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오늘도 만나러 왔네. 문을 열어주게나.”

 

“죄송해요, 오늘도 돌아가라고 하시네요.”

 

철학 연구실 앞에서 칸과 하르페이아는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대화를 주고받았다. 퇴원한 리마토르는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벌써 13일째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홀로 지내고 있었다. 명색이 조교인 하르페이아도 출입은 사치요, 대화도 못 나누고 문틈으로 나오는 쪽지를 칸에게 전해주는 게 전부였으니 그는 철저한 고립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내일 다시 오도록 하지.”

 

칸은 오늘도 틀렸다는 생각에 하르페이아에게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하르페이아도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리마토르가 대체 언제쯤 나올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칸은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호드의 숙소에 들어와 개인실 문을 열자 뜻밖의 손님이 그녀를 맞았다.

 

“오늘도 리마토르한테 갔다 왔나 봐?”

 

“잘 알고 있네. 아스널, 무슨 일로 온 거지?”

 

안경을 쓰고 두꺼운 책을 읽던 아스널은 책을 덮고 눈을 문질렀다. 칸은 아스널이 읽던 책의 제목을 슬쩍 곁눈질로 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글자가 표지에 큼직하게 적힌 가죽책은 한 눈에 봐도 읽기 어려워보였다.

 

“책 좀 읽으면서 이야기하러 왔지. 겸사겸사 리마토르랑 잘 되어가나 궁금하기도 하고.”

 

“잘 되기는 무슨, 오늘도 문전박대 당했는데. 차라도 한 잔 줄까?”

 

“괜찮아, 간단히 이야기만 하고 갈 생각이라서.”

 

아스널은 안경을 벗어 안경집에 넣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안 쓴 안경을 책 읽을 때면 쓰는 독특한 버릇이 생긴 아스널을 보며 칸은 대체 그녀가 리마토르의 기억에서 무엇을 보고 왔는지 알고 싶었다. 서로 각자가 보고 온 리마토르의 기억을 교환하자고 했을 때도 아스널은 기억을 전부 보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칸이 캐물어도 아스널은 그저 미소를 빙긋 띠며 묘한 답변만 되풀이했다.

 

“리마토르의 기억을 전부 보고 나서 난 지식의 공간에 내려갔어. 그곳에서 어제와 오늘, 현재와 미래가 이어지는 생각의 연속을 보았지. 자신이 매달린 줄이 어떤지 본 마리오네트가 된 기분이었어.”

 

아스널이 말한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칸은 그녀가 정말 경외감이 드는 무언가를 보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스널이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을 척척 정리해서 말해주거나, 각종 교양 철학서를 읽을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리마토르와 비슷한 인상이 얼핏 얼핏 겹칠 때마다 칸은 아스널이 무슨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고 왔는지 안 궁금해? 나라면 궁금했을 텐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들고 왔으니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지.”

 

“정답이야. 그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지?”

 

“표지에 적혀있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음? 니체? 그 신은 죽었다고 말한 철학자 아니야?”

 

칸의 질문에 아스널은 정답이라면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스널은 책 표지를 넘겨서 니체의 연표를 보여주더니 니체의 삶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어. 젊은 시절 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니체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라이프니치 대학으로 건너가서 문헌학을 전공해. 그러다가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인생이 바뀌었지.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힘을 좇는 의지라고 했는데, 이게 니체 사상의 중요한 원형이 되었어. 뒤에서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고.

 

니체는 25살에 스위스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었어. 라이프니치 대학에서 니체를 가르쳤던 스승인 리츨 교수가 니체의 잠재성을 고평가해서 추천한 결과였지. 박사학위도 취득하지 않았는데 교수로 임용될 정도였으니 니체가 고전문헌학 분야에서도 탁월한 두각을 보였음을 추측할 수 있어. 교수가 된 니체는 독특한 이웃을 만나게 돼. 바로 오페라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는 작곡가인 바그너였지. 바그너는 음악 소양만 뛰어난 게 아니라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 중에서도 니체가 관심을 가진 쇼펜하우어 철학을 대단히 좋아해서 둘은 많은 토론을 했다고 해. 이 과정에서 니체의 성향이 점점 철학자로 기울자 니체를 고전문헌학자로 키우려던 스승 리츨 교수와 갈등이 발생해서 결별하게 되지.

 

니체는 이후 바그너가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판단하자 결별을 선언하고 교수직을 사임해. 자리에서 내려온 니체는 10년 간 유럽을 떠돌면서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작품들을 편찬하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니체의 유명한 어구들은 거의 다 이 시기에 나왔어. 지금 읽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1883년에서 1885년에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지.”

 

“대단한 철학자였네. 25살이라는 나이에 교수가 될 정도라니... 천재는 타고나는 건가.”

 

니체의 삶을 들은 칸은 뛰어난 능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아스널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칸의 말을 받아쳤다.

 

“천재라고 해도 행복하지는 못했어. 니체는 45살의 나이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쓰러졌는데, 사망하는 1900년까지 10년 간 제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정신이 나간 채로 살았거든.”

 

아스널의 말에 칸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칸은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찾아오는 시련은 삶의 필요조건인가 생각하며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아스널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니체 본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니체는 정신이 나간 후 엄청나게 유명해졌어. 니체가 사망하고 17년이 지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의 청년들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배낭에 넣고 전선에 나섰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지.

 

니체가 현재까지도 철학계의 거두로 인정받는 이유는 기존의 서양철학을 죽였기 때문이야. 칸트가 뒤흔들고 헤겔이 탈탈 턴 서양철학을 니체가 밥상 뒤집기로 엎은 모양새로 비유해도 들어맞아. 생각보다 긴 이야기가 될 거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어?”

 

아스널은 넌지시 문 뒤를 가리켰다. 칸이 뒤를 돌아보자 케시크가 주먹 하나 정도 틈새로 종이쪽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칸은 뭔 일인가 싶어 문을 열고 물어봤다.

 

“케시크, 무슨 일이지?”

 

“아! 그, 그...”

 

케시크는 칸이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묻자 당황해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종이쪽지를 올려둔 걸 보면 뭔가 말하려고 했던 걸로 보였으나 지금 제대로 말을 못하는 케시크에게 대답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칸은 문을 닫으면서 일러두었다.

 

“아스널 준장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려고 하니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닌 이상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다른 대원들에게도 전해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케시크가 칸의 뜻을 받들자 칸은 안심하고 문을 닫았다. 아스널은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면서 말문을 열었다.

 

근대 이전의 서양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어. ‘누군가 네 뺨을 치면 반대편 뺨도 내어주어라’라는 말처럼 그리스도교가 윤리 기준으로 작동하는 시대였지. 니체는 이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했어. 왜 그랬는지 한 번 생각해보자고. 노예주는 자기 노예를 미워할까? 아니지,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미워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럼 노예는 자기 주인을 미워할까? 그렇지, 자신이 하기 싫은 노동을 강제하는데 완전 밉상이지.

 

즉, 노예의 시각으로 보면 자신들은 선이고 주인은 악이야. 반면 주인의 시각에서 노예는 악이 아니라 그저 좋고 나쁨만으로 바라볼 뿐이지.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자신들을 선으로, 대척하는 사상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사랑을 중시하는 교리와 충돌이 발생하자 이를 조율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가치들을 선으로 위장했다고 설명했어. 선악이라는 시야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 좋고 나쁨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주인의 도덕을 회복해야한다는 의미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그리스도교에 입각한 서양 철학을 뒤엎을 필요가 있었어. 그게 이루어진 게 근대였지.

 

근대는 이성의 시대라고 칭해지기도 해. 그만큼 인간의 이성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고, 과학의 빠른 발전을 통해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지.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가치는 뒤로 밀려났고, 신학이 미신으로 치부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어. 니체는 이를 가리켜서 ‘신이 죽었다’라고 말한 거야. 기존의 그리스도교 철학이 서양 철학의 주류에서 물러난 걸 말한 거지. 근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빠져나가고 남은 공백을 사상을 발전시켜서 메웠어. 이게 하나의 이념, 달리 말해 이데올로기(Ideology)야.

 

그리스도교가 주류에서 지나간 후 등장한 이데올로기에 니체는 만족했을까? 그렇지 않아. 니체는 근대 이데올로기를 통렬하게 비판했어. 이데올로기는 유사종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지. 자유주의를 위해, 사회주의를 위해 등등 온갖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 걸었어이데올로기를 삶의 도구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의의로까지 바라본 셈이지.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헌신을 요구했고 그에 응답한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교의 순교자처럼 여겼어. 결국 근대 이데올로기는 그리스도교가 가졌던 구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거야.

 

니체는 그리스도교와 이데올로기 모두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본다고 비판했어. 둘 다 자신들은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라고 구분 짓는 노예의 도덕인 동시에 미래에 도달할 이상향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근대 이데올로기는 그리스도교와 큰 차이점이 없었던 거야. 이를 깨닫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이해를 못하고 허무함을 느끼지. 그게 바로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이야.”

 

아스널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칸은 아스널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니체가 비판한 게 그리스도교 철학이 맞을까? 그리스도교가 이상향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말해서 니체의 비판을 받는 거라면, 그보다 더 앞선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제시한 사상부터 비판을 해야지. 플라톤이 제시한 이데아(Idea)론도 이상 세계인 이데아를 인지하기 위해 덧없는 현실을 이성으로 관조해야한다고 말했잖아.”

 

“예리한 질문이야. 니체는 자신의 사상을 가리키며 플라톤에게 도전한다고 했어. 플라톤이 만든 이분법적인 사고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출사표인 셈인데, 니체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가 중요하면 중요했지 미래의 이상향을 위해 현재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보았어.

 

니힐리즘이 이런 니체의 주장으로 이어져. 니힐리즘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치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삶의 태도로, 허무주의의 한 갈래라고 해석할 수 있어. 니체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도 사실 니힐리즘이 만연하다고 말했지. 그리스도교가 자리에서 내려옴에 따라 발생한 공백에서 사람들은 혼란과 허무를 느끼고 니힐리즘에 빠져.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지만, 결국 이데올로기도 미래에 도래할 이상향을 위해 불완전한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자는 그리스도교식 사고관을 답습한 거라 사람들은 상대방을 악으로 몰아붙이는 노예의 도덕에 빠지게 되지.

 

그래서 니체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려면 플라톤 이래 그리스도교를 거치며 이어진 이원론부터 치워야 한다고 주장했어. 니체는 이원론이 신에 의존하여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고, 성욕 같은 신체적 욕구와 소유욕 같은 이기적 욕구를 악으로 바라봐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선의 기준에 맞추어 획일화된 결론을 요구하니 문화를 정체시킨다고 비판했지. 이런 이원론을 뛰어넘어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니체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했어.”

 

“힘? 정신력 말인가?”

 

칸은 정신수행이라면 서양에도 있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스널은 정신력인지 신체적인 힘인지 딱 잘라 말하기 힘들다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세계를 외부의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없어. 동시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가 선과 악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단정 지을 수 없지. 니체는 이런 근거로 우리는 세계가 선한지 악한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어. 대신 세계는 보는 이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는데긍정적이고 강인한 자들에게는 아름다운 세계로 비치고 반대로 삶에 지치고 나약한 이들에게는 피폐한 세계로 비칠 거야. 에베레스트 산을 떠올려봐. 강인한 이들은 에베레스트 산을 숭고함의 상징으로 보지만 나약한 이들은 에베레스트를 가리켜 죽음의 산이라고 일컫지. 다시 말해, 강한 자에게만 세상이 완전하게 보이는 거야.

 

니체는 누구나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기에 강자가 되려는 욕구가 있다고 주장했어. 이것이 자신의 위대함을 느끼고픈 근원적 충동인 힘을 향한 의지야. 적확한 용어를 쓰자면 힘에의 의지라고 말해야겠지. 니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힘에는 성욕, 승리욕, 소유욕, 명예욕 등 다양한 욕구가 포함되어있다고 주장했어. 플라톤 사상과 그리스도교가 욕구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 반면, 니체는 욕구를 긍정해야한다고 봤지.”

 

“욕구에 솔직해지라는 주장은 참신하군. 모든 법규든 도덕이든 욕구를 가로막는 대상으로 보고 탈피하라고 말하다니.”

 

“그게 아니야. 니체는 욕구를 수용하라고 했지 방임하라고 하지는 않았어. 욕망과 충동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게 니체의 주장이었다고.”

 

아스널의 말을 들은 칸은 헛기침을 하면서 머리를 넘겼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하면서 니체의 주장을 오해했으면 큰일이 났다고 덧붙였다. 아스널은 칸의 말에 긍정을 표하면서 그럴 만하다고 말했다.

 

“니체 사상은 호도되기 딱 좋지. 힘을 향한 의지를 주장하면서 무력 경쟁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 규범이 힘을 잃었음을 가리켜 신이 죽었다고 표현한 걸 무신론으로 몰고 갈 수 있으니까. 니체 본인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니체의 유이한 혈육이었던 여동생은 니체가 죽은 뒤 자기 오빠의 저술을 나치 부역에 써먹었어. 살아생전 니체가 이데올로기를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비판한 것과 달리, 반유대주의자였던 니체의 여동생은 자기 오빠를 정반대로 이데올로기 확립에 써먹은 거야.”

 

“니체가 저승에서 땅을 치면서 후회했겠네. 자신이 남긴 유산이 잘못 쓰이는 걸 본 애덤 존스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거기까지 확실히 말은 못하겠어. 다만, 언제나 중요한 시대적 가치를 깊은 통찰 없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는 이들은 존재하지. 대표적으로 이청준 작가의 소설 <소문의 벽>에서는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념 때문에 죽을 뻔한 작가 박준이 나와. 어두운 밤에 전깃불을 들이대며 북이냐 남이냐를 선택하게 하는 누군가의 말에 잘못 대답하면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 당하기에, 박준은 성인이 된 작중 시점에서까지 전깃불을 두려워해. 마르크스가 제창한 사회주의가 인민을 무가치한 자본 아래의 노동에서 해방시켜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말한 것과 반대로, 뜻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죽이는 방향으로 변화한 소설 시점의 사회주의는 당대 지배층에 의해 호도되었다고 할 수 있지. 니체의 사상도 마찬가지야.”

 

칸은 아스널의 말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의 전원을 눌렀다. 아스널이 짧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차도 안 내주었는데, 본격적으로 긴 이야기가 된 지금도 차를 내어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찻장 안에 들어있는 빈 루이보스티 상자에 눈길을 주던 칸은 옆에 있던 인스턴트 커피를 들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마실 것도 안 가져왔네.”

 

“고마워, 잘 마실게.”

 

아스널은 따뜻한 커피로 마른 목을 축였다. 달콤쌉쌀한 인스턴트 커피의 맛이 식도로 내려가며 향을 피워냈다. 커피 특유의 새콤한 향을 느끼며 아스널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고. 니체는 욕망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승화시켜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타고난 소수만이 가능하고 평범한 대다수는 불가능하다고 보았지.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뛰어난 소수를 지원해주는데 만족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평등주의를 깨고 위계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게 니체야.”

 

“평등주의를 부정한다고? 설명이 없으면 잘못 쓰이기 딱 좋겠어.”

 

“정확해. 나치가 니체의 이 말을 끌어와서 게르만족이 유대인보다 우월하다고 자신들을 포장했으니까.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니체의 사상은 표면에 드러난 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 니체가 차이를 인정하자고 말한 이유는 뛰어난 재능이 있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들의 특수성을 지원해주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야. 탁월한 능력이 있음에도 평등을 외치며 똑같은 품질의 교육을 제공하면 역으로 능력을 썩힐 뿐이지. 니체는 이런 차이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강자는 자신보다 더 강한 자에게 도전하는 의지를 갖는 게 자신이 말하는 힘에의 의지라고 정리했어. 절대 나치가 주장한 것처럼 약자를 짓밟고 차별하는 게 아니었으니 괜히 오해하지 마.”

 

아스널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도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칸은 마치 리마토르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아스널의 말에 경청했다.

 

“니체는 욕구를 긍정하고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지향했어. 그리스도교의 주장처럼 욕구를 죄로 보고 자신을 학대하는 건 진정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두려워서 행하는 도피에 불과하니, 인간의 실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게 인간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했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계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천국처럼 현재에서 도망칠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봐야한다고 말한 거야.

 

니체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이 세상이 아무리 추악할지라도 긍정해야해. 앞에서 니힐리즘에 대해 이야기한 거 기억해? 이상향이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은 곧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현재의 세계만이 전부라고 말하지. 완벽한 세상이 없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좌절하고 절망하는데, 니체는 니힐리즘을 극한으로 밀고 나가 아무런 목적 없이 동일한 것들이 반복되는 순환세계를 제시해. 이게 바로 영원 회귀 사상이야.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받아들여 철학을 시작한 니체였기에 이 부분은 쇼펜하우어 철학과도 맞닿아 있어. 쇼펜하우어가 반복에서 고통이 만들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말한 걸 니체도 수용했지만, 쇼펜하우어가 인생의 고통을 뛰어넘기 위해 도야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니체는 모든 반복이 새로운 시작이므로 긍정해야한다고 보았지. 끝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는 어느 한 지점이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어. 처음과 끝이 있는 선이 아니라 선후가 존재하지 않는 원과 같은 거야. 

 

어느 한 지점이 가운데가 아니라는 사실은 모든 지점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지. 즉, 모든 삶의 부분은 항상 중요한 의미를 갖고, 모든 사람들의 삶 역시 중요해. 이를 위해 사람들은 욕구를 긍정하는 힘에의 의지를 따라 발전을 목표로 건설적인 경쟁을 하게 되며, 세계는 발전하지. 앞에서 니체가 말한 게 조금은 이해가 돼?”

 

아스널의 질문에 칸은 머리를 짚으면서 살짝 웃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칸은 커피를 홀짝이고 여태까지 들었던 아스널의 설명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욕구를 죄악시하는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욕구를 고차원적인 가치로 승화시키는 주인의 도덕을 가져한다는 거지? 주인의 도덕에 따라 살면 인간은 현재 존재하는 세상에서 발전하기 위해 힘을 추구하게 되고, 힘에의 의지에 따라 선의의 경쟁을 하게 돼.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교가 지배력을 잃은 상황에서 비롯한 사상 공백의 허무함, 다시 말해 니힐리즘이 극단화된 영원 회귀 세계에서도 힘을 좇아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는 게 니체의 주장이었어. 내가 말하고도 맞는가 모르겠네.”

 

감탄. 아스널의 감정은 단 두 글자로 설명되었다. 장황한 이야기의 핵심을 추려서 이해한 칸에게 박수를 보내며 아스널은 말문을 열었다.

 

“대단해! 제대로 이해했네! 어려운 내용인데 한 번에 알아듣다니, 역시 칸이야.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따라 살면 강자를 뛰어넘기 위해 발전한다고 말했어. 그러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와 규범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지. 신이라는 절대자에 의해 주어진 필연적인 가치에 매달리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면서 스스로 의미와 척도를 만드는 이를 니체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설정했어. 그게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 자기 자신을 초월한 인간이지.”

 

“초인이라, 단어가 주는 감각이 강렬하네.”

 

“영어로 Overman이니까 한자로 뛰어넘을 초(超)자를 사용한 거지. 그렇지만 칸 네가 말한 대로 초인이라고 하면 초능력자 같은 느낌을 주니 개인적으로는 원어 그대로 위버멘쉬라고 부르기를 추천해.”

 

“그 편이 더 낫겠어. 그래서 위버멘쉬는 영원 회귀 세계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거야?”

 

“그렇지 않아. 영원 회귀 세계는 문자 그대로 끝없이 돌고 도는 세계로, 위버멘쉬는 매 순간순간이 변화하는 영원 회귀 세계를 아름답게 바라봐. 그리고 끝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 끝에 찾아오는 죽음마저도 긍정하지. 생성과 소멸이 무한이 이어지는 세계에서 이어지는 삶에서 나오는 허무의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를 긍정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를 넘어서기 위한 욕구를 승화시켜 자신을 끌어올리는 힘에의 의지를 좇더라도, 인간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과 마주하게 돼.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지.

 

니체는 위버멘쉬 역시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고 말해. 하지만 필연적인 죽음이 힘에의 의지를 억누른다할지라도 피하지 않고 긍정한다고 보았지. 이게 바로 내가 근무하는 카페 이름이기도 한 Amor야. 자신의 필연적인 운명을 사랑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흠, 트로트 제목이라서 Party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더라. 아모르 파티는 라틴어 구절로 Amor는 사랑을, Fati는 운명을 의미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리스도교가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한 것과 대조되지. 다른 이를 위해서, 이상적인 천국을 위해서 나의 삶과 현실을 희생시키지 말고 오직 나 자신과 현재 살아가는 세계를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설령 죽음이라는 파멸이 필연적일지라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바라거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죽음조차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 그게 아모르 파티지.”

 

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니체의 주장은 그녀 나름대로 이해가 되었지만, 아모르 파티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스널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해달라며 질문했다.

 

“결국 파멸하게 되는 결말을 받아들이라는 건 무슨 의미가 있지? 추악한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 죽음까지 긍정하면 그건 건전한 사상과는 거리가 멀잖아?”

 

칸의 질문을 들은 아스널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비유를 찾으려고 생각의 조약돌을 하나씩 들여다보던 그녀는 좋은 예시를 떠올리고 칸에게 말했다.

 

“칸, 너나 나나 군인이라서 잘 알 거라고 믿어. 전장에서 우리 부대가 고립되어서 전멸하기 직전이고, 외부의 지원을 아예 받을 수도 없어. 적들은 철충이라 포로는커녕 곱게 죽는 것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그러면 넌 어떤 선택을 할 거야?”

 

“후방 부대에 지원을 요청할 병력을 파견하고 나머지는 최대한 살아남기 위해 전투를 준비해야지.”

 

“전투를 하면 100% 죽어. 그래도 맞설 거야?”

 

아스널이 재차 질문해도 칸은 자신의 대답을 바꾸지 않았다. 이제는 바닥을 드러낸 커피 잔을 깔끔하게 비우면서 칸은 자신의 명료한 의지를 굳혔다.

 

“당연하지. 앉아서 놈들에게 학살당할 바에야 일어나서 한 마리라도 더 죽이고 동귀어진 하는 게 군인에게 있어 훨씬 명예로운 일이야.”

 

아스널은 미소를 빙긋 띄웠다. 칸이 그제야 아모르 파티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다시 설명으로 돌아갔다.

 

“그거야. 니체가 주장한 아모르 파티도 마찬가지야. 결말이 비극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결과니까 후회 없이 받아들이는 게 핵심이지. 자유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과까지 긍정하는 게 니체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위버멘쉬에게 어울리는 일이라고 말한 거야.”

 

“아...!”

 

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중구난방으로 혼잡했던 개념이 흩어지며 일순간 머리가 맑아지자 비로소 니체의 철학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이제야 알겠어. 정말이지... 파격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떠오르지가 않네.”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칸의 모습에 아스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널은 자신의 커피 잔을 깔끔하게 비우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어 들었다.

 

“괜히 니체가 서양 철학의 분기점이 된 게 아니지.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오늘 한 니체의 이야기에 다 들어있어.”

 

“뭐?”

 

“니체가 말한 영원 회귀 사상에 따라 리마토르는 끊임없이 괴로워할 거야. 그건 너도 다르지 않지. 하지만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에의 의지를 따르면 고통은 아름다움으로 바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깨달은 자가 아직 깨닫지 못한 자에게 손을 내밀어줘야 해. 니체가 그리스도교 사상을 비판했다고 해서 타인을 아예 돕지 말자고 한 건 아니야. 상하가 나뉜 동정심으로 접근하면 그 사람은 의존하게 되어 약해지기에, 강자를 뛰어넘기 위한 목적 의식을 불어넣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했어. 

 

지금의 리마토르에게 뛰어넘어야 할 강자는 너야, 칸. 네가 다가가서 니체 이야기를 들려주면 분명 상황이 바뀔 거야. 리마토르 정도로 철학을 연구한 사람이 니체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

 

아스널은 말을 마치고 다시 안경을 썼다. 자신을 생각해서 일부러 니체 이야기를 해준 아스널에게 칸은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고마워, 아스널.”

 

“고맙기는 뭘. 빨리 가보기나 해.”

 

칸이 부푼 가슴을 안고 급하게 방을 나가자 호드의 대원들은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칸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아스널은 호탕하게 웃다가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 케시크가 칸에게 건넨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쪽지는 왜 준 거지?”

 

케시크의 종이쪽지를 들여다보던 아스널은 종이 안쪽에 반투명하게 비치는 글씨체를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종이쪽지를 풀어서 빠르게 읽은 아스널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짧은 욕설을 뇌까렸다.

 

“이런 제기랄.”

 

아스널은 책을 챙겨 다급하게 칸을 쫓아 나갔다. 아스널이 떨어뜨린 종이쪽지에는 볼펜으로 휘갈긴 글씨가 적혀있었다.

 


 

‘칸 대장, 리마토르 연구원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마세요. 당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종이쪽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그 시각. 복도 모퉁이 뒤에 숨은 하얀 그림자가 리마토르에게 향하는 칸을 보고 무전을 보냈다.

 

“언니, 칸 대장이 타겟에게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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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분량 조절에 실패했다... 원래는 이번 편으로 에피소드를 마치려고 했는데 니체에 대해서 쓰다보니 길어지는 바람에 끊고 가게 됐어. 개인적으로 이번 편이 가장 쓰기 어려웠던 거 같아. 다른 철학자들은 저서와 분석서 읽고 정리하면 설명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는데, 니체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제각각이라서 지도 교수님께 질문까지 해가면서 준비했거든. 그래서 이번 편은 오류가 다른 편보다 많이 발견될 수 있으니 혹시 니체 철학 중 틀린 점이 보이면 댓글로 알려줘. 바로 조사해서 수정할게.


이번 에피소드에서 14편 말미에 뿌려놨던 복선도 슬슬 회수해야지. 빨리 말랑말랑한 일상 에피소드, 달달한 순애 에피소드, 살벌한 얀데레 에피소드를 쓰고 싶은데 가급적 빨리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안경 쓴 아스널이 정장까지 입고 교수가 되는 에피소드도 나올 거야.


부족한 글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모두 비 오는데 조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