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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라면 끓여주고 근무하면서 잡담도 나누던 아저씨가 사실 사단장일 경우 군 생활은 얼마나 꼬이는가? 정답은 ‘상상도 하기 싫다’. 다만 오늘 조금 더 자세한 정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눈 앞에는 문제의 예시에 관련된 산증인이 있으니까.




다만 그 증인은 끔찍한 공포에 잠겨있어 지금 당장은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 같다.




"진정하고 편하게 응? 편하게 해."




편하게 하라니. 내가 한 소리지만 한대 때려주고 싶을 지경이다. 사단장 앞에서 편하게 있는 것보다 네스트 10마리랑 싸우는 게 더 쉽겠지.




일단 내가 먼저 앉아야겠다. 그래야 애들도 앉히고 이야기를 하든 말든 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내가 무릎을 굽힌 순간 무언가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본능이 겁에 질려 소리쳤다. 방금전 검은 칼날이 부활했을 때와 똑같은 감각이었다.




‘설마, 또?’




내 예상대로 1m는 되는 검은 칼날이 내 다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마리가 파괴한 것을 목격했던 내 기억이 의심갈 정도로 칼날은 멀쩡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공포,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지의 것에서부터 오는 공포였다.




병사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와중에도 손에 쥔 개인 무장은 여전히 붙잡고 있는 그녀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다. 그 정도로 지금 이 공간을 뒤덮은 공포감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전원 발사! 저 이상한 가시 당장 쏴버려!!"




그 혼란 속에서도 이프리트는 용캐 적절한 판단을 내렸다. 그녀의 호령과 함께 수십 개의 탄환이 발사된 순간 칼날이 내 상처에서 튀어나왔다. 




“하늘이다! 계속 쏴!!”




그러나 병사들이 다시 칼날을 조준하기도 전에 칼날은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정확히 브라우니를 겨냥했다.




"젠장! 브라우니 숙여!"




위험한 낌새를 눈치챈 이프리트가 소리친 순간, 칼날이 스스로를 발사했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브라우니의 심장. 칼날이 날아가는 속도는 브라우니의 반응속도를 한참 뛰어넘어 있었다.




콰드득!




하지만 타이런트의 머리 속에 담긴 반격시스템보다는 느렸다. 거대한 강철 이빨로 입 안에서 두 동강 난 칼날을 씹고 또 씹었다. 그러나 내 입속에서 수없이 파괴되면서도 칼날은 멈추지 않았다. 파괴와 재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이대로는 못 끝낸다. 흔적도 없이 한방에 날려버려야 한다.




“다들 눈감아! 큰거 한 방 쏠거다!”




명령에 가까운 부탁과 함께 플라스마 포가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 강렬한 에너지의 방출과 함께 입 속의 칼날은 마침내 소멸했다.




“브라우니, 레프리콘 주변에 비슷한 게 더 있는지 확인해. 긴장 늦추지마라.”




다행히도 이프리트의 걱정과는 달리 검은 칼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몸을 휘감던 정체 모를 공포감도 느껴지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아니 공포감이 느껴지지 않는건 나뿐이겠지. 플라스마 포를 발사하는 바람에 마리가 통신을 연결해버렸으니까.




“병장, 플라스마 포의 발사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저…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사단장님께서 플라스마 포를 발사, 확실히 처치했습니다."


“부상자는 없나?”


“...사단장님께서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바꿔보도록”




마리의 목소리는 무척 딱딱하고 어두웠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이프리트는 문책이 뒤따를 것이라 예상했는지 암울,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괜찮은가?”


“네 대장님, 대원들의 정확한 상황대처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특히 이프리트 병장의 공이 컸습니다.”




내 대답에 브라우니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내 입으로 라면 끓인 걸 일러바치기라도 할 것 같았나? 그런 잔인한 일은 내 성미에는 안맞는다.




게다가 이프리트가 저리 죽을 상인데 뭐라고 하는 건 너무하잖아? 그런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여기 있는 생명체 중 인간은 없지만 아무튼간에.




“알겠다. 이프리트의 포상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해보겠다. 곧 수송기가 도착한다. 탑승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머리 속으로 말한게 아니라 통신기로 말했으니 내용은 애들도 다 들었을거다. 이걸로 내가 문책할 일은 없을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지. 물론 내 바램일 뿐이다. 내가 애들 마음을 읽을 수 있는것도 아니고.




잠깐, 이프리트를 너무 띄워준 것 같은데 하사로 진급당하는건 아니겠지? 나중에 마리랑 이야기 할때 물어봐야겠다.






***





달의 뒷면


지구에서 관측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 사이로 금속으로 이루어진 괴물이 착륙했다. 수많은 이명을 가진 괴물이었으나 지구의 존재들은 그녀를 네스트라고 불렀다. 




다만 지금 달의 표면 위를 부유하는 네스트는 백색 배경에 황금 줄무늬가 새겨져 있어 보통의 개체와는 크게 다른 생김새였다. 그 독특한 모습은 그녀가 보통 연결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달의 표면 위를 부유하던 네스트는 한 거대한 검은색 물체 앞에서 멈춰섰다. 달의 회색빛 표면과는 상반되는 거대한 검은색 덩어리, 그것의 정체는 온갖 철충들의 시체 더미였다. 시체 하나하나가 전부 용접된 것처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동족의 시체더미라는 끔찍한 광경 앞에서도 네스트는 혐오도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머리를 숙이며 예를 차릴 뿐이었다. 




몇 초간의 적막이 흐른 후 네스트는 시체더미를 향해 말을 걸었다.




“교황 성하, 익스큐셔너는 실패한겁니까?”




네스트의 물음에 응답하듯 철충들의 시체더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수십개의 시체가 분해되고 다시 조립되며 어떤 형상을 취하려는 듯 움직였다. 어느순간 시체더미에는 2m 정도 되는 인간의 얼굴 같은 형상이 만들어졌다.




그 형상에서 입에 해당되는 부위가 꿈틀거렸다. 그와 함께 그 끔찍한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멍청한 것. 내가 하사한 눈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다니.”




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교황이 만들어낸 얼굴이 찡그린 표정으로 변했다. 그와 함께 검붉은 기운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지면이 흔들리는 떨림 속에서 네스트는 더욱 머리를 숙이며 쥐어짜내듯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교황 성하, 우선 옥체를 보존하시지요. 외신들이 냄새를 맡았습니다.”




외신이라는 단어에 교황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와 함께 검붉은 기운도 더욱 맹렬해졌으나 이내 멈췄다.




“문을 열어라. 고향으로 돌아가자. 이계의 존재를 죽일 기회는 많이 남아있으니.”




교황이 몸을 움직였다. 그와 함께 교황의 몸을 구성하는 철충의 시체들이 삐걱거리고 흔들렸다. 그럼에도 떨어져 나오는 부품은 하나도 없는 것이 기묘하다면 기묘한 일이었다. 어느새 시체더미는 기다란 뱀의 형상으로 뒤바뀌었다.




“그나저나 익스큐셔너의 칼은 영 무디더구나. 내 권능을 담았는데도 그 하찮은 것을 죽이지 못했다. 개선하도록. “


“그리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존재는 모두 검붉은 색의 빛에 뒤덮여 사라졌다.






***






비록 철충의 공격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지만, 가상현실로 들어갔던 사령관은 무사히 돌아왔다. 마지막 순간 해킹 공격으로 인해 자신도 그곳에서 만난 친구도 영영 삭제될 뻔했지만 대비를 해둔 덕분에 두 사람 모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타이런트…"




사령관의 머리 속에 문득 그 AGS의 이름이 떠올랐다. 물론 해킹에 대비하라는 그의 조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어째서인지 그가 이 모든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일에 대비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지금까지 그는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위기의 순간 대군과 함께 돌아와 철충과 별의 아이를 해치웠고 요정 마을에서는 숲속에 적대적인 타이런트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오르카에 합류하겠다고 결정하고 자신을 명령권자로 설정해달라는 부탁을 순순히 들어줬던 일도 그런 생각에 힘을 실어줬다. 그때 당시에는 타이런트의 성격이 온순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일까지 겪고나니 그가 오르카에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자신에게 밝힌 정체도 거짓이었으니 사령관의 의심은 더욱 강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충분한 근거가 모인 의심은 결단을 만들어냈다.




‘리앤을 불러서 조사해봐야겠어’




더 이상 개인적인 호기심의 영역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가 첩자인지 혹은 감이 좋을 뿐인 대원인지 혹은 예상할 수 없는 제3의 존재인지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오르카 모두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의 의무였다.




'...'




하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그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에게 용서를 받았지만 그와 함꼐 앞으로 자신의 행적을 지켜보겠다는 경고도 받았다. 당연하지만 그의 뒤를 캐는것은 그와의 관계에 있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속에서 망설임이 점점 커졌다. 망설임이 그의 결심을 서서히 좀먹어갔다.  




그러나 망설임이 어느새 그의 결심을 지울 만큼 크기를 키운 순간, 그 감정이 모조리 사라졌다. 마치 무언가가 먹어 치운 것처럼.




“누구 있어?”




두려울 정도로 위화감이 드는 감각에 사령관은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머리 속의 감정을 먹어치운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순간이 움직여 감정을 흡수한 것만 같은…




“난 또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자신이 잊고 있는 기억이 있다느니 감정이 지워진 것 같다느니 하는 말도 안되는 공상을 할 때가 아니다.




“리앤 사령관실로 와줘”




타이런트를 조사해야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리앤이 손에 든 문서의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문서의 제목은 오르카의 타이런트 정보 총합본. 꽤 두꺼운 종이 뭉치였지만 리앤이 마지막 장을 넘기는 것은 십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왓슨, 이 기록 전부 진짜야? 철 지난 만우절 장난 같은거 아니지?"



"전부 부관들의 사실검증을 거친 자료들이야. 잘못된 내용은 없다고 봐도 좋아."





사령관이 건네준 자료의 내용은 리앤의 흥미를 유발했다. 그 흥미를 연료삼아 작동된 리앤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며 수많은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의 두뇌는 자료 속 내용을 타이런트의 정체에 관한 수십가지 가설로 변화시켰다. 




"리앤, 나는 타이런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싶어. 정말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건지, 아는게 맞다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그리고 왜 나를 돕는건지도."



"흠…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타이런트가 여기 적힌대로 친절한 성격이라면 문제 없을거야! 왓슨이 궁금해하는 것 전부 내가 알아내 줄게.”



"고마워. 하지만 이 조사는 너와 나 단 둘만 아는 비밀로 해줘.



"흐음… 우리 둘만의 비밀?"




장난스럽게 사령관의 볼을 찌른 리앤의 표정에 색기가 담겼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도발에 사령관이 놀라 움찔거리자 리앤은 만족했다는듯 물러났다.




"걱정하지마. 이런건 내 전문이니까. 초천재 미소녀 탐정님께 맡겨두라고!"




리앤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선 사령관실 밖으로 나왔다. 사령관실의 문을 열고 닫는 3초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 그녀는 조사해야 하는 사람, 방법, 대상의 말을 끌어내기 위한 정보를 모두 정리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하는 법. 그녀가 향한 곳은 격납고였다.






***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물론 문제될건 없다. 지금의 나는 할일 없는 백수, 하루 일과라고는 격납고 벽 쳐다보기 뿐인 몸이니까




너무 나태한가? 아니 그래도 나는 대규모 전투외에는 별 쓸모가 없잖아. 내가 나설 일이 없는게 오르카에는 좋은거지. 그래 나는 평화를 상징하는 백수다.




그런 잡스러운 생각 사이로 텅텅하며 격납고의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당연하지만 리앤이었다. 




"안녕 타이런트. 시티가드 소속 형사인 리앤이야!"


"안녕 제 1기갑사단… 방금건 무시해. 그냥 타이런트야."


"아하핫 뭐야? 그렇게 말하니까 더 신경쓰이는데?"




날 눈앞에 두고도 리앤은 해맑게 웃고있었다. 토모에서 파생되었다는 바이오로이드다운 어딘가 순진해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때문일까? 닥터와도 비견되는 지능의 소유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당사자에게는 실례되는 생각이겠지만 조금 바보같아 보인다.





"사령관이 말해줬어. 전자전에 대비하라고 조언해줬다며? 덕분에 살았어."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말했겠지. 별거 아니야."



"그래도 고마워. 진심으로."





감사인사가 끝나고나서는 평범한 잡담이 오갔다. 대부분 오르카의 생활에 관한 것이었는데 대화가 진행될수록 리앤의 눈이 호기심으로 채워졌다. 그 눈빛은 LRL이 나를 처음 봤을 때와 무척 닮아있었다. 하지만 같은 것은 눈빛 뿐, 리앤은 LRL과 달리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그 질문공세의 위력은 저번 전투에서 만난 브라우니 3총사와도 비견될 지경이었다. 그래 리앤 혼자서 브라우니 3명의 위력을 내고 있다. 정신 나갈 것 같아.




"오르카의 대원들 모두 개성이 넘치더라. 그 중에서 왓슨이 제일 특이한 것 같아. 타이런트는 왓슨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사령관은… 착하고 능력있고 뭐. . . 실수 좀 하는거 감안해도 괜찮은 리더같은데."



"아하핫! 왓슨이 실수를 많이 하기는 하지. 방금전에도 만나고 왔는데 목에 단추가 빠져있더라고 앗… 생각해보니 귀뜸도 안해주고 왔네."




대화하는 동안 리앤은 야생마같았다. 주제도 페이스도 꽉 잡고선 나를 질질 끌고다니는 거친 야생마. 물론 재밌기는 하지만 평소 안쓰던 대화 알고리즘을 팍팍 쓰는건 정신적 피로가 장난 아니다.




슬슬 연산회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것 같다는 느낌이 들때쯤 마침내 리앤이  말을 멈췄다.




"후아.. 계속 말했더니 목이 좀 마르네. 여기 마실거 있어?"



"오른쪽 벽에 작은 냉장고가 있을거야. 화이트 럼 빼고 아무거나 마셔."




AGS 한대만 있는 격납고에 냉장고가 있는 이유는 그렘린과 포츈처럼 내 몸을 수리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내 거대한 몸을 정비하는건 시간도 걸리고 힘들기도 무지 힘들어서 시원한 마실 것은 필수 요소에 가깝다. 내 몸이 무지 뜨겁기도 해서 수분공급 없이는 오래 못 버틴다.




냉장고 한가득 채워진 콜라캔 중 하나를 꺼내 목을 축인 리앤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슬슬 리앤이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이야기 주제가 남아있다고?




"후아 시원하다. 그런데 화이트 럼에 쪽지가 붙어있던데. 그건 뭐야?"


"아 그거… 메이가 전에 선물로 보내준건데. 뭐 보다시피 내 몸이 이렇게 생겨먹어서 쪽지도 못 읽고 술도 못 마시고 있지."


"아하핫, 그게 뭐야. 메이 대장님은 선물 센스가 좋지는 않나보네"


"쪽지는 뭐… 그렇다쳐도 술에는 의미가 담겨있는 거니까. 마냥 센스가 없지는 않지."


"흐음.. 타이런트 너 여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타입? 실용성보다 의미를 중요시 하는 선물에  쪽지까지 보낸다는 건… 뭔가 있다는건데?"


"절대 아니거든. 애초에 메이는 사령관이랑 사귀고 있고."




그 대답을 들은 리앤은 무척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딱봐도 잔뜩 놀려먹을 주제를 찾았다는 표정이다.




"타이런트… 혹시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이야기 알아?"



"아 진짜 아니라니까? 애초에 난 키 큰 여자가 취향이거든?"



"헤에… 타이런트 기준으로 키 큰 여자라면 얼마나 커야하는 걸까?"




마구 물고 늘어지는 리앤을 상대로 대화 주제를 바꾸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소동이 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고 어느새 밤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초롱초롱했던 눈동자도 어느새 수마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슬슬 자러가야하는거 아니야?"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버렸네. 읏차… 그럼 난 이만 돌아가볼게. 오늘 재밌었어."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간단한 작별인사까지 끝나자 격납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눈만 감을 수 있다면 잠자기 좋은 공간이었을텐데. 물론 나는 감을 수 있는 눈이 없기에 하염없이 격납고의 벽만 바라볼 뿐이다. 






***






격납고에서 나온 리앤에게서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차가워 보일정도로 진지한 표정으로 변한 그녀는 머리 속에서 타이런트와의 대화를 곰씹어보고 있었다. 




'오르카의 대원들은 참 개성이 넘치더라 그 중에서 왓슨이 제일 특이한 것 같아. 타이런트는 왓슨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사령관은… 실수는 하지만 착하고 능력있고 뭐 따를만한 리더야.'




'내가 사령관을 왓슨이라고 부르는걸 알고 있었어. 도청? 아니 그건 아니야. 사령관실에 있던 도청기는 전부 처리해뒀으니까. 그럼 도대체 뭐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이야기 알아?"



"아 진짜 아니라니까? 난 키 큰 여자가 취향이야"





'평범한 AGS는 아니야. 그랬으면 인간의 모습을 한 여성을 향해 이성애를 느낄리가 없지. 게다가 키가 크다는 취향을 언급할 정도로 구체적인 성격을 가지는건 덴세츠의 AGS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해.'




리앤은 대화를 통해서 얻은 사실과 사령관이 알려준 정보를 조합하고 검증해나갔다. 고작 몇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녀의 두뇌가 한가지 해답을 내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인간의 형상에 이성적 호감을 느끼는건 인간과 바이오로이드 뿐이야. 타이런트를 연구할 정도의 기술을 가진 단체라면 두뇌를 디지털화하거나 뇌를 기계에 이식하는 기술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리앤은 미약한 공포심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가설일 뿐이지만 그가 만일 인간이라면? 인간이 가지는 명령권의 위험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지금처럼 바이오로이드 위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비록 타이런트에게서 뇌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뇌파를 숨길 수단은 차고 넘친다. 당장 자신이 아는 것만해도 10가지는 넘는다.




리앤은 곧장 사령관실로 달려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상황이 너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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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20화


20화 기념으로 알려드립니다. 구성해둔 스토리가 절반 정도가 남았습니다. 4~50화로 완결낼 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