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웬만해서 사령관실은 모든 바이오로이드에게 개방된다. 사령관에게 찾아오는 일은 사령관 바로 아래 직책을 맡은 라비아타부터 최말단인 브라우니까지 큰 제약 없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사령관이 이례적으로 사령관실 출입을 통제하는 경우가 둘 있었다.

 

첫째, 사령관실에서 동침이 진행되는 경우.

 

동침은 원래 비밀의 방에서 진행되지만, 피동침자의 희망여부와 사령관의 동의하에 사령관실에서 동침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런 경우에 동침이 시작되는 시간부터 다음날 아침 기상시간까지 사령관실 출입이 제한된다. 이는 불문율이 된 터라 사령관이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더라도 밤에 찾아갔을 때 문이 잠겨있으면 다들 누군가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나간다.

 

 

둘째, 사령관이 직속으로 지시를 내리는 경우.

 

가끔 사령관이 정식 지휘계통을 생략하고 소수의 바이오로이드를 불러 직속 지시를 내릴 때가 있다. 080기관이 진행하는 방첩행위가 이런 경우로, 이 경우에도 일부러 심야시간에 호출하여 다음날 기상시간까지 사령관실 출입을 통제하기에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평범한 동침으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오늘 사령관은 다음날 아침까지 사령관실 출입을 통제했다. 보고를 하러 온 콘스탄챠는 문이 잠긴 걸 보고 블랙웜에게 물었다가 리리스가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면서 넘어갔다. 그녀는 지금쯤 리리스가 귀갑묶기를 당한 채 승마용 채찍으로 엉덩이를 맞으면서 밟히는 행복한 시간을 겪을 거라 생각했으나, 굳게 닫힌 사령관실 문 뒤에 서있는 리리스는 굉장히 엄숙한 자세로 사령관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하르페이아와 불륜을 하는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영상까지 확실하군. 달리 건진 건 없나?”

 

“하르페이아와 불륜이 시작된 시점을 칸 대장이 목격했다는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의 증언을 받았습니다.”

 

“부드럽게 했겠지?”

 

“네. 하치코가 가서 물어봤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었을 거에요.”

 

사령관은 리리스가 제출한 영상파일이 담긴 USB를 품속에 넣었다. 기밀의 축은커녕 획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찌라시 기사 감이었으나 사령관은 여론만 충분하다면 리마토르를 흔들 조건이 된다고 생각했다.

 

“수고했어. 잠시 대기하고 있어줘.”

 

“알겠습니다.”

 

사령관은 리리스를 뒤로 물리고 옆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보고로 생각을 돌렸다. 제로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더미를 제출하자 그는 눈으로 제목을 훑었다.

 

“기억재생시술 결과보고서. 

 

하츠나, 스미레. 이 보고서를 닥터에게서 입수한 게 확실하지?”

 

사령관은 일부러 카엔과 제로의 본명으로 둘을 호칭했다. 동침할 때 외에는 부르지 않는 본명으로 부른다는 행위는 곧 그녀들에게 심리적인 족쇄를 채우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카엔과 제로가 혹여 거짓을 보고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름으로 안전장치를 건 것이었다. 제로는 틀림없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쿠노이치의 명예를 걸고, 이 보고서는 닥터에게서 입수했음을 맹세합니다.”

 

“하츠나, 파이프, 타고 넘어서, 방 침입. 스미레, 시간 끌 때, 가져왔어.”

 

카엔이 어떻게 입수했는지 설명하자 사령관은 그녀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다시 서류로 눈을 옮긴 그는 출력된 폰트가 아니라 자필로 쓰인 보고서를 보면서 닥터에게 냉소를 날렸다.

 

‘닥터, 자원 절약과 행정 전자화를 위해 모든 보고서는 전자문서로 올리라고 했는데 이런 아날로그한 문서를 만들다니. 전자문서를 작성하는 것만으로 덜미를 잡힐 소지가 존재하니까 자필로 보고서를 쓰는 짓을 했겠지. 대체 리마토르의 기억에서 뭘 보았기에 감추려고 한 거야?’

 

사령관은 표지를 뒤로 넘겼다. 10쪽 분량의 얇은 보고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닥터의 자필로 작성되어있었다. 만년필로 쓰인 한국어 필기체는 가독성이 떨어졌지만 아예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 보고서는 리마토르 교수의 기억재생시술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기억재생시술은 이번이 첫 시도이며, 정식 보고를 거치지 않고 진행하는 사유로 보고서는 현재 주임 연구원인 내 재량으로 임의 작성한다.

 

먼저 기억재생시술은 아직 효력이 확실히 검증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해마에 있는 시냅스의 복원을 촉진하는 약물을 투여하여 시냅스의 연결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나, 특정 기억을 잘못 강화하면 의식이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후술할 기억접속시술을 시행할 수 있지만 이 또한 불완전하다.’

 

“기억재생이 이뤄졌다는 아르망의 추측은 진실로 판명됐네. 다음에 쓰인 기억접속시술에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기억접속시술은 기억재생시술의 부작용으로 시술자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을 때 의식을 깨우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술이다. 그러나 완전한 혼수상태에서 사용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추측되며, 유일한 피시술자인 리마토르 교수는 한 단계 높은 반혼수 상태였기에 기억접속시술이 실효를 거두었다고 판단할 여지도 있다. 해마의 시냅스에 전기 작용을 강해 기억을 일시적으로 증폭한 뒤 시술자의 의식을 전송하여 기억을 읽어내는 기억접속시술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으로 나뉜다.

 

의식의 영역에서는 기억을 보는 것만 가능하다. 시술자는 피시술자의 기억을 볼뿐, 어떤 형태로도 개입할 수 없다. 외부의 시술자가 전기자극을 조절함에 따라 어느 시점의 기억을 볼 수 있는지는 정할 수 있으나 이 또한 기억을 조작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와 달리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술자인 칸 소장의 접속이 중도에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어떤 원리로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시술 이후 깨어난 리마토르 교수의 반응으로 보아 기억을 조작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억을 조작하지는 못한다? 그럼 무의식에서 뭘 바꿀 수 있다는 거지?”

 

사령관은 수상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일전에 리마토르에게 어떤 시술을 했는지 철저한 묵비권을 행사한 닥터가 개인적으로 작성한 보고서는 현재 리마토르가 자신에게 감추고 있는 사실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닥터가 기록한 리마토르의 기억을 확인하고자 다음 장을 넘겼다.

 

 

‘따라서 현재 기록할 수 있는 내용은 리마토르 교수의 의식에 접속한 아스널 준장이 본 기록이 유일하다. 그 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리마토르 교수는 멸망 전 성론대학교 철학과에서 수학하여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이후 삼안 연구소에 소속되어 바이오로이드에 관한 사회사상을 연구하였다. 구체적 사례로는 바이오로이드의 노동 효율성, 바이오로이드 장기적출의 윤리적 정당성, 바이오로이드 통제의 효율성을 위한 공리주의적 제안, 판옵티콘형 바이오로이드 중앙집권 통제제도의 이해가 있다.

 

삼안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도중 철충의 침공으로 연인을 잃고 블랙리버 연구소로 이적한다. 그 곳에서 바이오로이드의 인격을 말살하는 내용의 연구를 진행하며 마약에 중독된다. 기억을 잃는 원인은 이때의 마약중독으로 추정된다. 이후 실험용 LRL 개체에게 흥미를 느끼고 거둔다. 이 LRL 개체와 함께 생활하며 마약을 끊고 바이오로이드와의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등 인격적인 변화를 보임. 철충의 침공으로 LRL 개체가 사망하자 기존과 완전히 달라진 사상으로 전향한다.

 

전향 후 바이오로이드와의 공존에 대해 연구하다가 동면되어 현재에 이른다.’

 

 

“...허.”

 

사령관은 탁 소리가 나게 보고서를 책상에 집어던졌다.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고 그 자리를 김빠지는 한숨소리가 대신했다. 그는 여태까지 보여준 리마토르의 모습을 빠르게 정리하더니 속으로 닥터의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복기했다.

 

‘마약중독자에 반 바이로이드 분자 출신이었다니. 기가 막히는군. 그래놓고 이제 와서는 바이오로이드의 공존을 주장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닥터의 보고서에 적힌 대로면 블랙리버 연구소에서 거둔 LRL 개체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미쳤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기억을 어디 쉽사리 믿을 수 있나?

 

기억에 의존한 진술을 교차 검증하는 이유는 하나야. 아무리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도, 닥터처럼 극한의 두뇌를 가진 게 아닌 이상 기억은 완벽할 수 없어. 하물며 일개 인간인 리마토르의 기억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지. 그런 점에서 기억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으며, 리마토르의 마지막 기억은 오르카호에 합류한 이후 꾸며냈다고 볼 여지가 있지.

 

과한 의심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가장 위험한 순간을 상정해야 가장 안전해질 수 있는 법이니까.’

 

사령관은 보고서를 덮어 카엔에게 다시 쥐어주었다. 제자리에 돌려놓으라는 말과 함께 옷 벗고 침대로 가라는 말을 하자 카엔과 제로는 반색하지 않더라도 들뜬 기색으로 침대로 향했다. 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령관은 묵직한 목소리로 자신이 대기시킨 이를 불렀다.

 

“리리스.”

 

“네, 주인님.”

 

“네가 보기에는 인간이 1년씩이나 위장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 같아?”

 

“충분히 가능합니다. 철저히 훈련된 스파이에게 위장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니까요.

 

“그래. 그럼 일반인일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일반인 수준에서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는 위장은 불가능하나,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자 어느 정도 변조된 페르소나를 내세우는 건 가능하죠.”

 

리리스의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손깍지를 껴서 턱을 괴었다. 외투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USB의 존재를 느낀 그는 다시 리리스에게 USB를 돌려주었다. 리리스의 고운 손이 USB를 받자 사령관은 나직이 직권 지시를 전달했다.

 

“리마토르의 과거를 파봐. 080기관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해서 말이지. USB에 담긴 내용은 스프리건에게 슬쩍 찔러줘. USB 전달자 몇 번 교체해서 출처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주인님.”

 

“내가 리리스 믿고 있는 거 알지? 이번 일도 컴패니언의 명성에 걸맞게 제대로 처리할 거라고 생각해.”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어요.”

 

“그래. 그럼 이제 침대로 갈까?”

 

“...음란한 리리스가 가요♥

 

책상에서 재갈과 승마용 채찍을 꺼내 리리스에게 쥐어준 사령관은 벌써부터 절정에 이른 듯 짜릿해하는 리리스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카엔과 제로가 기다리는 침대로 향하면서 그는 리마토르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리마토르, 아무래도 당신을 신뢰하기는 어렵겠어. 구 인류의 잔재는 싹을 뽑아야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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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부터 리마토르가 직접적으로 위험해질 거야. 사령관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론을 어떻게 움직이냐가 곧 명분을 만들어내지. 거기에 더해 리리스가 주도하는 컴패니언의 공작이 리마토르를 덮치니, 이제 혼자서 대처하기는 어렵겠지.


왜 사령관이 080기관 대신 컴패니언을 이용하는지는 54편에 이미 나왔어. '080기관을 쓰면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괜히 판이 커진다. 그래서 별 소득이 없더라도 후폭풍이 적은 컴패니언을 쓴다.'라는 이유야. 그런 고로 왜 리앤 대신 리리스가 첩보를 맡는지 이해해주길 부탁할게.



부족한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맙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