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언니, 칸 대장이 타겟에게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수고했어, 페로. 호드 쪽에서 누가 더 따라붙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해. 펜리르, 하치코. 곧 칸 대장이 너희 쪽으로 갈 거야. 다른 인원들이 복도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적당히 통제해.”

 

“알겠어요!”

 

“알겠어!”

 

연락을 마친 리리스는 환풍구 안을 기어 리마토르의 방위에 도착했다. 환풍망 틈새로 리마토르가 앉아있는 모습을 슬쩍 본 그녀는 챙겨온 도청장치를 환풍기에 가려 보이지 않도록 은밀하게 설치한 뒤 그가 자신을 눈치 채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엄청난 이론을 적고 있구만. 전부 철학으로 보이는데... 주인님께 해가 될 내용도 포함되어있겠지.”

 

리리스는 가증스러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고 환풍구를 빠져나갔다. 경호명목으로 사령관실 바로 위에 위치한 환풍구를 매일 같이 드나든 덕분에 환풍구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은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환풍구를 빠져나와 컴패니언의 숙소로 돌아간 리리스는 자신의 방에서 한숨을 돌렸다. 잠깐 목을 축인 그녀는 다시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환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집중했다.

 

“하치코,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니?”

 

“칸 대장님이 문을 두드리고 뭔가 말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겠어?”

 

“음, 나체를 거론하는데.”

 

“나체가 아니라 니체 같은데요?”

 

펜리르의 말에 하치코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리리스가 보기에도 하치코의 의견이 맞아보였기에 그녀는 안에서 무슨 대답이 돌아왔는지 물었다.

 

“앗! 문이 열렸어요!”

 

“칸 대장이 안으로 들어갔어. 어떻게 할까?”

 

“이제 됐어. 이만 숙소로 돌아와.”

 

리리스는 하치코와 펜리르에게 귀환을 지시하고 페로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리리스의 연락을 받은 페로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고 운을 띄웠다.

 

“왜 그래? 호드가 단체로 칸 대장을 쫓기라도 했니?”

 

“아뇨, 아스널 대장이 다급히 칸 대장을 쫓아갔어요. 아마 목적지는 같은 곳 같은데... 추적할까요?”

 

페로의 말을 들은 리리스는 혀를 찼다. 아스널이 칸을 쫓아가는 건 계산 밖이었기에 그녀는 상황을 현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페로에게도 귀환을 지시했다.

 

“이런...”

 

“언니, 괜찮으세요?”

 

리리스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스노우 페더와 포이가 그녀에게 괜찮냐고 걱정을 건넸다. 리리스는 아직은 상황을 지켜볼 여유가 있다고 자신을 진정시키면서 둘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렴. 큰 문제는 아니니까.”

 

“저... 언니, 꼭 연구원님을 주시해야할까요?”

 

“뭐?”

 

스노우 페더가 쭈뼛거리면서 의견을 꺼내자 리리스는 평소답지 않게 날카로운 어투로 되물었다. 리리스의 반응을 본 스노우 페더는 입을 다물려다가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하려던 말을 전부 꺼냈다.

 

“연구원님이 1년 가까이 오르카호에 계셨지만 큰 문제를 일으키시지는 않으셨잖아요. 오히려 다른 분들의 상담을 해주셨는데, 아무리 주인님의 말씀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위험분자로 판단하고 대응해도 되는 걸까요?”

 

스노우 페더의 말을 들은 리리스는 눈을 감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포이는 리리스의 한숨이 싸늘한 냉기처럼 느껴져서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하아... 페더, 우리의 일이 뭐지?”

 

“주인님의 경호요...”

 

“그래, 우리는 경호원이야. 경호원은 단순히 닥치는 문제를 즉시 해결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능동적으로 사전에 위험할 수 있는 일을 예방해야 해. 주인님을 위해 작은 위험요소도 배제해야하지 않겠니?”

 

“그, 그렇지만 저희가 LRL을 위험분자로 보지는 않잖아요? 연구원님도 그런데-”

 

스노우 페더가 리리스의 말에 소극적이나마 항변하자 리리스는 페더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들어왔다. 리리스는 포이에게도 눈길을 돌리면서 자신들이 왜 이러고 있는지 목적을 재확인했다.

 

“페더. 잊어버린 건 아니지? 리마토르는 바이오로이드를 단순히 도구로 볼 뿐이라는 발언을 했어. 이 발언을 보고한 건 페로고, 심지어 페로의 공격을 피하기까지 했지. 오리진 더스트 시술도 받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 말이야.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데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이기까지 해. 주인님께 위협이 될까, 안 될까?”

 

말투는 일견 사근사근했으나 리리스의 노란 눈은 탁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스노우 페더는 말문이 막혔고 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스는 자신의 설득이 효과를 봤다는 생각에 자신의 지휘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말을 남기고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무슨 말이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다.

 

‘페더를 대기 인력으로 두기 잘했어. 괜히 리마토르에게 동조했다가 우리 쪽 계획이 줄줄이 새는 참사가 벌어질 뻔했네.

 

주인님께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수 있다면 리마토르는 배제해야만 해. 오르카호에서 칸 대장과 아스널 대장을 자기편으로 포섭해서 세력을 구축하는 것 같은데, 화력의 큰 축을 차지하는 캐노니어와 기동전의 정점인 호드가 주인님에게서 등을 돌리면 반란 진압을 할 수 있을지언정 손실이 클 수밖에 없어. 그러니 조금이라도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처리해야해.’

 

리리스는 블랙 맘바를 꽉 쥐었다. 하치코와 펜리르가 문을 열고 숙소에 들어오자 설치해둔 도청장치에서 칸과 리마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시각, 콘스탄챠는 사령관에게 보고서를 전달하고 있었다. 사령관은 진지한 표정으로 콘스탄챠의 말을 경청했다.

 

“배틀 메이드 전원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리마토르님께서 받은 시술은 기억 재생 시술로 보여요.”

 

“기억 재생 시술? 정보의 출처는 누구지?”

 

“바닐라가 다프네로부터 받았어요.”

 

“흠... 기억 재생 시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하면 말은 되네. 하르페이아에게서 얻어낸 건 없어?”

 

“아, 앨리스가 간다고 했는데 하르페이아가 겁먹고 도망쳐서 지금 블랙 웜이 추적 중이에요.”

 

“리마토르의 조교 일을 하고 있으니 많은 걸 알고 있을 거야. 겁주지 말고 부드럽게 대해줘.”

 

“알겠습니다. 추가적으로 금란을 소완에게 파견했다가 진술을 받았습니다.”

 

“무슨 진술인데? 설마 식사에 약을 탔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고 최근 2주간 리마토르님의 식사량이 대폭 줄었다고 말했어요. 샌드위치 하나로 당일 식사를 전부 마칠 정도랍니다.”

 

“곡기를 크게 제한할 정도로 기억이 어두웠던 건가... 수고했어, 콘스탄챠. 가서 애들 푹 쉬게 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콘스탄챠가 자리를 뜬 후, 사령관은 컴패니언으로부터 보고가 오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아직 답이 올라오지 않았음을 본 그는 아르망에게 물었다.

 

“아르망, 이 정도면 추측할 수 있겠어?”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가능합니다. 리마토르님께서 정의론 논문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미루어보아 리마토르님은 바이오로이드의 권리를 주장하는 연구를 진행하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재생한 뒤에 자해까지 할 정도라는 건, 그와 완벽히 대비되는 사건을 겪은 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바이오로이드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는 구 인류의 만행을 목도하시거나, 혹은 본인이 행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현재 고립을 택하셨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아르망의 말을 들은 사령관은 표정을 굳혔다. 리마토르가 구 인류의 만행을 본 반동으로 자발적 고립을 택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만약 그도 바이오로이드를 학대한 전력이 있으면 여태까지의 판단을 철회하고 처음부터 검증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아르망,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 거 같아?”

 

“2주라는 시간 동안 식사도 줄이시고 외부와 단절하는 선택지를 고를 정도면 리마토르님이 직접 바이오로이드를 구 인류와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었다는 쪽이 더 우세합니다.”

 

“젠장...”

 

사령관은 아르망의 말에 1년 간 그가 합류하고 보인 모습을 되돌아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리마토르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장난으로도 막 대한 기억은 없었다. LRL이나 안드바리, 아쿠아처럼 어린 바이오로이드에게도 경어를 쓸 정도로 존중의 덕목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과거에 그가 구 인류와 같은 인간군상이라는 주장에 반대 의견을 던졌다.

 

‘하지만 컴패니언은 계속해서 경계해야한다고 말했지. 리리스도 그렇고, 페로도 강경한 대응을 요구한 건 이례적이야. 둘 다 이유 없이 음모론을 퍼뜨리는 성격이 아님을 감안하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생각을 잇던 그는 불현듯 합류 첫날에 리마토르가 갑자기 경어에서 반말을 쓰던 때를 떠올렸다. 하루도 안 되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석연치 않았기에 사령관은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검토했다.

 

‘설마 싶기는 한데... 만약 반말을 한 순간이 과거의 무자비한 인격이 흘러나온 편린이라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던 여태까지는 상관없었지만, 만약 기억 재생 시술을 받고 모든 걸 떠올렸다면? 그러면 지금 자발적인 고립을 택하는 것도 설명이 돼. 자신이 과거와 같은 악행을 반복할까 두려울 테니까.’

 

사령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생각하면 할수록 작은 흠결이 점점 불어나 리마토르를 구 인류 중 일부로 가리켰다. 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리스에게 연락을 남겼다.

 

“그래, 검증해봐서 나쁠 건 없지.”

 

스스로 별 일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령관의 눈은 한눈에 봐도 불안한 기색을 담고 있었다. 아르망은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폐하, 저도 부디 제 추측이 틀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같은 시각, 칸은 2주 만에 리마토르와 대면했다. 식사를 불규칙하게 했는지 육안으로 보기에도 살이 많이 빠진 그의 모습은 과거의 기억이 얼마나 그를 아프게 하는지 외부에 보여주는 증거라고 칸은 생각했다. 리마토르는 책상에서 쓰고 있던 원고 무더기를 바닥으로 말없이 내렸다. 어색하게 감돌던 침묵을 먼저 깬 건 칸이었다.

 

“몸은 괜찮아?”

 

“...그럭저럭이요.”

 

칸은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칼로 그은 흉터가 선명했지만 상처는 다 아물어있었다. 그 자신의 생명을 난자한 흉터자국에 서글퍼진 칸은 화제를 돌렸다.

 

“리마토르, 왜 날 피했던 거야?”

 

그녀의 질문을 받고도 리마토르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칸은 그를 재촉하지 않고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몇 분간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두려웠어요. 저 때문에 칸이 상처 입을까 봐요.”

 

“...그래서였어?”

 

리마토르의 답변을 들은 칸은 겨우 그런 거였냐고 말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을 잃은 경험이 있는 리마토르에게 마음을 준 상대가 다친다는 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한 번 입을 연 리마토르는 말을 끊지 않고 이었다.

 

“칸도, 아스널도, LRL도, 에밀리도. 저와 가까운 이들이 저 때문에 상처받는 일을 또 겪을까 두려워요. 눈을 감으면 저를 감싸고 죽은 희연이와 연이의 모습이 떠올라 제 목을 조르고, 눈을 뜨면 여러분이 죽음에 이르는 모습이 보여 숨이 막혀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삶이 괴로워요.”

 

리마토르는 말을 하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칸은 그의 손을 잡아주면서 따뜻한 목소리로 그를 다독였다.

 

“그렇지 않아. 리마토르, 니체가 말한 영원 회귀 사상을 떠올려봐.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에서 모든 순간은 동등하게 중요해. 과거의 기억에 고통 받는 걸 부정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당신이 있는 건 오르카호의 현재야. 아들러 심리학도 그랬잖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뿐이라고.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 당신의 옆에서 내가 다치지 않고 살아갈게.”

 

“칸....”

 

리마토르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그의 손을 잡은 칸의 손등 위로 눈물 방울이 떨어지자 칸은 몸을 일으켜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칸은 자애로운 목소리로 리마토르의 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숨을 점점 가쁘게 쉬었다.

 

“리마토르?”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는 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칸은 그를 불렀다. 그녀가 몸을 빼자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책상에 상반신을 떨어뜨린 리마토르의 모습에 칸은 당황했다.

 

“이, 이 모습은...”

 

불규칙하게 거친 호흡,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 땀, 어긋나는 시야. 그의 모습을 본 칸은 기시감을 느꼈다. 과거의 자신이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그녀는 지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빠르게 판단했다.

 

“공황발작이다.”

 

칸은 지체 없이 리마토르의 입과 코를 손으로 막았다. 그의 상반신을 세우되 완전히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의 몸으로 받친 칸은 여전히 공황발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기억해. 이건 지나가는 한순간일 뿐이야. 절대 평생 유지되는 상황이 아니야.

 

1부터 3씩 더해서 세보자. 할 수 있지? 1, 4, 7, 10, 13, 16....”

 

그녀의 대처에 리마토르의 숨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호흡 주기가 고르게 돌아오자 그녀는 한시름 놓으면서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리마토르, 괜찮아?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

 

“...네.”

 

힘없이 대답한 리마토르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온몸의 기력이 빠져나간 것처럼 축 늘어져서 정신만 붙이고있던 그는 기력이 돌아오자 칸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칸.”

 

그의 감사를 받은 칸은 볼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며 말했다.

 

“아니야. 그때 당신이 내게 해준 대로 한 게 전부야.”

 

리마토르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자 칸도 입을 닫았고, 그렇게 둘은 어색한 침묵을 보냈다. 긴 시계바늘이 숫자 두 개를 건넜을 때 리마토르가 굳은 결심을 한 단호한 어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칸, 전에 제게 한... 사랑한다는 말을 못 받아들이겠어요. 미안해요.”

 

그는 말을 하면서도 차마 그녀가 받을 상처를 직시하기 미안하여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칸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더 구체적으로 말을 반복했다.

 

“저랑 같이 있으면 결국 괴로운 일만 따라와요. 그러니... 저를 사랑하지 말아주세요.”

 

리마토르가 조심스럽지만 굳은 의지를 보이자 칸도 그에 응답했다. 그녀는 담담한 투로 그에게 되물었다.

 

“좋아하지 말라고?”

 

“...네.”

 

그녀의 질문에 그는 말을 못하고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리마토르의 질문을 들은 칸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게 뭔데?”

 

“절 좋아하지 말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

 

점점 작아지는 리마토르의 말을 듣던 칸은 세 번째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얼굴을 그의 얼굴 앞에 바짝 들이밀면서 말했다. 양 볼에 새빨간 색을 물들인 리마토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자 그녀는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똑똑히 말했다.

 


“리마토르, 난 당신처럼 철학을 많이 몰라. 그래서 당신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고 실천할 수도 없어.

 

그래서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몰라. 사랑하는 방법만 알고 있어서,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표현하는 방법도 하나밖에 몰라, 잘 들으라고.

 


당신을 사랑해. 내 눈앞의 당신을 있는 그대로.

 


까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물어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대답해줄 테니까. 그러니 당신이 날 바꾸고 싶다면 직접 가르쳐봐. 평생 공부한 철학 수업을 들을 준비는 되어있어.”

 


“...칸, 정말 저로도 괜찮은 거에요? 같이 있으면 상처만 받고, 잘난 거라고는 하나도 없고, 손에 수많은 피를 묻힌 저따위에게, 그런 감정을 가져도 돼요?”

 

“이해를 못한 모양이네. 마리와 맞붙었을 때 한 말 잊었어?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목적적인 행동을 한다고 그랬잖아. 만약 내가 인간이라면, 당신을 이유 없이 사랑해도 괜찮잖아. 바이오로이드면 사랑할만한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고.”

 

칸은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리마토르와 처음 대화를 나눈 그 순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든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입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자 리마토르는 모든 생각을 지웠다. 말이 아닌 감각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감정을 그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저도 사랑해요, 칸.”

 

“기다리고 있었어.”

 

칸은 그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자신의 혀를 그의 혀에 살포시 얹어 살살 쓰다듬던 그녀는 숨이 막힐 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입이 떨어진 자리에 투명한 타액의 실이 길게 늘어지면서 둘을 이었다. 숨이 막혀서 그런지, 처음으로 한 키스라서 그런지. 어느 쪽도 알 수 없는 답을 두고 칸과 리마토르는 빨갛게 물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인력에 이끌렸다.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이면서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말했다.

 



“사랑해, 정말 많이.”

 


바람에 실린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불어와 색을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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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달달하게 에피소드 마무리. 마지막 본편 들어가기 전까지 당분간 달콤한 이야기나 써야지.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바이오로이드와 철학을 소재로 대화하는 에피소드도 나오니까 보고싶은 스토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길 부탁할게.


부족한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맙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