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미하일은 과거의 악몽을 꾸었다.

인류가 멸망하기 전,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고 아버지에게 달려갔던 때를.

그 때는 아버지에게 가기도 전에 경비병들에게 붙잡혀 밖으로 내쳐졌고, 심지어는 회장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조롱당했었다.


"넌 네 어미가 왜 죽은 줄 알고 있냐? 그건 바로 멍청해서야."


"그게 무슨 얘기야.."


"네 어미는 어떻게든 우리에게 이겨 보겠다고 제 분수도 모른 채 날뛰다가 끝에는 개죽음을 맞이했다는 뜻이라는 거지. 그 피를 이어받은 넌 오죽하겠나?"


"...난 당신 아들이기도 하잖아."


"그래, 내 아들이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아이고."


"....!"


"어쨌든, 네가 진실을 알아 버린 이상 본사에 널 계속 둘 수는 없지. 넌 지금 곧바로 모스크바로 보내질 거다. 네 어미의 고향이기도 하니, 한번 거기서 잘 살아봐라."


이 말을 끝으로 회장은 뒤로 돌아서서 유유히 사라졌다. 닫히는 문 사이로 자신과 피 반쪽을 나눈 자매들-레모네이드 7기가 미하일을 안쓰럽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제트기 안, 미하일은 날뛰지 못하도록 수갑이 채워진 채 묶여 가장 비참한 출장길에 올랐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딱 하나의 목표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내 손으로 그 노인네들을 끌어내려 버릴거야, 아니. 죽여 버리겠어.'


모스크바로 좌천된 와중에도, 미하일은 계속해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그나마 자신과 우호적이었던 알파, 베타와의 교신을 통해 거사를 계획할 수 있었고, 디데이도 확실히 잡아 두었다.


그러나, 디데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바로 그 날 철충이 침략했고, 세상은 휩노스 병으로 인해 인류의 모두 잠들듯 죽어 버렸다. 그리고 미하일은 바실리 대성당에 준비된 냉동 수면관에 잠들어, 오르카가 발견할 때까지 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허억..!" 미하일은 큰 소리와 함께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악몽을 꿔서일까, 온통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어 있었다.


"왜 하필이면 그런 꿈을.." 혼자 되뇌이던 중,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 일어났네? 왓슨한테 바로 보고해야겠다."

연갈색 머리에, 마치 형사나 탐정을 연상케 하는 복장의 바이오로이드 한 명이 그의 옆에 있었다. 분명히, 시티가드 소속으로 만들어진 '리앤' 이라고 했었지, 미하일은 생각했다.


"...여기 어떻게 들어와 계신 건가요?"


"응?"


"아니, 제 기억상으로는 사령관님이 제게 키카드를 주셨는데, 어떻게 제 방에 들어오신 건지 묻고 싶어서요."


"아하핫! 그게 궁금했구나?" 리앤은 쾌활한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어쩐지 그 발랄함 덕분에 방금 전의 악몽이 조금 희석된 기분이 들었다.


"간단해, 왓슨.. 그러니까 사령관이 내게 마스터 키카드를 줬거든, 새로운 인간 씨를 데려오라고."


"저를 데려오라고요?"


"응. 여기 와서 잠들고 꼬박 하루가 지나서, 왓슨이 인간 씨의 상태도 체크할 겸 지금 작전 회의실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거든. 혹시 같이 가줄 수 있을까?"


"네, 가야죠. 그 전에.. 샤워부터 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럼! 대신 최대한 빨리 나와야 해?" 리앤은 이 말을 끝으로 발랄하게 미하일의 방에서 나갔다.


약 5분쯤 뒤, 미하일과 리앤은 오르카 호의 복도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뒤에 펍헤드 한 기도 함께 뒤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


"왜 저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 계신 거죠..?"


"사령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네. 탈주의 위험성도 있고, 신분과 관련된 문제도 있으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필요 시엔 제압해 두라고." 하며 강한 전류로 충전된 전기 충격기를 꺼냈다.


"....(딸꾹)" 미하일은 조용히 딸꾹질했다. 이전에도 한 번 맞아본 경험이 있었고, 그것도 썩 기분 좋은 체험은 아니었기 때문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자, 왓슨 만나기 1분 전!" 리앤은 미하일이 너무 긴장하지 않도록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 않으세요?"


"뭐라고 했어?"


"제가.. 증오스럽지 않으시냐고요." 갑자기 던진 질문에 리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당신을 증오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저는 그 빌어먹을 노인네 자식이라는 거 하나만으로 오르카 호의 모두에게 경계를 받고 있어요. 물론 본인들이 모두 겪은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전에 존재했던 동일 개체들이 펙스를 포함한 제 자매들에게 못된 짓을 당했으니까요.


....그리고 리앤 씨, 당신도.. 원래는 토모 모델이었다가 펙스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조된 개체라는 것도 서류에서 봐서 알고 있습니다.


펙스는 당신, 아니 모든 이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빼앗았어요. 당장이라도 절 죽이고 싶으실 텐데, 어째서 가만히 내버려 두시고, 심지어는 호의적으로 대해 주시는 건가요." 미하일은 조용히 물었다. 자기 혐오, 아버지에 대한 혐오, 펙스라는 회사에 대한 혐오가 한 데 응축된, 그야말로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말이었다.


그 자신은, 이 잠수함 내에 있는 모든 이에게 대역 죄인이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이며 마치 악마와도 같은 존재라고 계속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 거구나."


"...네?"


"자신이 펙스 회장의 자식이기 때문에 여기 있는 모든 바이오로이드와 사령관에게 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맞아요. 그런데도 어째서 저를 계속 살려 두시는 건가요."


바로 그 때, 옆에 있던 문이 치익 하고 열리며 사령관이 나왔다.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으니까요."


"사령관님.."


"당신에 대한 건 모두 알아봤습니다. 어머님이신 보르비예프 박사님 덕에 회장을 닮지 않고 선하게 자랐다고 알파에게서 듣기도 했고요."


"알파가 그런 이야기를.."


"당신이 어떻게 회장에게 멸시받고 학대당하면서 자랐는지, 얼마나 혹독하게 살아왔던 건지, 그럼에도 끝까지 선한 마음을 지키면서 바이오로이드들도 인간으로 대우해 주었던 것 모두 들었죠. 훌륭한 어머님 덕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금 전 리앤과 한 대화, 일부러 나가지 않고 듣고 있었습니다. 혹시 몰라서 당신이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아무래도, 제 판단이 옳았던 것 같네요."


"잠깐만! 왓슨, 엿들었어?! 정말 나빠!" 리앤이 조금 화를 내며 사령관에게 약한 펀치를 날렸다.


"아얏.. 미.. 미안.."


"그러면 저를 일원으로써 받아 주시는 건가요?" 


"그럼요. 미하일 씨는 오르카 호의 당당한 구성원이자, '가족'입니다."


"가족.." 미하일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계속 입 안에서 되뇌였다.


"사령관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가요?"


"우선 전 대원들에게 사과부터 하고 와도 될까요?"


"예?"


"사령관님의 명령이 절대적이라 한들, 일부는 저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동안 펙스가 저질러 온 악행을 사죄하고 반성한다면, 그 분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미하일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령관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그것을 보고 자리를 떠났다.





그 날 하루 종일, 미하일은 함내를 돌아다니며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심지어 무릎까지 꿇었다. 리제나 리리스 같은 몇몇 과격한(?) 이들에게는 또 다시 습격받을 위기에 처했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제로와 카엔 자매가 그를 보호해 주었다. 아마도 사령관의 지시일 것이리라.


그는 자기 자매들 중 오메가, 델타와 감마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바이오로이드를 찾아가 머리까지 땅바닥에 박아 가며 사죄를 구했다. 남들이 보면 비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미하일은 죄를 씻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고통쯤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H..Hey, Mr.보르비예프! 이렇게까지 Apology를 할 필요까진 없어요! 듣기로는 여기 있는 모든 대원들에게 전부 무릎을 꿇었다는데, 비굴한 스탠스는 그만 보여주고 빨리 일어나요! Stand up!"


"아뇨 오드리 씨. 델타 때문에 마음 고생 심하게 하셨을 텐데, 제가 죄송합니다. 바늘로 절 찔러 죽이셔도 전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깐, 그런 말 쓰지 말래도!"


"오드리 양의 말이 맞소, 소관이 감마와 많은 마찰을 빚기는 했지만, 그것은 미하일 공의 잘못이 아니오. 죄를 짊어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이렇게 사죄를 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나서서 과오를 정리하는 게 더 낫습니다."


"용 씨.."


이러한 미하일의 모습을 보며, 지휘관 개체들도 조금씩 경계를 풀어 나갔다.


"우와, 그 노망난 영감한테서 저렇게 양심적인 아들이 태어날 수 있는거 맞아?"


"알파 양이 그랬잖나, 어머니 덕분에 엇나가지 않은 것이라고."


"저런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저 미하일이라는 사내는 완전히는 아니어도 신용할 수 있는 인간임은 틀림없는 것 같군." 


일련의 사죄와 석고대죄, 그리고 무릎 꿇기가 모두 끝나고 나자, 사령관이 미하일을 불러 세웠다.


"미하일 씨, 이제 대원들 앞에서 한 말씀 하시죠."


미하일은 잠시 숨을 고르고 전 대원에게 고하기 시작했다.


"함내에 계신 모든 여러분, 저 미하일 보르비예프는 그간 펙스가 해왔던 모든 악행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비단 사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펙스와 레모네이드 세력을 분쇄하는 것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이곳의 일원으로 받아 주십시오."


그는 짧지만 굵게 자신의 말을 마무리했다. 대원들은 아직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때 오드리가 사령관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사령관, 엑설런트하게 만들어 왔어요."


"고마워,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거야." 그러고 사령관은 미하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옷 받으세요, 오늘부터 미하일 씨는 오르카의 '부사령관'입니다."


"예?!" 무의식적으로 크게 소리친 나머지, 일부 대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합류하시려면 직함이 필요하잖아요. 부사령관 자리가 적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진짜 이런 과분한 자리를 맡아도 되는 건가요?"


"과분한지 아니면 적격인지는 함께 싸우다 보면 모두가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자, 받으세요."


사령관이 건넨 하얀 코트처럼 만들어진 부사령관의 제복을 미하일은 잠시 망설이다 받아들고 한번 휙 둘러 입었다. 그러자 대원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령관과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알파와 리앤을 포함한 모든 대원들도 새로운 인간이자 부사령관에게 격려와 응원, 아주 약간의 적개심도 섞인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어울리나요?"


"그뤠잇! 아주 잘 어울려요. 움츠리지 말고, 코트 아래 한번 확 넘겨 봐요."


"이렇게 하면 되나요?"


"퍼펙트! 이제야 부사령관 같네요."


"그러면, 미하일 '부사령관'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요. 잘 부탁드립니다. 사령관님."


"축하해, 미하일. 이제 너도 당당한 오르카의 한 일원이야."


"아직 당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고마워 알파."


지휘관들과도 인사를 나눈 후, 리앤이 쪼르르 달려왔다.


"축하해, 부사령관님!"


"고마워요, 리앤 씨."


"아, 근데 사령관이나 부사령관이라는 호칭은 여전히 딱딱하네.."


"(빵긋)별명 붙여줄까?"


"별..명이요?"


"응! 내가 사령관을 왓슨이라 부를 것처럼, 부사령관도 뭔가 애칭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미하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 이름을 꺼냈다.


"정말 그걸로 하려고?"


"네, 그거면 돼요."


"아 그리고, 경어는 더 이상 쓰지 않기야."


"에?"


"왜냐면, 우린 상하관계가 아니라, '친구'니까!" 과연 전신인 토모에게서 비롯된 카피바라와 같은 친근감과 발랄함이었다.


"그..럼 잘 부탁할게, 리앤."


"응! 나도 잘 부탁해, '모리아티'!"


미하일이 생각한 별명은 다름아닌 제임스 모리아티 교수의 성.

셜록 홈즈의 숙적이자 그 동료였던 존 왓슨에게 있어서는 원수인 인물이었다.

셜록의 모리아티는 악역이었지만, 오르카의 모리아티는 앞으로의 전세를 뒤집어 놓을, 비장의 카드가 될 것이었다.





계속


이건 부사령관 달은 미하일 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