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라는 표현이 적당한 시각, 부지런히 밀린 업무를 보는 도중 들려온 질문에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단 둘만 남아 업무를 보면서 하는 잡담이란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방식의 질문은 새로운 법. 자연스레 그녀의 질문에 나 역시 질문으로 대답하였다.


"비밀이라.. 그럼 시라유리는 비밀이 있어?"

"어머,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시다니.."


쿡쿡 웃으면서도 시라유리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딱히 내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순순히 내 질문에 응답하였다.


"음.. 여러가지 있어요. 만약 비밀이 없다면 그게 거짓말 이겠죠?"

"정말? 우리 사이에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어?"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역시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시라유리 그녀는 엄연히 첩보부에 속한 인물이고, 그렇다면 말하지 못할 비밀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물론, 아주 조금의 서운한 감정도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사령관 님도 충분히 눈치 채셨을 거니 의미 없는 비밀이지만.. 궁금하신가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라유리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쉬며 수다라도 떨자는 단 둘만의 신호에 나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응접용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여기, 각설탕 2개와 아주 약간의 우유를 넣은 커피.. 맞죠?"

"이제 말하지 않아도 내 취향을 알고 있구나?"

"그럼요~ 서로 지낸 시간이 있으니까요."


건네지는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니 몸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물론 커피 만을 마시며 보내는 시간이 아니었기에 슬며시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며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추궁하자, 그녀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대답을 시작했다.


"정말 한심한 일이죠.. 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거든요."

"뭐? 이야~ 그거 큰일인데.. 나 말고 다른 남자가 있었어?"


장난스럽게 시라유리의 대답에 응답하자, 시라유리 역시 피식 웃으며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항상 냉랭해 보이는 그녀가 보이는 따스한 시선. 만약 그녀를 알고 있는 다른 아이들이 보았다면 놀라 자빠질만한 그런 시선을 보이며, 그녀는 대답을 계속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제 본분을 망각하곤 한답니다.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녀처럼..."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가라앉히는 시라유리의 모습에 결국 피식거리는 웃음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마치 나와 전혀 관련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는 시라유리지만, 그녀가 말하는 '그분' 이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혀 관련 없다는 듯 계속 말하는 시라유리의 심정은 아마도 자신의 창피함을 덮고, 그저 털어놓고 싶어서 그런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그녀는 본디 요원으로 탄생 된 만큼,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정말로 어려워 했으니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아요. 정말 한심하죠?"

"한심하다 생각하진 않지만.. 직무유기는 곤란한 걸?"

"푸훗!"


커피의 유혹을 뿌리치며 시라유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곁에 앉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비강을 간지럽히고 낯간지러운 마음에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지만, 이렇게 그녀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이런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까요?"

"음... 상사병?"


사랑에 빠진 소녀의 심정이란 남자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가장 그럴 듯 한 대답을 하며 시라유리의 머리를 계속 어루만졌다. 시라유리 역시 그런 손길을 즐기는 듯 살며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째깍이는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방안은 고요해졌지만, 그 작은 소음에 우리들의 심장이 쿵쾅이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알고 지내온 시간이 긴 사이지만 언제나 이렇게 마음을 나누면 처음의 그때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빠져든 그 당시처럼 새롭다.


"제 본 모습을 알고도 받아들여 준 사람은 사령관 님 뿐이랍니다.. 정말, 독특하신 분.."

"그 모습조차 좋아하니까, 그래서 모든 것들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곁에 있고 싶으니까."

"저도.. 저도 그래요.. 080기관의 특수요원 시라유리도.. 사령관 님에게 전부를 바칠게요."


살며시 두 남녀의 입술이 맞닿았다. 짧고 입술 뿐인 가벼운 버드 키스에도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것에는 충분했다.


"그래도 직무 유기를 한 것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야겠지?"

"어머! 그건 상사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는데.. 후훗, 차라리 상사병을 치료해 주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아쉽게도 심리적인 부분은 능숙하지 못하기에 잠시 말문이 막히자, 시라유리는 모범 답안을 보여주려는 듯 내 앞에 마주 보고 서 그녀의 상의를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투둑- 툭- 단추가 튕기는 소리가 들려오며 새하얀 나신이 시선에 가득 들어왔다.


"후훗.. 이렇게 하면.. 상사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잘 아시겠죠?"

"멍석까지 깔린 마당에 놀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꺄앗~"


가볍게 시라유리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하기 시작하자, 시라유리가 사뿐히 목에 팔을 감으며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비밀이 하나 생기겠네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우리들만의 특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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