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LRL, 거기 서!”

 

“미안해! 금방 갚을게!”

 

참치캔을 손에 든 LRL이 재빨리 복도를 가로질러서 도망치자 안드바리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뒤를 쫓았다. 안드바리의 발이 빠르다고는 해도, 천적에게서 도망치는 피식자의 생존본능이 발동한 LRL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한참을 뛰다가 결국 LRL을 놓치자 안드바리는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멈췄다.

 

“이씨...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또 도둑질을 하다니... LRL 너무해!”

 

자신의 말을 안 듣는 LRL에게 화를 내던 안드바리 안에서 분노와 서러움이 속에서 치밀었다. 창고로 가는 내내 울먹거리던 안드바리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안드바리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창고에 책을 찾으러 온 리마토르가 안드바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안드바리!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흐흑... LRL이... 참치를... 흐아아앙...”

 

리마토르의 얼굴을 보자 안드바리는 더 서럽게 울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우는 안드바리의 모습에 난감해하던 리마토르는 책을 찾으려던 계획을 접고 안드바리를 달래주었다.

 

“마음껏 울어요. 감정을 다 씻어내는 거에요.”

 

한참동안 리마토르에게 안겨서 울던 안드바리는 울분을 다 쏟아내고 눈물을 그쳤다. 코를 쿨쩍이던 안드바리에게 티슈를 건넨 리마토르는 이제 괜찮아졌냐고 부드럽게 묻자, 안드바리는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아니에요. 안드바리가 괜찮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별 거 아니에요. LRL이 또 참치를 훔쳐갔어요.”

 

리마토르의 질문을 들은 안드바리는 LRL의 모습이 눈에 선한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답했다. 리마토르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사뭇 진지하게 안드바리의 말을 받았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겠네요. LRL의 서리가 하루이틀도 아니고요.”

 

“그러니까요! 매번 하지 말라고 말하는데도 왜 이러는지... 알비스도 툭하면 초코바를 훔쳐가고...”

 

“안드바리, LRL이랑 알비스가 많이 밉나요?”

 

“네, 미워요.”

 

“밉다고 하면 1에서 10 중 어느 정도인가요?”

 

“음... 한 6 정도요.”

 

“6이라. 제가 안드바리가 아니라서 마음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제가 보기에는 안드바리가 LRL과 알비스에게 갖는 감정은 순수한 미움이 아닌 거 같아요. 맞나요?”

 

“그, 그건 그렇기는 한데...”

 

“밉다라는 감정은 중요해요. 그건 안드바리의 감정이니까요. 하지만 미움에만 집중하면 안드바리가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니까, 다른 감정들을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안드바리가 갖고 있는 다른 감정은 무엇인가요?”

 

“으음....”

 

리마토르는 안드바리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질문했다. 상대방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며 생각과 감정을 추측하는 리마토르의 노련한 화술에 안드바리는 끙끙 고민하던 소리를 내더니 감정을 털어놓았다.

 

“LRL이랑 알비스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둘 다 친구니까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안드바리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운 감정에 가려진 따뜻한 온정을 꺼내드는 게 어른에게도 힘든 일임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는 안드바리를 칭찬해주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꺼내는 게 어려운 일인데 아주 잘했어요. 훌륭해요, 안드바리.”

 

“헤헤...”

 

그의 칭찬을 들은 안드바리가 배시시 미소를 짓자 리마토르는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안드바리가 앉아있는 곳을 빠르게 살폈다. 거울이 있는 선반 옆에 컵떡볶이가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본 리마토르는 재빠르게 안드바리의 취향을 추리했다.

 

‘손거울과 장부가 있다는 점에서 안드바리가 쓰는 개인물건들이겠지. 그 옆에 컵떡볶이가 묶음포장도 아니고 낱개로 있다는 건 안드바리가 따로 먹을 생각이라는 뜻이겠지. 옆에 포크까지 있으니 확실하네.’

 

“안드바리, 우리 간식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참치 드릴 테니까 컵떡볶이 하나만 주세요.”

 

“어? 교수님도 컵떡볶이 좋아하세요?”

 

“물론이죠. 좋아한답니다.”

 

“우와... 금방 가져올게요!”

 

리마토르가 자신과 같은 입맛을 좋아한다고 하자 안드바리는 환하게 웃으면서 창고 안으로 달려갔다. 언제 울었는지 기미도 찾지 못할 정도로 밝게 웃는 안드바리의 뒷모습을 보며 리마토르는 기억 속에서 연이를 떠올리고 싱긋 웃었다. 안드바리가 컵떡볶이를 가지러 간 사이,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지 고민했다.

 

“여기요! 물 부어왔으니까 3분만 기다리시면 돼요!”

 

“물까지 따라준 거에요? 고마워요.”

 

“컵떡볶이 좋아하시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평소에는 코코, 더치걸과 더불어 오르카호의 어린이들 중에서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안드바리지만 이럴 때는 영락없는 어린 아이였다. 리마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 걸리는 아빠 미소를 감추지 않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컵떡볶이가 익을 동안 짧은 이야기를 해볼까요?”

 

“네, 좋아요!”

 

“그래요. 안드바리는 LRL과 알비스가 바뀌면 좋겠다고 그랬죠?”

 

“네.”

 

“안드바리고 보기에 둘은 어때요? 바뀔 거 같나요?”

 

리마토르의 질문을 받은 안드바리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푹 쉬면서 다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요... 몇 번이나 말해도 안 바뀔 거 같아요.”

 

“그래요? 안드바리, 둘이 바뀌기를 바라면서 안드바리가 한 노력은 뭐가 있나요?”

 

“음... 레오나 대장님이나 발키리 언니, 베라 언니에게 말씀도 드렸고 사령관님께도 말씀드렸어요. 한 번은 공포탄까지 쏴서 겁먹게 했지만, 더치한테서 구했는지 로드롤러를 앞세워서 돌파했어요...

 

하아... 교수님, 둘이 바뀌기는 할까요?”

 

“로드롤러라니 그건 그것대로 신기한 일인데요. 아무튼 안드바리, LRL과 알비스가 도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요?”

 

“글쎄요, 매번 보급 받은 걸 다 까먹고 다음 보급까지 기다리기 어려우니까 계속 슬쩍 가져가려는 거 같아요.”


안드바리의 답을 들은 리마토르는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보따리를 풀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LRL과 에밀리가 사자소학을 다 떼면 명심보감과 논어를 읽히려고 교재를 만들던 기억을 떠올려 안드바리에게 말로 풀어냈다.


“안드바리, <논어>라는 책을 들어본 적 있나요?”

 

“아니요...”

 

“그럼 공자라는 이름은요?”

 

“아! 금란 언니가 LRL을 혼낼 때 말한 거 같아요.”

 

“공자는 유학이라는 학문을 집대성한 고대 중국의 학자로, <논어>는 공자가 사망한 이후 제자들이 공자의 말을 모아서 쓴 책이랍니다. 제가 보기에는 안드바리한테 유학이 필요할 거 같아요.”

 

“유학이요? 어려울 거 같은데...”

 

안드바리가 지레 겁을 먹자 리마토르는 걱정 말라면서 싱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명색이 교수인데 쉽게 설명 못하면 안 되죠.”

 

“교수님은 연구하는 분 아니신가요? 원래 연구원으로 합류하신 걸로 아는데요...?”

 

“교수의 주업이 연구이기는 하죠. 그렇지만 이름에 가르칠 교(敎)가 들어간 만큼, 가르치는 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강의하는 데도 흥미가 있기도 하고요.”

 

“그랬군요. 그건 몰랐어요.”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안드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바리가 경계심을 거둔 것 같자 리마토르는 술이 식기 전까지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온 삼국지연의의 관우처럼, 컵떡볶이가 익기 전에 핵심을 농축한 강의를 끝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한 번 들어봐요. 유학이라고 하면 제사를 지내고 웃어른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거에요. 형식에만 집착하는 꼬장꼬장한 모습도 딸려오죠.

 

하지만 그건 유학의 본래 모습이 아니에요. 공자가 제시한 유학은 딱 하나로 정리되죠. 인(仁)을 실현하라. 인(仁)이란 유학에서 바라는 가장 완벽한 이상적 경지로, 공자가 살았던 시기가 굉장한 혼란에 빠져있었음을 알아야 이해하기가 쉬워요. 춘추전국시대라고 해서 중국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시대에 태어난 공자는 왜 이런 고통이 끊이지 않는지를 고민했어요.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던 공자는 마침내 인(仁)이 부족해서 현재의 세상이 도탄에 빠졌다고 결론을 지었죠.

 

인이 없어서 세상이 망가졌으니,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인을 회복하는 거에요. 공자는 인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정명(正名)을 강조했답니다. 정명을 대표하는 말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가 있는데요, 이를 해석하면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라는 말이에요.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 혼란스러운 세상의 진실이 잡힐 거라는 뜻이죠.”

 

“교수님, 각자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 왜 세상이 바로잡히는 건가요?”

 

“안드바리에게는 약간 어려운 이야기인데, 쉽게 설명하면 공자는 명(名)에 부합하는 실(實)이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설탕을 샀는데 성분 표시에 무설탕이라고 적혀있으면 그건 설탕일까요? 아니죠. 공자는 당시 사회가 내세운 정의가 실제 정의와 동떨어져 있어서 혼란이 발했으니, 벗어난 이름을 바로잡아서 알맹이를 세상에 실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거에요.”

 

“음... 그럼 정명의 방법 중 하나로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하는 걸 말한 거죠?”

 

“그렇답니다. 잘 이해했어요.

 

공자는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하는 도리가 규범으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게 예(禮)에요.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공경하는 방법으로 인사나 경어를 사용하는 게 예의 한 모습으로, 사회적인 방법을 통해 인에 가까워지려는 수단이에요. 공자는 예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이기는 극기(克己)가 필요하다고 보았어요. 사람들은 감정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사는 경향이 있으니, 인에 다가가려면 자신의 감정을 넘어 예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죠.

 

자, 그럼 극기를 거듭해서 예를 실천하면 그 끝인 인에 도달할 수 있겠죠? 인을 실현하는데 성공한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군자(君子)라고 합니다. 군자는 아직 인을 깨닫지 못한 이들을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공자는 지도자는 반드시 군자여야 한다고 했어요. 만약 지도자가 군자가 아니라 자신의 사리사욕만 챙기는 바른 길에 어긋난 행동을 일삼는다면 가차 없이 내치라고 했죠.

 

여기서 핵심은 군자가 사람들을 ‘변하게 한다’라는 점이에요. 유학은 모든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감정에 휘둘려 막 사는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예를 익히고 자신을 갈고 닦으면 인을 깨우칠 수 있다고 본 거죠.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조선시대의 4대 왕 세종 이도의 일화에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하려는 당시 정창손이라는 신하가 ‘사람은 타고난 자질대로 살기 때문에 쉬운 문자로 유학을 가르쳐봤자 백성들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반대하자, 온화한 성품의 세종이 격노하면서 정창손에게 과격한 욕설을 쏟더니 관직에서 내쫓았다고 해요. 그 정도로 유학은 누구나 수양을 통해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걸 강조하는 학문이랍니다.”

 

“우와, 생각만큼 아주 어렵지는 않네요.”

 

“그렇죠? 제가 안드바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점은 이거에요. LRL과 알비스 모두 올바른 길을 알려주고 실천하면 바뀔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가르침의 과정은 무작정 하지 말라고 막는 게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하면 왜 안 되는지 자신이 직접 깨치게 하는 걸로 시작해야 해요. 공자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올바른 예를 모르기 때문에 저런 짓을한다고 했어요. 동시에 바른 길로 인도하여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짓임을 알게 하면 다시는 그러지 않는다고 말했죠.

 

다음에 LRL과 알비스가 또 창고를 털다가 걸리면 이 이야기를 해줘 봐요.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에 부끄럼을 느끼면 참치와 초코바를 아껴쓰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거에요.”

 

“네! 고맙습니다, 교수님!”

 

“뭘요. 컵떡볶이가 다 익은 거 같으니 이제 먹을까요?”

 

안드바리가 해맑게 웃으면서 포장지를 뜯자 리마토르도 따라 뚜껑을 벗겼다. 둘은 대화가 길어져서 살짝 불기는 했지만 적당히 맛있을 정도로 익은 떡볶이를 호호 불어서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컵떡볶이를 싹 비운 안드바리는 식곤증이 오는지 꾸벅꾸벅 졸다가 리마토르의 품에 안겨서 잠들었다. 그는 창고문을 닫고 꿈나라로 떠난 안드바리를 안아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숙소로 데려다주었다. 발키리가 안드바리를 안아드는 모습을 보며 리마토르는 또 다시 연이의 모습을 비춰보였다.

 


“연이야, 너에게 못해준 것들을 이제 할 수 있어.”

 


혼잣말을 나직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리마토르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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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면 꼰대의 이미지로 굳혀져있는데, 사실 유학이 생각보다는 유연한 학문이야. 원래는 맹자의 저서 <맹자>, 주자가 제시한 성리학, 왕수인의 양명학, 양명학을 이어받은 조선 후기의 강화학파까지 쭉 이어지는 설명을 쓰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괜히 내용만 방대해지고 핵심에서 멀어질 것 같아 공자가 제시한 논어에서의 유학만 썼어. 남은 유학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에피소드에서 기회가 되면 풀어보려고 해.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