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거모음


누군가 말했다. 사랑에 빠진다는것은 누군가의 세계를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라고.


자신 위주로 돌아가던 세계에, 다른 이의 색으로 물들이고 이내 서로 섞이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랑은 한쪽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물들일때도 있고.


"짠~ 안녕! 이것 참 우연이네!"


"....아니야, 철남이는 이런거 안좋아할것같아. 어떻게해야 철남이 마음에 드는 이미지가 될 수 있지? 나앤이 조사해준 정보는 충분한데, 뭐가 적절할지를 모르겠네.....어렵다, 짝사랑이라는거."



"흐흠, 오늘의 레시피 실험은...."


"완벽해! 이정도면 누구라도 사로잡을 수 있겠어!"


"으음, 그런데...그때 맡았던 그 향기...그건 도저히 재현이 안되네...하, 한번 더 맡아봐야하나....?"


"으와아으아아아!! 내가 무슨 생각을?!"


서로가 서로를 물들이며 새로운 색이 될때도 있고.


"이 바보, 멍청이...! 평소에는 천재라고 자랑을 하고다니면서 그럴때만 바보같이...!"


"아아, 진짜! 눈 딱감고 같이갈걸! 그랬으면 성공인데! 뭐하러 데이트를 시뮬레이션 한거냐고, 이 멍청아!"


"왓슨은, 마지막에 적극적이었었지...나도...나도 적극적으로 변해야해. 당당하고, 자신있게. 왓슨도 날 싫어하는게 아니니까, 실패할 일은 없어!"


"그, 그래도...역시 첫경험은...아프겠지...?"



"그때 먹은 술 값이랑~매트리스 교체비용이랑~다 계산해보며언~"


"엣, 적자?! 어떡하지...매트리스는 일단 저렇게 놔둬야하나...? 술을 줄이면 어떻게든 될것같기도하고...?"


"술을 끊는다니...음, 철남이도 책임이 있으니 같이 고민하자고 할까? 아니면 저상태로 몇번 더 써먹어야하나? 일단 매트리스부터 해결하고 생각하자. 돈 없으면...알아서 술 끊겠지..."



"....이거, 그녀석한테 어울리려나. 아니, 너무 나한테 맞춘 색인가...? 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거, 색깔별로 전부."


때로는 양보없이 한쪽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기 위해 과감하게 나올때도 있다.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서로 적극적이더라도, 과하게 적극적이게 변하더라도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는 상대처럼 물들어가는 것이다.


짝사랑을 하고있든, 서로 마음을 조금씩 주고받고있든, 밸런스가 맞지 않을정로도 많은 마음을 주거나 받든, 그 모든것은 사랑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기 직전의 한 여자가 있다.


-오후 6시 30분-


"으으, 어떡하지? 뭘 해야하지?"


유미는 지금 PC방 앞에서 불안하게 주변을 왔다갔다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철남-밥먹고 감. 먼저 놀고있어도 됨.]


그녀는 어쩌다 친구가 된 직장 동기 철남과 PC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정작 만날 시간이 다가오니 불안해졌다.


"그냥 아무게임이나 하자고 하면 되는데, 왜 게임을 고민하고 있냐고 나는...!"


유미는 FPS, AOS, 일반 RPG, 시뮬레이션이나 퍼즐 등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플레이했고 모두를 그럭저럭 준수하게 플레이 할 수 있었다.


게임에 취미를 붙이게 된 이유도, 키보드나 컨트롤러를 잡았을 때 큰 막힘 없이 술술 진행되는 그 편안함이 기분좋아서이기도 했고.


그런 게이머 유미였기에, 그녀는 철남이 와서 전혀 듣도보도 못한 게임을 하자고 하지 않는 이상 문제없이 어울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유미는 어째서인지 게임을 선택하는데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으음, FPS를 하자고 하면 너무 맞춰준것같을거고. AOS는 실력차이나면 둘다 재미없고, RPG는 취향에 안맞으면 나가리인데..."


재미가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는게 아닌,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게이머답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엄마야?!"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 나머지, 유미는 결국 철남이 올 때까지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를 PC방 앞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왜 밖에 있어?"


왜 밖에 있냐는 질문에 '너랑 했을때 제일 좋은 평가를 들을만한 게임을 고민하고 있었어'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유미는 연애시뮬레이션의 대사를 읊기로 했다.


"으음, 그게...바, 방금 도착했어서?"


"...여기서 뱅뱅 돌던게 멀리서부터 보이던데. 뭐, 기다려줘서 고마워."


"아, 별거 아니야. 헤헤..."


"자, 들어가자. 밥은 먹었지?"


"어, 어? 빵먹었는데?!"


"...뭐라도 먹긴 먹었네."


'아, 이 등신! 거기서 빵먹었다는 대답이 왜 나와! 유미, 너 왜이래? 미쳤어? 어제 술먹고 머리가 돈거야?'


유미는 속으로 자신을 자책하며, 먼저 PC방으로 들어가는 철남을 따라 들어갔다.





-30분 후-


유미와 PC방에서 게임하기로 약속했던 나는 리앤과의 데이트를 끝내자마자 바로 PC방으로 달려와 유미를 만났다.


그리고 바깥에서 기다리던 유미랑 같이 앉아서 게임을 돌리기 시작했고, 처음은 가볍게 몸풀기로 FPS류로 시작했는데...


[MVP]-Connecter_Yumi


"...개쩌네."


유미가 죄다 쓸어담고 있다.


나는 킬과 데스의 비율이 일정치를 유지하고, 어시도 가끔씩 하는...1인분의 역할을 하고 있고, 유미는....


음, 유미는 대충 저격수를 권총으로 잡고 근거리 샷건을 점프로 피한다음에 칼로 머리를 찍어버리고 기울이기 무빙으로 헤드샷을 피하는 신기를 선보이며 킬과 데스의 비율을 대유쾌 마운틴과 불쾌한 골짜기 급의 차이로 벌려버렸다.


채팅창 또한, 반응이 격했다.


[Onion69]-저거 핵 아님까? 어떻게 1픽셀 사이로 권총저격이 가능한검까!

[Tomo_dachi]-핵이라고? 핵보다 센거같은데....수소폭탄인가?

[fkqnddl123]-아 게임 ㅈ같이 하네. 운영자들 핵좀 잡아라. 개발사에는 겜안분밖에 없냐.

[HarpyKing]-친구들? 누가 신고좀 넣어봐. 나쁜뜻은 없는데 확인이나 해보자.


대부분이 핵이라고 의심하고있는 상황. 그건 아군적군 구별없이 공통된 반응이었다. 애초에 옆에서 보는 나도 유미의 손을 못봤으면 못믿었을테니까.


그리고 그 때, 채팅창에 또다른 채팅이 올라왔다.


[GM셔아이]-핵 아닙니다. 제가 봤어요.


GM이 와서 직접 증언해주고 있다.


[fkqnddl123]-GM등판ㅋㅋㅋㅋㅋㅋ겜안분ㅋㅋㅋㅋ어떻게 저게 핵이 아님ㅋㅋㅋㅋ에임이 거의 고정이던데?

[GM셔아이]-반동제어때마다 포인터 변동값이 조금씩 변경됐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캐릭터를 이동해서 크로스헤어 위치를 맞췄고요. 프로그램을 쓰면 이동해서 맞추더라도 포인터 변동값은 균일하게 나옵니다.

[fkqnddl123]-되게 좋은 핵인가보지 뭐ㅋㅋㅋㅋ역시 겜안분GM 아무것도 모르죠? 홈페이지 배너에 나오는 캐릭터나 좀 덜 해괴망측한거로 바꿔ㅋㅋㅋ


[GM셔아이]-아가리.


[fkqnddl123]-채팅 이용이 정지된 유저입니다.


[GM셔아이]-그럼 여러분, 다시 즐겁게 게임을 즐겨주세요! 참고로 저희 홈페이지는 전.혀. 해괴망측하지 않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더이상 플레이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못하겠는데. GM까지 떴는데 누가 매칭을 잡겠어?"


"어, 어어. 그렇겠네. 미안해."


유미는 게임을 끄고 나한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뭐가 미안해?"


"아니, 나 때문에 게임 못하게 됐잖아...?"


"계정이 정지를 먹은것도 아니고, 그냥 매칭상태가 안좋아서 나오는건데 뭘. 부담갖지마. 친구랑 게임할때 이런일 저런일 다 있는거지."


내 대답에, 유미는 어느정도 안심한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그렇지...친구랑 게임하는건 그럴때도 있는거지? 마음이 혼란하고 그럴때도 있는거지?"


"어?"


마음이 혼란? 뭐, 게임하다가 별 인간군상 다 만날때도 있긴 하지. 게임에 지고 농락당하면 멘탈이 터지기도 하고...


"그렇지, 혼란할때도 있는거지."


"그렇구나, 다행이다...평범한거구나..."


"뭐야, 친구랑 게임한번 같이해본적 없는 사람처럼."


"...없어."


"뭐?"


"그런적 없다고! 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일했단말이야...친구랑 같이 놀거나 그런거 할 시간 없었어."


유미도 나름대로 뭔가 사연이 있었구나...?


"거기다가, 고향에서 상경한거라 친구도 주변에 없고...이런저런 알바랑 다른 일하면서 취직준비하다보니까 세월은 흐르고...23살에 대학은 안나오고 알바만 하고 있어. 에휴..."


유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고 있자니, 이건 아무래도 PC방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것같았다.


"음...지금 시간도 조금씩 늦어가는데, 바에 가서 이야기 할까?"


"...좋아."


결국 그렇게, 어제와 비슷한 흐름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다만 달라진게 있다면 술을 마시는건 유미뿐이라는 점 정도일까.


"뭐야아...키르케 언니, 술 안마셔요?"


유미는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키르케 누나에게도 술을 권했지만,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 미안. 내가 이번달에 마셔버린술들이 죄다 단가가 비싼거라. 오늘은 이 한잔으로 끝. 더 손댔다가는 이 언니 굶어죽어버릴걸?"


키르케 누나의 손에는 위스키가 반쯤 담긴 소주잔이 하나 들려있었다. 아마 저 위스키가 어제 창고에서 깐 다음 반쯤 마신 그거같은데. 그보다 오늘 하루를 저거로 끝낸다고...? 대체 얼마나 엄청난 긴축정책을 펼치려고....!


"야아, 철남아. 너라도 마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일하는 중이라 조금..."


"뭐어? 어제는 마셨잖아!"


어제의 일을 꺼내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한데...어제처럼 마셨다가 또 다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저 창고 안의 매트리스를 또 더럽히게 된단 말이야.


"아니, 어제는 나도 분위기에 휩쓸린거랄까...애초에 키르케 누나가 주도해서 어울려줬달까...아무튼 오늘은 키르케 누나가 안마신다니까 나도 마시기 좀 그래. 저래보여도 따져보면 내 상급자라고."


"잠깐, 알바군. 저래보여도라니? 내가 어떻게 보이길래?!"


"매일 술취해있고 정신못차리는 헬렐레 누나....?"


"그건 너무한데?! 알바군! 내가 그렇게 보였단 말이야?"


"솔직하게, 네."


진짜로. 매일 취해서 헤실헤실 웃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확실히 한번쯤 했다.


뭐....그것도 나름 매력이라면 매력이지만.


"우와~나 알바군 말에 상처받았어! 나라고 매일 24시간 취해있는건 아니거든?"


"정작 지금까지 누나가 술에 안 취한걸 본적이 없는데요?"


진짜 생각해보니 매번 볼때마다 묘하게 취기가 올라있었다. 심지어 관계를 가질때도 술을 마셨는데.


"그럼 내가 보여줄게! 보여주면 되잖아! 너 수녀님이 내일 만나러오라고했었지? 내가 그때 따라가서 멀쩡할때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거 아냐?!"


응? 갑자기 여기서 수녀님 이야기가 나온다고?


"진짜? 만나러간다고요?"


"그래. 어차피 수녀님 만나는 장소도 알고, 시간대도 내가 옆에서 들었으니까 오지말라고 해도 갈건데?"


일단 수녀님이랑 키르케 누나가 서로 술친구인건 알겠는데 여기서 찾아오겠다고 할줄은...


"이거 괜찮은가 모르겠네..."


"뭐 어때? 수녀님이랑 데이트할것도 아닌데 내가 같이 따라가면 안돼?"


"아니, 그건 문제가 없는데 왜 굳이 따라오냐 싶어서..."


"내, 내가 너한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한번이라도 보여보려고 그러는건데..."


"아."


"직장 선배에 누나뻘인데 맨날 술에 취해서 헬렐레 하는 모습만 보여주는거 생각보다 부끄럽다고..."


하긴, 나같아도 동생같은...그래, 토모나 철용이같은 애들이 내가 이상한짓 하는것만 보여주면 실망...아니, 예시가 좀 틀렸다. 걔네들은 이상한짓 하면 어울려서 같이 놀것같아.


미호네 자매인 별이같은애가 내 망가지는 모습보면 많이 부끄럽겠지...


"네, 그럼 뭐 가서 밥이나 먹죠."


그것으로 일요일, 그러니까 내일 수녀님을 만나러가는것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끝냈다.


그러나, 나는 키르케 누나와 대화를 하느라 우리 둘 사이에 소외된 누군가의 존재를 까먹고 있었다.


"왜 둘이서만 이야기하는건데에에에~!"


"앗, 유미..."


대화도중에 소외된 유미가 뭘 마신건지 몰라도, 갑자기 취기가 급하게 올라간 상태로 소리를 질렀다.


어? 잠깐, 쟤 옆에있는 저거 키르케 누나가 아까 갖고있던 소주잔 아닌가? 저걸 마신거야?


"왜 나만 따돌리는거야...둘이 뭐 있어?"


"아, 아니?! 없는데 그런거?"


아니 거기서 그런 반응은 뭔가 있다고 자백하는것 같잖아요.


"....없어."


"그러면 왜 나만 두고 둘이서만 이야기하는거야...나도 친한 사람 있어....나도 친구 있다고...근데 왜 나만 혼자 남기는거야아..."


유미의 술주정에, 키르케 누나는 익숙하다는듯 느긋하고 나긋나긋하게 유미를 달래주었다.


"에이, 괜찮아. 진정해. 진정해. 친구랑 친한사람이 있잖아? 그 사람들이 언제나 곁에 있어주니까 괜찮아 유미야."


키르케 누나가 달래주자 유미는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바에 머리를 박았다.


"그 친한사람, 친구가 서로 붙어먹잖아....나만 혼자남아...쿨."


그 말을 끝으로 유미는 잠들었다. 이거 달래서 진정한게 아니라 술기운 돌아서 쓰러진거 아냐?


"아하하, 이렇게 됐네. 유미는 맥주만 마시게 해야하는데."


"홧김에 누나가 갖고있던 위스키 마셔서 이렇게 됐잖아요."


"아니, 난 소주잔 절반 분량에도 이렇게 될줄은 몰랐지. 매번 스트레이트잔 기준으로 꽉 채워서 줬다고."


"그래서...어떡하죠? 지난번처럼 창고에 재워요?"


나는 어제의 일을 고려하지 못하고 지난번에 유미가 술먹고 뻗었을때를 언급했다. 그때는 창고의 매트리스에 유미를 재웠었는데...


"저, 저기. 그게...창고는...알잖아. 그럴 상태...아닌거."


"아, 맞다."


지금은 누군가를 재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라는게 문제였다.


"그게, 물기는 말랐는데...냄새는...안빠지더라. 급하게 매트리스용 시트랑 커버를 인터넷으로 주문시키긴 했는데, 오늘 도착하진 않을거 아니야?"


키르케 누나나 내가 그 매트리스에서 자는건 문제가 없다. 무슨일이 있었는지 아니까.


그리고 그 매트리스의 존재를 모르는 제 3자를 재우는것도, 약간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문제가 없다. 원래 그런 매트리스였다고 우기기라도 하면 되니까.


근데, 매트리스의 예전 상태를 알고있는 유미를 거기서 재웠다간...어제 우리가 뭘 했는지 바로 들키겠지.


"아, 그래. 누나가 유미를 데려다주면 되는거 아니에요? 어제도 누나가 데려다줬잖아요."


"으음, 그건 힘들겠는데. 유미가 평소에 나한테 줬던 열쇠를 어제 쓴 다음 두고왔거든."


"네? 그럼 어떻게 하죠?"


내가 키르케 누나에게 대책을 묻자, 키르케 누나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왜? 주변에 다른 장소가 없는건 아니잖아. 네 집에 데려다놔."


"제...집요?"


"그래, 너희 집. 네가 손만 안대면 되는거 아니야?"


어라, 지난번에 이런 상황이 있었던거 같은데? 그것도 사장님이랑.


물론 그때는 내가 손댈 마음이 없었고 실제로도 밤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나중에 다시 갔을때 반쯤 미쳐있던 사장님이 역으로 날 덮쳤던거지만.


"그렇긴 한데..."


"내일 성당 가야하는거 알지? 유미한테 손대면 늦을지도 몰라~"


"안그래요. 아무리 제가 분위기 타서 바로 넘어가긴 했어도 친구한테 손댈정도로 못난놈은 아니니까."


"어머, 친구라...후후."


"...왜 웃어요?"


"아니, 아무것도. 내가 인정받고있구나~하는 마음이 들어서. 으힛. 빨리 갔다와. 근무는 해야지?"


키르케 누나는 나를 내보내는 와중에도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일단 유미를 들처메고 바를 나왔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나는 땀을 흘리며 유미를 옮기고 있었다.


"사람 옮기는거, 생각보다 힘들구나..."


겨우겨우 유미를 침대에 던져놓고, 다시 바로 돌아가기 전 물이라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의 문을 열고 물을 찾던 그 때, 나는 이상한걸 목격했다.


"....뭐지?"


냉장고 안에...사과랑 배가 있었다.


곧죽어도 귀찮아서 요리를 안해먹고 건강을 챙기기보다는 편의를 챙기는 자취생인 나. 그런 내가 과일을 사서 먹는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얘기다.


그보다 형태가 참 특이했는데, 둘 다 제사상에 올릴때 쓰듯이 네개를 놓고 위에 하나를 쌓은데다 홍동백서의 형태까지 맞춰서 오른쪽에 사과, 왼쪽에 배가 배치되어있었다.


"또 누가 왔다갔나...아니, 그 이전에 우리집 분명 도어락이 걸려있는데 누가 어떻게 왔다가는거야?"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낸 순간, 내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땄어. 지문. 도어락에. 남은거."


"아,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어제 봤던 단발머리의 닌자가 있었다.


"도-모, 철남=상. 쿠노이치 카엔입니다."


"도-모, 쿠노이치 카엔=상. 철남입니다. 어째서 여기에?"


닌자니까 잠입해온건 그렇다 치는데 왜 온거지?


"동생의 무례. 사죄. 그리고, 개인적 흥미."


"사죄라..."


"아이사츠 관련, 원래는 케지메. 하지만 침묵했어. 소중한 동생."


"그러니까...어제 규칙을 어긴 동생은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소중한 동생이라 입을 다물었다?"


"정답."


카엔이란 쿠노이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사과를 꺼내 나한테 내밀었다.


"그리고, 사과. 임무는. 공식적사과. 못해. 이건. 개인적인. 인사."


나는 카엔의 사과를 물리적으로도 마음적으로도 받은 뒤, 살육이 일어나지 않을거란걸 확신하고 궁금한걸 물어보기로 했다.


"...닌자인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거야?"


"나, 프리랜서. 동생과는 의리로. 이제...손 뗄래."


"원래 프리랜서였다는거야? 아니면 이제부터 프리랜서란거야?"


"원래. 자유. 카엔, 말 잘 못해. 그래서, 전속 자격 잃었어."


아, 저 말이 용건만 딱딱 끊어서 말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거였구나.


"그보다, 대체 뭘 위해서 왔던거야?"


"그건, 비밀. 업계의. 철칙."


하긴, 대답해줄거라고는 생각도 안했어.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던거야.


"그럼, 다음에 또."


카엔은 고개를 숙인 뒤 곧바로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카엔이 주고간 사과와 배만이 그녀가 다녀간 증거로 남았다.


....잠깐, 다음에 또 온다고?


나는 사과를 보며 아무 말 없이 서있었고, 침묵만이 가득한 집에는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와 유미의 잠꼬대만이 조용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으흐, 으헤헤헤...커리어우먼이라고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나와 철남아..."


"후우....돌아갈까."


유미가 깨어나면 대충 상황을 알 수 있게 메모를 적어둔 후, 나는 다시 바로 돌아갔다.



-10분 뒤-


"흐헤에...철남아...이 능력있는 커리어우먼 유미님 여자친구로 삼다니, 너무 운좋은거 아닐까아...?"


잠꼬대를 하는 유미의 곁에,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쓴 누군가가 창문을 통해 소리없이 방 안으로 침입해왔다.


"뭐지? 왜 없지? 분명히 집으로 향한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침입자는 방의 내부를 샅샅이 살폈지만, 유미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찾을 수 있는게 없었던 침입자는 다시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고, 건물의 옥상까지 올라온 뒤 복면을 벗고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제로, 여기는 시라유리. 응답하세요. 정말로 집으로 향한게 맞나요?"


-맞다. 그리고 방금 전 다시 이곳으로 복귀했다.


"이런...엇갈렸나. 멍청하게 괜히 시선을 신경써서 머뭇거렸어..."


정보는 신속하게 전달되었으나, 시라유리는 머뭇거렸던 자신을 자책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좋은 소식도 있었다.


-그리고 추가적인 정보가 있다. 목표가 내일 성당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는군.


"성당...? 그래, 마침 잘됐네요. 선배를 거기로 보내면 되겠어요."


-확인, 목표 감시를 계속하겠다. 그리고....카엔에게서는 연락이 없나?


"유감스럽게도, 없어요. 당신에게 실망한게 아닐까요?"


-그럴리가 없다.....일단, 임무에 집중하겠다.


"교신종료."


교신을 끝낸 시라유리는 무전기를 집어넣은 뒤, 검은 잠행복을 벗었다.


잠행복의 안에는 몸에 달라붙는 레깅스와 탱크탑이 있었고, 신발까지 갈아신은 그녀의 모습은 운동하러 나온 일반인의 모습과 다를게 없었다.


옆에 준비한 작은 가방에 잠행복을 접어서 집어넣은 시라유리는 자연스럽게 옥상쪽 출입구를 통해 건물의 계단을 내려갔고, 조깅을 하는 한명의 일반 시민이 되어 현장을 벗어났다.


다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