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받아서 작업한 소설임


*바이오로이드들의 제약을 풀어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싶어한 사령관이 인간이 되는 약을 만들고 난 후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다루고 있음


*중간에 삽화는 신청자가 다른 분한테 부탁해서 받은거임


*이전화: https://arca.live/b/lastorigin/54225302





비록 헤프닝에 가까운 시작이었지만, 에밀리의 '인간화' 이후 사령관의 계획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의 제약을 풀어주는 약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니, 이제는 그 약을 나눠줄 사람을 선별하는 작업이 남은 것이었다.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한 번에 약을 주는 것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령관은 우선 비밀리에 소수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만 인간화에 대해 고려해보라고 물어볼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어느날 X-00 티아멧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인간화 약을 요구했을 때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올곶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티아멧에게 사령관은 조금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일단 누구한테 들은거야? 그 이야기는 사실 반쯤 기밀로 취급되고 있거든?"


"에밀리로부터 들었어요."


티아멧의 대답에 사령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에밀리이......"


우선 에밀리에게도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일러두긴 했었지만, 아무래도 친한 관계인 티아멧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르게 흘려버렸을 수도 있다.


이미 엎질러 물을 퍼담을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사령관은 지금 눈 앞의 안건에 다시 집중하기로 하고 티아멧과 눈을 맞췄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티아멧 너는......왜 갑자기 인간이 되고 싶어진 거야?"


다음 말을 꺼내기까지 사령관은 약간의 고민이 필요했다. 


"인간들은 너한테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티아멧은 사령관의 눈을 담담히 쳐다보며 자신의 말을 속으로 정리하는 듯했다.


"그렇기 때문이에요. 인간들이 저에게 저질렀던 그 끔찍한 일들 때문에."


티아멧은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사령관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향해 있었다.


"제가 아무리 과거에서 벗어나려 해도, 사령관이 아무리 새로운 행복한 기억들로 그 위를 덮어주어도......제가 바이오로이드로 남아 있는 한 저는 언제까지나 '인간들에게 끔찍한 실험을 당했던 바이오로이드'일 뿐이에요."


"티아멧."


"그래서 저는 인간이 되고 싶어요.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리고,"


티아멧의 입가가 사령관만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 살짝 휘었다. 


"사령관만의 티아멧으로, 완전히 거듭나기 위해서요."


"......"


사령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눈을 보고, 그 미소를 보고, 그 진심어린 선언을 듣고. 


어떻게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을까.


"알았어."


잠시 고민하던 사령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바로......진행하고 싶어?"


사령관의 말에 티아멧은 마치 출전 명령을 받은 기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



며칠 뒤, 사령관과 티아멧은 사령관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테이블에 놓인 병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밀리가 먹었던 액체가 담긴 그 병을 바라보며 티아멧이 입을 열었다. 


"이걸 먹으면......정말 인간이 되는 건가요?"


"정확히는 바이오로이드로서의 제약이 사라지는 거지만."


사령관의 곁에서 부관 발키리가 마찬가지로 긴장된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에밀리 때에는 별다른 부작용이 없었지만, 그게 모든 개체들에게 적용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발키리를 대동한 것이다. 


눈 앞의 병을 한참 째려보던 티아멧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먹을게요."


병을 손에 쥐고 심호흡을 잠깐 한 티아멧은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액체를 삼켰다.


"......"


"......"


손에 잡힐 것 같은 두텁한 적막이 사령관실에 내려앉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티아멧에게, 사령관이 안달난다는 듯이 먼저 질문했다.


"저기, 티아멧? 느낌이 어때? 괜찮아?"


에밀리 때는 그녀가 약을 먹은 직후의 변화를 지켜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


티아멧이 천천히 눈을 뜨고 사령관과 눈을 마주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서서히, 에밀리 때와 마찬가지로, 티아멧 또한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눈이 조금 커졌다.


"어때 티아멧?"


사령관이 재차 물었다. 


"사령관......"


티아멧이 사령관을 부르며 슬며시 미소를 지으려는 그때였다.


티아멧의 동공이 갑자기 확장되고, 그녀의 얼굴에선 피어오르던 미소가 쓸려내려가는 모래처럼 지워졌다.


"티아멧?"


갑작스러운 표정변화에 사령관이 당황해하며 티아멧을 불렀다.


티아멧은 여전히 유추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에 눈을 크게 뜬 채 머리를 감싸쥐었다.


거칠어진 호흡 속에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사령관......아니, 인간......? 인간. 인간......! 아냐! 하지만 사령관은......"


"티아멧! 왜 그ㄹ......"


사령관이 다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오지마아!!!"


티아멧은 몸을 움츠리며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허억, 허억......"


얼굴과 머리를 가린 팔 틈으로 티아멧의 눈이 살짝 보였다. 


그리고 사령관은 그 희번뜩한 안광 속에서 명백한 분노와, 그 분노를 훨씬 뛰어넘는 두려움을 보았다. 


"사, 사령관."


자신의 비명에 자기가 놀란 듯 티아멧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 이만 가볼게요. 사령관은 오지 마세요. 저 지금......조금 이상해요. 그러니까......"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티아멧은 도망치듯이 사령관실을 빠져나갔다. 


"티아멧!"


뒤늦게 발키리가 티아멧을 따라나가자, 적막한 사령관실에 사령관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녀의 눈빛이 뇌리에 박힌 듯 떠나질 않았다. 


분노와 두려움이 소용돌이치며 떨리던 그 눈.


"티아멧......"


사령관은 그녀에게는 닿지 않을 허망한 중얼거림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부작용이 없는 건 수천 번도 확인했는데......"


사용목적을 알기 힘든 복잡한 기계와 도면들이 가득한 어느 흰 색의 방. 


발치에 질질 끌리는 흰 색 가운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하지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 사실이잖아 닥터."


사령관이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닥터는 잠시 진중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내 결론에 다다랐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티아멧 언니가 인간화 약물을 먹은 직후 격한 감정의 반응을 보였다고 했지?"


"응."


"그건 오빠를 향한 거였고?"


"나......혹은 '인간' 그 자체를 향한 감정이었을지도 몰라. 나중에 발키리가 따라나섰을 때에는 조금 진정되어 있었다고 했거든.


그렇게 말하고 사령관은 잠시 고민하듯 손에 턱을 괴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던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사령관은 방금 전 사령관실에서 보았던 티아멧의 눈을 떠올렸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그 눈동자. 그건 마치, 그 안의 모든 것을 연소시켜가며 타오르는 산불과도 같았다.


"분노는 나를 향하던 게 맞지만......동시에 두려워보였어.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어."


"갑작스런 변화에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수도 있어 그건."


닥터가 노트에 급하게 뭔가를 써갈기며 말했다.


"그리고 분노......어쩌면 바이오로이드로서의 제약이 풀리면서 그간 억눌려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걸지도 몰라."


"설마 과거 인간들에게 당했던 실험들에 대한 분노가?"


닥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령관은 온 몸에 식은땀이 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100년도 넘은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었단 말이야......?" 사령관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떤 상처들은 절대 치유되지 않는 법이니까."


무거운 침묵이 잠시 닥터와 사령관은 짓눌렀다. 


인간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티아멧은, 역으로 인간들이 그녀에게 남겼던 상처에 오히려 얽메이게 된 것이다.


"그럼."


잠시 후 사령관이 침묵을 힘겹게 깨고 입을 열었다.


"이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난 같은 과학자는 마음의 상처에 약물이나 전기치료 말고는 제시해줄 수가 없어."


닥터가 사령관의 눈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오빠뿐이야."


"내가?내가 어떻게......"


"오빠.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 중요한 건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야."


닥터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사령관에게 다가와 손을 위로 뻗어 그의 심장부근을 톡 쳤다.


"바로 여기에 든 거지. 오르카 최고의 과학자인 내가 장담하는 거니까, 괜한 소리하지 말고 티아멧 언니를 보살펴줘."


"......"


자신의 가슴팍에 닿는 작은 주먹의 온기를 사령관은 잠시 가만히 느꼈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사령관의 말에 닥터가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오빠지."



***



"티아멧."


걱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에, 어둠 속에서 티아멧이 고개를 들었다.


"라비아타."


"주인님께 이야기 들었어요."


사령관을 지칭하는 말에 티아멧의 웅크린 몸이 흠칫 떨렸다.


"......말해주세요 티아멧."


라비아타가 조심스럽게 티아멧에게 다가갔다.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티아멧의 앞에 다소곳이 앉은 라비아타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티아멧의 기분을."


티아멧은 팔로 감싼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사령관은 제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인간이에요."


"그랬었죠."


"나는 믿었어요. 자신이 있었어요. 인간과 대등해져도, 인간과 같아져도. 사령관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무릎을 감싼 티아멧의 팔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하지만 달랐어요. 저는......저는 바이오로이드로서의 제약이 풀린 그 순간 엄청난 증오를 느꼈어요."


"......"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사령관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나와 내 동료들을 실험과 재미를 위해 찢고 갈아버리고 덧붙이던 그 개새끼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티아멧이 고개를 들어 라비아타의 눈을 마주치자, 라비아타는 순간적으로 목 뒤의 솜털이 바짝 서는 걸 느꼈다. 


겉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증오가, 티아멧이 내뱉는 거친 말과 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감정이 사라지질 않아요." 


"티아멧......"


"제가 당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어져요. 우리의 팔다리를 자르고, 온 몸이 반대로 뒤틀리는 것 같은 약물을 투여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어져요. 똑같이 해주고 싶어져요. 제가 느꼈던 그 고통을, 그 괴로움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고 싶어진다구요."


라비아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멸망 전 인간들을 직접 겪어본 그녀로서는 티아멧의 저 감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방을 뛰쳐나가 사령관의 목을 조를 것만 같은 그녀를 이해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자기도 티아멧의 상황에 놓인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티아멧은 피부로 느껴질 것 같은 저 감정이 처음 끓어오르던 그 순간에도 사령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반대로 그녀는 마치 스스로가 보균자가 된 것처럼 사령관으로부터 멀어지고, 그와의 접촉을 거부했다.


그 의미를 알게되자, 라비아타의 가슴이 저며졌다.


"하지만 티아멧 넌 아직 주인님을......"


자신의 마음을 라비아타가 헤아려줬다는 사실에 안도했는지, 티아멧의 눈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치만 사령관이잖아요."


그 한 마디에는 참 많은 뜻이 담겨있었다. 


라비아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티아멧의 붉게 충혈된 눈은 분노가 아닌 눈물로 인한 것이란 걸.


티아멧에게 좀 더 다가간 라비아타는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티아멧의 몸이 찬 비를 맞은 동물처럼 떨렸다.


"사령관이 저한테,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왜 저는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죠?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증오하기 싫어요. 이러면 저는 절 가지고 실험하던 인간들과 다를바 없는 이기적인 놈이 되버리잖아요......"


"아니에요."


라비아타가 티아멧의 등을 슬슬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티아멧은 그 사람들하고 달라요. 이렇게 아파할 줄 알고, 남을 생각할 줄 알잖아요. 사령관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티아멧은 이미 그 인간들보다 훨씬 더 나은 인간이란 걸 증명한 거에요."


"라비아타, 저는 이제 사령관 보기가 두려워져요. 만약에 이 분노가 사라지지 않으면 어떡하죠? 제가 만약 사령관을 상처입혀 버리면......"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라비아타가 티아멧을 더 꼭 껴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테니까......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안심시키며 라비아타는 티아멧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그녀를 계속 품에 안고 있었다. 


잠시 후, 조금 진정된 티아멧은 라비아타의 품에서 떨어지며 조금 더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라비아타. 제게 다시 바이오로이드의 제약을 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티아멧의 질문에 라비아타는 잠시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닥터니까, 아마 찾아보면 방법은 있겠죠......하지만 티아멧, 나는 티아멧이 이 문제를 없던 일로 하기보다, 이 문제와 맞서서 이걸 극복했으면 좋겠어요."


"이 문제를......극복하라구요?"


"응. 물론 티아멧에게 가혹한 이야기인건 알아요. 만약 티아멧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면, 주인님도 나도 티아멧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약을 만다는 걸 절대 반대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바이오로이드로서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우릴 옭아매고 있던 제약을 푸는 건, 주인님이 오랫동안 원했던 염원 중에 하나였으니까요."


라비아타는 그렇게 말하며 티아멧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티아멧이 말했던 대로, 제약을 벗는 것은 우리가 정말 주인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진정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니까요."


티아멧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라비아타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곤 해도 어떻게 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지 도저히 보이지 않는걸요."


"난 믿어요. 티아멧과 주인님이 이걸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그렇게 바로 확신하는 거에요?"


"그야."


라비아타가 티아멧에게 싱긋 미소지어보였다.


"지금껏 봐왔던 당신과 주인님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믿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



그 이후 티아멧은 자신의 방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장비가 고장나 수리하는 동안 대기하는 것으로 라비아타가 처리해주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만나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지만, 혹여나 복도에서 사령관을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티아멧은 자신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식사는 부관으로서 사정을 알고 있었던 발키리나 라비아타가 가져다주었다. 


식사를 가져다주면서 그녀들은 매번 티아멧의 상태를 살피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었지만, 그녀는 처음처럼 감정의 혼란을 겪고 있지 않다는 것 뿐, 여전히 사령관을 만나는 것은 꺼려하고 있었다.


그런 정체상태가 지속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티아멧 씨."


발키리가 언제나처럼 식사를 들고 문을 열며 들어왔다.


"아, 발키리 씨. 매번 고생시켜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지금 누구보다 고생하고 있는 건 티아멧 씨일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트레이를 책상 위에 올려둔 발키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보다, 오늘은 사령관 님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령관의......편지?"


티아멧의 표정이 일순 긴장감으로 굳었다.


"물론, 사령관 님께서는 티아멧 씨가 읽고 싶지 않으신다면 무리해서 열어볼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발키리가 식사가 담긴 트레이 옆에 편지를 두었다.


"그러니 이 편지는 여기에 두고만 가겠습니다. 읽을지 읽지 않을지는 티아멧 씨에게 맡겨두겠습니다."


"......"


착잡한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보고 있는 티아멧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발키리는,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인 후 그녀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었다.


발키리가 떠난 후 티아멧은 조용히 편지를 집어들고, 떨리는 손으로 봉투 안을 열고 내용을 펼처보았다.



<안녕 티아멧. 혹시 내가 편지 쓰는 것만으로도 네게 안좋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 꼭 알려줘. 네게 부담을 안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음.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무슨 말을 써야할 지 모르겠네. 하르페이아는 내가 분명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정작 지금 펜을 들고 이렇게 한 자씩 써내려가는 것도 되게 어색하다. 흐흐.


 오늘은 좌우좌가 놀러왔었어. 사이클롭스 프린세스 놀이를 해달라고 하는데, 이걸 오늘 하루만 몇 번을 해도 전혀 질려하지 않는 거 있지? 결국엔 더치걸이랑 안드바리가 다른 놀이 하자며 데려갈 때까지 나를 붙잡고 놔주지를 않았어. 

 

 (사실은 나도 그걸 빌미로 골타리온이랑 램파리온 불러서 좀 놀고 싶었는데, 발키리가 옆에서 내내 붙어다니느라 차마 말을 못 꺼내겠더라.)


 아참, 오늘 저녁은 특별히 소완한테 부탁해서 티아멧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 옆에 사탕은...먹고 싶으며 먹어. 무리하지는 말고.


 뭔가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직 편지를 쓰는 게 익숙하지가 않네. 만약 티아멧이 계속 써주길 허락한다면, 다음부턴 좀 더 재밌게 써보도록 노력할게.


 그럼.


 사령관이.>



티아멧은 사령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편지를 읽고 있으면 인간에 대한 분노가 자기도 모르게 치솟기는 했지만, 사령관을 직접 마주했을 때처럼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령관의 편지를 몇 번 읽던 티아멧은 사령관이 편지 마지막 부분을 읽고 트레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척 보기에도 소완이 신경을 쓴 것 같은 호화로운 음식과 함께, 동그란 사탕이 하나 놓여있었다. 


화려한 음식들과는 다르게 평범한 알사탕. 하지만 티아멧의 눈은 오직 그 사탕에만 꽂혀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면 사령관이 항상 주던 사탕이었다. 


인간들에 대한 불신과 증오, 그리고 그들에게 당했던 상처들을 달콤하게 덮어주었던 그 사탕.


임무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였던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던 그 사탕.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한켠이 아릿하게 저려오는 그 사람의 사탕.


티아멧은 트레이에서 사탕을 집어 껍질을 벗긴 후 입 속에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달콤한 맛이 퍼졌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분노와 조롱에 가득찬 목소리가 속삭였다.


'왜 아직도 인간에게 복수하지 않는 거야? 이제 널 묶어둘 제약은 아무것도 없어.'


'너와 네 친구들을 갈아죽인 인간들이 준 걸 개처럼 받아먹는 거야?'


'왜 저 나약하고 한심하고 사악한 인간 따위 앞에 벌레처럼 기는 거지?'


"우욱......"


사령관, 아니 인간을 향한 분노와 혐오감에 본능적으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크윽, 으으!"


하지만 티아멧은 주먹을 꽉 쥐며 그 구역질을, 자신의 안에서 솟아오르는 본능을 짓눌렀다.


"나약하지도 한심하지도 사악하지도 않아."


티아멧이 입 안 사탕의 맛을, 그 달콤한 상냥함의 맛을 가슴 깊숙이 다시 새겨넣으며 읊조렸다.


"사령관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멋지고, 착한 사람이야."


칼을 들고 철충을 베어내듯이, 내면에 응어리져 있었던 증오를 베어낸다. 


"사령관은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았어. 오히려 내가 상처입을까봐 편지조차 한 글자씩 조심스레 쓴 게 눈에 보인다고."


가슴이 찢어질 듯이 괴로웠고, 머리는 터질 듯이 뜨거웠다. 100여년 동안 쌓여있었던 분노는 그리 쉬이 꺼질 줄을 몰랐다. 


하지만 티아멧은 그 분노를 끊임없이 잘라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직시하며 끊어냈다. 


"이제 나를 묶어둘 제약은 없어.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증명할 때야."


까득.


티아멧이 사탕을 깨부수자 입 안에 향긋한 딸기 향이 입 안에, 그리고 온 몸에 퍼져나갔다.


"내가 그깟 제약따위 없어도 사령관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



사령관은 누가 보기에도 안절부절한 모습으로 사령관실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어제 티아멧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이후 그는 계속해서 불안에 가득 차 한 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닥터의 조언을 듣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내어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 편지를 통한 소통이었다. 


하지만 그건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그저 이것말고는 도저히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혹시나 티아멧에게 자기가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준 건 아닌지, 그녀가 과연 답장을 해주기는 할 지 계속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령관, 정신 사나워."


오늘의 부관 에밀리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사령관을 따라 몸을 이리저리 휙휙 거리다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 알아 나도."


에밀리의 저 초연한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을까 했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다. 


"각하."


이윽고 사령관 실 문이 열리고 발키리가 들어오자, 사령관은 쏜살같이 그녀에게 달려갔다.


"티아멧은?!"


거두절미한 그의 질문에, 발키리는 품에서 투박하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빈 접시들 곁에 이게......"


사령관은 얼른 발키리에게서 종이를 받아들고 열어보았다. 


힘 조절을 제대로 못해서인지 곳곳에 잉크자국이 묻은 종이에는 짧은 한마디만이 적혀있었다.


<저도, 노력할게요.>


"하아......"


사령관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한숨소리와 함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이다아아......"


"짧은 문장인데도 힘겹게 쓴 것 같군요."


발키리가 곁에서 티아멧의 편지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일단 대화는 할 수 있으니 다행이야. 이걸로 조금씩 재활......재활이라고 하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활을 할 수 있겠어."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쳐 축 늘어진 사령관은 멍하니 티아멧의 편지를 잠시 바라보았다. 


"......발키리, 혹시 넌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쓸모없거나 가혹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아?"


"그렇지 않습니다."


발키리의 대답은 즉답이었다.


"제약이 없어진 이후에도 티아멧이 이렇게 노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사령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기합을 넣듯 숨을 흡하고 쉬었다. 


"좋아. 티아멧이 이렇게 노력하는데, 내가 이렇게 축 쳐져 있을 순 없지."


그렇게 말하고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사령관은 편지지와 볼펜을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좀 더 잘 써보자......발키리, 하르페이아랑 알렉산드리아 좀 불러줄래?"


"각하께서 직접 생각하시는 게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사령관, 티아멧한테 편지 써?"


"오, 에밀리 너도 한 마디 쓸래?"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은 사령관을 잠시 바라보던 발키리는, 사령관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웃었다. 



***



그 이후 사령관과 티아멧의 팬팔 활동은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이것저것 매일 새로운 일이 생겨나는 사령관과는 달리 티아멧은 하루 대부분을 자신의 방에서 보낸다는 걸 고려해, 사령관은 자기 얘기와 함께 티아멧에게 이것저것 질문들을 던졌다. 


<몸이 괜찮아지면, 제일 먼저 뭐하고 싶어?>


질문들은 주로 티아멧의 희망을 적을 수 있는 종류의 질문들이었다. 티아멧이 질문의 답을 적어 보내면, 사령관은 그 대답에서 또 다른 이야깃거리나 질문을 만들어 다시 보내는 형식으로 대화는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아직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에 단답형으로 답을 적던 티아멧도, 점차 편지지가 쌓일 수록 안정된 글씨체로 제법 긴 답을 적어 보내기 시작했다.


<우선은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출격부터 하고 싶네요. 아직 철충과의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니까요.>


티아멧의 편지 속 대답을 읽은 사령관이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임무를 우선하는 건 너무 티아멧다워서 오히려 좋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사령관은 내심 조금 다른 대답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기껏 이 고생을 거쳐가며 인간이 되지 않았나. 좀 더 희망찬 일상을 꿈꿔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령관은 다시 펜을 들었다. 


<......그런 거 말고 뭔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건?>


"음......"


티아멧은 볼펜을 입가에 톡톡 치며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거라.


그녀에게는 개인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었다. 멸망 전에는 실험체로서, 멸망 후에는 전투원 스트라이커로서 끊임없이 눈 앞의 적을 헤치우는 것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녀에게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어느새 전투복과 대검을 장착하지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스스로를 상상하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티아멧의 시선은 자신의 책상 옆에 높게 쌓인 편지들에 향했다. 


사령관의 첫 편지부터 가장 최근에 온 것까지, 티아멧은 그 편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십번은 읽었다. 곱게 접혀있었던 편지들이 마치 새 종이처럼 평평하게 펴질 때까지. 


처음에는 그저 인간에 대한 혐오증을 지우기 위해서 억지로 읽었지만, 점차 그 안의 내용 자체를 곱씹게 되었다. 


편지의 행간에는 사령관이 자신에게 뭔가 힘이 될만한 멋진 문장들을 써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엿보였다. 


하지만 사령관에게 그런 재능은 없었는지, 결국 그의 편지는 언제나 첫 편지 때처럼 하루 일상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어린 바이오로이드들과 함께 놀아준 것, 장난끼 넘치는 바이오로이드들의 꾐에 넘어간 것, 혹은 반대로 순진한 바이오로이드를 골려먹고 함께 웃는 것.


중간중간에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편지를 쓰는 것에 참여했는지, 이따금 다른 필체로 티아멧이 다시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안부글들이 적혀있는 것을 처음 봤을 때 티아멧은 저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었다. 


물론 그런 한가한 일들만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티아멧은 사령관이 마지막 인간이자 오르카의 사령관으로서 얼마나 막대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분명 그 이야기들 이 편지에 적어두지 않은 건 티아멧이 괜히 걱정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겠지. 


티아멧은 눈을 감고, 끙끙거리며 편지에 글자를 하나씩 적어내려가는 사령관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참으로 한결 같은 사람. 바보같이 보일정도로 남을 배려해주는 그 모습은 편지의 글자만으로도 금새 떠올릴 수 있을만큼 뻔했다.  


하지만 티아멧의 마음을 녹였던 것도 그 바보같은 배려였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런 사령관을 닮고 싶어, 티아멧은 인간이 되는 약을 먹었다. 


인간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들이 준 상처를 모두 털어버리고, 사령관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지만 그 아프고 질척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방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돌아보는 동안 티아멧은 자신이 그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란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100년 동안 쌓였던 증오는 비록 그만한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계속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 불쑥불쑥 잡초처럼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티아멧은 두려웠다. 자신이, 이 증오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해 영원히 사령관의 곁에 다시 설 수 없게 될까봐.


하지만 사령관의 편지를, 그 얕은 종이에 담긴 깊은 진심을 읽으며 티아멧은 깨달아갔다. 


사령관의 상냥함은 자신의 아픔을 모두 덮어버릴 정도로 터무니없다는 것을. 


그걸 깨달은 후 티아멧은 더 이상 스스로가 두렵지 않게 되어버렸다. 


증오를 계속해서 베어낼 것이다. 지금 자신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지글거리는 이 감정을 극복하고 사령관의 편지를 마주하는 것처럼. 


그리고 가끔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기가 너무 힘들어질 때면, 그때는 사령관이 곁에 있어줄 것이다. 


저 바보 같은 배려와 상냥함이 흰 눈처럼 자신의 증오를 덮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티아멧은 더 이상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감정의 격류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령관은 몸이 괜찮아졌을 때 개인적으로는 뭘 해보고 싶냐고 물었었지.


그와 만난 후 짧지만 강렬했던 나날들을 머릿속으로 더듬어가며, 티아멧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았다.


"......"


답은 의외로 금방 떠올랐다. 


그녀의 추억 속 펼쳐진 환상동화 같은 장소. 그녀가 처음으로 사령관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던 그곳. 


그곳에 있었던 사령관과 그의 사탕. 그리고 티아멧과 그녀의......


되돌아보니, 티아멧과 사령관 사이에서 항상 먼저 다가와준 것은 사령관이었다. 


자그마한 사탕과 함께, 그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의 문을 부드럽게 노크해왔었다. 


처음 이 약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런 사령관의 마음에 제대로 된 답을 해주고 싶어서였지. 


'아직 어리숙하구나 나는.'


답이 너무 오래 걸려버렸어. 


티아멧은 눈을 슬며시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사령관을 만나도 될 지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령관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잠시 가려두고 있었을 뿐, 그것을 없애지는 못했다. 



두려움을 걷어내면 그곳에는 소중히 간직한 마음이 있었다. 



***



사령관은 어둠이 내려앉은 사령관실에서 작은 스탠드만을 켜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 펜의 끝으로 입가를 톡톡 치고 있었다. 


"다음에는 또 뭘 적어서 보내주면 좋아하려나."


아직 마지막 편지에 대한 티아멧의 답장이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사령관은 이제 하루를 정리하며 편지에 쓸만한 이야기를 쓰는 게 제법 즐거웠다. 


물론 티아멧의 오래된 상처를 함께 치료하자는 목적을 잊지는 않았지만, 말이 아닌 글로 이야기를 나누니 오히려 티아멧과 더욱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서였다. 


순식간에 휘발되는 말과는 달리, 고르고 골라 조심스레 담은 그 글 하나 하나에는 조금 더 소중하고 반짝이는 마음이 비춰지는 듯 했다. 


그렇게 티아멧의 답장내용을 상상하며 다음엔 무슨 이야기를 쓸지 고민하던 그때,


똑똑. 


누군가가 사령관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를 듣고 사령관이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


그의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고, 사령관은 그만 손에 들린 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티아멧?"


이른 아침의 하늘을 담아놓은 듯한 머릿결을 살랑거리며, 티아멧은 양손을 등 뒤에 살포시 숨기고 조금 수줍은 모습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령관."


"이제 괜찮은 거야?"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티아멧에게 조심스레 다다갔다. 


티아멧이 자기를 해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기를 봐서 괴로워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빛.


그 어떤 편지도, 그 어떤 상상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저 눈빛.


티아멧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자신의 마음 속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티아멧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괜찮아질거에요."


그 말에 사령관은 잠시 티아멧을 바라보다,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건 꼭 직접 전해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티아멧이 등 뒤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뭔데?"


사령관의 말에 티아멧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답장이요."


티아멧의 손에 들린 것은, 평범하게 포장된 시판 초콜릿이었다. 


"초콜릿?"


"저번에 편지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티아멧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그냥 초콜릿을 드리지만, 다음엔 꼭 제가 만든 수제 초콜릿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때는,'


티아멧의 다음 말은 그녀의 마음속에서만 조용한 다짐이 되어 울려퍼졌다. 


'그 수제 초콜릿을 사령관의 사탕에 대한 답으로 드릴게요.'


비록 본래는 여자가 먼저 초콜릿으로 마음을 전한다지만. 


비록 사령관이 사탕에 담은 마음과 자신이 초콜릿에 담을 마음은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티아멧은 생각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그렇기에 소중한 것일테니까.


아직은 전하지 못할 감정을 담아, 티아멧은 사령관을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햇살 같은, 소녀의 미소.



"그때에도, 함께 해줄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