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철충의 눈을 피해 우리가 도착한 곳은 판자촌이었다. 인조인간이나 AI로봇도 만들 정도의 미래세계인데도 이런 허름한 판잔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이리 많나 하다가 멸망 전 세계에선 빈부격차가 극대화됐었다는 설정이 떠오르자 그려러니 했다. 어차피 별로 중요한 문제고 아니고. 적어도 이 동네엔 철충이 눈독 들일만한 건 없어보인다, 로봇 만드는 공장이나 뭐 그런거. 다시말해 철충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이지. 


빨갛게 물든 하늘을 보니 곧 해가 떨어질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제일 가까이 있는 폐가의 문을 열어봤다. 실망스럽게도 이 집은 반대쪽 벽에 큼지막한 구멍이 나서 바람도 못막는 형편이었기에 다른 건물을 찾아야만 했다.


"멍! 멍!"


"응? 보리야, 어디가니?"


부숴지지 않은 건물을 하나씩 확인해봐야 생각하던 중, 아까부터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던 보리가 멍멍 짖으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짖는 톤으로 보아 적이나 그런 위험을 감지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발견한 것일거라 판단한 나는 곧장 보리의 뒤를 밟았다.


보리가 멈춰선 곳은 이곳에 즐비한 폐가 중 하나였다. 뒷다리로만 서서 앞발로 문을 짚고 긁는 모습이 마치 이 안에 뭔가가 있다고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문에 귀를 갖다 대봤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문에 대지 않은 반대쪽 귀에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보리는 나보다 오감이 예민하니 뭔가 감지한거겠지 하고 짐작하고 문을 열려했으나 문고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안에서 잠겨있다. 


멸망 전에 쓰던 사람이 잠궈놓았던가, 아니면... 지금 누군가가 이 안에 있다던가.


"이봐요! 안에 누구 있어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문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으나 안에선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 부수고 들어가야 할까?"


"멍!"


"...긍정이면 한 번 짖고 부정이면 두 번 짖어줘."


"멍."


"긍정이란 뜻이지, 오케이."


나는 잠긴 문을 억지로 열기 위해 있는힘껏 어깨로 들이받았다. 한 번 치고 나서야 헬창이 아닌 몸으로 나무 문에 어깨빵을 시도하는건 별로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는 걸 깨달았지만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고 계속해서 몸을 부딪혔다. 다행히도 낡은 문이라 금방 삐걱대기 시작하더니 어깨빵 몇 번 만에 안쪽의 경첩이 떨어져나가면서 문이 벌컥 열렸다.


집 안에는 아무런 불빛도 없었으나 등 뒤의 달빛이 열린 문 너머의 실내를 비춰준 덕에 우린 어렴풋이나마 안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단칸방 바닥에 왠 사람 한 명이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있었다. 내가 놀라 얼타는 사이 보리가 나보다 먼저 달려가 그 사람의 얼굴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맡기 시작했다.


"아... 이, 이봐요! 괜찮아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자 기다란 금발 머리가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여자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바이오로이드일 것 같은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 자고 있다기엔 아까 문을 부수면서 낸 소음에도 깨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제발 이번엔 시체가 아니여라 하고 속으로 빌면서 그 여자의 어깨를 흔들자 그녀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으..."


살아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낄 때 쯤 그녀의 배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배... 고파요..."


"뭐? 배고프다고? 잠깐만, 나 참치캔 있어!"


참치캔이란 말에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가방 안에서 참치캔을 하나 꺼내 딴 뒤 그녀 앞에 건네주자 허겁지겁 맨손으로 참치살을 퍼먹기 시작했다. 급하게 먹다 체한건지 가슴팍을 퉁퉁 치길래 생수통 뚜껑 따서 건네주자 한 입 만에 페트병의 절반을 비웠다.

곧이어 캔 안에 든 남은 참치살까지 다 먹어치우자 그녀는 몸을 일으켜세워 무릎꿇고 앉은 자세로 고쳐앉은 뒤 말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을 열었다.



"헉... 허억...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러니까... 인... 간님? 어라... 진짜로 인간님...?"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꿈벅거리며 내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인간'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역시 바이오로이드가 맞나보다.


"어, 네. 인간인데...요. 그, 반갑습니다?"


"그, 저기, 전 바이오로이드인데... 저한테 그렇게 존칭을 해주시면 좀... 부담스러워서 그런데요..."


"그런가...? 알았어, 편하게 말할게. 그럼... 너는 이름이 뭐야?"


"앗, 네! C-79G 하베트롯 이라고 합니다!"


"하베트롯이라고?"


아는 이름이다. 라오에 나왔던 스틸라인 소속의 바이오로이드, 소위 계급을 달고있으나 어리숙한 면모가 있는 탓에 팬덤에선 줄곧 쏘가리 취급받는 캐릭터였었지. 아까는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얼굴을 보자 밝은 색의 금발 머리와 대비되는 검은색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네, 네... 그런데요... 뭔가, 문제라도...?"


"아냐아냐, 아무 문제 없어. 그냥, 머리를 풀어서 못알아봤어."


"앗,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묶을게요!"


"아니, 미안해할 일이 아니지 그건. 그런걸로 사과하지 마. 지금 묶으라는 뜻도 아니니까 나중에 묶어도 돼."


"넷, 죄송합니다!"


"...그래..."


안그래도 묻고싶은 게 많은데 하베트론이 연신 사과만 반복하는 통에 뻘쭘해져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고민하던 중 하베트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인간님... 정말 죄송한데, 그..."


"응? 편하게 말해도 돼. 뭔데?"


그래, 저쪽도 묻고싶은 게 많겠지, 오래전에 멸망됐을 터인 인간이 눈 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일단 나도 궁금한 게 많다. 저쪽의 질문에 먼저 대답해준 뒤 내가 질문을 하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면...


"참치캔 하나만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제가 며칠 째 굶었어서..."


"...안될 거 없지. 자, 여기."


일단 밥부터 먹이고나서 얘기하자. 하베트롯이 두 번째 참치캔을 싹싹 비우는 동안 난 내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보리의 등이나 쓰다듬었다.



그동안 라붕이 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나레이션이 열일했어야 했지만 다음화부턴 대화문으로 분량 때울 수 있다 끼요오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