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칸은 눈을 떴다. 물에 잠긴 것처럼 팔다리를 움직일 때 묵직한 느낌이 있었지만 몸은 전반적으로 한결 가벼웠다. 사방이 온통 하얀 공간에서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언가 눈에 띄는 건 없는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 것도 없군.”

 

그녀는 걸으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한참을 걸었지만 주변이 텅 빈 종이처럼 하얀 공간이라 얼마만큼 걸어왔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한참을 걷던 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할 겸 자리에 앉았다.

 

“내가 온 곳은 리마토르의 무의식이야. 뒤집어 말하면 리마토르가 숨기고 있던 많은 정보가 이곳에 있고, 리마토르 본인의 의식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것들까지 여기 있다는 거지. 그러니 이렇게 휑할 리가 없을 텐데...”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기에 그녀는 혹시 닥터가 실수한 건 아닌가 싶어 닥터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아예 먹통이 된 통신기는 노이즈만 내뿜었다. 칸은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통신기를 집어넣었다. 춥지만 않지, 설국이나 다름없는 하얀 벌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숙고하던 칸은 자신의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저건...?”

 

반투명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하얀 배경과 구분이 가지 않는 작은 인영(人影)이 멀리서 달리고 있었다. 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본능적인 감으로 저 인영이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한 칸은 재빠르게 그 인영을 향해 뛰었다. 이명인 신속에 걸맞게 그녀의 속도는 마력 좋은 엔진을 탑재한 오토바이의 속도에 맞먹었다. 10초도 안 걸려서 체감 상 1km에 가까운 거리를 주파한 그녀는 자신이 본 인영을 찾았다. 자세히 보니 어린 아이의 형상을 띤 반투명한 인간은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는 듯 그녀와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거리만을 두고 서 있었다.

 

“저기, 네가 혹시-”

 

칸이 뭐라 말을 걸어보려는 찰나, 반투명한 아이는 허공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그녀의 뒤에 검은색 문이 나타나자 반투명한 아이는 총총 걸어가 문을 가리켰다. 칸은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는가 싶어 그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반투명한 아이는 답을 주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좌우로 젓지도 않고 그저 문을 통과해 모습을 감출 뿐이었다. 칸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문에 다가가 뒤편을 보았지만 아이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무엇이 되든 리마토르의 일부가 이 안에 있으리라 생각하자 저절로 그녀의 마음이 중압감으로 무장했다. 손잡이를 돌려서 연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또 다른 하얀 방이 펼쳐지는 걸 보았다.

 

“여기는 뭐지?”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공간과는 달랐다. 하얀 방에 검은 선으로 벽과 가구가 그려진 것 같은 공간은 마치 화가가 스케치를 해둔 것 같았다. 검은 선으로 윤곽만 잡힌 침대를 손으로 만져본 칸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허공과 분간이 되지 않는 하얀 공간에서 폭신폭신한 질감이 느껴지자 그녀 자신이 생각하는 물질계의 정의가 비틀리는 인상을 주었다.

 

“신기한 곳이네. 좌우간 여기는 가정집 방처럼 보이는데, 리마토르가 살던 곳이었나?”

 

칸은 다른 공간으로 향하려고 허공에 그려진 문에 손을 댔으나 문은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창문도 열리지 않자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자신이 들어온 검은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검은 문도 꽉 잠겨서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으나 나갈 때는 아닌 상황에 빠진 칸은 혀를 차더니 침대에 앉았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리마토르가 분명 논어를 설명할 때 하나의 이치로 모든 걸 꿰뚫어볼 수 있다고 그랬잖아.”

 

칸은 논어의 위령공편(衛靈公篇)의 일이관지(一以貫之)를 떠올리며 침착함을 가다듬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서 냉정함을 잃으면 결과가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축적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그녀는 더더욱 논어 구절에 집중을 기울였다. 완전히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는 자신이 있는 방을 관찰하면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침대 외에 시계 하나가 전부인가. 접이식 책상 외에 책장도 없으니 이상한 걸.”

 

칸은 바닥에 흩어진 여러 장의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삐뚤빼뚤한 어린 아이의 글씨로 다양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건 수학 공식이고, 이건 독후감이고, 이건 반성문?

 

어디 보자, 내용이...

 

‘쓸모없는 사람이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반항하는 쓰레기가 되지 않고 엄마와 아빠 말을 잘 들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반성문의 내용을 눈으로 훑던 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 아이가 쓸 법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직감적으로 리마토르의 과거가 순탄하지 않음을 눈치 챘다.

 

“어린 아이의 글씨고, 부모에게 통제를 받을 나이임을 고려하면 나이가 많아야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여. 반항이라는 건 사춘기 초반에 나타나는 시기니까 13살 정도로 봐야 하나?”

 

반성문의 내용으로 현재 자신이 보고 있는 과거의 리마토르가 몇 살 정도인지 유추해낸 칸은 단서를 더 찾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근처에 떨어진 2권의 책을 주운 그녀는 자신의 심증을 굳혔다.

 

“이 정도의 두께면 한 300여 쪽은 되겠는데. 어린 아이가 읽기에는 두꺼운 편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라면 시간을 들여서 읽을 수 있는 정도일 거야.

 

그보다 이 책들은 제목이 아예 안 적혀있네. 내용도 듬성듬성 쓰여 있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칸은 두 권의 책 모두 한 장씩 넘겨보면서 무슨 단서가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다. 내용에서 특별히 주의할 점을 찾지는 못했으나, 그녀는 책장 마지막 페이지에 어린 아이의 자필로 쓰인 글자를 발견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했어요, 말 잘 들을 테니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허, 참...”

 

칸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때리지 말아주세요’라는 말이 나오는 시점에서 학대를 의심할 텐데, ‘미워하지 말아주세요’라는 말은 곧 물리적인 폭력을 넘어 심리적인 폭력까지 자행되는 상태임을 암시했다. 많이 잡아야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아이가 겪은 일이라 생각하자 그녀는 손이 분노로 떨리는 걸 느꼈다.

 

“이런 쓰레기보다도 못한 놈들 같으니라고!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하는 짓거리가 폭력이라니...!”

 

칸은 격노를 참지 못하고 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정신적인 공간이라 물리적인 충격은 없었으나 그녀의 분노만큼이나 큰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주먹소리에 반응이라도 했는지 잠긴 문 밖에서 누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폭이 작고 소리가 가벼운 걸로 보아 어린아이로 추정되는군. 나를 이 공간으로 초대한 그 아이인가?”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를 듣던 칸은 손잡이를 쥐는 소리에 문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약간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잠겨있던 문이 열리자 칸은 시야에 들어오는 아이의 모습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생각한 13살 정도의 아이보다 더 어린, 자신을 이 방으로 초대했던 10살 남짓한 아이가 하얀 방에 어울리지 않는 색이 들어간 모습으로 울면서 방에 들어왔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칸을 바라본 아이는 소리 없이 슬픈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칸은 말없이 아이에게 다가가서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그녀의 안으로 아이의 기억이 들어왔다. ‘본다’는 시각에 의존한 느낌이 아니라 자신이 마치 그 사건을 겪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칸은 생경한 감각에 눈을 감고 자신이 무엇을 받아들여야할지 바라보았다.

 

 

 

 

 

“이 쉬운 것도 못해! 이 쓸모없는 놈!”

 

나를 경멸하는 말 뒤에 당구 큐대가 날아와 내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휘두르기 쉬우면서도 아프기는 끔찍하게 아프니 저 여자도 큐대를 회초리로 쓸 터였다. 어깨, 허벅지, 머리, 팔 모두 맞을 때마다 묵직하면서 화끈한 고통이 올라와 주인인 나에게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오기가 생겨서 버티려고 했지만, 큐대가 나름대로 방어를 해보던 내 팔 아래를 향해 갈비뼈를 가격하자 숨이 막히는 고통이 울컥이며 올라와 잘못했다고 빌게 내 몸을 움직였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 말만 몇 번째야! 너 또 거짓말하고 있어!”

 

큐대가 내 귀를 때리자 일순간 세상이 멍했다. 삐 소리 나는 이명이 청각을 마비시켰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잘못했다고 비는 게 전부였다. 한참을 날 때리던 여자는 꼴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면서 내게 발길질을 했다. 빨리 들어가지 않으면 또 맞을까 무서워서 급히 방에 들어간 나는 침대로 올라와 몸을 웅크렸다.

 

“노력했는데... 나도 진짜 열심히 노력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서, 밥 먹을 때 젓가락질을 잘 못해서, 걸을 때 일직선으로 걷지 않아서. 여러 이유를 붙여서 여자는 나를 때렸다. 이유가 없을 때도 여자는 자신의 기분에 거슬린다면서 나를 때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 쉬운 거 하나 못하고 있냐’고.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는 이 사슬을 정당화했다. 나를 세상에 낳아줬다는 이유 하나로 그 여자는 나를 다룰 모든 권리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기대에 맞추어 움직이면 나를 좋아해주겠지, 미워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내 노력은 언제나 안 하니만 못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렇다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아버지라는 남자가 왜 이렇게 기가 죽어있냐면서 또 매를 들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난 최대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하나의 쇼였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좋지 않다. 폭행, 폭언, 폭력. 폭(爆) 자가 붙은 말은 날 끊임없이 터뜨렸다. 난 내면에서도 외면에서도 폭사(爆死)당했다. 쓸모없는 놈, 왜 이렇게 사냐, 이럴 거면 죽어버려. 온갖 말들이 나를 찔러 속을 헤집어 놓아도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내가 더 잘했으면 그런 말을 안 들었을 거니까.

 

 

“또 질질 짜고 계신 겁니까?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으니 정말이지 끔찍하군요.”

 

소리 죽여서 운다고 생각했는데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갔는지, 가정용 바닐라가 날카로운 독설로 날 공격하면서 내 방에 들어왔다. 미안하다고 눈을 내리다가 바닐라의 볼에 남은 새빨간 손자국을 본 나는 걱정이 앞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닐라, 또 엄마가 때린 거야?”

 

“신경 끄십시오. 떽떽거리는 소리 따위 듣기 싫습니다.”

 

“볼이 빨개... 연고라도 발라줄ㄱ-”

 

“쓸데없는 짓하지 마시고 더러운 손 치우세요.”

 

바닐라는 서랍에서 연고를 꺼내 발라주려던 나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래도 내가 약은 발라야 한다고 우물쭈물 거리자 바닐라는 날 내려다보면서 차갑게 선언했다.

 

“정상적으로 생각이란 걸 하고 사십시오. 그렇지 않으니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겁니다.”

 

바닐라가 방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연고를 손에 쥐고 있던 나는 이불을 덮어썼다. 이불이 안전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아줄 터였다. 이불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격리된 나는 그저 울었다.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울고 싶었다. 덩어리진 감정이 눈물에 씻겨나가자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싫고, 제발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아. 버려지고 싶지 않아. 날 혼자 두지 말아줘.

 

 

 

맞는 건 아프고 싫지만 버려지는 게 더 무서워.

 

 

 



“....”

 

아이의 머리에서 손을 뗀 칸은 모든 기억을 받아들이고 그 아이를 온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칸은 여전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칸의 손길을 받은 아이는 울먹이면서 입을 열었다.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착한 아이가 될 게요...”

 

아이의 말을 들은 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이를 꼭 품에 안고 토닥이는 행동으로 답을 한 그녀는 아이의 작은 등이 떨리지 않도록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괜찮아, 나는 널 미워하지 않을 거야.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이제는 괜찮을 거야. 네가 혼자가 되지 않도록 내가 옆에 있어줄게. 

 

울어도 돼. 하지만 혼자 울지는 마.”

 

칸이 아이의 귀에 나긋나긋하게 속삭여주자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아직 붉게 충혈 되고 퉁퉁 부었지만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 눈으로 칸을 올려다본 아이는 처음 문을 만들었을 때처럼 허공에 손을 휘저어 검은 문을 만들었다. 살짝 문을 열고 칸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한 아이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투명해졌다.

 

 

“고마워요.”

----------------------------------------------------------------------------------------------------------------------------------------------------------------


드디어 칸 에피소드에 돌입했네. 칸 에피소드에서는 리마토르의 삶을 택하기 전 유상이 어떤 유년기를 보냈고, 아스널 에피소드에 나온 희연과 어떻게 만났는지를 다룰 거야. 이번 에피소드에서 아스널 에피소드 때 보인 유상의 가치관이 형성된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35편에 나왔던 떡밥도 풀 예정이야.


개인적으로는 이번 에피소드를 전체 스토리에서 1부를 마무리 짓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중심인물들의 관계를 치밀하게 짜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길 부탁할게. 그런 부분은 전부 제대로 설명하고 넘어갈게.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