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그게 무슨 말이지?”

 

“죄송해요, 칸 대장님. 리마토르님께서 면회를 거절하셨어요.”

 

과일바구니를 든 칸과 다프네는 병실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들어가겠다는 칸과 환자의 동의 없이 만날 수는 없다며 양해를 부탁하는 다프네는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했기에 칸이 발걸음을 돌렸다.

 

“휴... 알겠네. 대신 리마토르에게 내가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을 전달해주길 부탁하지.”

 

“네, 그건 꼭 전해드릴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칸은 과일바구니를 다프네에게 선물이라며 주고 호드의 숙소로 돌아왔다. 스카라비아가 과일바구니가 좋은 선택지였냐고 묻자 칸은 좋은 선택지였다고 대답한 뒤 개인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포커를 치던 샐러맨더와 워울프가 그 모습을 보더니 안타깝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대장도 힘들겠어. 사랑이 저렇게 어렵다니 참.”

 

“교수가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비리비리한 쪽보다는 튼튼하고 굵은 사령관이 더 낫지 않나?”

 

“시원하게 한 번 터뜨리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폭탄 맛을 보여주면 생각이 바뀔 지도 모르지.”

 

하이에나도 수류탄을 던지면서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평소랑 달리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대장인 칸이 부하들을 믿는 정도가 깊은 만큼 그녀들도 칸에게 굳은 신의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호드는 모두 칸의 애타는 사랑이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고민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기에 다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하아, 페더. 병실 안은 어때?”

 

“큰 변화는 없어요. 모든 면회는 일절 거부하고 방 안에서 카메라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겨있어요.”

 

퀵 카멜이 탈론 페더에게 혹시 리마토르도 칸처럼 힘들어 하는가 알아봐달라고 말했지만, 탈론 페더도 특이사항이 포착되지 않았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화면 밖의 자신을 감시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이 설치한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는 리마토르가 무서울 지경까지 간 탈론 페더는 패널에서 눈을 돌렸다.

 

“단 거라도 사올까요? 카페 아모르에서 판매하는 멜론 파르페가 인기가 좋대요.”

 

“난 찬성.”

 

“나도 부탁할게.”

 

“나도 하나!”

 

“나도. 아, 하나는 멜론 시럽이 아니라 와사비 시럽으로 뿌려줘. 어떤 불운아가 매운맛을 볼지 궁금하네.”

 

샐러맨더가 특유의 도박사 기질을 담아 주문하자 탈론 페더는 알겠다면서 주문을 받았다. 카페 아모르로 가던 그녀는 하르페이아가 책이 가득 담긴 수레를 끌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웬 책이냐며 물었다.

 

“아, 이거요? 교수님이 연구실에 있던 모든 책을 병실로 갖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갖다드리러 가는 길이에요.”

 

하르페이아의 대답을 들은 페더의 속에서 불편한 감정이 울렁였다.

 

‘뭐야. 우리 대장님 면회는 거절하더니 하르페이아는 만나는 거야?’

 

“무겁겠네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 고맙긴 하지만 반대편으로 가는 거 아니었나요?”

 

“이 정도 시간은 있어요.”

 

탈론 페더는 하르페이아가 끌던 수레를 뒤에서 밀면서 생각했다. 이대로 하르페이아를 따라 병실에 들어가면 리마토르에게 따끔한 소리를 해줘야겠다고 다짐한 탈론 페더는 힘을 주어 수레를 밀었다. 의무실 안에 들어가 그의 병실 앞에 선 하르페이아는 문을 두드렸다.

 

“교수님, 책 가져 왔어요.”

 

탈론 페더는 마른 침을 삼켰다. 문 뒤에서 그가 들어오라는 수락의 답변을 보내자마자 그녀는 문을 부수면서라도 들어가서 왜 대장님을 피하냐고 화를 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문 안에서는 전혀 다른 답이 돌아왔다.

 

“수고했어요. 앞에 두고 가 주세요.”

 

“네, 그... 휴강은 언제까지 하실 건가요?”

 

“...우선은 2주만 해주세요.”

 

“알겠어요. 쾌차하세요.”

 

하르페이아가 문 앞에 수레를 두고 나가자 엉겁결에 따라간 탈론 페더는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는 상황에 의무실 문 앞에서 마주친 다프네에게 여태까지 리마토르가 면회객을 안 만났냐고 물었다. 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다프네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네, 오시는 분들은 모두 돌려보내셨어요. 방금처럼 짧게라도 대화하신 건 처음이라 저도 놀랐네요.”

 

“대체 무슨...”

 

휴강 기간을 알려주는 짧은 대화도 처음이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다프네의 말에 탈론 페더는 그가 어째서 자신을 격리하려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리마토르가 있는 방문을 향해 눈을 돌리던 순간, 양 손목에 붕대를 감은 그가 병실 문을 열고 책이 든 수레를 방 안으로 끄는 모습을 포착한 그녀는 병실을 향해 달렸다.

 

“잠깐만요!”

 

문이 닫히기 전에 문틈에 발을 끼워 넣은 탈론 페더는 다급히 리마토르를 불렀다. 

 

“대장님을 만나줘요,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에요.”

 

“.....”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말없이 그녀의 발을 자신의 발로 밀어내려했다. 문을 닫을 수 없도록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탈론 페더는 리마토르에게 간절하게 애원하다시피 칸을 만나주기를 부탁했다.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대장님 한 번만 만나줘요. 대장님은 계속... 계속 기다리고 있으신다고요.”

 

“탈론 페더 씨.”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자 그녀는 성공이라는 생각에 반색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얼어붙고 말았다. 텅 빈 리마토르의 눈이 어두운 심연을 보여주는 인상을 받은 페더는 꺼내려던 말도 잊어버리고 순간 움직이지 못했다. 리마토르는 그런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문을 닫더니 잠금장치를 걸었다. 그러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누구도 만날 생각 없으니 돌아가세요.”

 

 

두문불출하는 리마토르의 소식은 사령관의 귀에도 전해졌다. 보고를 받은 사령관은 자신을 보좌하는 아르망을 부르더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리마토르 씨가 닥터의 시술을 받고 4일 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는 자해를 해서 입원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을 수가 없어. 사건 사이에 개연성이 있을 법도 한데, 닥터의 시술이 어떤 종류인지 대략적이라도 알 수 있을까?”

 

“폐하, 저로서는 리마토르님께서 어떤 시술을 필요로 했는지 정보가 부족한 관계로 추측이 어렵습니다. 닥터 양을 불러 답변을 들으시길 추천합니다.”

 

“그 방법은 써봤는데 닥터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답하더라. 시술을 진행한 건 자신이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파편적으로 밖에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어.”

 

“대답의 초점이 어긋났습니다. 닥터 양은 무슨 시술인지 묻는 질문에 시술의 종류가 아니라 내용을 답했습니다. 질문을 다시 하시길 추천 드립니다.”

 

“거기까지는 나도 생각해서 다시 질문했지. 그렇지만 답하기 어렵다면서 회피하더라.”

 

“폐하. 누가 봐도 수상합니다.”

 

“그렇지. 그래서 네게 묻는 거야. 닥터에게 답변을 들으려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전부 거절의 답변으로 돌아왔어. 명령권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취향이 아닌 거 잘 알잖아.”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재 제가 가진 정보 중에 리마토르님께서 어떤 시술을 필요로 했는지 추측할 수 있는 정보는 부족합니다. 정보 수집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아르망이 두 번 모두 난색을 표하자 사령관은 080기관에게 의뢰할까 잠시 고민했다. 080기관의 정보수집이면 아르망이 분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양을 얻을 수 있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리마토르가 다른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을 터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080기관은 아니야. 이미 1년 가까이 오르카호에서 지내는 모습을 관찰한 결과, 리마토르가 구 인류와 달리 무해한 인간임은 검증이 끝났어. 괜히 080기관에게 의뢰했다가 그가 눈치라도 채면 신뢰 관계만 흔들릴 뿐이야. 내가 리마토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신호를 줄 여지가 없으면서도 안정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패로는 뭐가 있을까...’

 

고민에 잠겨 있던 사령관은 현재로서는 공개적인 정보망에서 수집할 수 있는 정보를 늘리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아르망의 분석을 거치면 어떻게든 답이 나올 것이 자명했기에 그는 아르망이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릴 때까지 리마토르의 동향을 살필 업무를 맡길 부대를 고민했다.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아예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레 정보를 모을 수 있는 부대가 뭐가 있는지 고민하다가 콘스탄챠와 리리스를 호출했다.

 

“부르셨나요, 주인님.”

 

“착한 리리스가 왔어요!”

 

평소처럼 예의를 갖춘 콘스탄챠와 무언가 기대를 하고 있는 표정의 리리스가 자신의 앞에 오자 사령관은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배틀 메이드와 컴패니언에게 부탁할게 있어서 말이야. 이 시간부로 리마토르 씨가 최근 일주일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조사해주기를 부탁할게. 배틀 메이드와 컴패니언 모두 평소 업무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오르카호 내부의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너희 둘을 대표로 부른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네, 가능합니다.”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콘스탄챠와 리리스 모두 긍정의 반응을 보이자 사령관은 둘을 물렸다. 두 명이 떠나간 뒤에도 그는 잠시 리마토르가 왜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자해를 저질렀는지 고민했다.

 

“대체 왜 그런 거지? 보고 싶지 않은 걸 보고만 건가?”

 

리마토르의 속내를 도통 알 수 없었던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업무로 눈을 돌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르망의 시선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그 사이 멜론 파르페를 사온 탈론 페더는 카메라로 병실 안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와사비 파르페를 피해 달콤한 진짜 멜론 파르페를 고른 그녀는 뒤에서 매운맛에 고통 받으면서도 포커를 진행하는 샐러맨더의 눈물과 워울프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리마토르가 병실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진짜 질리지도 않는 건가? 책 읽고 덮고, 책 읽고 덮고, 다시 책 읽고 덮고. 대체 몇 번을 저러는 거야.”

 

리마토르의 독서량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탈론 페더는 그가 무슨 책을 읽는지 제목까지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가 읽은 책을 살피던 그녀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꿈의 해석, 장자, 도덕경, 논어, 반야심경, 리비도의 변화와 상징?

 

전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책 같은데...”

 

탈론 페더는 리버럴 아츠 특강 때 들었던 몇 권의 고전들을 떠올리려고 기억에 집중했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칸을 도촬하는 게 거의 일상이다시피 했기에 수업 내용은 머릿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던 그녀는 그래도 누구 한 명은 답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주변에 물었다.

 

“혹시 리버럴 아츠 강의 내용 기억나는 분 있나요?”

 

“수업을 듣는다고?”

 

하이에나가 탈론 페더의 질문에 역으로 되물었다. 사실 그녀를 포함하여 워울프도, 샐러맨더도, 스카라비아도 리마토르의 인문학 강의에 등록은 했지만 문자 그대로 딱 출석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쩌다 가끔 관심 있는 내용이 나오면 집중해서 듣고 보고서도 나름대로 성실히 써서 내기도 하지만, 강의 대부분은 들은 기억이 아예 없었다.

 

“음... 조금은 하고 있어.”

 

다행히 절망적인 상황에도 구원은 있었다. 유일하게 강의를 신경 써서 듣는 퀵 카멜이 대답하자 탈론 페더는 와서 이 책들을 보라며 그녀를 불렀다. 화면 안의 리마토르가 읽은 책들을 쭉 살펴보던 퀵 카멜은 기억을 정리해서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논어랑 반야심경이야. 하나는 유학자인 공자의 가르침을, 다른 하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당나라의 승려였던 현장 법사가 번역한 걸로 알고 있어.”

 

“그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은 없나요?”

 

“공통점이라... 음....”

 

탈론 페더의 질문을 받은 퀵 카멜은 강의 내용을 복기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잊어버린 내용 때문에 군데군데 빈 구멍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추 내용을 떠올린 퀵 카멜은 두 고전 사이에 겹쳐진 부분을 찾았다.

 

“둘 다 자기 자신을 다스려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내용이야. 논어는 유학에서 지향하는 군자가 되어 인(仁)을 자연스럽게 행해야 하고, 반야심경은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모든 것들이 비어있음을 인지해서 열반에 들자는 내용이었을 거야.”

 

“자신을 뛰어넘으라는 내용이라 봐야겠네요. 자기 극복이라... 알려줘서 고마워요.”

 

퀵 카멜의 설명을 들은 탈론 페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 자신을 바꾸고 싶어서 리마토르가 그런 내용의 고전을 쭉 읽는지 생각하던 그녀는 대체 그가 어떤 부분을 바꾸고 싶은지 알지 못하는 난관에 부딪쳤다. 탈론 허브를 운영할 때만큼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며 호드 대원들은 모두 감탄했다. 그 사이 칸은 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밖에서 오간 대화를 듣고 내용을 곱씹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바꾸라는 고전이라. 리마토르, 당신은 바뀌고 싶은 거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아픈 사랑의 기억을 안고 가는 스스로를 버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희연에게 빚진 목숨을 버리려는 생각을 고친 거 같아서 다행인 거 같기는 하지만, 죽음을 갈망하는 목적이 완전히 당신을 떠나갔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만약 수술하기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당신이 그런 어둠까지 받아들이고 앞을 직시할 용기를 낼 수 있게 내가 도와주고 싶어. 그러니 부탁할게, 부디 한 번만 날 만나줘. 딱 한 번만.’ 

 

칸은 눈을 감고 그에게 닿기를 바라며 자신의 희망을 속으로 읊조렸다. 그때, 병실에서 책을 읽던 리마토르는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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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주변인들에게서 멀어지려는 리마토르와 그를 바라보는 여러 주변인들. 이번 에피소드는 다음 편으로 빨리 끝낼 예정이야. 빨리 끝낸다고는 해도 스토리가 날림으로 처리 되지 않도록 공을 들일 테니 갑자기 막장으로 흐르지는 않을지 걱정은 잠시 접어둬도 돼.


부족한 글을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다들 월요일에도 힘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