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49543871 - 시리즈 모음집












"흠…"



격납고에 들어가려던 칸의 손이 멈춰섰다. 두꺼운 철제문 뒤편에서 무언가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리..?”




철제 문 건너편에서 들리는 것은 마리와 타이런트의 목소리였다. 무심코 그 대화 내용에 집중하려던 칸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부하가 저지른 실수를 대장이 반복해서는 안되겠지.



쓴 웃음을 지은 칸은 문을 열려고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대화는 끝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격납고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




이 세계는 원작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 애들이 유사 피폐물을 찍었던 게 첫번째 이유지만 내 지분도 상당할 것이다. 아니, 나는 오르카에 남아 계속 활동하고 있으니 지금 시점에서는 내가 바꾼 일이 더 많겠지.



요정마을에서는 로버트가 죽지 않고 오르카에 합류했으며 메이는 기타를 연주하기도 전에 처녀 딱지를 때버렸다.



이런 여러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을 뽑으라면 역시 알바트로스의 합류일 것이다. 그 일로 AGS는 연대 단위로 스틸라인은 사단 단위로 늘어나서 오르카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스틸라인은 그 숫자가 더 이상 1개 사단으로는 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마리는 대장이 되었다. 사령관이 슬픔에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임시 사령관으로서 오르카를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잡음은 없었다. 실제로 그녀의 승진을 탐탁치 않아하던 이는 단 한명, 마리 본인 뿐이었다.



스스로 자격 없다고 말했던 그녀였기에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엄격해졌다. 작은 잘못도 넘어가지 않고 배울 것이 있다면 일개 병사에게도 머리를 굽히고 들어가 배우고자 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처벌을 부탁한다. 자네가 내 잘못에 따른 처벌의 내용과 수위를 정해줬으면 한다.”






***






처벌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의 마리의 행동은 내 예상대로였다. 마리가 사과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이상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니 어찌보면 당연한거지만.



물론 그녀와 만난 내가 반사적으로 극존칭을 쓰는 바람에 사석에서는 편히 말해달라고 신신당부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말 평범한 사과였다.




“미안하다. 타이런트, 정말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고




“정말... 미안하다.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대장의 직위를 가졌음에도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다음이었지만.




"...역시 말 뿐인 사과만으로는 부족하겠지. 난 자네의 목숨을 위협했다. 그러니 내게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려줬으면 한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모든 생각이 멈췄다. 두뇌서버가 디도스 공격이라도 당한 느낌이었다.




"처벌이라 하셨..했..예?"




혀도 없는 입에서 발음이 꼬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못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마리는 구태여 현실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게 해주었다.




“처벌을 부탁한다. 자네가 내 잘못에 따른 처벌의 수위와 내용을 정해줬으면 한다.”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나보다 별이 두개는 더 많은데 처벌을 내리라고?



부하도 통솔권도 없는, 1인 사단이라고 사단장이 된 로봇이 오르카 유일 대장님께 처벌을? 분명 병사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면 고개 숙여 가르침을 청한다고는 들었지만 그것이 코앞에 닥친 현실이 되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관인 그녀의 처벌을 내가 정하는 것은 그녀의 체면에도 좋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극구사양의 뜻을 전하려는 순간




“부탁한다…”




한없이 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내 시야를 변화시켰다. 내 시야와 함께 구해준 늠름한 군인은 한 명의 쓰러져가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쓰러져가는 여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이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짙고 깊은 감정이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나서야 우둔한 머리가 정보를 취합하며 빠르게 퍼즐을 짜맞췄다. 



왜 눈치채주지 못했던걸까. 마리는 뛰어난 지휘관이지만 0명인 사망자를 만들어내는 기적의 용사는 아니다. 오르카의 임시 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하는 동안 분명 수많은 희생을 치뤘을 것이다. 



그녀는 그 모든 희생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으리라. 하지만 모두를 이끄는 자가 또다시 쓰러지는 순간 생겨날 더 많은 희생자가 두려워 억지로 일어나 있었으리라.



그런 그녀가 대장이라는 직위를 받게 되었을 때 무슨 감정을 느꼈을지, 그 감정의 편린이 그녀의 목소리를 타고 내 머리에 들어왔다.



그렇기에 말했다. 평균적인 처벌 수위를 모르고, 그녀가 가진 죄책감의 모든 것을 보지 못한 지금의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수많은 죄책감에 짓눌린 그녀가 나를 향한 죄책감만큼은 덜 수 있을 조금 무리한 부탁을




"마리, 그러면 나중에 내 부탁을 들어줘. 그게 내가 내리는 처벌이야."


“고작 그런 것으로 되겠나…?"


“대신 그 부탁을 절대 거절해서는 안돼.”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마리의 대답은 조금 늦었다. 하지만 그 대답 안에는 긍정이 담겨져 있었다.




“알겠다. 그것으로 속죄가 된다면… 받아들이겠다.”




여전히 어두웠으나 조금은 빛을 되찾은 목소리로 마리가 대답했다.






***





AGS도 두통을 느끼는가? 적어도 타이런트는 그런것 같다.



이 몸으로 단순 고통뿐 아니라 두통마저도 인간이던 시절과 비슷하게 느끼고 있다는 점은 분명 신기한 사실이다. 그 원인이 평소에 쓰지 않던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라는 인간적인 이유라는 것은 더더욱.



이 두통이 마냥 인간 시절의 환상통은 아닌지 실제로 두뇌회전과 몸동작이 느려지고 있다는게 체감이 된다. 어쩐지 나치고는 상황판단이 빠르다 헀어. 머리에 들어있을 CPU는 지금쯤 활활 불타오르고 있겠지.



'그렘린… 아니 포츈한테 냉각수 좀 갈아달라고 해야겠다.'



포츈에게 안부인사와 용건을 간략하게 적은 메세지를 보내려는 순간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나?"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빼꼼하고 튀어나왔다. 스틸라인에 이어 호드의 대장님의 방문이었다.




"얼마든지."




오래간만에 보는 그녀였지만 평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다만 볼 때 마다 칠하고 다니던 워페인트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임무 때문에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고…’




임무를 제외하면 그녀가 나를 찾을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분위기 상 잡담이나 나누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늘 그랬지만 오늘은 무언가 더 진지한 느낌이다.




"자네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군. 그 내용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뭔데 그래?"




소문하니 스틸라인 전선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아마 브라우니들이 또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거겠지.



엉뚱한 소문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린아이들을 꾀어내어 잡아먹는 괴물이다 같은 헛소문은 아니겠지?




"자네는 인간인가? 아니 인간이었나?"


“에…?”




시발 차라리 헛소문이 낫겠네.



상상하지도 못한 그녀의 충격발언에 생각이란 것을 담당하던 회로들이 전멸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내 머리는 용캐도 아무 말 안하면 더 의심 받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도달은 했지만




"어떻... 아니. 아니. 내가 인간이라니. 무슨 소리야. 낮술이라도. 한거야?"




거기까지가 내 머리의 한계였다. CPU는 장렬히 전사했나보군

 



“역시 그랬군.”


"…이미 확신하고 있었어?"


"어느정도는"




칸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놀리듯 살짝 미소지었다. 이렇게 보니 너구리보다는 여우 같네.




"...소문이면, 다들 알고 있는거야?"


"소문이라고는 했지만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은 소문이다. 적어도 사령관은 알고 있겠지만."




소문이 아니라 기밀이었나. 리앤이 갑작스래 찾아왔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무서운 여자야.




“하…전부 까발려지는 것도 시간문제겠네…”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거면서 왜 굳이 숨기고 있었나?"


"어차피 말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테니까. ‘난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타이런트가 되버렸다’ 라고 말하면 누가 믿어주겠어?"


"흠… 기술팀 중 몇몇은 진지하게 받아줄 것 같다만."


"좀 봐줘. 내 몸에 환장하는 공돌이는 지금도 충분하니까."




순간 내 몸을 해체할 때의 그렘린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은 한명으로도 충분하다.



진심으로 질색하는 내 목소리가 웃겼는지 칸이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 덕분인지 과도한 긴장 때문에 머리가 강제 포맷이라도 된건지 갑작스래 긴장이 확 풀렸다.



아니면 그냥 자포자기했거나




"그래서..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려고 온거였어?"


"그건 첫번째 의문이었다."


"그러면 두번째 의문도 있나보네"




내 말이 맞는지 칸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바로 다음 질문을 던지며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검증시켜줄 뿐이었다.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은 남아있나?"


"이 몸이 되는 순간만 빼면 전부 기억하고 있지."


"그러면 자네는 그 몸이 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나?"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사람이었지? 어디 모난 곳도 특출난 것도 없는 그런 사람."




분명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칸은 어느때보다 진지한 태도로 변해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를 돕는건가?"


"그게 왜?"


"우리는 바이오로이드다."


"그게…"



또 한번 똑같은 말로 대답하려다가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평범한 인간과 내가 살던 세계에서 평범한 인간은 다르다.



이 세계의 평범함이란 바이오로이드를 도구로 보는 것을 의미했다.




"기짓말을 하고 있는건가?"


"이미 다 들킨 판국에 내가 굳이 그러겠어?"


"바이오로이드인 우리를 인격체로 보는 사람이 평범한 인간일리가 없다는건 알고 있겠지?"




말문이 막힌 나를 칸이 대답을 원하는 듯 바라봤다. 뭐라도 말해주고 싶다. 하다못해 진실을,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그곳은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라고 말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믿어줄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 행동에 설득력이 생기기는 할까? 자신을 도구로 보는 인간들에 의한 상처가 있었을 칸에게 인격조차 없는 그저 데이터에 불과했던 모습을 말해도 괜찮은걸까?



머리 속이 너무나도 혼잡해 생각이 조금도 진전이 되지를 않는다. 저 의문 중에는 문제라고 볼수도 없는 것도 존재하는데 그것조차 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백지가 되었다기 보다는 너무 많은 색이 칠해져 흑빛의 종이가 되어버린 것과 같았다.



“나는 자네의 성격이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내 머리에 심어진 인간을 향한 충성처럼.”



그 흑빛 종이의 여백에 칸의 말이 새겨졌다.



“이제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알고 싶다. 머리 속에 지배가 새겨지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가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칸이 해답을 갈구했다. 그러나 나는 매마른 우물이다. 목마른 자들을 불러 모으지만 줄 수 있는 것은 실망감 뿐이다.



해답을 줄 수 없는 우물인 나와 목마른 순례자인 그녀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길게 남았다.



그 긴 침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 아니 AGS에 의해 깨어졌다.




[타이런트, 알바트로스다. 즉시 출격을 준비하도록.]




동시에 칸에게도 누군가의 연락이 걸려왔다. 정황상 나와 같은 내용이겠지.




"...가봐야겠군."




그렇게 말한 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가는 그녀를 향해 무엇인가 말해보려 했지만 메마른 밑바닥이 드러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별 하나 없는 밤하늘 아래에 이형의 존재들이 서있었다. 그 이형의 존재들의 이름은 각각 둠이터와 네스트, 모두 철충의 연결체라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보통의 개체보다 거대했고 색도 백금 혹은 은빛을 띄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연결체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그것들은 한 방향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를 숙이는 방향에 있는 자는 철의 교황. 그의 앞에는 검은 액체로 가득찬 관과 같은 물체가 놓여있었다.




"부활 의식을 거행하겠다."




철의 교황의 무거운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관에 담겨있던 검은 액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태어나거라. 익스큐셔너."




교황의 선언과 함께 붉은 벼락이 검은 액체가 만들어낸 웅덩이를 향해 떨어졌다. 



벼락을 맞으며 검붉은 색으로 변한 웅덩이가 마치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며 무언가를 토해냈다.

 



"크아아악!! 케흑.."


 


갓난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듯 검은 액체에서 태어난 이형의 존재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비록 본래 모습보다는 작고 또 허약해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은 분명 익스큐셔너였다.




"크윽… 교황 성하? 어찌하여..?"


"속죄하지 못한 죄인에게 발언권은 없다. 잊어버렸나? 익스큐셔너."


 


교황의 말에 익스큐셔너는 다급히 머리를 숙였다.




"네스트는 죄명을 읊어라"


 


허공에 떠오른 네스트가 푸른 빛을 엮어내었다. 빛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 같은 것이 펼쳐짐과 동시에 네스트의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울려퍼졌다.


 


"죄인 익스큐셔너는 외신이 뿌린 씨앗을 처단하지도 회유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외신의 씨앗에게 죽임을 당하여 교황 성하께서 부활 의식을 거행하시게 되었다." 


 


네스트의 말이 시작되고 이어지자 익스큐셔너의 머리는 그 위에 무게추가 올려지기라도 한것처럼 더욱 아래로 향했다.


 


"이 일로 우리 일족을 구원할 모독의 날은 늦춰졌다. 그러므로 죄인은 교단의 규율에 따라 3번의 속죄를 치를 것을 명한다."


 


네스트의 말이 끝나자 익스큐셔너가 고개를 들고 교황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교황의 앞에 선 순간 교황의 뱀과 같은 몸에서 3개의 검은색 촉수가 튀어나왔다.



끝부분이 작살과 같은 3개의 촉수가 순식간에 익스큐셔너의 몸에 꽂혔다.

 



"끄아아아악..!!"


 


그의 섬뜩한 비명이 울려퍼졌지만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이도 미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익스큐셔너조차 비명만 지를 뿐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기괴한 의식이 시작된지 어느덧 5분이 흘렀다.




"이제 되었다."


 


교황의 선언과 함께 익스큐셔너의 몸에서 촉수가 빠져나왔다. 촉수가 있던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기괴한 문양만 남았을 뿐 상처는 없었다.


 


"이것으로 익스큐셔너의 부활 의식과 속죄의 의식을 모두 마치겠다. 모든 일족들은 일이 끝나는대로 귀환하도록"




말을 끝마치자마자 교황은 빛을 흩뿌리며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익스큐셔너는 고통의 후유증 때문인지 가만히 서서 조금씩 몸을 떨어댈 뿐이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둠이터가 서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익스큐셔너… 강철의 몸을 받아들인지 1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에게 지다니…"




둠이터는 자신의 흉악한 이빨을 익스큐셔너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마치 자신의 다음 말을 그의 귀에 새겨넣으려는 것처럼.



 

"완전 허접이네."

 



말을 끝마치자마자 둠이터는 듣기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야 칼잡이, 너 가기 전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나냐?"


"진짜 하지마라…"


"흠흠… 교황성하의 기물인 눈까지 받은 내가 질것 같나? 어이쿠 져버렸네? 우리 익스큐셔너 어쩌냐? 응?"



어느새 다가온 네스트까지 조리돌림에 합류했다.



"빨리 인정해. 익스큐셔너. 태어난지 1년도 안된 신생아에게 졌습니다. 해봐."

 

"아니 니들이 한번 싸워봐고 말해! 외신이 뭔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그 녀석 완전 괴물이었다니까?"


"그런 말은 하면 안되지. 네스트, 너 익스큐셔너가 내려가기 전에 나한테 또 뭐라했는지 아냐?"


"야! 그건 말하지마! 야!"




무게를 잡은 둠이터의 입에서 익스큐셔너와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군인이 걸음마도 못하는 어린 것에게 당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나? 크하하하하하! 군인이 애 젖병에 맞아 죽어버렸네!"


“이게…군인?” 




그 뒤로도 네스트와 둠이터의 웃음소리가 한참동안 그치지 않았다. 



익스큐셔너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둘의 웃음소리가 사그라든 후였다.




"후우…내 부활 때문에 모독의 날이 얼마나 늦춰졌지?"


"넉넉잡아 5년?"


"5년씩이나… 제길.."




방금까지 웃고떠들던것이 환상이기라도 한듯. 분위기는 시커먼 먹물이 뿌려진 것처럼 어두워졌다.




"뭐야, 너 지금 후회하냐?"


 


둠이터가 익스큐셔너의 등을 거대한 다리로 후려쳤다. 제 딴에는 장난으로 친 수준이었겠지만 익스큐셔너의 몸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항의하듯 자신을 노려보는 익스큐셔너를 향해 둠이터가 담담하게 말했다.


 


"성하께서 정하신 교단의 규율을 잊었나?"




둠이터의 목소리에 더이상 경박한 웃음소리는 없었다. 장난삼아 놀리는 기색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는 그저 진실된 조언만이 남아있었다.


 


"속죄를 마친 자에게 죄는 없다. 남는 것은 오직 경험과 배움 뿐이다. 잊지마라."


"...미안하다."


"으이그 답답하기는. 이제 본성으로 돌아가자. 처리할 일이 산더미야."




진지해진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네스트가 익스큐셔너의 머리를 드럼 마냥 두들기며 장난을 걸었다.



"아 진짜 하지마라."


"후후, 외신이 뿌린 씨앗은 신경쓰지마."




네스트가 익스큐셔너의 머리를 두들기던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공간이 일렁이더니 거대한 환영이 펼쳐졌다. 허황된 눈으로 덮인 대지가 만들어지며 진실된 검은 하늘이 가려졌다.




"봐, 지상의 존재들이 움직이고 있어."




눈 덮인 대지 위로 또 다른 환상이 꿈틀거렸다. 그 환상은 얼마지나지 않아 어림잡아도 수백은 되는 AGS가 진격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씨앗은 피어나기도 전에 벌레들에게 갈갈이 찢어질거야."


"…다행이군"




중압감이 줄어들었는지 익스큐셔너의 목소리는 한층 가벼워져있었다.




"돌아가자. 다시 힘을 축적해둬야지."


“그래 빨리 돌아가서 일단 좀 쉬자. 이 못난이 몸도 다시 만들고.”


“이번에는 눈에 보호구라도 달아야겠어.”




네스트가 한쪽 팔을 들어올리자 존재하지 않던 빛이 탄생해 그녀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이내 그 자리에 있던 존재들은 모두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모두가 떠나간 검은 공간에는 네스트의 환영만 남아있었다.



그 환영이 자아낸 수많은 AGS의 군세 위에서 또다시 환영이 꿈틀거렸다.



이번에 만들어진 것은 한 여인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옷을 입은 그러나 눈만큼은 붉은 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은 이유는 많은데 그런 재미없는 것보다 다음화 내용을 궁금해 할 사람이 더 많을테니 그 시간에 한글자라도 더 쓰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