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날이 밝았다. 눈을 뜨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단칸방의 천장이 보였다. 몸을 일으켜세우자 내 옆에 기대어 자고있던 보리도 눈을 뜨더니 누운채로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하고선 곧장 날 따라 일어났다. 나 때문에 깬건가? 아님 개는 원래 잠을 얕게 자나?


반면 내 왼쪽에 누워 자고있던 하베트롯은 아직도 꿈 속을 해메고 있었다. 하도 오랫동안 홀로 살아서인지 스틸라인 치고는 군기가 많이 빠진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어젠 제대로 못살펴봤는데 잘 보니 진짜 귀여우면서도 예쁜 얼굴이네, 액정 너머로나 보던 캐릭터가 내 눈앞에 있다니 새삼 라오 세상에 들어왔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최대한 빨리 오르카호 찾아야 하는데 자는 애 얼굴만 쳐다보다가 시간 낭비할 순 없는 노릇이니 나는 하베트롯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하베트롯, 일어나. 아침이야."


"으응...? 핫! 죄,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에서 깬 하베트롯은 상황을 파악하자 벌떡 일어나 눈꼽도 떼지않은 채로 소리 지르듯이 사과했다. 번번이 말하는 거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지.


"아니... 괜찮아. 몇 시에 일어날 지는 안정했으니 늦잠은 아니지. 그보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하니 준비해."


"네, 네... 금방 끝낼게요."


하베트롯이 떠날 채비를 하는 건 정말로 금방이었다. 챙길 짐이라곤 내가 매고있는 가방 하나 뿐이었기에 하베트롯이 해야할 준비는 머리를 동글게 묶어올린 뒤 외투를 걸치고 군화를 신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빈민가를 떠나 라디오 방송에 나왔던 합류지점을 향해 출발했다. 하베트롯의 말로는 거기까지 쉬지않고 걸으면 사나흘은 걸리는 거리라고 했지만 내 체력을 고려해보면 일주일은 걸릴지도 모르겠다. 젠장.


금 간 도로 위에는 버려진 차량들이 잔뜩 방치돼있었지만 하나같이 녹슬거나 타이어가 빠져있는 등, 대충 봐도 굴러갈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내내 쉬지않고 걸어야 한다니 생각만해도 벌써부터 지치는 느낌이었지만 괜히 투정부려봤자 주변 사람들만 피곤해질 뿐,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기에 군말없이 발을 움직였다. 꾸준히 걷다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하베트롯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보리는 내게서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내 근처를 맴돌며 주변을 경계했다. 얘는 그 와중에도 산책이라 마냥 즐거운건지 꼬리를 열심히 흔들면서 걷고있다. 보리 정도로 똑똑하니 목줄 채울 필요도 없이 알아서 잘 따라오는구나. 


가는 길에 야생 바이오로이드나 누군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건물 잔해 따위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철충이랑도 마주치진 않은 점은 행운이었다.


그나저나 철충들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 지금쯤 철충 사이에선 또다른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났을텐데, 아직도 내가 처음 들켰던 그 도시에 몰려들어서 수색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잘 따라오던 보리가 갑자기 멈춰섰다. 보리는 귀를 쫑긋 세운 채로 뒤돌아서서 우리가 왔던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보리야? 왜그래?"


하베트롯이 의아해하며 말을 건넸으나 보리는 대답하기는 커냥 우리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컹컹! 컹컹!"


"어어? 보리야?"


보리가 난데없이 다급하게 짓으며 우릴 두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 입구로 들어가더니 끝까지 내려가지는 않고 입구 근처에서 우릴 쳐다보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하베트롯은 보리의 돌발행동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으나 난 보리의 짖는 톤과 저번에 보여줬던 것과 같은 행동으로 뭔가 위기상황이라는 걸 직감했다.


"하베트롯! 어서 숨어!"


"네? 어엇...!?"



나는 하베트롯의 손을 붙잡고 냅다 보리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지하로 향하는 경사면에 들어선 뒤 벽에 몸을 바싹 붙여 몸을 숨기고 잠시 기다리자 스카우터, 와습 따위의 비행형 철충 무리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걸 힐끗 볼 수 있었다. 저번에 폐허 도시에서 도망다닐 때는 한 두 마리 뿐이었는데 이번엔 어림잡아 한 다스는 되어보인다.


우릴 지나치고 날아가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초 만에 바깥이 잠잠해지자 슬쩍 나와보니 하늘 한 곳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멀리 가버린 철충 떼가 떠있는 점을 제외하면 평소랑 다를 바 없는 삭막한 폐허 도시로 돌아와있었다.


"저기, 라붕님... 손 좀..."


"응? 아...!"


나는 그제서야 아직도 하베트롯의 손을 꽉 쥐고있었다는 걸 깨닫았다. 잡고있던 손을 놓아주자 하베트롯은 미묘한 표정으로 양 손바닥을 포갰다. 기분탓인지 왠지 얼굴도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느닷없는 스킨십이라 좀 기분나빴나?


"미, 미안해, 내가 좀 긴장했었나봐."


"아뇨, 괜찮아요... 사과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그, 그보다! 아까 그 철충들, 저희랑 가던 방향으로 날아가지 않았어요?"


"그건... 그러고보니..."


확실히 좀 전의 철충들의 행동은 이상했다. 뭐가 그리 급한건지 여러마리가 빠른 속도로, 그것도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날아갔다. 당장 짐작가는 원인은 나 밖에 없었다. 이 일대 어딘가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으니 본격적으로 수색하고 있는 것이겠지.


만약 그렇다고 친다면, 문제는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줄 알고 나랑 같은 방향으로 갔냐는 거다. 그냥 우연이던가, 내가 이동하면서 생긴 흔적을 추적했다던가, 아니면 설마...


"하베트롯? 혹시 철충이 도청도 할 줄 알던가?"


"네? 아, 그게... 그런 기록을 본 적이... 있는... 데요...?"


아까까지만 해도 불그스름하던 하베트롯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만약 철충이 정말로 그 라디오 방송의 내용을 들었다면, 그리고 내가 그 합류 지점으로 갈 것을 예상했다면, 분명 그리로 갈 것이다. 설령 가는 길에 날 찾지 못한다 해도 그 합류지점 근처에 매복해서 내가 모습을 보이는 순간 나한테 총알세례를 퍼붓겠지.


위험하다. 무작정 철충한테 들키지 않기를 빌며 출발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생각보다 낮은 것 같다. 나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판단해 생각해두지 않았던 안건을 머릿속에서 꺼냈다. 지금의 우리 파티는 너무나도 무력하다.


하베트롯은 오래 전에 호버링 전차도 무기도 다 내팽개친 채로 도망쳤었기 때문에 지금은 비무장 상태고, 평범한 민간인인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전투력 0 이다. 유일하게 싸울 수 있는 건 보리밖에 없으나 얘의 이빨과 발톱 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저번에는 철충 한 두 마리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보리가 잠깐이나마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나 방금 지나간 철충 부대처럼 한 다스로 몰려올 경우엔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무기가 필요해."


"네? 무, 무기요?"


니 말버릇은 네? 로구나. 하베트롯이 철충과 싸워야한다는 사실에 겁먹은건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자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싸워서 이길 정도까진 바라지 않아. 최소한 철충과 조우할 경우 저항이라도 하면서 도망칠 시간을 벌 정도의 힘은 필요해. 하베트롯, 어딘가 무기가 있을만한 곳 아는 데 없어? 블랙리버 군수품 창고라던가, 뭐 그런거?"


"그게... 잠시만요, 거긴 폭격맞고 터졌었고... 거긴 빼았겼고... 아, 짐작가는 데가 하나 있어요! 멸망 전에 블랙리버 임원들이 숨었던 벙커가 있어요!"


"옛날에 니네 부대가 지켰다던 거기?"


"아뇨, 거기 말고 다른 벙커에요. 거기도 보호 대상 중 하나였거든요. 그곳엔 블랙리버 과학자들이 머물렀다고 들었는데... 그, 분명, 아니, 아마도...? 그 사람들이 쓰던 무기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베트롯은 자기가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는건지 점점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블랙리버는 명색이 군사업체인데 뭐든 있겠지. 뭣보다 그 인간들의 뻔한 탐욕과 이기심을 생각해보면 자기들이 쓸 식량이든 무기든 꽁쳐뒀을 가능성이 있다. 일단 하베트롯 기 좀 살려줘야지, 계속 저렇게 주눅들어있으면 보는 내가 답답하니까. 


"좋은 생각이네. 블랙리버 사람들이 쓰던 곳이라면 분명 쓸만한 물건이 남아있을 거야.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오르카로 가기 전에 먼저 거기부터 들리자. 어디 있는지는 알고있어?"


"네? 아, 네! 물론입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틀정도 걸으면 도착할 겁니다."


이틀이라, 멀리 돌아가야 하긴 하겠지만 안전하게 갈 수 있다면야 상관없지.


우리 셋은 목적지를 바꿔 아까 철충들이 간 곳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부디 쓸만한 무언가를, 아니면 누군가를 찾을 수 있었으면.



이걸로 미리 써둔 비축분이 바닥났다. 다음화는 언제나올까

적어도 다음화 올릴 때 쯤엔 챈 불타지 않았으면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