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랜드. 사령관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오르카의 수많은 인원이 노력해서 개장한 다용도 시설.

개장 이후로 아쿠아랜드는 항상 사람으로 붐볐다. 이는 여러 사람들의 심혈이 녹아든 어트랙션의 훌륭함 덕분이기도 했지만 다들 곧이어 감돌 전운을 피부로 느끼며 지금이야말로 마지막 휴식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한 결과이기도 했다. 


때는 한여름, 거기에 수많은 이용객이 붐비는 놀이공원과도 같은 풍경에 므네모시네와 퀸 오브 메인이 열었던 빙수가게는 그야말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덕분에 수익이 짭짤하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누구도 빠지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령관의 의지는 휴일도 없이 일하는 그녀들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사령관이 지정한 방침에 따라 그녀들의 빙수가게도 정기 휴일을 가지기로 했고, 바로 오늘 빙수가게의 첫 번째 정기 휴일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비운 메인과는 달리 므네모시네는 방 안에서 기르는 화분을 돌보는 등의 오전 일과를 마치고는 혼자서 고요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평소라면 점심식사를 마친 시점에서 유일한 취미인 들꽃의 검색을 위해서 정보 구역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그녀가 떠올려낸 기억과 기억을 토대로 세워진 새로운 결심은 그녀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령관과 단 둘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행복하다. 들꽃을 검색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배우고 기존에 알던 내용을 더욱 심화해서 익히는 일 또한 행복하다. 다른 와쳐 오브 네이쳐의 동료들과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서 협업하는 것 또한 행복하다. 방주에 사령관과 오르카의 인원들이 합류한 이후로, 혼자 있을 때는 들꽃과 관련된 것 뿐이던 므네모시네의 행복은 이전에 비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알고 있는 것만이 행복의 전부일 것인가? 그녀의 아버지. 비록 본인이 그 호칭을 기껍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허락은 받지 못했지만, 적어도 므네모시네의 안에서는 아버지라는 관계로 정의된 인간이 남겨준 유산은 므네모시네의 생각에 부드럽게 반박했다. 추천받은 영화, 소설을 보면서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끼게 된 므네모시네. 이것이 과거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점점 더 풍부해져감에 따라 변화된 경향이라면, 그것은 므네모시네가 새롭게 경험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과거와는 다른 감상을 느끼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관리자님께서도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보 구역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향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다음으로는 타 개체와의 대화를 나누기 위한 목적이 필요합니다. 본 개체는 현재 특별한 요구사항을 가지지 않아 타 개체에게 무언가를 요청할 이유가 없는 상태. 타 개체와 대화할 목적을 찾기 위해 이동합니다.'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행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므네모시네. 그녀의 감정이 무감정의 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리고 오랜 기간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왔던 그녀는 상당히 귀여운 사고전개를 통해 '타인과 이야기하기 위한 목적'을 찾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칭찬해주었던 나들이옷을 입고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들을 챙긴다. 타인과 이야기할 목적을 제외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므네모시네는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타인과 이야기할 구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애초부터 그런 고민조차도 할 필요가 없는 법. 잠시 방주 내부를 걸어다니던 므네모시네는 여러 바이오로이드를 봤음에도 대화 한 마디 걸어보지 못하고 묵묵히 이동하던 끝에 방주 내부에서 들꽃이 자라던 공간에 생각이 미쳤다.


'들꽃에 관한 이야기라면 문제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공간에서 자리를 펴고 들꽃을 보면서 대기한다면 지나가던 다른 개체와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인이 타인과 이야기할 목적을 찾지 못한다면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오게 만들면 된다는 역발상에서 시작된 생각의 흐름. 비록 들꽃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어진 므네모시네의 사욕이 상당부분 스며든 결론이었지만 지금 그것을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생각을 마친 므네모시네의 발걸음에 생기가 돌며 햇빛을 받아 실버 블론드의 아름다운 색채를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포시 떠올랐다가 바람을 타고 나풀거렸다. 이전까지와는 달리 자신의 걸음걸이가 조금 더 빨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므네모시네는 아무도 없던 시절에 자신이 가끔씩 들르곤 하던 공간으로 향했다.




지금은 마사지실로 만들어진 건물. 그 건물의 뒷편에 자라던 개망초 군집은 므네모시네가 가장 좋아하는 들꽃 중 하나였다. 화단을 만든 것도 아닌데 어느 새 자라기 시작한 개망초들은 아주 가끔씩 물을 주는 정도의 보살핌만으로도 훌륭히 꽃을 피우며 므네모시네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줬다. 건물의 외진 뒷문 근처에 있는 공간은 통행로와는 많이 떨어진 곳이고 들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때문에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사람이 없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던 므네모시네의 예상과는 달리 목적지에서 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근처에 울타리를 쳐서 안뜰 같은 느낌으로 만드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으니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도 만들구요. 아~ 자매들끼리 마음대로 정원을 만든다니~ 농장일은 해봤어도 정원일은 처음인데 엄청 기대돼요~"

"위치가 구석이라서 울타리를 둘러도 사람들이 다니는데 지장은 없을 것 같네. 정말 좋은 아이디어야. 드리아드."

"아. 에헤헤...다프네 언니~ 머리 쓰다듬는 솜씨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좀 더 팍팍 쓰다듬어주세요~ 헤헤~"

"후훗. 하여튼 어리광쟁이라니까. 질릴 때까지 잔뜩 쓰다듬어 줄테니 걱정 마렴~"


목소리를 따라 건물의 모퉁이 너머로 시선을 향하자 메이드복을 입은 두 여성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다프네와 드리아드. 페어리의 두 자매는 므네모시네가 즐겨보던 들꽃을 앞에 두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딱히 모습을 감춰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녀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했던 므네모시네는 조용히 자리를 지킨 채 두 자매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러면 공간은 대충 여기에서부터 저기까지라고 보면 될 것 같고...꽃들은 어떤 걸 키울거에요?"

"음...아무래도 몸이 약해진 분들이 부담없이 보시려면 향기나 꽃가루 같은 걸 신경써야 하니까 종류가 한정되지만...모두 함께 모여서 정하는게 좋지 않을까?"

"후후후. 레아 언니는 꽃은 잘 모르신다며 양보하실 것 같지만...그러네요. 다 같이 정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보다 이 개망초들은...어떻게 하죠...? 누가 기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뽑는게 좋겠죠?"

"굉장히 예쁘게 자랐는데...뽑기는 좀 아쉽지 않니? 화원과 어울릴 수 있으면 가급적 유지하는 편이..."


다프네와 드리아드는 향후에 의료시설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마사지실의 개조가 궤도에 오르자 마사지실 옆에 환자들의 멘탈케어를 위한 작은 정원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서가 수락되어 사령관과 아르망이 추천해준 공간을 확인하러 온 참이었다. 사람이 자주 찾지 않아 통행에 지장이 없으면서도 식물을 기르기에 나쁘지 않은 입지. 비록 작은 공터에 불과하지만 처음으로 정원다운 정원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그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몰래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기쁜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개망초를 제초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힉?!"

"꺅?!"


페어리 자매의 말로부터 그녀들의 목적을 유추해나가던 므네모시네의 귀에 함부로 넘길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개망초의 제초' 아직은 확정된 것도 아닌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 말이었을 뿐이지만 므네모시네는 그 가능성조차 0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었다. 반면 대화를 나누고 있던 페어리 자매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냉기마저 휘감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므...므네모시네 씨?! 아...안녕하세요..."

"아...안녕하세요. 므네모시네 양. 혹시...이 개망초들...므네모시네 양이 기르시던 건가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버버하는 드리아드와 혹시나 므네모시네가 개망초를 기르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어오는 다프네. 므네모시네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날이 가물었을 때 이 곳의 개망초에 가끔 물을 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방에서 기르는 화분을 기준으로 할 경우 기른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망초를 제초하는 것 보다는 그대로 두면서 정원을 만드는 것을 개인적으로 제안합니다."

"아...아하하...그...그게 좋겠네요. 아하하...저도 개망초가 있는 편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요...아하하하...그...개망초를 뽑는게 어떠냐고 말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므네모시네 양.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장소라고 생각하고 저희들 마음대로 이곳을 정원으로 꾸미려고 했어요. 므네모시네 양이 원하지 않으신다면 정원을 만드는 계획은 취소하도록 할게요. 말씀도 드리지 않고 마음대로 정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므네모시네의 말을 듣고는 개망초가 꽃을 피울 때까지 그녀가 돌봐주었다는 것을 깨달은 페어리 자매들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설령 몰랐다고는 해도, 그리고 꽃이 하필이면 자유롭게 자란 느낌의 야생화인 터라 보고도 눈치를 챌 수 없었다고는 해도, 타인이 기르던 식물이 있는 공간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정원으로 바꾸겠다는 이야기를 해버렸다. 이쪽 업계의 프로인 페어리 자매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는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실책이었다. 


물론...그 사과를 받는 입장인 므네모시네는 업계인이 아닌 터라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게다가 그녀 자신이 사령관에게 넘긴 방주의 공간배치도에도 들꽃의 존재유무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설령 사령관이 므네모시네를 신경써주고 싶어도 정보가 없는 터라 신경써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므네모시네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아무도 탓할 생각이 없었다.


"이 장소에 정원을 만드는 것은 관리자님의 허가를 받아서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기존에 자라던 개망초를 제초하지 않는 것을 제안할 뿐입니다."

"어...저...므네모시네 씨...? 화나지는 않으셨나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적합한 절차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과정상 문제는 없고, 결과에 대해 제가 화를 낼 이유는 없습니다. 개망초가 사라진다면 아쉽다고 생각하겠지만 저의 제안을 들어주신다면 제게는 아무런 불만도 없습니다."

"므네모시네 양이 원래 관리하시던 곳을 상의도 없이 고치려고 한 점이 죄송해서 그래요. 원래 방주는 므네모시네 양의 담당구역이었으니 저희가 먼저 찾아뵙고 여쭤봤어야 했는데 경솔했어요. 당연히 개망초는 그대로 둘 생각이지만...그래도 저희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어떻게든 므네모시네에 조금이라도 더 사과하고 싶어하는 다프네와 개망초만 남겨주면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므네모시네간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잠시 이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실소가 나오는 장면을 옆에서 조용히 이를 지켜보던 드리아드는 이대로 두면 끝이 없겠다는 생각에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므네모시네 씨. 여기 있는 개망초를 돌보셨다면 꽃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그러면 혹시...따로 기르는 꽃이 있으신가요?"

"몇몇 종류의 꽃을 좋아해서 화분에 키우고 있습니다. 지금 방에는 금낭화와 꽃기린을 키우고 있는 중이고 이번 달 말쯤에 돌단풍의 씨앗을 심을 화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머, 야생화를 좋아하시나봐요. 말씀하신 꽃들도 정말 예쁜데...실례가 안 된다면 나중에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꽃의 관람을 위해 제 방에 방문을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 외에도 전부터 길렀던 화분들의 사진도 보관하고 있어 관람을 추천합니다."


단순한 화제 전환을 위해 던진 드리아드의 말 한 마디에 상황은 급변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를 고수하던 므네모시네의 눈빛에 생기가 돌며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수많은 들꽃들의 이름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므네모시네의 이야기를 평소의 차분한 어조에서 살짝 톤이 올라 마찬가지로 흥미가 솟구치는 것을 숨기지 못하는 다프네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받아갔다.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르카 최고의 들꽃 매니아인 므네모시네, 본업이 정원사이고 모든 동식물을 사랑하지만 오르카의 사정상 식물은 못 돌보고 환자만 돌보던 다프네. 두 사람은 마치 지기를 만난 듯이 공터에 관한 일은 잊어버리고 들꽃의 아름다움과 생육 방법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지난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을 종류별로 길러서 순서대로 꽃이 피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정말이지 멋진 광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 당시에 찍었던 사진입니다."

"와아...진달래, 산철쭉, 철쭉 순으로 꽃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는 모습이군요. 배치도 정말 멋져요. 이런 식으로 시간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는 정원 구성도 좋은데...멸망 전 자료 중에 이런 것도..."

"아하하...두 분 다...즐거우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아하하...;;;"


드리아드 역시 예쁜 것을 좋아하기에 두 사람이 서로 보여주는 사진 등은 순수하게 예쁘다고 감탄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드리아드의 전문영역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수확하는 작물이다. 들꽃에 대한 것도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본 가락이 있어서 다른 바이오로이드 자매들에 비하면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아무래도 전문가들의 대화에 끼어들기는 힘들다고 할까. 처음에는 사과와 사과를 거부하는 무한루프를 끊어냈다는 기쁨에 가벼워진 마음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에 참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 발 물러서서 두 사람의 화제가 일단락되기를 기다렸다.


그에 반해 므네모시네는 처음으로 자신의 취미에 전력으로 어울려 줄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기쁨을 흠뻑 느끼고 있었다. 들꽃을 좋아해서 수많은 정보들을 찾고 스스로 길러보기도 했지만 적어도 식물을 기르고 가꾸는 입장에서의 그녀는 아마추어. 들꽃류의 강인한 생명력 덕분에 대부분은 무리없이 길러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생육을 책임지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프네와의 대화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정보의 보고였다. 자신이 이야기하는 들꽃의 대부분을 이해하고 대답을 돌려주는 한 편, 흙, 습도, 온도, 햇빛 조절 등 각각의 식물에게 적합한 환경에도 해박한 다프네의 식견은 정보 구역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생생한 것이었다.


다프네 역시 므네모시네와의 대화에 푹 빠져서 즐기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식물과 동물을 돌보기에 적합하도록 무언가를 보살피는데 극도의 만족감을 얻도록 만들어진 그녀. 반대로 말하자면 오르카에서 바이오로이드를 돌보는 일만 맡던 그녀는 식물을 돌보는 기쁨에 목말라있었다. 그나마 식물 이야기를 하더라도 업무의 특성상 다른 페어리 자매들은 각각 전문분야가 달라서 므네모시네와 지금 나누는 대화만큼 서로의 관심분야가 겹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기도 했다. 게다가 므네모시네의 들꽃에 대한 사랑은 보통을 한참 전에 초월한 수준. 므네모시네의 지식은 들꽃에 한해서만은 다프네조차도 알지 못하던 꽃들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멸망 전에도 수많은 컨셉의 정원이 있었고, 컨셉에 맞춰서 정리된 꽃의 종류는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 내용들을 모듈을 통해서 배운 다프네는 오르카 전체를 통틀어도 꽃에 대한 지식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 하지만 그런 그녀의 지식조차도 완벽하게 끌어안지 못할 정도의 므네모시네의 열정은 서로의 가슴과 가슴을 통해서 다프네에게도 전해져왔다. 페어리 자매가 아니면서도 꽃을 정말 사랑하는 동료이자, 때로는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지식을 입에 올리는 뛰어난 식견을 가진 사람. 그렇게 므네모시네와의 대화에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을 느끼며 다프네도 들꽃의 매력에 흠뻑 빠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후훗...다프네 언니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보네. 정말 즐거운가봐.'

'그리고...므네모시네 씨도 조금 차가운 이미지였는데 그런 성격도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대화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두 여인과 달리 옆에서 관람하는 기분으로 눈에 띄지 않도록 여기저기를 살피던 드리아드. 평소에는 의젓하고 듬직한 모습만 보여주던 언니가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에 집중하는 모습과 처음에는 감정이 거의 비치지 않던 미녀가 때로는 학구열을 느끼는 학생같은 느낌으로, 때로는 동생들을 자랑하는 레아의 표정과도 닮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름대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아예 장소를 옮겨서 편하게 이야기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저...언니? 므네모시네 씨? 기왕이면 서서 이야기하시는 것 보다는 카페 호라이즌이라도 가서..."

"아, 잊고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가지고 다니는 돗자리가 있으니 여기에 앉아서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므네모시네는 돗자리를 꺼내서 땅에 펼쳤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새겨진 돗자리가 삭막한 느낌의 땅 위에 깔리자 색다른 정취가 느껴졌다. 녹음이 우거진 풀밭이었다면 더욱 정취가 살았겠지만 흙빛의 맨땅을 뒤덮은 돗자리에도 충분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이 중에도 있었다.


"어머나, 너무 예뻐요. 올라가기 아쉬울 정도로 예쁜데...저희들도 함께 앉아도 괜찮은가요?"

"네. 공간은 넉넉하니 두 분 모두 편안히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들이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므네모시네의 피크닉용 돗자리. 지난번 사령관과의 나들이 이후로 사이즈를 조금 더 키워서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도 문제가 없을 만한 돗자리가 바닥을 뒤덮자 한 사람씩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개망초를 구경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일렬로 앉은 세 사람. 이야기를 하기에 좀 더 편안한 자리가 마련되자 다프네는 그제서야 자신이 잠시 동안 드리아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므네모시네와의 대화에만 집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드리아드에게 사과의 눈짓을 보내는 다프네와 그것을 깨닫고 생긋 웃어주는 드리아드. 짧은 시간의 눈짓으로 자매간의 뜻이 전달되자 다프네가 드리아드에게 다른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있던 것을 떠올린 드리아드가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저희가 마시려고 가져온 건데 함께 드시는 건 어때요?"

"감사합니다. 이건...차의 일종입니까?"

"드리아드가 만든 미숫가루에요. 섞는 곡물의 배합 비율도 드리아드가 직접 정해서 만든 수제품이랍니다. 저희 자매들은 무척 좋아하는데 므네모시네 양의 입맛에도 맞으면 좋겠네요."

"헤헤헤. 언니도 같이 도와주셨잖아요. 지금 시점에서는 최고 자신작이니까 맛은 보장해요. 아, 근데...아침에 차갑게 식혀뒀는데 날이 더워서 미지근한 건 좀 아쉽네요. 차갑게 먹어야 제맛인데..."


컵에 담긴 갈색의 액체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 므네모시네에게 돌아오는 답변. 드리아드는 자신작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누가 먹어도 맛있다고 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담긴 표정을 짓다가 미숫가루가 차갑지 않아서 최고의 맛은 나오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꿨다. 그런 드리아드를 바라보며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떠오른 므네모시네는 가볍게 의식을 집중했다.


사아아아


"음료의 온도를 섭씨 2도로 낮추었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습니까?"

"아! 그러고보니 므네모시네 씨, 냉기를 다루셨죠? 아하하...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식혀주셔서 고마워요. 지금 이대로 드시면 정말 맛있을테니 꼭 드셔보세요."


드리아드의 말에 미숫가루가 든 컵을 입에 대고는 한모금을 마시는 므네모시네. 두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는 그녀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드리아드는 어떤 감상이 돌아올지에 대해 엄청나게 기대하는 귀여운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감겨진 므네모시네의 눈이 열리고 드리아드가 고대하던 감상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음...달고 고소한 맛입니다. 차갑게 먹는 편이 맛있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맛있는 음료를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훗.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저희들도 앉을 공간을 나누어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리고 드리아드, 다시 마셔봐도 정말 맛있다. 내일 주인님께서 시찰하실 때 우리 쪽에도 오실테니까, 그 때 이걸 드리면 주인님께서도 정말 좋아하실거야."

"에헤헤헤...두 분 다 맛있게 드셔주셔서 저도 기뻐요~ 내일 주인님도 기쁘게 드셔주시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므네모시네를 필두로 전해진 미숫가루의 감상을 듣고는 내일의 일을 상상하며 기뻐하는 드리아드. 그렇게 잠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는 세 여성은 므네모시네의 능력으로 차갑게 식힌 미숫가루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며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따가울 정도로 쨍쨍한 햇빛이 내려쬐고 있었지만 므네모시네가 냉기의 범위를 넓히자 때마침 불어온 바람과 맞물려 가을과도 같은 선선한 바람이 세 사람을 둘러싼 공기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실버 블론드의 생머리와 서로 다른 형태로 묶인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이며 미녀들의 포근한 목소리가 주위를 감싼다. 드리아드가 대화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절묘하게 화제를 컨트롤하기 시작한 다프네의 지원이 겹쳐지며 세 사람은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봄날에 소풍을 즐기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미숫가루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곡물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작물의 꽃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논밭에서 보기 쉬운 야생화에 대한 이야기, 눈 앞에 펼쳐진 개망초의 아름다움과 거기에서 나아가 수많은 꽃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보면서 좋아하는 꽃에 대한 의견 교환 등. 대화법에는 초보인 므네모시네는 다프네가 절묘하게 화제를 이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즐겁게 대화에 참여했고, 다프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드리아드는 중간부터 언니에게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눈인사를 보내면서 이야기를 즐겼다.


화기애애한 시간이 흐르고 다프네라는 지휘자가 연주하는 세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교향곡이 서서히 끝 무렵을 향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들뜬 느낌만 천천히 밑으로 당겨서 모두를 착륙시킨 뒤, 다프네는 마지막으로 므네모시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므네모시네 양. 마침 므네모시네 양도 꽃에 흥미가 많으신 것 같은데, 저희들이 만들 정원 설계에 참여하시는 건 어때요? 개망초와 함께 있을 때 어울리는 야생화에 대한 것도 잘 아실 것 같고..."

"...! 페어리 부대원들의 불만이 없으시다면 저도 참여를 원합니다."

"후훗. 저희 언니들도 므네모시네 씨처럼 꽃을 잘 아시는 분이 참여하신다면 다들 환영하실 거에요."


그렇게 개망초 건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던 다프네와 드리아드에게도, 개망초의 유지를 원하던 므네모시네에게도 최상의 결말로 모든 것이 끝나려는 찰나, 드리아드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어? 근데 므네모시네 씨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신 거에요? 평소에도 개망초를 보러 여기에 자주 오시는 건가요?"

"여기에 온 목적 말입니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지도 모릅니다만, 두 분 모두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하십니까?"

"네? 네, 저희 둘 다 오늘 휴일이거든요. 얼마든지 긴 이야기라도 좋아요. 드리아드도 괜찮지?"

"네~ 저도 이야기 듣는 건 좋아하니까 얼마든지 괜찮아요~"


페어리 자매와의 즐거운 대화 떄문에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목적. 지금까지의 대화만으로도 오늘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기존의 므네모시네의 화법이었다면 '개망초를 보기 위해서'라는 정도로 표현하고 마무리 했었겠지만, 지금껏 대화를 하면서 두 사람에게 친근감을 느낀 므네모시네는 왠지 '아버지'의 이야기를 포함한 긴 이야기를 그녀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졌다. 유일하게 걱정하던 시간적인 문제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므네모시네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겠지만...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은...10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담담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므네모시네는 자신의 과거를 시작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의지, 유산에 대한 이야기, 현재에 이르러 감정이 싹트게 된 이야기, 자신에게 새롭게 다가오게 된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동시에 자신의 의지로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 그 수단으로서 자신이 시도하고 있는 것들을 천천히 읊조리듯 설명해갔다. 긴 과거 이야기가 끝나고 오늘 아침에 휴일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것과 타인과 이야기할 목적을 찾기 위해 애쓰던 도중 개망초를 매개로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두 사람을 바라본 므네모시네의 눈 앞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에게 안기는 드리아드의 모습이었다.


"흑...므네모시네 씨...너무 감동적이에요...므네모시네 씨를 만들어주신 인간님께서 므네모시네 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절절히 와닿는 멋진 이야기에요...흑흑...므네모시네 씨, 꼭 행복해지셔야 해요. 알겠죠? 흑..."

"어머...나도 참...눈물이...안 멈춰서...음...잠시만요...므네모시네 양. 잠시만 진정하고 나서...므네모시네 양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알겠습니다. 두 분 모두 잠시 진정하실 때까지 안정할 것을 권장합니다."


먼저 조용히 눈가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던 다프네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정을 찾고, 이야기에 잔뜩 몰입해서 눈물을 주륵주륵 쏟아내던 드리아드가 아직도 진정하지 못한 것을 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므네모시네의 품을 떠나 다프네의 품에 안겨서 안정을 찾아가는 드리아드.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어느 정도 진정하고 난 후에 다프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므네모시네 양은 다른 분들과 좀 더 자주 교류하고 싶으신 건데 어려움을 느끼신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맞습니다. 오늘은 꽃의 이야기였기에 저도 즐겁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이나 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다른 개체...다른 분들과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음...대화하는 게 싫으시다거나 귀찮으신 건 아닌거죠? 예를 들면...자신이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느낌일까요?"

"다프네 씨의 말이 제 현재 상태를 90%이상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개체와의 대화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상대방이 본 개체와의 대화를 싫어하지 않게 될지 판단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후훗...그런 거라면 다행이네요."


므네모시네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서 그녀의 고민을 정확히 파악해낸 다프네. 아까 전부터 꽤 긴 시간 므네모시네와 이야기를 해왔기에 그녀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났다. 상냥하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컴퓨터처럼 딱딱한 느낌. 그녀와 자주 접촉하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쉽게 이해하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딱딱한 반응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애매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므네모시네의 딱딱함이 사라지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므네모시네가 지금보다 감성이 풍부해지고 타인을 대하는 방법에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타인과 잘 지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타인과 친해지는 경험을 누적할 필요가 있다는 모순. 일견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난제이지만 다프네는 이미 답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과거에 이오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얻었던 해답과 그녀를 돕기 위해서 노력했던 방법은 므네모시네에게도 유효할 것이 틀림없었다.


"시간이 꽤 필요하겠지만...므네모시네 양이 다른 분들과 좀 더 쉽게 대화할 수 있도록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므네모시네 양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를 돕는다고 해서 다프네 씨에게 이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은 다프네 씨의 부담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려고 하는 것인지...알 수 없습니다."


므네모시네의 질문은 다프네의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미 다프네는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해봤고 수많은 답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을 돕고 타인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 자신도 즐거우니까, 므네모시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꼭 돕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므네모시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해서, 기타 등등...하지만 굳이 그것을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므네모시네를 가장 잘 설득할 수 있고, 므네모시네에게도, 다프네에게도 부정할 수 없는 간단한 이유가 있었다.


"후훗, 므네모시네 양이 생각하시는 것 만큼 저에게 부담이 되는 일은 아니랍니다. 그리고...므네모시네 양을 도우려는 이유는...음...새로운 친구를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친구.....입니까...?"


므네모시네도 타인을 배려하고 선의를 베푸는 것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감성을 배제하고 지극히 이성적으로 판단하더라도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호의를 사는 것은 향후의 관계유지에 있어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생각해봐도 므네모시네의 기준에서 다프네의 선의는 지나쳤다. 므네모시네의 고민을 해결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거기에 들어가는 노력이 어느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단순히 몇 시간 대화를 나눈 상대를 위해서 선뜻 손을 내미는 것은 감성을 배제한 판단으로는 합리성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다프네가 꺼낸 '친구'라는 단어가 므네모시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멸망전부터 존재하던 개념. 전혀 연관이 없던 개체간의 교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관계. 때로는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상대방을 위해서 크나큰 희생을 자처하는 관계. 몇 달 전의 므네모시네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지금은 미약한 동경마저도 느끼게 되는 관계. 그리고...지금까지의 므네모시네의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관계. 연인, 동료에 부합하는 관계는 경험해보았지만 아직 친구라는 관계는 그녀의 삶에 있어서 미지의 영역이었다.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그를 경험하는 것은 '아버지'가 말했던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충분히 합리적이다. 게다가...다프네와 꽃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척 즐거웠다. 설령 건설적인 목적이 없더라도 단지 즐겁다는 이유로 같은 주제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앞으로도 꾸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 역시 친구라는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다프네 씨가 부담스럽지 않으시다면. 도움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제부터 저와 다프네 씨의 관계는 친구로 정의하면 되는 겁니까?"

"네. 므네모시네 양. 제 친구가 되어주셔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지내봐요. 꽃 이야기가 아니라도 무언가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찾아주세요."

"와아~ 언니, 므네모시네 씨, 아니, 다프네 언니의 친구시니까 저는 므네모시네 언니라고 부를게요~ 두 분 다 친구가 되신 것 축하드려요~ 므네모시네 언니, 앞으로 저는 동생 대하듯이 대해주시면 된답니다~"

"동생...입니까. 오늘은 새로운 관계를 많이 만드는 날인 것 같습니다. 기분이 꽤 복잡한 느낌이지만...기쁨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후훗. 므네모시네 언니, 지금 살짝 웃으셨죠? 이제 조금쯤 언니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에요."


다프네와 므네모시네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드리아드가 가볍게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렇게 다들 웃으며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고는 각자 헤어지는 그녀들. 헤어지기 전에 다프네는 므네모시네에게 마침 정기 휴일이 겹치니까 1주일에 한 번 쉴 때마다 다과회를 가지자고 제안했고, 므네모시네도 이를 승낙했다. 그렇게 므네모시네를 위한 계획의 첫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다프네는 돌아오는 길에 조용히 생각에 빠진 것 같아 보였다.


'음...우선은 어떤 화제라도 능숙하게 들어주시면서 대화를 이끄는 분들이 좋으니까...님프 양과 콘스탄챠 양...그리고...블랙하운드 양이나 하르페이아 양도 후보에 들어갈 수 있고...그 외에는...이그니스 양도 있고...오렌지에이드 양은...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하는게 좋을 것 같고...'

"후훗. 언니. 새로 생긴 친구를 위해서 열심이시네요? 보기 좋아요~"

"어머. 드리아드. 미안해. 잠깐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오랜만에 자매끼리 나들이를 나온 셈인데 많이 못 챙겨준 것 같아서 미안해..."


므네모시네 생각에 옆에 있는 드리아드를 잊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과하는 다프네. 오늘은 오랜만에 어리광부리기를 좋아하는 드리아드를 잔뜩 만족시켜줄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므네모시네와의 만남에 드리아드를 별로 챙겨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 대신 숙소에 돌아가면 드리아드를 잔뜩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다프네였지만 막상 그 대상인 드리아드는 불만은 커녕 오히려 다프네의 모습을 보고 즐겁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잔뜩 띄워올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까지 어리광쟁이는 아니라구요? 게다가 언니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응? 내 새로운 모습이라니? 나 뭔가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니?"

"네~ 엄청요. 사진이라도 찍어놨어야 했는데~ 저 혼자만 봐서 아깝게 됐네요~ 레아 언니한테 보여드리면 좋아하셨을 것 같은데~"

"나...뭔가 이상한 표정이라도 지은 거 아니지? 그렇지...?"

"글쎄요~? 후후후훗~"

"드리아드? 도망치지 말고 언니한테 말해줘~! 대체 뭘 봤길래 그렇게 웃는 거니?"


발걸음의 속도를 올려서 귀여운 웃음소리를 남기고 나아가는 드리아드와 궁금증을 담은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는 다프네. 결국 숙소에 도착한 후에는 다프네가 드리아드에게 가볍게 마사지를 시작하면서 드리아드의 방어를 무너뜨리며 그녀의 어리광을 본격적으로 받아줬고, 드리아드 역시 남은 휴일을 더없이 만족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 편, 마실을 마치고 돌아온 므네모시네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하루 일과를 정리했다. 내일도 빙수가게를 열어야 하니 기상시간을 생각하면 빨리 잠드는 편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버지'의 유산을 본 뒤로 하루 일과의 마지막이 된 행사를 시작하기 위해 일기장을 펼쳤다. 기억의 방주를 총괄하는 므네모시네에게 대부분의 기록은 자신이 겪지 못한, 단순히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것들. 그렇기에 감정이 살아나고 새로운 일들을 겪으며 생겨난 스스로의 경험을 정리하기 위해 방주가 아닌 다른 방식의 매체를 사용하기로 했고, 그 결과가 지금은 일과가 되어버린 '일기쓰기'이다. 


므네모시네에게 일기를 쓰는 것은 스스로의 경험과 감상을 담담히 글로 풀어내며 되새기고 자신 안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조하는 행위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자신을 더없이 사랑해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했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굉장히 새로우면서도 즐거웠던 경험들을 다시 떠올리고 그것이 자신의 행복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신을 마음에 새기며 므네모시네의 손이 종이 위에서 자유롭게 노닐었다. 그렇게 한동안 움직이던 손이 멈추고 일기장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 오늘은 처음으로 친구와 동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즐거운 행위였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녀들과 함께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 끝 -



므네모시네 외전, 리리스-레아의 동생 자랑 대결을 보고 생각난 것들을 버무려서 적어봤음. 이번 이야기는 들꽃을 매개로 하다보니 페어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넣었지만 다프네 설정으로 인망이 높고 남의 상담도 잘 받아주는 내용이 추가돼서 일상물 쓸 때 연결고리로 쓰기 엄청 좋아졌다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