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다음 날 아침. 리마토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늘 입는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왠지 오늘은 멋을 내고 싶은 기분이 들어 정장 자켓을 걸치자 그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앞머리를 손으로 한 번 더 쓸어내린 그는 연구실 책상에 앉았다.

 

“오늘 강의 일정은 뭐가 있더라? 주제는... 실용주의였지.”

 

강의 자료를 읽어보던 그는 어제 있었던 일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마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묵직한 추를 달아놓은 것 같은 죄책감은 그의 마음을 한없이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하르페이아의 공석을 본 그는 어제 있었던 일을 털어내려고 중얼거렸다.

 

“하르페이아에게 미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난 이미 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자신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인류가 멸망하고 최후의 남성이라고는 사령관과 자신만이 남은 상황에서 더 이상 예전의 성 윤리는 힘을 쓰지 못했다. 도덕원리나 사회규범이라는 모든 제한장치에 선행하는 종족 번식의 본능은 그가 수많은 여성들을 안고 다녀도 문제없다고 속삭였다. 실제로도 사령관은 그랬으나, 그는 자신의 내면에 불어드는 흔들림을 뿌리쳤다.

 

“이제 그런 성 윤리가 사라졌다고 해도, 내가 칸 말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는 없어.”

 

한 명에게 오롯이 사랑을 주고 싶은 욕망이 그의 안에 굳건히 똬리를 틀고 있었기에 그의 눈동자는 칸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하르페이아의 마음을 밀어낼 수밖에 없어서 그는 하르페이아가 받는 상처가 미안했다.

 

“내가 내지 못한 용기를 냈던 만큼 상처받았을 텐데 결국 하르페이아만 상처받고 끝나게 되었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리마토르는 하르페이아의 자리를 미안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커피포트의 전원을 올렸다. 믹스커피 두 봉지를 꺼내 뜨겁게 데워진 물에 타고 섞으면서 그는 혹시 하르페이아가 찾아올까 연구실 문을 연신 살폈다. 검은 원두가루와 하얀 프림이 섞여 갈색 빛깔로 바뀌었음에도 그는 계속 커피를 빙빙 저었다. 멀리서 보면 달고나 커피를 만드는 줄 알았겠으나 가까이서 보면 커피에 프림 대신 근심을 넣는 씁쓸한 모습인 그는 커피잔을 하르페이아의 자리에 올려두었다.

 

“그럼 일정부터 확인할까.”

 

리마토르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갖다 대며 시간표를 확인하는 순간, 문이 부서져라 열리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리마토르!!!”

 

“으억, 뜨거!!!!!!”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란 나머지 커피잔을 떨어뜨려 뜨거운 액체를 뒤집어쓴 리마토르는 용수철이 튀어오르는 것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모습에 그를 찾아 들어온 칸이 더 당황해서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괜찮아?”

 

“어후... 네, 그럭저럭요.”

 

다행히 커피포트의 성능이 좋지 않아 팔팔 끓을 정도로 뜨거운 물이 아니었기에 그는 1도 화상에 그친 왼쪽 허벅지를 물티슈로 닦아 뒤처리를 했다. 상황이 수습되자 그는 난데없이 연구실에 쳐들어온 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칸,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오늘 아침에는 훈련이 있다고 안 했어요?”

 

“훈련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생겼어. 당신, 이거 대체 뭐야?”

 

“네?”

 

칸은 지휘패드를 그에게 내밀었다. 화면에 띄워진 뉴스 기사가 리마토르의 눈과 마주하자 그의 뇌는 자동적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속보] 리마토르 교수, 하르페이아와의 불륜 현장 발각

 

오르카 대학 인문사회대학 학장 리마토르 교수가 어젯밤 하르페이아와 연구실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발각되었습니다. 본지의 취재결과 리마토르 교수와 하르페이아는 합류 초기부터 연분을 나누어 왔으며, 하르페이아가 술을 마시다가 공개 고백을 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이 나왔습니다.

 

현재 리마토르 교수는 앵거 오브 호드의 지휘관 칸 소장과 공개 연애 중인만큼 전문가들은 이번 불륜 사실이 칸 소장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본지는 리마토르 교수와 하르페이아의 불륜 관계에 대한 구독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제보를 기다립니다.

 

 

“아니, 이건 뭔 말도 안 되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찌라시 기사에 리마토르는 말문이 막혔다. 기사 초반에 대문짝만하게 박힌 영상은 하르페이아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던 어제의 상황을 담고 있었지만, 기사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 쓴 내용이었기에 그는 즉각 부인했다.

 

“칸, 지금 이 기사 때문에 절 찾아온 거에요?”

 

“그럼 내가 이 기사를 보고 가만히 있어야 했어?”

 

칸은 날카롭게 날이 선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마토르는 아무래도 엄청난 오해가 벌어졌다고 생각하며 차근차근 설득을 시도했다.

 

“칸, 이 기사는 삼류 찌라시에요.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요.”

 

“찌라시?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어. 하지만 몇 번이나 돌려봐도 이 영상은 진짜던데?”

 

칸은 영상을 가리키면서 그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그는 어제 일을 뭐라고 말해야 그녀가 쉽게 납득할까 머리를 굴렸으나, 도무지 압축이 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는 요약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하기로 했다.

 

“말하려면 조금 길어요.”

 

하지만 그의 선택은 악수(惡手)였다. 그의 말을 듣자 칸은 미간을 구기면서 그를 향하는 눈초리를 더욱 곧추세웠다.

 

“뭐야, 변명이라도 할 셈이야? 설마 진짜였어?”

 

“그게 아니에요. 다시 말하지만, 이 기사는 절대 사실이 아니에요.”

 

“그럼 뭔데! 대체 뭐길래 하르페이아랑 밤중에 키스를 하고 있냐고!”

 

감정에 북받쳐 추궁하는 칸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속으로 골치 아프게 되었다고 뇌까렸다. 감정이 앞선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을 해도 칸의 이성이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기에 결국 둘 다 감정 소모만 이뤄질 뿐이라는 걸 그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칸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라고 판단하면서 조급해지는 이성을 진정시켰다.

 

‘침착해. 타인의 마음을 조작하는 방법을 칸에게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하나씩 분석하는 거야.

 

동공이 확장된 걸로 보아 현재 칸이 가진 분노의 감정이 상당히 큰 거 같아. 전에 내가 후사르에게 집중을 쏟았다는 사실만으로 칸이 질투한 적이 있음을 감안하면 칸은 나와 자신의 관계가 침해받았다는 사실에 격렬한 분노를 느낄 거야. 조금 더 생각해보면 분노의 근원은 신뢰의 파괴와도 연결되겠지. 내가 먼저 칸 자신과의 신뢰를 깼다고 생각해서 더 화를 내는 거야.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신뢰와 관계 모두 아주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고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 줘야해.’

 

칸의 감정을 달랠 방법을 구상한 리마토르는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는 자신을 쏘아보는 칸의 코와 입 정도에 시야를 맞추어 혹시라도 그녀를 자극할 수 있는 직접적인 시선 교환을 피했다. 감정이 고양된 상태에서는 이성적 판단이 부족해짐을 생각해서 그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칸, 이건 전부 거짓이에요. 제가 칸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은 함께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티끌만큼의 변화도 없어요.”

 

그의 말을 들은 칸은 일순간 감정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아직 가장 강력한 자물쇠가 그녀의 이성을 묶어두고 있었기에 그녀는 리마토르에게 바로 해명을 요구했다.

 

“그럼 이 영상은 뭐야. 왜 하르페이아가 당신에게 입맞춤을 하는 건데.”

 

“강제로 당한 거에요. 한 번 보세요, 누가 봐도 하르페이아가 일방적으로 먼저 들어오잖아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칸은 바로 영상을 돌려보았다. 천장에 설치된 카메라의 시점에서 입을 맞추는 둘의 모습을 담고 있었기에 명확하지는 않았으나, 하르페이아가 갑자기 빠르게 까치발을 뻗어 그에게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는 장면 정도는 판독할 수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칸의 표정이 의구심으로 바뀌자 리마토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칸, 그리고 제가 왜 칸을 놔두고 하르페이아와 불륜을 저질러요. 제가 매춘이라도 해요? 대체 뭐가 좋아서 칸 대신 하르페이아를 택하냐고요?”

 

과격할 정도로 자신은 칸을 떠날 의사가 없음을 강조하는 걸로 그는 설득의 방점을 찍었다. 리마토르가 자신의 전략이 효과를 거두었는지 마른 침을 삼키면서 상황을 가늠하는 동안 칸은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 말, 진짜야?”

 

“네.”

 

눈빛은 아직도 날카로웠으나 매서운 기색은 조금 가셔있었다. 칸은 일단은 화가 누그러졌다는 투로 침대에 걸터앉더니 그에게 의자를 갖고 와서 앉으라고 말했다. 칸과 마주보고 앉은 리마토르는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전부 설명했고, 칸은 중간중간 표정이 굳기는 했으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설명이 끝나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리마토르. 그래서 거절로 끝냈다고?”

 

“네. 제게는 칸이 있으니까요.”

 

“그건 단순한 주장이잖아. 증명할 수 있어?”

 

“내세울 물증은 없지만, 저는 지금 칸과 제 신뢰관계에 기반해서 말하고 있어요.”

 

칸은 리마토르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탈론 페더에게 연구실 내부 카메라 한 개 정도는 남겨두라고 관용을 베풀어야했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다시금 속에서 의심이 스멀스멀 자라나는 걸 느꼈다.

 

“리마토르. 당신의 말은 입증이 불가능해. 그래도 지금 나한테 믿어달라는 거야?”

 

“네, 믿어주세요. 칸과 제 관계 사이에서 제가 한 톨의 거짓이라도 말할 거 같나요?”

 

리마토르는 칸의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뭔가 찔리는 게 있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기색이 있어야 하는데, 초지일관 당당한 자세를 보여주는 그에게서 결백의 가능성을 느낀 그녀는 그를 믿기로 했다.

 

“그래, 내가 당신 말을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겠어. 당신이 나한테 그럴 리가 없지.”

 

“믿어줘서 고마워요, 칸.”

 

“아니야. 오히려 내가 미안해. 앞뒤사정도 모르고 당신에게 화만 벌컥 냈으니까.”

 

“괜찮아요. 그럴 수 있었어요.”

 

리마토르는 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어깨에 기댄 칸은 그에게 꼭꼭 감춰두었던 마음 속 깊숙한 이야기보따리를 꺼내 풀었다.

 

“미안해. 두려워서 그랬어.”

 

“뭐가요?”

 

“케시크일 적에 난 소중한 이를 모두 잃어버려야 했어. 이제는 케시크가 아니라 칸이지만, 아직도 난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잃고 싶지 않아.

 

이번에 당신이라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아닐까... 너무나도 두려워서 감정이 앞서버렸어. 미안해.”

 

리마토르는 그제야 칸의 분노가 왜 그리 격렬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병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무방할 정도로 주변인을 지키는 행위에 강박을 가질 정도로 불안정한 칸이었기에, 자신의 수비범위가 눈 뜬 채로 타인에게 유린당한다고 생각해서 두려움이 분노의 탈을 쓰고 리마토르 자신에게 덤벼든 일이었을 터였다. 그는 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고마워, 고마워....”

 

칸은 기대다가 몸을 뒤로 눕혀 침대에 엎어졌다.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이불에 엎드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칸의 모습을 이해하면서 그는 잠시 그녀가 감정을 삭힐 시간을 주었다. 한참이나 그러던 칸은 다시 일어나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리마토르, 이걸로 두 번째네. 날 두 번이나 잡아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이니까요. 아프지 말아요, 칸.”

 

칸은 그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태블릿을 손에 들었다. 애정을 나누는 일을 잠시 뒤로 무른 그녀는 찌라시의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 기사의 출처는 스프리건이야. 애시당초 오르카호 내부에서 이런 자극적인 뉴스를 쓰는 건 스프리건 한 명 뿐이라고.”

 

“문제는 영상의 출처가 어디냐는 점이죠. 위에서 내려 보는 각도로 영상의 찍혔는데, 제 연구실에는 귀퉁이 그 어디에도 카메라가 없어요.”

 

“흠... 혹시 탈론 페더가 우리 몰래 도촬장치를 하나 더 설치해둔 게 아닐까?”

 

“지난번에 칸이 제 방에 설치된 카메라를 싹 제거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어요? 탈론 페더 씨 성격이 자극적인 영상에 목을 매다시피 한다고 해도 칸 명령이라면 재깍 따르잖아요.”

 

리마토르의 말에 칸은 과연 탈론 페더가 카메라를 하나도 남김없이 철거한 게 맞는지 가능성을 검토했다. 인간이 바이로이드에게 내리는 명령과는 달리 바이오로이드 간의 명령은 페널티가 부과되지 않는다. 스틸라인처럼 위계질서가 강한 부대에서는 명령을 어겼을 시에 자체적인 처벌을 하기는 하나 그건 부대 내부에서 정한 것이지, 인간의 명령처럼 아예 거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 바이오로이드 간의 명령은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것이기에 명령에 따른다고 해도 뒷구멍을 팔 수 있다. 특히 호드처럼 직급에 따른 위계질서가 약한 곳에서는 칸 자신이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탈론 페더가 자체적으로 최소한의 구멍을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칸은 지휘패드로 탈론 페더를 호출했다.

 

“페더, 지금 즉시 리마토르 교수 연구실로 오도록.”

 

칸은 평소 탈론 페더가 당사자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도촬장치를 설치하고 다니는 걸 탐탁찮게 생각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마음대로 설치된 도촬장치가 하나라도 있기를 바랐다. 리마토르는 칸의 모습을 보더니 설마 탈론 페더가 도촬장치를 남겨놓았다는 의견이 확신으로 바뀌었는가싶어 말했다.

 

“칸, 탈론 페더 씨가 제 방에 카메라를 남겨두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페더가 하나 정도는 남겨놓았으리라는 의혹이 농후하지. 생각해보니 내 방에도 카메라를 설치하지 말라고 했는데 들켜서 된통 혼난 적이 있잖아.”

 

“음, 그럼 의혹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칸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쇄도촬마라는 별명이 괜히 탈론 페더에게 붙은 게 아닌 만큼 안 좋은 의미로 탈론 페더가 도촬계에서 갖고 있는 권위는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정적인 권위가 자신을 구원하는 모순에 리마토르는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칸, 탈론 페더 씨가 오면 외부의 카메라가 설치되는지는 않았는가도 한 번 확인해보죠. 카메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 물어보지.”

 

“대장님, 부르셨나요?”

 

둘이 영상 출처의 꼬리를 잡으려고 생각하는 사이 탈론 페더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칸은 페더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들이밀었다.

 

“페더. 딱 한 번만 묻겠다. 리마토르의 방에 설치한 카메라가 있어, 없어?”

 

“그... 없어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탈론 페더 씨, 이미 저희가 물증을 확보하고 하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부인하셔봤자 좋을 게 없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희도 다 감안을 해드립니다.”

 

탈론 페더의 눈동자가 떨리는 걸 본 리마토르는 일부러 그녀를 떠봤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을 때는 살짝 간을 보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동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페더가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휴.... 이미 들켰을 줄이야... 네, 딱 하나 있어요. 그걸 용케도 찾으셨네요.”

 

“뭐? 위치가 어디야?”

 

“네? 이미 찾으셨다면서요?”

 

“한 번 떠본 거였어요. 제대로 낚이셨네요.”

 

칸의 역질문에 탈론 페더가 되묻자 리마토르는 자신이 블러핑을 쳤음을 밝혔다. 그 사실을 들은 탈론 페더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교수님, 꼭 샐러맨더랑 도박 해보세요.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블러핑을 치시면 샐러맨더도 그냥 이기시겠네요.”

 

“도박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카메라부터 이야기하지. 카메라 어디 있어?”

 

칸은 바로 탈론 페더에게 본론을 요구했다. 탈론 페더는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리마토르의 침대 옆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의 정면을 바라보는 평행한 위치의 가운데 칸에 꽂힌 두텁게 쌓인 책 사이를 훑던 탈론 페더는 적잖이 당황하더니 리마토르에게 물었다.

 

“교수님, 최근에 책장 건드린 적 있으세요?”

 

“그 칸은 건드린 적이 없어요.”

 

“그럼 이거 어떡하죠? 제가 설치해둔 카메라가 없어졌어요.”

 

“네?”

 

탈론 페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말하자 리마토르와 칸 모두 당혹스러웠다. 칸은 리마토르에게 그 책장을 건드린 적이 없는가 되물었으나, 리마토르는 기억을 가다듬더니 없다고 대답했다.

 

“거기는 이미 읽어둔 논문과 책을 꽂아놓는 곳이라서 최근에 손댈 일이 없었어요. 요즘은 안드바리한테서 자료를 받아와서 책상에 쌓아두고 보거든요.”

 

“하르페이아가 카메라를 건드렸을 가능성은 없어?”

 

“그것도 없어요. 기억재생시술 받은 뒤로 하르페이아는 계속 스카이 나이츠 숙소에서 자택근무를 하다가 어제 다시 연구실로 나왔어요. 어제도 계속 같이 있었지만 하르페이아가 책장을 건드리는 건 못 봤어요.”

 

“흠... 그럼 대체 누구지?”

 

칸과 리마토르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설치되었던 카메라가 없어졌다는 점에서 어제 하르페이아와 리마토르의 일을 담은 영상의 유포지가 그 카메라라는 생각에 도달한 둘이었으나, 사라진 카메라의 행방을 잡을 감도 오지 않았기에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리마토르는 일단 한 가지 가능성을 점검하고자 탈론 페더에게 질문을 던졌다.

 

“탈론 페더 씨, 혹시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 바로 탈론 허브에 업로드 되는 구조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1차로 제 외장 하드로 올라오고 제가 그 중에서 선별을 해서 탈론 허브 스트리밍으로 올려요.”

 

“그럼 그 외장 하드부터 확인해보죠.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거기 있으면 그 카메라를 마지막으로 건드린 이가 누구인지 실마리를 잡을지도 모르겠네요.”

 

“와, 좋은 생각인데요!”

 

리마토르의 말에 탈론 페더는 금방 외장 하드를 가져오겠다면서 호드 숙소로 향했다. 칸은 훌륭한 의견이라고 그를 추켜세우더니 한 가지 질문을 덧붙였다.

 

“그런데 리마토르, 아까 우리가 본 영상의 각도와 페더가 설치한 카메라의 위치가 다르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그 영상은 분명 천장에 설치된 시점이었죠. 그런데 아까 탈론 페더 씨가 카메라를 찾던 위치는...?”

 

“책장 가운데 칸이었지. 그곳에 카메라를 설치하면 책상 높이와 평행을 이루기 때문에 절대 우리가 본 영상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가 나올 수 없어.”

 

칸의 지적에 리마토르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 사건에 대한 한 가지 진실이 드러나자 칸은 그가 생각하는 게 맞다고 확신을 주었다.

 

“페더는 범인이 아니야. 제3자가 개입했어.”

 

제3자의 개입. 이 사건이 결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리마토르는 모종의 위기가 자신을 노리는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칸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를 바라보면서 주의를 주었다.

 

“리마토르, 느낌이 좋지 않아. 페더를 제외하고 당신 방에 카메라를 설치할 인원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알고 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탈론 페더 씨가 저희에게 덜 혼나려고 카메라 위치를 거짓으로 말한 걸 수도 있어요. 일단 탈론 페더 씨가 가져올 외장 하드부터 확인하죠.”

 

그가 위기감에 긴장한 몸을 풀러 반쯤 식은 하르페이아 몫의 커피를 쭉 들이키는 사이 탈론 페더가 외장 하드를 들고 왔다. 탈론 페더가 사용하는 태블릿에서 연결하여 최근에 저장된 영상을 찾아보는 동안 칸과 리마토르도 이목을 집중했다.

 

“최근에 저장된 영상, 어제, 전체 시간대 확인, 장소는 연구실....

 

없어요. 하르페이아와 교수님을 찍은 영상은 없어요.”

 

“이런 젠장...”

 

추정이 확정으로 바뀌자 리마토르는 혀를 찼다. 그래도 무언가 더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혹시라도 연구실에 설치된 카메라가 찍은 영상은 없는가 더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잠시만요, 연구실에 설치했던 카메라는 충전용 배터리식이라 최대 3일밖에 안 찍혀요. 아무래도 어제 배터리가 다 닳은 거 같은데, 일단 그저께부터 3일 전까지 녹화된 거라도 빨리 돌릴게요.”

 

탈론 페더는 72시간 분량의 화면을 720배속으로 돌렸다. 3일을 10분에 압축하자 사람의 이동이 잔상으로 남을 정도로 화면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리마토르는 보다가 눈이 아파서 안경을 올리고 눈을 문질렀지만 칸은 뛰어난 동체시력 덕분에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거기 멈춰봐.”

 

“네! 뭐 찾으셨어요?”

 

“갑자기 왜 이 부분만 화면이 검게 송출되지?”

 

칸이 멈춘 시점은 오늘로부터 이틀 전 새벽이었다. 리마토르가 칸과 호드 숙소에서 뜨거운 밤을 보낸 날, 비어있던 연구실에 누군가가 침투했다는 증거였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책상과 의자를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검은 영상을 3분간 내보내다가 다시 멀쩡히 돌아왔다는 건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페더, 카메라가 갑자기 화면이 검게 꺼졌다가 다시 나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노이즈가 낀다거나 배터리가 다 되어서 깜빡거린다면 모를까, 아직 배터리가 20시간 정도 남아있던 시점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꺼졌다가 다시 켜질 수는 없어요. 게다가 그 순간도 영상 기록에 잡힌 걸 보면 카메라가 기능 오류를 일으킨 거지 꺼졌다가 다시 켜진 건 아니에요.”

 

“그렇다는 말이지. 알겠어.”

 

칸은 어느새 호드를 지휘할 때 보여주는 냉철한 대장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취소된 아침 훈련을 이곳에서 실전으로 대신하게 된 그녀는 표정이 굳어있는 리마토르에게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리마토르, 지금까지 알아낸 걸 맞춰보자.

 

우리가 동침했던 그저께 누군가가 연구실에 침투해서 카메라를 설치했어. 그 카메라로 당신이 어제 하르페이아와 있었던 일을 촬영했고, 그 영상은 오늘 아침에 기사로 나왔지. 모든 일은 길어야 이틀 안에 벌어진 거야.”

 

“...탈론 페더 씨, 저 환풍구 아래에 카메라가 설치되었던 자국이 없는지 확인해주실래요?”

 

“아, 네.”

 

페더는 리마토르의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 환풍구 아래를 살폈다. 꼼꼼히 살피던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칸과 리마토르를 불렀다.

 

“여기 보세요. 환풍구에 쌓인 먼지가 이 부분에만 동그랗게 없어요.”

 

“그곳에 카메라가 있었다가 회수되었군. 이제 확실해졌네.”

 

칸은 사건의 방향을 바꾸었다. 단순히 리마토르가 하르페이아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넘어, 이 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연출되고 있다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문을 열려는 찰나, 그녀의 태블릿과 탈론 페더의 태블릿이 모두 울렸다.

 

“뭐야?”

 

“앗,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어요!”

 

탈론 페더는 실시간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기사 제목을 확인하더니 급히 눌러서 화면을 열었다. 화면에 대문짝하게 박힌 제목을 읽은 칸은 말을 꺼내지 못했고 리마토르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하르페이아 긴급 입장 표명...?”

 

“페더, 영상 소리 키워.”

 

칸은 연구실 문을 잠그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리마토르의 손을 잡았다. 그의 감정이 손을 타고 나와 만들어낸 떨림이 그녀의 손에 전해지자 칸은 그의 모든 불안을 잡아주려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탈론 페더가 영상 소리를 키우자 추리닝을 입은 하르페이아가 스프리건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속보] 하르페이아 긴급 입장 표명


 

“교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세요. 전부 제가 칠칠치 못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하르페이아 씨, 지금 발언은 교수님의 결백을 주장하시는 건가요?”

 

“네. 항상 민폐만 끼치던 제가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교수님께 기대고 싶어서 벌어진 일이에요. 교수님은 상냥하게 저를 달래주신 게 전부일 뿐, 저한테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어요.”

 

“아, 상냥하게 달래주었다? 그게 영상에서 나온 키스인가요?”

 

“아니에요! 그것도 제가 한 거에요... 어제 일은 제가 전부 잘못해서 교수님께 또 폐를 끼치게 된 거니까, 교수님께서는 결백하다는 걸 확실하게 해주세요.”

 

“교수님은 결백하다. 네, 하르페이아 씨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 후속 보도에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탈론 페더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한 그녀는 가려져있던 실시간 채팅창을 확인했다. 채팅창은 몇 초만에 맨 아래에 작성된 댓글이 맨 위로 올라가 안 보일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계속 교수는 무관하다고 하는 거 보니까 교수가 시킨 듯’

 


‘리마토르 교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쓰레기네’

 


‘전부 자기가 잘못한 거라고 하는 거 봐. 하르페이아 불쌍해서 어떡해’

 


‘계속 민폐 민폐거리는 거 보니까 그 가스레인지 당한 거 같네’

 


‘가스레인지가 아니라 가스라이팅이지 토모야’

 


‘토모 아니거든?’

 


‘스틸 드라코, 채팅 꺼라.’

 


‘리마토르 교수가 계속 강연해도 괜찮은 거 맞아?’

 


‘교수 입장도 들어봐야하겠지만 이건 교수가 쓰레기다’

 

 


“....”

 

탈론 페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칸도, 리마토르도 마찬가지였다. 오르카호에 리마토르가 합류한 이후 대체로 호의적이었던 여론이 하루아침에 그를 죽일 놈으로 몰고 가자 그 자리에 있는 세 명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제 어쩌죠?”

 

침묵을 깬 건 탈론 페더였다. 우려가 가득 어린 목소리로 둘을 돌아보며 방법을 물은 그녀였으나, 칸과 리마토르 모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망부석이 된 것처럼 인터뷰가 끝났는데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실시간 채팅의 행렬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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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이 날린 주먹이 제대로 들어갔네. 과연 리마토르는 이 위기를 잘 타개할 수 있을까?


원래는 이번 편에서 공작을 파훼하는 모습을 넣으려고 했는데 묘사를 세세하게 넣다보니 밀리게 되었네. 분량 조절에 실패해서 미안하다.



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