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거모음


토요일 밤 10시.


"알바군, 4도짜리 맥주 열잔을 마시는게 40도짜리 위스키 한잔을 마시는거랑 다를게 없는거 아닐까? 그러니까 위스키 한잔만 할게?"


"아니, 누나가 그러면 설득력이 없다니까요? 그보다 내일 술 안마시는 모습 보여준다면서 오늘 마시면 어떡하자고요?"


"아까 유미가 뺏어갔잖아? 그정도는 먹어도 되는거잖아?!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눈앞에서 내 술을 뺏겼다고?!"


철남이 유미를 집에 데려다주고 바에 다시 출근하여 키르케와 의미없는 수다를 나누던 때.


그 시각, 철남의 집에서 나왔던 시라유리는 어딘가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똑.


또도도독. 또도도독.


똑.


일정한 리듬과 횟수로 문을 노크한 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시라유리.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철컥, 착. 착. 차르륵. 철커덕.


수많은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린 후, 문이 열리며 집 안에서 한 여성이 내밀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색기가 넘치는, 유혹하는 인상이 강한 여성.


"이런...시라유리. 이렇게 직접 찾아올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그것도, 노크로 '임무신호'까지 보내면서..."


여성은 시라유리와 구면인듯, 갑작스럽게 찾아왔음에도 놀라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응대했다.


"저도 가능하면 손님으로 오고싶었지만, 시간이 급박해서 말이죠. '파랑새' 에이미 선배님."


"그런 선배 대우는 그만두세요. 저는 이미 은퇴했으니까."


에이미는 시라유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자신과 시라유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부정했지만, 시라유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은퇴는 커녕 중간에 시들어버리는 '꽃'들과 달리 젊은 나이에 성공할까 말까한 은퇴에 성공해서 자유로운 새가 된 선배님에게 예우는 당연히 갖춰야하지 않을까요?"


"후후, 새라는게 자유롭게 날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은 새장에 갇혀 구경거리가 될 뿐인걸요? 이렇게, 당신이 저에게 찾아온걸 보면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글쎄요, 선배님이 사는 모습을 보면 저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자유로운데요."


시라유리의 대답 직후, 집안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에이미~"


푸른색의 머리칼을 양쪽으로 묶은, 트윈테일의 소녀.


소녀는 한쪽눈에 안대를 차고 있었고, 잠옷을 입은것으로 보아 잠자리에 들려다가 나온듯 했다.


"어머, 우리 공주님. 왜 안자고 나왔을까?"


"에이미가 옆에 없어서...옆에는 누구야?"


공주님이라 불린 소녀의 대답에, 에이미는 시라유리를 대할때 보여준 적 없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런, 정말 미안해요 우리 공주님. 옛날 친구가 잠깐 찾아와서 이야기하느라 그만...공주님? 먼저 침대에 가있을래요? 친구는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른거라 금방 간대요."


"응..."


"금방 끝내고....동화책을 읽어주러 갈테니까, 안심하고 침대에 누워있어요."


소녀를 침대로 돌려보낸 에이미는 고개를 돌려 시라유리를 쳐다보았고, 시라유리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현관에 등을 기대고있었다.


"후훗, 엄마의 과거를 모르는 딸과의 평화롭고 평범한 생활...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그런데, 이렇게 비밀을 숨긴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네요."


시라유리의 은근한 협박조에도, 에이미는 표정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대응했다.


"지금 협박하려는건가요? 은퇴후의 생활까지 건드린다면, 대체 어떤 요원이 은퇴까지 성실히 일해줄까요?"


"협박이 아니에요. 저도 거래를 할 줄 안답니다? 일족쪽의 일이 아니라...그 아래, 080쪽의 일이에요."


지금까지 소녀가 나왔을 때를 제외하면 안색하나 바꾸지 않던 에이미는 시라유리의 말에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기관쪽의 일? 그런데 당신이 직접 온다고요?"


"네, 사정상 제일 가까운게 저였거든요. 애초에,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하는것이기도 하고."


"아무리 당신이라도 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을텐데."


"뭐, 빌려달란 요청은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제 제안을 들으면 당신도 받아들일거랍니다. 그리고, 딸과의 즐거운 일상을 조금 더 편하게 즐기고싶지 않나요?"


"...들어나보죠, 당신이라면 보상도 충분히 준비했을테니. 대신, 빨리 끝내줘요. 잠자야하는 공주님이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우후후, 잠자는 공주님이 아니라 자야하는 공주님이라...알겠어요. 빨리 끝내죠."


시라유리는 곧바로 자신이 찾아온 목적과 부탁하려는 일에 대해서 설명했고, 에이미는 그것을 모두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쁘지 않네요. 제가 가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인데다...공주님과 외출도 할 겸 가봐도 되겠죠. 그 부탁, 들어줄게요. 대신 보상은 곧바로 줘야해요."


"후후, 걱정마세요. 월요일에 바로 전달해드릴테니. 그보다...당신이 그런걸 요청할 줄은. 아이를 키우는게 보통 힘든게 아닌가봐요?"


"그만큼의 보람이 있으니까요. 당신은...모르겠지만."


"글쎄요? 사랑하는 남자와의 아이라면, 저도 잘 키울 자신이 있답니다?"


"훗, 그런 남자가 있을까 싶네요. 얼른 가세요. 동화책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는 공주님이 있으니까."


"그럼, 이만."


시라유리는 에이미에게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집을 나갔다.


"은퇴 이전의 에이미 선배는 자연스러운 접근과 유혹의 1인자였으니...정보를 캐는게 어렵지는 않겠죠. 그보다, 겨우 그것만 요구하시다니...이럴줄 알았으면 굳이 요청할 필요는 없을텐데."


에이미와의 대화도중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밤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한 시라유리는 몰랐다.


에이미가 부탁한 보상인 <드래곤 슬레이어 코스튬-사이클롭스 프린세스 Deluxe Edition>은 지금 시중에서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는것을...



-일요일, 오후 12시 20분-


나는 수녀님과의 식사약속을 지키기 위해 점심시간대를 맞춰 성당을 찾았다.


그보다 약속을 했던가...? 아, 뭐 주말에 할것도 없긴 했는데...문제는 내 옆에 따라온 동행인이었다.


"와, 알바군. 저것봐! 수녀님들이 잔뜩이야!"


그 동행인이란 여기저기 있는 수녀님들을 보며 감탄하는 키르케 누나였다.


말만 같이 간다고 하는줄 알았는데, 진짜 성당까지 따라왔다. 그리고 약속대로 술도 안먹고 멀쩡한 정신으로 왔다는데...


"그거야 성당이니까요..."


"이야~하하, 종교쪽이랑은 거리가 멀었거든! 이래보여도 마녀라서 말이야. 근데 여기 되게 크지 않아? 성당이 다 이런가?"


"돈 많으면 크게 짓겠죠...그보다 누나 마녀복장 그거 그냥 컨셉잡은 바텐더로 입는거 아니었어요?"


"내가 옛날에 마녀로 일했다는 얘기 안했던가? 뭐, 점집의 마녀 역할이었지만 나름대로 정확했다구?"


뭔가 평소의 술먹고 헬렐레한 모습이랑 똑같은데? 이거 술먹는건 평소의 텐션을 가리려고 위장으로 먹는건가? 그보다 점집에서 일했다니, 어울리는듯 하면서도 의외인데.


"그럼 제 점도 쳐줄 수 있어요?"


"으음, 도구도 없어서 자세하게는 힘든데...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뭔데요?"


"알바군에게는 여자에게 둘러싸이는 미래가 보여."


오? 뭔가 좋은것같은데? 진짜 점을 칠줄 아나?


"...정말요? 거짓말 아니고?"


"글쎄? 근데 이렇게 수녀님들이 많은 공간에 들어오니까 여자에 둘러싸인건 맞지않아?"


"나 참, 끼워맞추기잖아..."


괜히 기대했다.


수녀님이 성당 주소는 가르쳐 줬지만, 자세한 장소는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수녀님을 찾아서 주위를 살펴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수녀님은 최소한 방 번호라도 알려주셔야 하는거 아니야? 왜 초대를 받았는데 초대받은것같지가 않지?"


"알바군, 여긴 아파트가 아니야. 그리고 자세한 방 번호라니, 택배라도 받을거야?"


수녀님을 찾다가 피곤함을 느끼고있을때 즈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등 뒤에서 수녀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제 거처까지 자세히 알려드릴 수는 없었거든요. 참고로, 택배는 모두 받아서 검사 후에 수령하게 되어있답니다."


"아, 수녀님."


"수녀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시죠, 형제님. 여기 주변에 수녀가 한두명이 아니니까 크게 부르면 열명 스무명이 고개를 돌릴겁니다."


하긴,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을때도 수녀님 한번에 저 쪽에 있던 수녀님 한분이 잠깐 고개를 돌려 여기를 봤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베로니카 자매님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형제님."


"네, 베로니카 자매님."


"후후후, 종교에 몸을 담지 않은분께 그렇게 이름을 불리니까 기분이 묘하군요. 그보다 이쪽으로."


베로니카 수녀님은 나와 키르케 누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수녀님의 리드 하에 서로 다른 여러개의 건물을 지나왔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수녀님들과 신부님들을 볼 수 있었다. 분명히 건물 몇개를 지나왔는데 아직 성당부지 안쪽인가?


"...여기 왜 이렇게 넓어요? 일직선으로 이만큼 걸어도 아직 끝이 안보이는데."


"저희는 성당인 동시에 수녀원도 운영하고, 또 고아원과 어린이집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답니다. 평소에는 각 구역 사이의 울타리를 쳐서 닫아두지만 오늘은 미사가 있는만큼 전부 열려있지요."


그렇게 말한 베로니카 수녀님은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고, 거기에는 울타리같은것이 접혀있었다. 저게 아마 방금 말한 구역사이를 구별하는 울타리겠지.


"와...엄청 크네."


"으음, 돈이 엄청 많은가봐요?"


"네, 신실한 신도분들의 헌금뿐 아니라 각종 단체에서의 기부도 있으니까요. 이쪽입니다."


베로니카 수녀님은 우리를 성당 뒷편의 작은 건물로 안내했고, 거기에는 여러명의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작은 운동장같은게 있었다.


"여긴...?"


"아까 말했지요? 고아원과, 어린이집이 있다고. 저희 성당에서 보살피는 아이들이랍니다."


"그럼 오늘 저희의 목적지는 여기인가요?"


"네, 식사도 대접할 겸...일손이 필요해서요."


"아하, 일손....잠깐? 일손?! 설마?"


소, 속였구나! 베로니카! 수녀라는 그럴듯한 위장으로 나를 속이고 끌어들였어! 나를, 나를 속이다니이이이!!


"후후, 형제님.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도 말라 하잖습니까? 노동 후의 식사가 얼마나 즐거운지는 직접 겪어보시죠."


그런데...여기서 내가 매몰차게 거절할수도 없다.


"누구야?"


"베로니카 수녀님~누구에요?"


이미 운동장에서 놀던 애들중 일부가 이쪽을 인식했고, 내가 여기서 돌아서서 가버리면 쟤네들한테 마음의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고... 젠장, 이래서 여기까지 끌고온 다음 이야기를 했구나...


"후우, 네. 할게요. 그 일손인지 뭔지. 뭘 도와드리면 되는거죠?"


"사실, 머릿수가 많다보니 식재료도 적지 않습니다. 손재주를 그리 기대하는건 아니니, 식재료 운반과 재료 밑손질과 식기 운반과 쓰레기 정리와 설거지와 뒷정리정도만 해주시면 될것같네요."


"...사실상 조리빼고 다 하라는거 아닌가요?"


그걸 다 하라니 차라리 요리를 하겠어...


"어머, 힘쓰는 일만 맡겨보려다보니 그만."


베로니카 수녀님은 장난이라는듯 가볍게 웃었고, 나는 감쪽같이 놀려졌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후우...베로니카 수녀님 의외로 되게 영악하시네요."


응? 근데 이쯤되면 키르케 누나가 뭐라고 한마디 할때 아닌가?


'알바군, 열심히 해! 누나는 조리를 맡을게! 밑준비랑 뒷정리랑 쓰레기 치우는거랑 공과금납부정도만 부탁해!'


라던가.


'이런, 알바군 오늘도 열심히 일하게 생겼네? 수녀님도 참, 사람이 못됐어~'


라던가.


뭐라도 말할줄 알았는데....


"누나, 뭐라고 말이라도...응?"


"네?"


정작 찾아보려니까 내 옆에 없다.


"베로니카 수녀님, 키르케 누나 어디있어요?"



"아, 형제님께서 저를 누나라고 부른줄로만 알았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을 너무 연호하다보니 정말 누나라고 착각하신줄로만 알았지 뭡니까. 그보다, 저희 술냄새 가득한 마녀 자매님이라면 아까 형제님에게 일손을 요청했을때부터 저기에 계셨습니다. 아이들을 지켜보고 계시더군요."


뭔가 되게 신랄하게 키르케 누나를 까는것 같은데...아무튼 키르케 누나의 위치는 알았다.


"누나, 뭐해요?"


"응? 아니, 아무것도. 그냥 어린애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키르케 누나는 내가 다가오자 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아무것도 아닌척을 했지만, 방금전까지 멍하니 애들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누나가 뭘 했는지 알고 있었다.


"......."


활발하게 노는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곳에서, 혼자 멍하니 땅을 바라보는 주황색머리의 여자아이.


키르케 누나의 시선은 줄곧 그 아이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저 여자애가 신경쓰여요?"


"어어? 그게...후우, 그렇게 티났어?"


"눈이 떨어질줄을 모르던데요."


"그냥, 옛날에 인연이 있는 아이가 한명 있었어. 그 애랑 똑닮아서 그만..."


키르케 누나의 설명에, 나는 어느정도 이해하긴 했지만 완전히 납득하지는 않았다.


겨우 그런걸로 잃어버린 가족 보는것마냥 쭉 쳐다보는게 이해되지는...


툭.


"응?"


키르케 누나가 왜 저렇게 저 아이를 쳐다보는가에 대해 생각하려던 찰나, 내 발치에 무언가가 닿았다.


"공?"


작은 축구공이 내 발치에 떨어져 있었고, 이내 내쪽으로 어떤 여자아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파란색에, 양갈래머리를 하고 안대까지 착용한 다소 특이한 복장이었다.


"저, 저기. 공좀..."


아, 이 공이 얘가 갖고 놀던 공이구나.


"여기."


나는 여자아이에게 공을 건네줬고, 여자아이가 공을 받아들었을 때 누군가가 여자아이의 뒤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정말 죄송해요. 딸이랑 놀아주다가 그만..."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30대도 안되는것같은데 10살 남짓해보이는 이런 여자애의 엄마라니...가능한가?


....아, 불가능한건 아니구나. 실제사례가 있긴 했네.


"아니, 괜찮습니다."


내 대답에, 아이의 엄마분은 웃어보였다.


"후후,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폐를 끼치지 않았을까해서 걱정했거든요."


웃는 모습이 참...뭐랄까, 사람을 유혹하는것같다.


그보다 딸이라는 저 여자아이도 확실히 귀여운 면이 있긴 한데, 엄마랑...좀 안닮은것 같은데.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오신건가요? 미사는 끝난지 오래고, 아이를...데려오신것도 아닌것같은데. 아, 봉사활동을 하러 오신건가요?"


신자도 아니고, 애 아빠도 아니면 여기 있을 이유는 자원봉사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것같다. 하긴, 성당에 밥먹으러 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리가 없지.


"봉사활동이라...네, 뭐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볼수도 있겠죠."


"어머, 주말에 애인과 함께 봉사활동으로 데이트이라니. 좋은일을 하시네요. 저는 에이미라고 해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철남입니다. 강철남. 그보다 데이트 아닌..."


내 대답에, 공을 들고 가만히 있던 여자아이쪽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이름 이상해~"


"내 이름이 어디가 어때서?"


이 여자아이...아니, 꼬마. 남의 이름을 놀리면 안된다.



"어머, 공주님. 그럼 못써요."


그래, 엄마도 그렇게 말하잖아! 그럼 못써!


"하지만 이상한걸? 에이미도 강철남이라는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고 생각해도 입 밖으로 내는건 실례에요."


뭐지? 엄마를 이름으로 부르나? 뭐지? 한국의 유교문화에 떡칠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다. 하지만 존중해주겠어!


"꼬마야, 이 오빠는 부모님한테 받은 이 이름이 자랑스럽단다. 네 이름은 어떻니?"


그렇지만 이름을 비웃은건 존중할 수 없다. 네 이름도 놀려주겠어! 나는 사나이 강철남,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평등하게 대한다!


놀림 받은건 똑같이 놀려주도록 하겠어!


"내 이름? 에헴! 이몸은 바로 진조의 공주, 싸이클롭스 프린세스 님이시다!"


"그래, 그래. 싸 이클롭스프린세스님. 성이 싸씨에 이름이 이클롭스프린세스라니.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멋지네."


"싸 이클롭스프린세스 아니야! 싸이클롭스 프린세스라고! 그, 그보다 내 이름이 멋져?"


어? 화내거나 그러는게 아니라 이렇게 멋지냐고 물어온다고? 이건 생각하지 못한 반응인데.


"응? 말해줘, 내 이름이 진짜로 멋져? 응? 응?"


쓰읍...괜히 어른답지 못하게 놀려먹으려 했던것같다. 내가 애 상대로 뭐하는거냐, 지금...애한테 맞춰서 놀아줄줄도 알아야지.


"그래, 멋진데? 진조의 공주님이라 그런지 과연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네!"


"어머, 죄송해요. 저희 공주님이 푹 빠져있는 작품이 있어서요. 매번 이래요."


에이미씨가 사과했지만, 이 작은 꼬마 공주님은 내가 어울려주자 흥분해서 더더욱 심도깊은 곳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본좌의 진명은 LRL! 네게만 알려주도록 하겠다! 기뻐하도록, 권속이여!"


그냥 이름만 그렇게 대는게 아니라 나를 멤버로 편입시키려고 하고있었다.


....나도 그럴때가 있었지. 옛날...감수성 넘치던 중학교 시절에. 좋아, 어울려주마!


"이 미천한 권속에게 이름을 알려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공주님!"


"어어? 고마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에, 에헴! 당연하지! 앞으로도 공주를 다해 헌신하도록!"


이 꼬마 공주님...LRL이랬지, 이것마저도 약자로 줄인거냐...무슨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LRL..LRL...이효리는 거꾸로 해도 이효리..아니고...L..왼쪽...아하! 좌우좌! 넌 앞으로 좌우좌다!


좌우좌...우좌랑 조금 더 놀아주려고 하던 그 때, 에이미씨가 우좌를 슬쩍 뒤로 끌어당겼다.


"자, 자. 공주님. 오늘 처음본 사람을 권속으로 삼고 그러면 안돼요."


하긴, 누군가 보면 마지못해서 아이의 억지에 어울려준것처럼 보이겠지.....나도 내심 즐겼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밝히지 말자.


"그치만 이만큼 어울려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괜찮아요, 이정도는."


에이미씨와 이야기를 하던 그 때,  키르케 누나가 내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어머, 어머. 알바군. 어느새 친구를 만들었네?"


"...친구라기보다는..."



"히잉..."


"모셔야할 공주님을 한분 찾았죠."


"우와아아아...!"


반응이 하나하나 드러나는게, 보는 맛이 있다. 조금 더 어울려주고 놀아도 괜찮을지도.


키르케 누나는 내가 우좌랑 적당히 어울려주며 노는모습을 보고 뭔가 확신을 얻은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침 여기에 잘 적응한것 같으니까 하나 부탁해도 될까?"


"뭔데요?"


"여기 애들이 고아원 애들이잖아? 그냥 찾아와서 얼굴만 비추고 가는건 실례같지 않아?"


듣고보니...고아원에 찾아온 사람들이 얼굴만 슬쩍 비추고 가면 외로움을 탈것같기도 하다.


"으음, 그런것 같기도."


"그래서! 나는 애들을 줄 과자와 사탕을 사러 갈거야! 혼자 잘 있을 수 있지? 우리 알바군, 나 없다고 울고 그러면 안된다?"


"아, 잠깐? 누가 운다고 그래요?"


아니, 나를 무슨 집에 혼자 남는 애취급 하네?


"그럼 부탁해!"


키르케 누나는 그렇게 말한뒤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술 안마시면 저정도 신체능력을 뽑아내는구나."


바 하나도 제대로 못넘어서 휘청였던 그때와 다르게, 술을 안먹은 지금은 무슨 육상선수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머, 애인분이 참 빠르네요. 아니지...알바군이라고 부른걸 보면, 애인은 아닌가요?"


"그냥 알바 하는곳에 있는 친한 누나에요."


"그럼 왜 여기에 같이 자원봉사를 하러 오신거죠?"


"베로니카 수녀님이 불러서..."


베로니카 수녀님은 진짜 부르면 반응하는 센서라도 있는건지, 이름을 꺼내자마자 거짓말처럼 내 뒤에 귀신처럼 다가오셨다.


"형제님? 준비가 거의 끝났습니다. 와서 도와주시죠."


"아, 네. 도와드릴게요."


내가 수녀님을 따라가려 할때, 수녀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셨다.


"음...그보다, 키르케 자매님은 어디계시죠? 도와주실거라 생각해서 다른 자매님 한분을 돌려보냈습니다만."


맞네, 여긴 나 혼자 온게 아니었지. 키르케 누나도 같이 왔고...


"그러니까...누나가...어? 어어?!"


탈주했나?! 젠장, 어쩐지 더럽게 빠르더라니! 탈주닌자라서 그렇게 빠른거였나!


"아까 거기 가만히 있던게 탈주 각을 재려고 그랬던거야?!"


"으음, 그런건 아닌 모양입니다만...아무튼 키르케 자매님의 몫만큼 열심히 해주시길."


"쓰읍, 혼자서 얼마나 해야하는거지...?"


"저기..."


내가 혼자서 두명분의 일을 해야하는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에이미씨가 말을 걸어왔다.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도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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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만났고, 만난지 1시간도 안된 여자인 에이미에게 자연스럽게 이름도 알려주고 도움까지 받는 상황.


식사대접인줄 알았는데 식사조리였고, 함께 온 동행인이 탈주하고, 혼자 2인분의 일을 해야하는 그런 상황에서, 낯선 사람의 손길이 반가우면 반가웠지 의심스러울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철남은 에이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고, 어느새 불편하지 않게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당의 내부 풀숲에서 지켜보는 누군가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심, 너무 없어. 순진."


풀숲의 누군가는 자연과 하나된듯 풀숲과 동화된채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목표였지? 모르겠어. 그치만. 방치. 불안해."


"앗, 이동."


그리고 감시하던 이들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풀숲속의 누군가는 소리하나 없이 풀숲을 빠져나와 장소를 이동했다.


다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