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바닐라 씨, 처리할 서류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엄살 피우지 마시죠. 사령관님은 지금 부사령관님 처리하시는 서류의 5배 정도 분량을 하루에 다 처리하십니다. 그러니 떠들지 마시고 잠자코 일이나 하시죠."


"사.. 살려주십시오 업무 처형인님..!" 집무실을 나가는 바닐라의 뒤에 대고 미하일은 절규했다.


막 부사령관이 되었을 때는 전투 지휘와 훈련만 하는 줄 알았지만, 점점 많아지는 서류 작업으로 미하일은 지쳐갔다.


브라우니들의 소원수리 처리.

시설 증축 및 신설 결재.

각 지휘관들과 전투원들의 보고 처리.

거기에 선내 거주 인원들의 불만 처리 외 기타 등등.


"옛날에도 분명 이랬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 말하는 '옛날'은 그가 회장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 후계자 교육이라는 탈을 쓴 학대를 받을 때,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거의 수백, 수천 건에 달하는 업무를 앉아서 처리했던 것을 말한다.


그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할 만큼, 말 그대로 산더미 같은 서류들이 미하일 앞에 놓였고, 매번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읽고, 검토하고,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는 등의 과정을 거의 매일 반복하고 있었다.

'이쯤되면 사령관이 날 일부러 과로사시키려는 게 아닐까.' 라는 감정이 순간 들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서류 업무에서 끝나면 다행이었겠지만, 고된 훈련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다가오는 실제 전투를 위해 미리 실력을 쌓아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령관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검술, 총술, 창술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무술과 손자병법부터 시작한 지휘의 기본과 현명하게 싸우는 법을 배우다 보니, 생전 한번도 누군가와 싸워본 적 없는 미하일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캐노니어의 지휘관 로열 아스널과의 대련이 있는 날이었다.


"어딜 보는 겐가, 부사령관!"


"아..아스널 준장님! 조.. 좀만 천천히 해주세..!"


"전투에 천천히가 어디 있단 말인가! 조금만 늦어도 바로 죽는 걸세!" 하고 아스널은 정권을 내질렀다.


 일찍이 '아스널=색마' 라는 풍문을 다른 바이오로이드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짜일까 봐 두려웠던 미하일이었지만, 훈련할 때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음흉한 눈빛은 커녕 정말로 죽일 듯이 그를 향해 발차기와 주먹을 내질렀고, 그럴 때마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훈련이잖습-!"


"빠르기를 바람과 같이."


"에?" 바로 다음 순간, 엘보우 벗이 복부로 날아왔다.


"쿨럭..!"


"고요하기를 수풀과 같이." 아스널이 미하일 앞에서 멈춰 섰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기에, 그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아스널이 어느새 뒤로 다가와 미하일의 팔을 뒤로 꺾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침략하는 것은 불과 같이!" 


"이런..!" 아스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미하일은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날렸지만, 어째서인지 유효타를 낸 것 같지는 않았다.


"멈춰 있기를 산과 같이." 이 말 다음으로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아스널이 업어치기로 신임 부사령관을 훈련장 바닥에 메다꽂은 것이었다. 그의 머리는 방금 일어난 일을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코마를 연상케 하듯 멍한 상태였다.


"어.."


아스널이 그것을 보고 빙긋 웃었다.


"이것이 손자병법에 나온 기선을 제압하는 방법인 '풍림화산'일세. 사실 뒤에 '음'과 '정'도 있다만 오늘은 일단 이쯤 하도록 하지." 하고 바닥에 늘러붙은 미하일을 일으켜 주고선 목례를 한 번 하고 유유히 탈의실로 사라졌다.


아스널이 가고 난 이후에도, 미하일은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옆에 있던 바닐라가 다가와 바보같이 서 있지 말고 땀냄새 나니까 빨리 씻으라는 독설을 날리기 전까지 쭉 혼이 빠진 모습이었다.





"하아.." 샤워를 마치고 난 이후, 미하일은 갑판으로 나와 코트 안에 감춰 두었던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불을 붙이고 피우기 시작했다.

과거 회장들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교육을 받을 때 생겨난, 말하자면 그만의 일종의 일탈이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피우는 담배 수도 많아졌다.


"그래도 동침 업무는 없다는 게 다행인 건가.."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현재로선) 사령관과 미하일은 세상에 단 둘 뿐인 살아있는 인간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인류를 재건한다는 목표를 가진 오르카의 거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은 거의 매일 사령관과 차례로 동침 일정을 가졌다. 인류를 재건하려면 2세가 필요했고, 그 2세를 만들기 위해선 당연히 성행위가 필수불가결적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부사령관에게는 동침 일정표가 오지 않았다. 최초로 발견된 사령관하고만 관계를 갖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며, 미하일하고는 일절 잠자리는 물론이거니와 아직까지 어색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전히 잠재적인 적이라는 인식 때문일까,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는 이들도 많았다.


"내게 손대지 마라! 넌 여제님의 적인 자가 아닌가!" 과거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친위대인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대장 격인 바르그는 미하일이 인사를 건네려 하자 이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래, 그럴 만도 하겠지. 나는 아직까진 부사령관이라는 감투 쓴 시한폭탄일 테니까." 하고 그는 깊게 담배 연기를 뱉어 냈다.


"아앗 부사령관님! 그 담배 어디서 나신 거에요!"


"아.. 안드바리?"


"내가 못살아. 어쩐지 창고의 담배가 꼭 몇 갑씩 빈다 했더니, 몇 개는 부사령관님이 가지고 계셨군요!" 오르카 호 내부의 물자 담당 안드바리가 부루퉁한 얼굴로 화를 냈다.


"어.. 난 이 담배 훔친 적 없는데.."


"알아요. 편의점에서도 사고 워울프 언니랑 스카라비아 언니한테 돈 주고 사신 거죠?"


뜨끔. 하고 양심이 찔렸다. 하도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 많다 보니 그만큼 피우는 담배의 양도 늘어났고, 편의점에서는 한정된 수량 때문에 두어 갑밖에 사지 못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오르카 제일의 골초들이라 할 수 있는 워울프와 스카라비아로부터 판매가의 거의 2배 정도 되는 참치캔을 주고 담배를 얻어왔던 것이다.


"미안.. 내가 할 말이 없네."


그 뒤로 발키리가 다가오더니

"부사령관님. 아무리 스트레스가 쌓이더라도 그걸 담배로서 풀면 안됩니다. 대원들이 피울 것도 모자라지만,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의 건강에 안 좋다구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 원을 달성할 때까진 절대 폐암으론 안 죽으니까." 하고 미하일은 대꾸했다. 사실이었다. 회장들을 죽이고 어머니의 복수를 달성할 때까진 아직 죽을 생각이 없는 그였다.


"그건 알겠습니다만." 하고 발키리는 담배갑을 부사령관의 손에서 홱 뺐었다.


"뭐야, 돌려주세요."


"안 됩니다. 그리고 당분간 담배는 끊으세요." 그리고 그녀는 단호하게 담배 금지령을 내렸다.


"이러시면 제가 스트레스 풀 방법이 없는데요."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을 눈앞에서 빼앗기자 미하일은 곧바로 침울해졌다.


바로 그 때,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LRL이 쪼르르 다가와 부사령관에게 무언가를 손에 건네주었다.


"부사령관! 그러면 이거 먹어!" 평소 즐겨 읽는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에 나오는 중2병스러운 말투가 아닌 명랑한 말투였다. 


"..초코바?" 겉 포장지에 [라지사이즈 쿠키앤크림 초콜릿 바]라고 써진 초코바였다.


"우후후.. 짐이 새로운 권속을 위해 친히 가져온 것이니 잘 받아먹도록 하거라!"


미하일은 빙긋 웃으며 LRL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초코바의 포장지를 벗겼다.

"고마워 LRL, 맛있게 먹을게." 


"히히." LRL은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LRL, 그 초코바 알비스하고 같이 몰래 창고에서 털어온 거죠!!"


"뭐어?! 아.. 아냐! 나 이거 참치캔 주고 유미 언니한테서 제대로 사온 거란 말이야!"


"거짓말 마요! CCTV에 다 찍혔더만! 숙소에 몰래 꽁쳐놨죠! 당장 이리로 왓!"


"히이익!! 부..부사령관! 맛나게 먹어! 나 가볼게!!" LRL은 서류철을 들고 쫓아오는 안드바리를 피해 잠수함 내부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도망치는 LRL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후, 미하일은 초코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레오 쿠키 비슷한 맛이 입 안에서 감돌았다.


'엄마가 주시던 쿠키 맛이랑 비슷하네.' 하고 미하일은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무언가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였던 안나는 늘 그에게 크림이 들어간 초콜릿 쿠키를 주며 무엇이든 잘 될 거라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는 늘 힘들고 지쳐 보였지만, 아들 앞에서는 언제나 웃고 힘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는 없다. 그가 좋아했던 나비가 되어 멀리 떠나 버리고 만 것이다.


"....Я скучаю, мама.(보고 싶어요, 엄마.)" 모국어로 미하일은 조용히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점점 초코바에서는 단 맛이 아닌 씁쓸하고 짠 맛이 났다. 아직 옆에 있던 발키리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울고 있는 부사령관의 뺨을 닦아 주었다. 그럼에도 그치지 않자 이번에는 조용히 그를 안아 주었다.

창백한 달빛 아래에서 미하일의 눈물은 마치 수정처럼 반짝였다.




계속




XX처형인 & 풍림화산 드립에 골초 미하일 그리고 어머니까지 넣어봤는데 난잡해지지는 않았나 조금 걱정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