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방으로 돌아온 미하일은 침대에 누워 조용히 천장을 응시하며 사령관에게 남기고 간 말을 되새겼다. 자신이 레모네이드들의 관리권을 맡겠다는 발언은 죄를 씻기 위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이자 죽은 어머니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멸망 전의 인간들은 바이오로이드를 사람이 아닌 도구 정도로만 취급하였고 그것은 아버지인 회장도 다를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 외에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대상이었고, 그 때문에 자연스레 그들을 '인간'으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인 안나 또한 어린 시절의 그에게 '바이오로이드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진 존재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라고 가르쳤기에 더욱 그에게 있어서는 피를 나눈 레모네이드들에게 애착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설령 50%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회장들의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멸망 전에 다른 기업 총수를 납치하고 고문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피붙이였기에 그는 더욱 그 연을 끊어내지 못했다.


"핏줄이라는게 참 얄궃네.." 조용히 되뇌이며 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회장의 얼굴, 어머니의 얼굴, 그리고 레모네이드들의 얼굴 등의 이미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며 잠을 못 이루게 만들었다.


장성 회의가 있는 다음 날 아침, 결국 미하일은 단 한숨도 못 잔 채로 일어나 문 밖으로 나섰다. 아직 기상나팔이 울리기 전이라 복도는 고요했다. 그 틈을 타고 그는 갑판으로 올라가 차가운 새벽공기를 폐 가득 들이마셨다.


"후우.."


그리고 나서 그는 겉옷 안에서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바르셀로나에 있던 제타의 주둔지에서 가져온 물자 중 하나였는데, 며칠 전 편의점에서 그것을 사 가던 더치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회상)

"사령관한테 들키면 나도 혼나."


"걱정마. 안 들켜. 만약 들통났다 해도 네 이름은 절대 안 말할게." 


당연히 그냥 가져오지는 않았고 대신 그녀에게는 초콜릿과 참치 캔을 쥐어 주었다. 거진 2개월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더니 꽤나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입에 한 개비 물고 불을 당기려는 찰나..


"분명히 금연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아이엣?!" 미하일은 꼴사납게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사령관님? 사령관님이 왜..?"


"저도 좀 일찍 일어났습니다. 중요한 날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어쩐지 안색이 좀 해쓱해 보이시네요."


"그게.. 음. 어제 아스널하고.."


"아." 아스널과의 동침이라면 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미 그녀에 관해 들려오는 소문은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미하일이 깨어나기 전부터 이미 수도 없이 사령관의 정기를 진공청소기, 아니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는 무용담(?)은 함내의 부대원들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그건 그거고. 담배는 압수입니다." 또다시 귀중한 담배를 빼앗기고 말았다.


"못 피운지 두 달이나 되었습니다만." 그는 살짝 사령관을 째려보았다.


"완전히 사태가 종료될 때까지만 끊으세요." 하지만 사령관은 단호하게 말했다. 착정마와 격한 밤을 보내고 막 일어난 그였지만 리더로서의 자세는 언제나 굳건했다.


"완전히 사태가 종료될 때 까지, 라..." 그 사태가 끝날 때까지 자매들과 싸워야 한다는 건가요. 하는 생각이 그의 입 안을 맴돌았다. 그는 다시 눈을 들어 저 멀리의 조금씩 밝아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부사령관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오르카 호의 존속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해요."


"물론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부사령관님이 납득하실 수 없는 결과가 나와도.. 그건 이해해 주세요. 저 외의 지휘관들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으니." 


"네." 미하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 자신이 결정에 반대한다 해도 바뀌는 문제는 아니었다. 최종 결정권은 사령관에게 있었고 자신은 부사령관인 동시에 잠재적인 위험 요소이기도 했으니까. 자매들을 처형한다 해도 그가 말릴 수 있는 권한은 매우 적었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합류했을 초기처럼 일부 과격한 이들에게 제거당할 수도 있었다. 회의가 잘 되기를 바라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태양이 수평선 위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들어가실까요? 회의는 오후 1시니까 그동안 오전 업무 보고 계시면 될 것 같네요." 


미하일이 알겠다고 입을 떼기 전, 내부로 들어가는 해치가 열리더니 안에서 반라의 아스널이 튀어나왔다.


"그대여, 날 내버려두고 부사령관과 담소 나누고 있었는가?"


"아..아스널? 아침부터 상대해 주는건 좀 힘들 것 같은데.. 게다가 오늘 중요한 회의도 있잖아."


"호오. 난 그냥 찾으러 온 것 뿐인데 '상대해 준다'고? 이건 예상치 못했군. 이걸 보고 일석이조라 하는 건가."


"에. 아니 잠시만."


"회의 전까지 뽑아내 주겠다! 당장 이리로 오시게!!"


"으아아아!! 한번만 봐줘!!" 사령관이 절규했다. 철충과 펙스 등 여러 고난을 헤쳐온 그도 착정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대의 쥬지를 봐달라는 것인가? 좋네! 그럼 부사령관, 회의 때 보세나!" 하고 그녀는 사령관을 마치 곰인형처럼 안고 잠수함 아래로 내려갔다. 그것을 보며 미하일은 사령관에게 힘내라며 조용히 따봉을 날려 줄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오후 1시. 장성 회의는 시작되었다. 사령관은 아침보다 더 해쓱해진 얼굴로 상석에 앉아 있었고, 마리, 용, 메이 등 지휘관들도 모두 착석했다. 그 중 아스널의 얼굴에 유난히 윤기가 도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그리고 가장 끝에는 부사령관 미하일이 앉아 가만히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서일까, 계속 불안한 눈빛을 띄었다.


"그..러면.. 장성 회의를 시작하도록 할게.. 콜록." 단 몇 시간 만에 사령관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버렸다.


'아스널 준장. 대체 얼마나 짜낸 겐가..' 칸은 삽시간에 말라버린 사령관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폐하께서 회복하시려면 조금만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제가 안건을 발제하겠습니다. 오늘의 안건은.." 함께 참석한 아르망은 안경을 만지는 등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 '레모네이드 관리권을 부사령관에게 넘겨야 하는가' 입니다."


아르망의 말에 회의실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사령관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와서 싱글벙글해진 아스널마저도 곧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레모네이드들의 관리권이라.. 혹시 지금 붙잡힌 제타와 감마 얘기야?"


"아니오. 앞으로 확보할 베타, 엡실론, 델타, 그리고 오메가까지 전부입니다." 미하일이 아르망의 말을 정정하기 무섭게 모두 예상대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에서 권총의 장전음과 가위 사각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부사령관."


"네."


"그 안건을 꺼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지?" 메이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꽂혔다. 자신보다 나이가 4~5살 정도 어렸지만 그녀의 말은 충분히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그들을 관리하는 걸 실패할 시에는.. 저도 함께 처벌받겠죠." 처벌이라 표현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것으로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다. 부사령관직 박탈은 기본이요, 기껏 신임을 얻은 이들도 자신을 벌레 보듯 볼 것이 분명했으며 심하면 자매들과 함께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그걸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그런 안건을 꺼내다니.."


"확실히 위험한 안건이군. 그에 대한 책임도 모두 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케지메라도 하라 하시면.. 바로 하겠습니다." 하고 그는 주머니에서 군용 나이프를 꺼내려다가 알파에게 제지당했다.


"미하일, 안 그래도 돼. 아직 회의는 시작도 안 했잖아."



"맞는 말이오. 설령 부사령관의 안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들 우리는 그대보고 죽으라거나 손가락을 자르라는 마피아 같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오."


"일단은 모두의 의견을 들어 보고 결정하는 거니까 칼은 내려두세요. 너무 극단적이잖습니까." 사령관의 말에 결국 미하일은 나이프를 알파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입을 꾹 닫았다.


"왜 그런 안건을 꺼냈는지 충분히 이해는 간다만.. 그래도 다시 한번 그대의 입으로 듣고 싶군. 왜 레모네이드들을 직접 관리하려는 겐가?" 아스널을 비롯한 장성들과 사령관, 그리고 다른 몇몇 이들의 눈이 부사령관에게 쏠렸다.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제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자 어머니와의 마지막 연결고리에요. 물론 이런 전시 상황에서는 온정적인 태도가 곧 죽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 그들의 행위는 아무리 회장의 명령을 받았다 한들 좌시할 수 없는 명백한 악행이죠. 그리고.. 여러분들께 끼친 상당한 피해도 있고요." 그의 말을 사령관과 지휘관들은 들었다. 


"저한테는 회장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제 말은 잘 들을 수도 있지만, 사령관님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르카 호에 해가 가고 결국 분열이 일어나겠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 모든 걸 떠안고 책임지려는 겁니다. 그들의 죄도. 회장의 죄도요." 미하일은 담담하게 자신의 말을 마무리지었다.


"죄를 함께 안고 간다라.."


"부사령관, 자기한테는 실질적으로 잘못이 없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모든 걸 홀로 짊어지려는 거야?"


"전 여러분들 덕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만약 저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전 그대로 수면관의 전원이 다해 죽었겠죠. 깨어난 후에 생각했어요. '이건 하늘이 내려준 속죄할 기회다.' 라고요. 그래서 저는 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 아버지와 자매들의 악행에 대한 모두의 원한도, 그리고 그들의 적대감도요."


"미하일." 알파는 형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어머니를 잃고 절망하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자신 앞에 놓인 큰 벽을 넘어가려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마치 번데기에서 우화하려는 나비 같다고 해야 할까.


"만일 그대의 자매들이 그대의 말마저 듣지 않겠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때는, 저도 어쩔 수 없이 죽여야겠죠." 칸의 예리한 질문에 미하일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지휘관들의 의견을 들어 보도록 하죠. 모두들 여기에 찬성인지 반대인지 적어서 넣어 줄래?" 사령관은 투표함 대용으로 조그만 상자를 하나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돌리며 지휘관들의 표를 하나씩 담았다. 


5분쯤 후, 사령관은 지휘관들이 담은 표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결과는 이러했다.


용: 찬성. 

아스널: 찬성. 

메이: 찬성.

레오나: 반대.

마리: 반대.

칸: 반대.


결과는 3:3으로, 한쪽에 지휘관이 한 명 없었기에 사실상 이 투표는 무효로 끝날 것이 뻔했고, 그 때문에 미하일은 일순 절망했다.


"아직 투표는 안 끝났습니다.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누군가가 회의실 내부로 들어와 '찬성' 표를 던졌다. 다름 아닌 오르카의 통령인 라비아타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요."


"라비아타 씨가..?"


"잊으셨나 보네요. 저는 이 함선의 통령이랍니다. 그렇기에 투표권이 있다구요."


"하지만.. 어째서 라비아타 씨가 찬성을.."


"처음엔 저도 많이 고민했어요. 오메가는 제 주인이신 애덤 존스를 납치해서 살해한 주범인데 과연 작은 주인님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지, 아니면 복수를 해야 할지 말이죠. 하지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조금씩 흔들리더군요.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작은 주인님을 한번 믿어보는게 어떠냐고 해서 마음을 굳혔습니다."


"다른 아이들이요? 여기 상황은 우리만 알 텐데.. 설마."


주위를 둘러보던 미하일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꽂혔다. 다름 아닌 아르망이 쓰고 온 안경이었다. 시력이 좋은 그녀가 왜 굳이 안경을 쓰고 왔는지를 그는 회의 때문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나, 그것을 다시 보자마자 바로 무슨 의도였는지 알아차렸다.


"후훗. 죄송합니다, 전하. 사실 여기 생중계되고 있었어요." 아르망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안경다리 안쪽에는 [Presented by TalonTube]라 적혀있었다.


"탈론페더...! 진짜 죽일거야!!" 


"방금 그 발언도 탈론튜브 타고 생방으로 나가고 있는 거 아시죠? 지금 채팅도 주르륵 달리고 있네요." 


미하일은 자신의 진심을 담은 말을 전 부대원들이 들어 주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말해주지 않은 사령관이 미워졌다. 


"뭐 어쨌든, 이걸로 부사령관의 안건은 가결이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찬성표를 던질 걸 그랬나."


"혹시 투표도 짜고 쳤슴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브라우니와 비슷한 말투로 물었다.


"아니. 투표는 진짜로 진행한 거야. 생중계를 하자고 한 건 사령관 아이디어였고. 물론 그거에 관해서는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으어어어어.." 미하일은 긴장이 풀려버린 탓인지 그 자리에서 아래로 축 흘러내렸다. 


"자 일어나세요. 그리고 이거 받으시고요." 손에는 리모컨 하나와 감마의 발찌와 유사한 장치가 들려 있었다. "통제용 장비입니다. 미리 만들어 뒀죠."


"다들 미리 찬성으로 다 짜고 친거 맞죠? 말해봐요." 미리 만들어뒀다는 말에 발끈한 나머지 그는 조금 성을 냈다.


"아니요. 케스토스 히마스에서 발견한 내용을 토대로 만든 겁니다."


"그곳에 뭔가 적혀 있었나요?" 미하일은 이전에 오메가를 비롯한 다른 레모네이드들의 슈퍼컴퓨터인 케스토스 히마스의 데이터를 읽어 본 적은 있지만,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레모네이드들의 설계 관련 문서에 암호화된 내용이었는데, 거기에는 코드가 하나 적혀 있더군요. 부사령관님과 관련해서." 


"그게 대체.."


"박사님이 살아생전 레모네이드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심어 두신 코드였어. 내용은.."


"내용은?"


"박사님은.. 자매들 모두에게 '모성'을 심어 두셨어."




계속.


가볍게 쓰려고 했는데 벌써 15화까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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