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이거 먹어봐, 아~”

 

“아~”

 

두 번째 문 뒤의 공간에서 칸은 달달한 시간을 만끽했다. 비록 칸 본인이 아니라 희연의 모습을 빌린 기억이라고 해도, 리마토르를 구성하는 자아 중 하나가 추구하는 ‘사랑 받고자하는 목적’을 자신이 충족시켜주는 중이라고 그녀는 자신을 다잡았다.

 

“어때? 맛있어?”

 

“희연이가 해준 거면 뭐든 맛있지!”

 

한낱 지나간 기억에 그녀가 역할 중 하나를 대신했을 뿐인데,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이 우러나오는 걸 느꼈다. 그에게 달걀말이의 간이 잘 되었냐고 간을 보게 해주고, 맛있는 반찬은 하나라도 더 먹으라며 자기 밥그릇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서로 상대의 밥그릇에 반찬을 더 얹어주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함께 소파에 기대어 앉아 TV를 보지만 정작 TV보다 서로를 더 오래 보고 있는 삶.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부를 수 있는 연애를 거치며 칸은 자신의 안에서 욕망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평생을 전선에서 살아오면서 내게도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지금 내가 겪는 일이 전부 신기루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잠시 빌려서 겪는 일이라고 해도 이 행복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아.’

 

설탕물을 맛본 개미가 달콤함을 좇다가 끝내 설탕물에서 익사하는 운명을 맞는다면 그 개미는 죽는 순간에 극상의 쾌락을 맛보니 행복할까? 평상시의 그녀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겠지만, 지금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상대방을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사랑할 수 있고, 그런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관계 속에서 칸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내면의 가치가 충족되는 감각을 느꼈다.

 

“희연아.”

 

“응?”

 

“좋아해.”

 

“히힛, 나도.”

 

리마토르가, 정확히는 아직 유상의 삶을 살고 있는 그가 희연의 삶을 사는 칸을 불렀다. 그윽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입을 맞추자 따뜻한 혀의 온기로 감정이 오갔다. 숨을 너무 오래 참아 머리가 살짝 아플 무렵 입을 떼자 서로가 연결되었음을 알려주던 투명한 타액의 실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빛나는 타액의 실만큼 찬란한 상대를 사랑하는 감정에 둘은 몸을 던졌다. TV를 끄고 커튼을 친 둘은 예정된 일이라는 듯 자연스레 안방으로 향했다.

 

“이런 건... 처음이라 모르겠는데...?”

 

희연의 입에서 칸의 말이 나왔다. 그녀의 모습을 빌려 리마토르의 과거를 보고 있는 칸은 은근히 기대를 하면서 침대에 누워 살짝 티셔츠를 올렸다. 올라간 티셔츠 사이로 뽀얀 그녀의 배가 보이자 유상은 말없이 그녀의 옆에 누웠다. 칸에게 팔베개를 해준 그는 눈에 띄게 붉어진 볼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천장에 시선을 맞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아?”

 

칸은 바로 긍정을 표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은 달라붙어 목소리를 봉쇄하더니 칸의 의도 없이도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신체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자 칸은 놀랐으나, 금세 희연의 기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안심했다. 그녀가 몸의 통제권을 쥐든 아니든 결과는 바라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유상은 칸의 티셔츠를 서서히 올렸다. 적당히 볼륨감 있는 가슴을 담고 있는 하얀 브래지어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자 칸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저기, 희연아? 이건...”

 

유상은 그녀의 손에 이끌린 자신의 손이 브래지어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터질지도 모른다는 인상까지 주는 그의 얼굴은 그가 절대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폭신한 살결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지고 손가락에는 부드러우면서 봉긋한 촉감이 느껴지자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만취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 칸은 그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으면서 다른 손으로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다.

 

“오빠, 마음에 들어?”

 

입에서 칸이 아닌 희연의 말이 나왔지만 상황에 더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지는 내용이었다. 백색에 가까운 살결과 대조되는 선홍빛 첨단에 반강제로 손을 올린 유상은 뭐라 반응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칸은 미숙한 그의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의 하반신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유경험자와 무경험자의 차이는 확연했기에 유상은 본능을 깨우는 그녀의 손놀림을 거부하지 못했다.

 

한참 뒤, 유상은 신사적인 짐승이 되어있었다. 유전자에 각인된 번식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상대가 혹여나 아플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흡사 병아리를 다치지 않게 입에 물고 옮기는 늑대였다. 칸은 그의 그런 신중한 모습까지도 매력이라 생각하며 상황을 즐겼다. 원초적인 리비도를 따라 성적 욕망을 충족하던 둘은 절정에 이르기 전에 교합을 풀었다. 끈적거리는 백탁액이 희연의 모습을 한 칸의 배 위에 뿌려지자 칸은 아쉬움과 행복이 교차했다. 그녀가 이번에는 노력해보자고 말하려는데, 희연의 기억이 칸의 인격보다 먼저 움직였다.

 

“왜 그걸 몸에 뿌려?”

 

예기치 못한 질문을 받은 유상은 뭐라 대답해야할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임신하면... 아직은 곤란하니까.”

 

칸은 이해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희연의 기억은 칸의 통제를 막으면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자아냈다. 그러고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순수한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게 몸에 들어가면 임신하는 거야?”

 

순간 칸도 유상도 동작을 멈췄다. 예상 범위를 벗어나는 희연의 질문에 유상은 위화감을 느끼고 물어봤다.

 

“....희연아, 혹시 오빠한테 말하지 않은 거 있니?”

 

“응? 그런 거 없는데?”

 

거짓말. 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무언가 숨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표정은 사실을 감추기에는 너무나도 허술했다. 몰래 사탕을 빼먹고 시치미를 떼는 초등학생처럼 입을 앙다물고 대답을 피하는 희연의 반응에 의심을 점점 키운 유상은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희연아, 오빠가 희연이를 좋아해서 물어보는 거야. 자세히 알수록 예쁜 점이 더 많이 보이니까 희연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래.”

 

“난 숨기는 거 하나도 없는데?”

 

“음, 혹시 오빠가 희연이한테는 못 믿을 사람이었니?”

 

“아니야! 오빠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

 

“그럼 오빠에게 말 안한 게 있는지 조금만 알려줄 수 있어?”


“그, 그건 안 돼!”

 

“안 된다고? 오빠한테 이야기 안한 게 있구나?”

 

“ㅇ,어,없어! 그런 건 없다고!”

 

한참 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이던 희연은 눈물까지 그렁거리면서 부인했다. 칸은 대체 무슨 비밀이길래 희연이 그토록 숨기는지 의구심을 품었고, 유상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연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자 유상은 캐묻기를 포기했다.

 

“그럼 말 안 해도 돼. 희연이가 싫으면 싫은 거니까. 오빠가 억지로 말하라고 해서 미안해.”

 

그는 여전히 눈가에 눈물이 맺힌 희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느끼던 희연은 코가 막혀 코맹맹이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빠는 나 안 미워할 거야?”

 

“내가? 내가 널 왜 미워해.”

 

“진짜로 진짜로 나 안 미워할 거지?”

 

“그럼. 오빠는 언제나 희연이를 좋아해.”

 

그의 대답을 듣자 희연은 그의 품에 폭 안겼다. 표정을 가리고 싶었는지 유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그녀는 꼭꼭 감추어왔던 비밀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나... 나 사실 지적장애 3급이야.”

 

희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칸은 아스널과 보았던 기억의 일부를 떠올리고 탄성을 질렀다. 유상은 좀체 믿을 수 없었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가슴팍에 그녀의 눈물이 흐르는 게 느껴지자 희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미안해... 숨겨서 미안해...”

 

히끅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몸이 파들파들 떨리자 유상은 희연의 몸을 부드러우면서도 듬직하게 안아주었다. 그녀가 한 질문의 의도를 이해한 그는 자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 오빠는 희연이를 미워하지 않아.”

 

그의 대답을 들은 희연은 아예 목 놓아 울었다. 우는 그녀를 달래는 유상의 손길을 희연의 내면에서 느끼던 칸은 자신이 이 순간에서 유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행복한 순간을 겪어도 이 기억을 겪은 장본인은 희연이지 그녀가 아니었다. 좁혀진 줄 알았던 그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다시 확 벌어지자 칸은 벗어나지 못하는 늪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결국 그의 사랑 밖인가? 공연 뒷풀이 때 고백한 내 마음을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면서 거절한 건, 아직도 그가 희연을 잊지 못해서였나? 애끊는 사랑이 현재진행형이어서 나는 그에게 단 한 발자국도 다가가서는 안 되는 건가?

 

이럴 거면... 처음부터 사랑하지 말 걸... 공황장애로 쓰러진 나를 구해주지 말지... 단순한 흥미로 접근하지 말 걸....’

 

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금 어금니를 세게 깨물지 않으면 자신도 희연처럼 억누르고 있던 눈물이 자제하지 못하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긋난 사랑의 방향등이 가리키는 방향이 자신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그의 도착지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억울함과 분노, 부러움에 손을 떨고 있을 때 유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어떤 조건이든, 나는 너라는 사람의 본질을 보고 좋아하는 거야. 희연이 네가 언제까지고 상냥한 희연이 너로 남아준다면 내가 좋아하는 너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 거지.”

 

“흐끅... 그 말 진짜야...?”

 

“진짜지. 상냥한 너의 모습을 잃지 말아줘. 네 본질이 있는 그대로 널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으니까.”

 

그의 말에 칸은 무언가 깨닫는 느낌을 받았다. 여태까지 알고 있던 감정과 그의 기억 속에서 본 많은 기억들이 흩어지면서 가장 아래에 숨겨져 있던 진실이 떠올랐다.

 

“그래. 리마토르 당신이 과거에 누구를 사랑했든, 그 사랑이 이어지고 있든 내가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아. 내가 사랑하고 있는 건 당신뿐이야.”

 

칸이 결심하자 몸의 통제권이 다시 그녀에게로 넘어갔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유상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누구보다도, 아주 많이.

 

그러니 사랑받고 싶어서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마. 당신을 내 사랑으로 채워줄게.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싶어.”

 

희연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다시 칸의 몸이 돌아왔다. 그녀는 희연의 모습을 빌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뜻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젊은 시절의 유상은 그녀를 꼭 껴안으면서 몸이 옅어져갔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 세 번째 검은색 문이 생겨나자 칸은 다짐했다.

 

“끝나고 돌아가면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야겠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문득 그와 사랑을 나누던 때를 떠올린 칸은 살짝 웃으면서 문손잡이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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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조금 짧아서 미안해. 떡씬을 쓰려고 했는데 어떻게 묘사해야할지 도저히 답이 안 떠올라서 중간에 건너뛰었더니 분량이 평소보다 1000자 정도 적네. 다음 편은 더 많이 써서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


칸이 첫 번째 방에서 본 건 유년기의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목적이었고, 두 번째 방에서 본 건 23살의 사랑 받고 싶다는 목적이었지. 세 번째 방이 마지막 방이 될 예정인데, 과연 세 번째 검은 문 뒤의 하얀 방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많이 부족한 필력으로 쓴 글인데도 읽어줘서 고맙다.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