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주문 받겠습니다! 립아이 스테이크 굽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음... 레어가 좋겠어. 나는 여기... 투움바 파스타로 할게. 덜어 먹을 그릇 두 개만 줄래, 실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태양과도 같은 접대용 웃음을 띈 실키에게 메뉴판을 돌려주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나름의 배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생각지도 못 하고 있었다.


"잠깐."


착 가라앉은 바르그의 목소리. 실키와 나 사이의 메뉴판이 잠깐 멈칫했다. 그때까지 조용히 팔짱을 끼며 명상하듯 감겨 있던 바르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난 아직 메뉴판도 못 봤다만."


아차.


고요하게 바라보는 바르그의 눈동자에 섞인 한 가닥의 불만. 내 가슴이 살짝 철렁했다. 그러고보니 들어오자마자 바르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멋대로 주문을 했지. 다 이게 죽일 놈의 습관 탓이었다. 아이들과 이런 데이트 비슷한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되면 어째선지 대부분 메뉴를 못 정하고 우물쭈물하기 일쑤였고, 그래서 미리 대원들의 기호나 그날 컨디션을 눈치껏 파악해서 좋아할 법한 식단을 골라주는 것이 몸에 배어 버렸다. 린티에게는 민트초코스무디를, 토모에게는 돈코츠 라멘을, 스미레에게는 불고기 와퍼 세트를. 모두의 취향에 맞추려는 노력을 난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쪽 방면의 스킬도 꽤 숙련되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 픽에 불만을 가진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는 건, 역시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는 바르그를 보니 새삼 그런 의심이 환기되었다.


당혹스럽게 바르그 쪽을 돌아보는 실키. 단골 식당의 간판 아가씨같은 가슴 넉넉한 앞치마가 잘 어울리긴 하지만, 뼛속까지 군인인 그녀에게는 상관에게 불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바르그를 보는 게 상당히 조마조마하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실키가 더 기겁할 바르그의 직언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래, 이런 외형으로 좋아할 법할 음식은 뻔하겠지."

"..."

"하지만, 넘겨짚어서 판단한 내 기호를 억지로 내게 갖다붙이지는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것도 하나의 폭력이니까.


처음 바르그와 만났을 때의 대화가 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너의 즐거움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그걸 남에게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아무래도... 간신히 나를 다시 보려는 바르그와의 첫 단추부터... 지뢰를 밟아버린 것 같은...


"미, 미안."


묵직한 지적에 나는 메뉴판을 다시 굳어버린 실키에게서 바르그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여기를 잘 모를 날 위한 너의 배려였겠지. 그저, 내 메뉴는 내가 정하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바르그는 선선히 팔짱을 풀고 한결 풀린 표정으로 받아든 메뉴판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굳은 분위기에 눈치만 살피던 실키는 물 두 잔을 내려놓고 후다닥 달려나갔다.


"그, 그럼 메뉴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투움바 먼저 준비되는대로 불러드릴게요!"

"어, 응."


찬찬히 메뉴판을 훑던 바르그가 곁눈질로 멀어져가는 실키 쪽을 흘끗 보았다. 그와 함께 살짝 쫑긋거리는 바르그의 귀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메뉴판에 집중하고 있는 바르그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으니,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가 메뉴판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송구하군. 돌이켜 보니 이 집단의 수장인 네 위신을 세워 주지 못하고 너무 무례한 언동을 한 것 같은데."

"음? 아, 아니야. 오히려 바르그가 지적해 준 덕분에 내 행실을 다시 돌아볼 기회가 되었어."

"다소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단어 선택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입바른 말이라도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다른 법인데..."

"남들은 그냥 넘어갈 만한 불편함을 꼭 짚고 가줄 사람은, 어떤 집단에서건 필요한 법이야. 옆에서 보면 과하다고 생각할 지 몰라도 말이지. 그리고..."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고, 메뉴판 위로 비죽 솟아나온 바르그의 두 귀가 두어 번 쫑긋였다.


"어차피 바르그는... 그런 걸 참을 성격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 델타랑도... 한 바탕 했을 거고."

"...동의한다."

"메뉴는 정했어?"

"...거의."


사실, 이 정도 시간이면 메뉴판을 다섯 번은 정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체 뭐가 그녀의 고민을 이토록 길게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투움바 파스타가 나올 시간만큼은 지루하지는 않았다.


"자~ 주문하신 투움바 파스타 나왔습니다! 여기 덜어 드실 접시도요!"

"오~ 실키, 고마워! 가운데에 놔 줘."

"네에~"

"흐, 흐흠. 나도 정했다. 여기 주문."

"네~ 손님."

"저, 더 가까이..."


여전히 바르그는 메뉴판 뒤로 얼굴을 가리며 허리를 숙인 실키와 무언가를 속삭거리고 있었다. 바르그 몫의 파스타를 소분하고 있던 나는 그걸 보며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메뉴판 뒤로 사라진 실키의 옆얼굴이 다시 올라왔다. 어딘가 영업의 영역을 넘어선 방긋방긋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였다. 실키는 한층 더 높아진 톤의 목소리로 힘차게 주문을 받았다.


"네~ 손님! 주문 받았습니다! 금방 내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 알았다."


왠지 모르게, 바르그는 우물쭈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초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정말로 머지 않아서 돌아온 실키의 서빙용 쟁반 위를 본 나는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네~! 주문하신 립아이 스테이크 레어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좋은 시간 되세요~"

"...고맙다."


우렁차고 밝은 실키의 목소리와, 기어들어가는 듯한 바르그의 목소리가 교차되었다. 바르그는 단속적인 동작으로 옷깃에 냅킨을 끼우고 있었다. 어이없도록 뻔뻔하면서도 귀여운 광경에 내 입가에 걸린 웃음의 밀도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


일부러 내 쪽을 보려고 하지 않으며 짐짓 태연한 척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있는 바르그. 물론, 볼가는 자기가 썰고 있는 스테이크의 단면 만큼이나 발그레하다. 이미 임계점에 달한 내 웃음기가 콧바람이 되어 조금 새어나왔다.


"크흣..."


쿵!


방금 전의 실키처럼 빙글거리며 지켜보던 내게 바르그가 무언으로 쏘아붙였다. 포크를 쥔 채로 밑주먹으로 가볍게 내리치는 귀여운 위협과 항의. 불만이 그득그득해보이는 눈초리와, 그와 대조되는 달궈진 얼굴.


"왜, 불만 있나?"

"아니, 맛있게 먹어 주면 좋지 뭐."


치켜 올린 눈초리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식식거리면서도 꾸역꾸역 한 점씩 썰어낸 스테이크를 입으로 옮겨간다. 나는 그저 흐뭇하게 그녀의 만찬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