장의 말에 금발 태닝남은 공으로 굴리던 LRL의 머리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눈에 집어넣고 눈알을 끄집어 빼냈다. 초점을 잃은 갈색 눈동자가 새겨진 동근 눈동자를 탁탁 던져보던 그는 직원에게 탁구공을 보관해달라면서 눈알을 넘겼다.

 

유상은 거기까지 보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속에서 올라오는 혐오의 감정에 그는 화장실로 가서 먹었던 걸 전부 게워냈다. 한참을 구역질하며 위에서 올라오던 신물까지 뱉어낸 그는 물을 내리고 나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는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자신이 있었다.

 

“.....씨발.”

 

그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디지 못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갈기면서도 풀리지 않는 혐오감에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도 똑같아, 다를 게 없잖아... 바이오로이드는 도구라고, 인격을 없애라고, 싸우다 죽게 부품으로 만들라고 말한 게 나였잖아....”

 

유상은 절규를 끌어내어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 LRL도 내가 거두었으면 연이처럼 살았겠지. 연이도 내가 거두지 않았으면 그 LRL처럼 허무하게 죽었겠지.

 

난 알량한 위선을 행해놓고 그게 면죄부라도 되는 것처럼 안심하고 살았던 거야. 쓰레기 같은 과거의 악행이 전부 지워지리라고 굳게 믿은 안일한 폐기물의 사고방식이었어.

 

난 대체 뭘 하는 거지? 결국 내 모든 죄는 죽어야 속죄 받을, 아니. 죽어서도 속죄 받지 못하는 거잖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주제에 뻔뻔하게도 죽어서 희연이를 만나겠다고 상냥함을 연기하고 있다니...”

 

유상은 세면대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른 핏줄기가 세면대에 그림을 그렸다. 아스널은 그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불쌍한 그대여, 그대는 결국 희연을 잊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잡혀 있는 건가.”

 

유상은 한참을 더 세면대에 머리를 박다가 비척비척 자리를 떴다. 의무실에서 붕대를 감고 자신의 방에 돌아온 그의 표정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 턱이 없던 연이는 그를 미소로 맞았다.

 

“오빠! 일찍 왔네?”

 

연이는 도도도 달려가서 유상을 꼬옥 껴안았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그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연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오빠, 안 쓰다듬어줄 거야?”

 

“...어. 해줘야지.”

 

그제야 유상은 손을 들어 연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연이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오빠. 혹시 힘든 일 있었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그래.”

 

유상은 긴 말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붕대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연이는 그가 크게 다쳐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화들짝 놀라 그에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다.

 

“오빠! 괜찮아? 많이 아파?”

 

“오빠는 괜찮아.”

 

유상은 그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연이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연이는 울상이 되더니 그에게 달라붙었다. 누운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연이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오빠,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다시 혼자가 되기 싫어...”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 그의 옷을 적시자 유상도 눈물이 났다. 연이가 보지 못하게 어금니를 꽉 깨물어 눈물을 막은 그는 연이를 토닥였다.

 

“걱정 마. 오빠는 절대 연이 혼자 두고 죽지 않아.”

 

“죽지 마... 오빠가 죽으면... 죽으면... 으아앙....”

 

연이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자 유상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마음을 담아 연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눈에서도 한줄기 굵은 눈물이 흘렀다. 유상은 연이가 자신의 막힌 콧소리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하지만 결심을 담아 굳세게 말했다.

 

“연이야, 오빠는 인간이 될 거야. 우리 연이랑 같은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 함께 살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인간이 될 거야. 그때까지는 절대 연이 혼자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뚝하자, 뚝하자 연이야.”

 

유상의 말에도 연이는 눈물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유상 역시 말로는 뚝하라면서 자신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스널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누가 볼 새랴 얼른 닦으며 말했다.

 

“여기였군. 유상 그대가 리마토르가 된 순간이. 생물학적 인간을 넘어 진정한 인간이 되려고 마음먹은 순간이 여기였군.”

 

그녀는 유상의 품에서 울다 지쳐 잠든 연이를 바라보았다. 한때 광기에 사로잡혀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던 유상을 인간이 되고자 하는 철학자 리마토르로 바꾼 건, 외부의 약물이나 고문 따위가 아니라 작은 소녀의 인정이었다. 인간적인 감정을 나누는 모습에서 아스널은 그가 오르카호에서 이어가는 연구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갈피를 잡았다.

 

“연이야, 고마워.”

 

유상은 잠든 연이에게 조용히 감사인사를 전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꿈나라로 떠난 연이의 눈물을 닦아준 그는 불을 끄고 이른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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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매운맛은 끝. 남은 건 리마토르가 되기 위해 유상이 겪는 마지막 아픔이야. 그건 맵지는 않을 테니 안심해도 돼.


구 인류의 잔혹함을 어떤 사례를 들어야 명확히 와닿을지 고민하다가 실제 사례에서 모티브를 따서 이번 에피소드에 넣었어. 찾아보면서도 인간의 기준에 저들을 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더라.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자유와 정의, 인간인데 개인적으로는 저 3개의 주제를 따로 볼 게 아니라 하나로 통합해서 봐야한다고 생각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책임을 제대로 질 정도로 자유롭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존재를 과연 인간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오늘은 많이 불편한 내용이라 읽기 더더욱 곤란했을 텐데 끝까지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다음 편이면 아스널 에피소드가 끝나고 칸 에피소드로 넘어갈 거야. 칸은 유상과 희연의 연애를 보며 자신의 연심을 돌아보는 스토리가 될 테니 이번처럼 극단적으로 맵지는 않을 예정이야.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