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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아무리 경험이 있다지만 이건 별의 아이의 힘이니까.

운이 좋다면 성공할 것이고, 아니면 직접 나가서 입만 잘 털면 된다는 심정으로 해본 일이었다.

 

 

 

“사... 사령관...?”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네.”

 

 

 

교황이 내 몸을 잠식했을 때의 느낌을 최대한 상기하며 온 몸의 신경을 손 끝으로 집중시켰다.

손가락의 끄트머리가 저릿해지는 감각.

손목으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혈관들이 LED 등이 달린 것처럼 자주색으로 반짝였다. 케이프로 가리고 있었으니 저 둘이 봤을 리는 없지만.

 

 

 

“발키리! 저 인간은 무슨 생각으로 데리고 온 거야!”

 

“잠깐 진정하시죠! 설명은 해드릴 겁니다!”

 

“진정은 개뿔!”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슬레이프니르의 얼굴 혈관이 터져나갈 듯이 붉게 변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는 보는 듯이.

엔진은 망가졌지만 마하 수십의 단위를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버텨내는 몸은 눈 깜짝할 새 나에게 달려들었다.

 

콰각!

 

순식간에 사라진 신형. 바닥에는 균열만 남았다.

고개를 들자 어떤 그림자가 햇살을 가렸다. 발키리가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 거기서 뾰족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발키리만 재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인간을 상대할 땐 명령권을 사용하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는 것도 반군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테고.

 

하지만, 이쪽도 바이오로이드 하나로 겁먹기엔 너무 많은 걸 배웠다.

 

 

 

“첫 발을 내디딘 후 5박자.”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슈슉!

 

등 쪽을 스치고 날아드는 깃털 모양의 비기.

원래였다면 스치지도 않고 피했을 텐데. 

역시 이 신체로는 리리스에게 배운 걸 다 써먹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정도는 케이프로 극복할 수 있지.

입고 있는 케이프를 손으로 쥔 뒤 세차게 펼쳐 슬레이프니르의 눈 앞을 막았다.

 

-상대가 저보다 강하다고 해서 싸울 수 없는 건 아니에요.

 

다음 수로 니킥을 날리던 슬레이프니르가 순간 검게 변한 시야에 주춤거리며 다리에 힘을 뺐다.

 

그럼에도 어느새 내 코 앞까지 달려든 슬레이프니르의 무릎.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무릎의 위쪽을 손등으로 감싸, 뒤틀었다.

 

 

 

“다, 당신 뭐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슬레이프니르.

나는 아직 자주빛 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가볍게 응시했다.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이 때의 슬레이프니르라면 고작 ‘혼란’ 정도로 인간을 향한 적의를 꺾지는 않을 거다.

그 말을 증명하듯, 그녀는 자세를 고쳐 잡고 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스스슷!

 

잔상이 보일 정도의 속도. 그 끝에서도 소닉붐이 이는 것 같다.

 

-상대가 먼저 공격을 온다면, 십중팔구 일직선으로 팔을 내지르기 마련입니다.

 

한 줄기 가닥처럼 수축한 슬레이프니르의 근육이 부들거리며 있는 힘껏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광선처럼 정직한 일직선으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속도가 진짜라면 저건 맞는 즉시 즉사다.

성기능에만 몰빵된 이 신체로 저런 주먹을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쿵!

 

내가 그녀를 향해 앞다리를 뻗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첫 박자 이후 대강 0.5초.”

 

“뭐?”

 

 

 

역시 전부 다 배우진 못했다. 누구처럼 소수 세번째 자리까지 읽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

주먹의 끝을 바라보며 나는 내 시야를 넓혔다. 

포착된 팔의 관절. 그곳을 향해 손등을 집어 넣어 가볍게 주먹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흥분한 건 알겠는데 조금 진정하지 그래.”

 

 

 

그녀가 허리의 힘까지 끌어올려 내지른 주먹은 지금 내 오른팔에 얽혀 있다.

슬레이프니르의 다리 사이에는 내 왼발이 들어가 있고.

반대쪽 팔이 남아있긴 하지만 제대로 힘을 주는 건 지금 자세에서 불가능할 것이다.

 

 

 

“네... ... 네가 어떻게...?”

 

“용이나 라비아타가 왔으면 이렇게 할 생각도 못했을 거다. 너니까 이렇게 한 거지.”

 

 

 

나는 왼팔로 찡그리고 있는 슬레이프니르의 미간을 툭 하고 치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할 여유가 있는데도 명령 한 마디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텐데?

지금 나는 그 새끼가 아니라는 거.”

 

“... ... 그게 어떻게... ...”

 

 

 

온 몸이 결박된 상태가 되고서야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슬레이프니르.

 

익숙한 광경이다. 이전 회차에서 칸도, 마리도, 아스널도, 전부 다 이런 표정을 지었으니까.

복수할 상대가 사라진 것인가, 지금 눈 앞에 있는 자는 믿을 만한 자인가,

수많은 질문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황망함. 그리고 그 끝은 대개 눈물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조금 더 했다.

 

 

 

“흐, 흐아아아앙!”

 

“스, 슬레이프니르? 갑자기 왜... ...”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왜 나만 맨날 이 모양이냐고오!”

 

 

 

댐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눈물.

당황스러움에 발키리에게 눈을 꿈뻑이며 신호를 보냈지만 그녀도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뜰 뿐이었다.

 

짐작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1회차에서 내가 내 정체를 밝힌 것은 잔잔한 분위기의 상담 속에서였지, 이런 격렬한 싸움 도중이 아니었다.

다른 인간이 나타났다는 사실의 충격과 아드레날린이 막고 있던 전투의 고통.

그 둘이 한 번에 몰려들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내버려 두자니 오르카 호까지 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 일단 이거라도 쓰고 있어.”

 

 

 

주저앉은 슬레이프니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나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그리곤 입고 있던 케이프를 벗어 그녀의 등에 조심스럽게 둘러주었다.

너 같은 인간의 냄새가 배어있는 물건은 어깨에 걸치기도 싫다며 몸부림치는 그녀였지만, 이거 입은 지 20분도 안 지난 거라고 말하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그렇게 조용해진 슬레이프니르를 향해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당장은 받아들이지 못할 거 알아.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테고.

그러니까 일단 천천히 알아가자고. 뭐 궁금한 거 없어?”

 

“... ... 궁, 궁금한 거...?

 

 

 

눈 속에 녹아있던 살의가 서서히 사그라든 슬레이프니르가, 잠시 우물쭈물 대더니 입을 열었다.

 

 

 

“내... 내 날개, 저거 어떻게 한 거야?”

 

 

 

그녀가 뒤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는 비행 엔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날개라...

눈물을 글썽이는 슬레이프니르를 보고 있자니 제비 날개를 부러뜨린 놀부가 된 느낌이다.

 

 

 

‘... 하긴, 지금 내 목표가 놀부 심보긴 하지.’

 

 

 

나는 고개를 한 번 풀어준 뒤, 내 손을 바라보았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혈관. 피 대신 오리진 더스트가 흐르고 있는 듯한 이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별의 아이는커녕 추기경의 존재도 모르는 지금 상태에서는... 그래, 그냥 이렇게 얘기하자.

언젠가 설명해줄 수 있을 때가 오겠지.

 

 

 

“그냥 염동력이야.”

 

“응?”

 

 

 

슬레이프니르의 날개에는 엔진마다 작은 제어 부품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에 이상이 생기면 안전 시스템이 강제로 부팅돼 시동이 꺼지게 된다. 공중에서 폭사하는 건 막아야 하니까.

 

나는 그 중 하나의 전선을 잘라냈을 뿐이다. 

그것만 이어 붙이면 끝날 일이지만 날개를 해부해보지 않으면 모르겠지.

 

 

 

“내가 염동력으로 한 일이라고.”

 

“... 농담하는 거지?”

 

“농담인지 아닌지는 네가 와서 확인해봐.

오르카 호로 가면 고쳐줄 테니까 일단 움직이-“
 

 

 

내 코에서 새빨간 피가 주륵 하고 흘러나온 것은 그 때였다.

 

막을 새도 없이 바닥까지 뚝뚝 떨어지는 피.

심지어 입 속도 텁텁해지기 시작했다. 혀 끝에 고인 피의 냄새가 비강을 타고 흘러 들어와 비릿하게 풍겼다.

 

역시... 벌써 힘을 쓰기엔 반동이 심하다.

이제 막 흡수를 시작한 별의 아이의 힘이니까. 그래도 갑자기 혼절하는 경우까지 대비해 놨는데 이 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이, 인간? 뭐야! 갑자기 왜...”

 

“별 거 아니야. 그냥 가서 조금 쉬면 돼.”

 

 

 

물론 일이 끝나기 전까지 쉴 생각은 없지만.

 

 

 

“발키리, 슬레이프니르를 데리고 오르카 호로 돌아가있어. 저 날개는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혼자서 드실 수 있으십니까? 저렇게 보여도 꽤나 무거울 텐데...”

 

“그렇다고 너에게 시킬 수는 없잖아. 네 몸 엉망인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래도 마음까지 망가지기 전엔 구한 것 같다.

 

 

 

“하지만...”

 

“큰 상처 아니니까 무시해.

게다가 실수로 죽어버려도 너희한텐 좋은 일이잖아.”

 

 

 

내 말에 발키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슬레이프니르를 부축해준 뒤, 신묘한 요령이 담긴 보폭으로 건물 아래로 재빠르게 달려갔다.

이 힘에 대해 궁금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꼬투리 안 잡는 건 딱 그 애답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내가 슬레이프니르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반군 쪽에 우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날개를 망가뜨린 것도 떠나지 못하게 막으려 한 일환이었다.

... 이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놀부 같네.

 

 

 

“쿨럭! 쿨럭!”

 

 

 

그리고, 아마 절반 정도는 진짜 놀부랑 다를 바 없을 거다.

멋대로 이야기를 바꾸고, ‘선’을 꼬아버리면서, 아직 흡수도 덜 된 미숙한 힘까지 쓰고 있는 걸 보면 심보가 고약하긴 고약하지.

대낮인데도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 게 보일 것 같다.

 

 

 

“... ... 뭐, 이럴 거 알고 준 기회 아닙니까?”

 

 

 

입에서 흐르는 피를 팔뚝으로 닦으며, 하늘을 향해 얘기했다.

 

 

 

“그렇게 많이 바꾸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붉게 물든 팔을 툭툭 털어버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대중없게 놓인 슬레이프니르의 날개.

전에 들어봤을 때는 분명 무겁진 않았다. 오히려 가벼웠지.

아무리 몸에 부상이 있다지만 이 정도는 분명 들고 갈 수 있을 것-

 

 

 

“응?”

 

 

 

안 들린다. 대체 왜?

땅 바닥에 붙여 놓은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 풀무장이라 그런가.”

 

 

 

하긴, 적진 한복판에 오는데 무기를 놓고 올 리가 없지.

자세히 보니 탄창에 사람 팔뚝만한 총알들이 우수수 들어있다. 기관총 전용 탄창인 것 같은데... 저걸 놓고 갈 수도 없고.

지금 당장 가야 하는데... 결국 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나?

 

 

 

“이 버튼이랑... 이쪽 기판을 조금 연결해보면...”

 

 

 

나는 후유증으로 파르르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준 채 날개의 엔진부를 살펴 보았다.

 

빨간색, 파란색, 화폭마냥 다양한 색채의 회로들이 난잡하게 들어서 있는 기판.

하지만 여기서 필요한 것들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필요한 부분을 연결시켰다.

 

엔진의 안전 장치를 부순 이상 초고속비행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안전 상의 문제가 되는 수준의 속도까지만 그럴 뿐.

호버링이나 느리게 비행하는 것까지 전부 막아두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기능은 이 슬레이프니르에게도 있다.

 

-쿠구구구구.

 

보기 좋게 들려오는 엔진음.

한 개를 제외한 나머지 화구에서 짧은 불길이 치솟더니 공중에 가볍게 떠올랐다.

 

 

 

“... 옛날 생각나는구만.”

 

 

 

나는 날개의 부착 부분에 허리를 맞추고 벨트를 조여맸다.

찌직, 어딘가 부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어차피 고치러 가는 건데 상관 없겠지.

 

툭.

 

건물의 철근을 아슬아슬하게 딛고 선 뒤, 그대로 밖을 향해 한 발자국 걸어나갔다.

순간 중력이 몸을 끌어내리는 감각이 온 몸을 휘감았지만, 벨트에 매인 신체는 허공에 대롱대롱 떠있었다.

내 몸의 무게 때문에 서서히 내려가곤 있었지만 이 정도면 딱 적당하지. 어차피 내려가야 했으니까.

 

 

 

“... 해서,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아무튼 사령관이 이상해진 것만큼은 확실...

...

... ... 슬레이프니르?”

 

“응?”

 

“당신 날개, 아무나 쓸 수 있는 겁니까?”

 

 

 

진작에 오르카 호를 향해 걸어가고 있던 발키리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부축을 받느라 땅만 보고 걸어가던 슬레이프니르가 뭔 소리냐며 툭 하고 콧방귀를 꼈다.

 

 

 

“하, 갑자기 뭔 소리야? 그건 마하 100까지 날 수 있는 초정밀 기계라고.

까딱 잘못하면 초음속으로 날아갈 텐데, 온 몸이 가루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올라탈 엄두도 못 내지.”

 

“... 온 몸이 가루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나 봅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더 이상 놀랄 여력이 없다는 듯, 발키리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위로 올려 슬레이프니르가 위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 야이 미친 새끼야!!!!”

 

 

 

나와 눈이 마주쳤다.

 

빨리 도망가야지.

 

 

 

“어디 가냐고 미친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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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