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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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많은 일이 있었다.

 



함내를 돌아다니며 사과를 하기도 했고, 아직 영상을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상황 설명을 하기도 했다.


‘선’의 꼬임을 최대한 막기 위해 1회차 때처럼 호드, 스틸라인, 캐노니어, 발할라 순으로 돌아다녔지.

 

다만 이미 오해할 껀덕지도 없는 사람들끼리 화해를 하자니 조금 쑥쓰럽긴 했다.

 



간헐적으로 철충이 침공해오는 일도 있었고, 1회차와 마찬가지로 내 의식이 이 녀석과 다시 뒤바뀌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닥터와 새롭게 다시 만든 닥터의 활약으로 별 탈 없이 넘길 수 있었지만, 바닐라는 1회차와 마찬가지로 울보였다.

 



슬레이프니르는 내가 한 일들을 영상으로 받아 반군에 가지고 돌아갔다.


그 애들이 어떤 얼굴로 영상을 봤을 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반군이 있는 좌표로 배를 타고 갔을 때 용이 먼저 나와 나를 껴안아 줬던 게 기억 난다.


라비아타나 메이도. 1회차 때 날 죽이려 했던 에키드나는 여전히 뾰로퉁한 얼굴로 있었지만.

 



발키리는 그 날 이후로 하루도 빠짐 없이 내 부관으로 살고 있다.


언제 또 도망갈 지 몰라 붙잡고 있을 심산으로 시작한 일이었다만, 요즘은 되려 때놓는 게 더 힘들 지경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제까지 붙어 다닐 거냐며 리리스가 쏘아붙였을 정도니까.


생각해 보면 이 함선에서 가장 사랑이 고팠던 아이는 발키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반군 이후로 김지석의 묘를 찾아 몸을 바꾸고, 겸사겸사 레오나 의족도 만들어줬고,


아 참, 이번에는 묘지기 역할을 하고 있던 익스큐셔너를 최대한 손상 없이 닥터에게 전달해줬다.


1회차에서 라비아타가 산산조각 낸 걸 보고 닥터가 세상 무너져라 통곡하던 걸 생각하면... 좀 고생하긴 했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렇게 해야겠다 싶다.



 

아무튼, 교황도 그걸 보고 있었던 건지 한 동안 철충 때문에 한창 발이 묶였었다.


한시라도 빨리 괌으로 가야 했는데, 속이 터질 노릇이었지.


하지만 전장을 그냥 괌으로 옮겨버리자는 용의 판단 덕분에 그 많은 양의 철충들은 우리가 아닌 로버트의 타이런트 부대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과연 오르카 최고의 전술가답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덕분에 타이런트가 없어진 로버트는 우리가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요정 마을 트리오와 함께 로버트의 비밀 기지에 몰래 들어간 우리는 네 명으로, 특히 알프레드의 도움으로 로버트의 핵심 코어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요정 마을에 걸렸던 세뇌도 풀렸고, 세레스티아의 활약으로 나는 다시 한 번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벚꽃 나무가 만개하는 모습을 보았다.

 



앨리스는 어떻게 했냐고?


그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집중 케어를 해준 덕분에 잘만 살고 있다.


벚꽃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내 옆에 앉아 참치 덮밥 먹고 있었으니 말 다했지, 뭐.


지금도 그 참치는 어디서 낚아왔는지 모르겠다. 설마 미사일로 잡은 건 아니겠지...?

 



레아의 요청으로 열었던 꽃꽃이 대회는 그대로 열렸다.


물론 리제도 멀쩡한 상태로 참가했었고.


그 때 대회 1등을 했던 게 아마 리제가 만든 ‘얼음꽃 주인님 동상’이었던가?


페더가 주변 꽃들을 얼음으로 코팅해주고, 써니의 홀로그램 꽃잎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데코레이션을 해줬으니 이기지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었지.


‘미스’가 된 알프레드가 내 옆에서 흐뭇하게 웃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광택이 반짝이는 검은색 단백질 덩어리 두 개가 흉부에 달린 채 흔들리는 모습은 9회차가 되도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다.



 

뭐, 그 다음은 좀 쉬다가 1회차와 똑같은 방법으로 오메가를 잡았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여왕과 카르디아를 만났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


처음 나를 본 여왕이 그 말을 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거기서 잘못 말하면 ‘선’이 미친 듯이 꼬일 게 뻔했기에 나는 발뺌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카르디아는 그럴 만한 눈치가 없었고, 나는 너스레 떨며 그 애를 오르카 호로 데리고 왔다.

 



그 다음은 VR 세계.


다행히 미리 준비를 해놓은 덕분에 이번에는 다섯 명이 아니라 오고 싶은 대원들은 전부 다 데리고 올 수가 있었다.


실시간으로 늘어가는 접속량에 놀라는 ‘즐거운 토모’ 양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뒀어야 했는데.


지금도 리앤에게 그 때 얘기를 하면 얼굴이 빨게 진 채 화를 내곤 한다. 자긴 그저 오붓하게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을 뿐인데 몇 백 명씩 들어와서 얼마나 놀랬는지 아냐고.


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기억해주는 거니까 좋은 거 아냐?’라고 말하면 늘 말싸움에서 이기는 건 나다.

 



그리고... 그래. 사향도 있었지.


VR 게임의 클리어 조건을 모두 끝낸 뒤에 대원들을 로그아웃시키고 잠시 고민했었다.


이전과 같이 죽음을 반복해야 하는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상대해야 하는지.


하지만 추기경 중 가장 세력이 강한 녀석을 내버려둬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선’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결국 리앤만 내보낸 뒤, 나는 혼자서 녀석을 맞이했다.


죽고, 죽고, 또 죽고. 질릴 만큼 경험해봤던 거지만 늘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점차 축적되는 별의 아이의 힘 덕에 참을 만했고, 무엇보다 시라유리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몇 번씩 회귀를 반복했다.


그렇게 12번째가 됐을 때였나, 나는 마침내 시라유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나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 때문이었을까,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저 시나리오를 진행시키고, 사향과의 전투를 준비하며 조금씩 마음을 접어갔을 뿐이었다.

 



물론 늘 그랬듯 먼저 다가온 것은 그 아이였고, 나는 다시 그 아이에게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닥터에게 그 아이를 빼낼 수 없느냐고 물어봤지만 애초에 실존하던 아이가 아니라 빼낼 의식 데이터가 없다고 했다.


의식이 없다라.


그럼에도 날 울린 그 아이는 대체 뭐였을까.


그런 의문과 함께 사향과의 결전은 마무리되었다.

 



뭐, 그 뒤로 아자젤도 만나고, 버려졌던 교회도 수리하면서 스틸라인 여름 수련회가 다시 열렸다.


아자젤 혼자만이 알고 있던 그 동굴은 물놀이 하러 찾아온 온갖 브라우니들로 가득 찼었고, 그 덕에 레프리콘들은 심심할 틈이 없었다. 자기 아랫기수 관리를 해야 했으니까.


그 이후로 부러진 날개도 다시 붙이고, 20kg 고작이었던 아자젤의 몸도 다시 살이 붙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살의 최대 주주가 밥이 아니라 과자라는 거. 베로니카들이 자기네 천사 관리에 진땀을 빼고 있다는 뒷소문이 도는 건 나중에야 안 사실이다.

 



그 다음은 델타랑 펙스였지.


나는 델타는 가짜 회장으로 속인 뒤 서둘러 오드리를 구출하고 그 즉시 빠져나갔다.


뒷정리는 AGS 두 명이면 충분했으니까


타이런트가 뿜은 브레스가 도심의 역장을 꿰뚫었고, 그 불길의 심지를 뚫고 알바트로스가 나타나 도시의 하늘 전역에 리멘을 열어 미믹을 쏟아 부었다.


오드리는 그 장면이 델타와 회장의 화형식보다 더 Impressive 했다고 한다. ‘인상적이다’라고 하지 않고 굳이 영어를 고집하는 건 딱 그녀답다.

 



낙원도 뭐... 비슷하게 끝났지.


일부로 대원들을 보내지 않고 나 홀로 낙원에 들어가 간만에 여유를 좀 즐겼었다.


길거리에서 떡볶이을 사먹는 나를 보고 데우스는 세뇌 작업이 잘 됐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닥터가 준 인이어 덕분에 그런 녀석을 오히려 역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원천 기술에 관한 자료는 우리쪽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녀석이 굳이 마키나의 낙원을 써먹으려 한 덕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정도가 있지. 딱 녀석이 내 아버지를 들먹일 때까지만이었다.


다른 욕은 다 참아도 패드립은 못 참는다 하지 않던가?


안 그래도 내 아버지 손목에 금으로 도금된 롤렉스 시계가 차있는 것도 불쾌했는데 '한국 목사 다 거기서 거기다.'라고 말한 순간 아예 뚜껑이 열려버렸다.


밖에서 대기하던 대원들에게 진입 명령을 내린 다음, 감마의 함선 어나일레이터 주포로 놈이 있던 황금 신전을 그대로 아작을 냈다.


그 다음은 광자 집속 장치의 통제권을 빼앗은 마키나가 상황을 끝냈고. 하여간 화나면 무서운 아가씨라니까.

 



상견례는 어떻게 됐냐고?


뭐, 그 때쯤이 되니 나 스스로도 지구로 향하는 포탈을 잠시나마 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사이 나는 조용히 두 분 모시러 왔고, 내가 남겨둔 쪽지를 보고 기다리고 계시던 분은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나를 반겨주셨다.


그 다음에는 와서 호강시켜드리고... 가시겠다는 두 분 배웅해드리며 끝났지. 이 때가 아마 내가 이곳에서 보낸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엡실론과 트리아이나를 거의 동시에 만난 건 그 후로 한 달쯤 뒤였다.


오비탈 와쳐를 구해달라는 요청과 우주로 가고 싶다는 바이오로이드의 꿈.


참으로 기가 막힌 때에 아귀가 맞은 두 명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소우피쉬가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피쉬’라는 이름을 달고서 하늘로 날아가겠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뭐, 덴세츠는 하늘 나는 고래도 만들었는데 안 될 게 뭐 있나?



 

그렇게 위로 올라가서 철의 탑도 부수고 감염 성채도 부수고.


애들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줬지. 그러는 동안 오비탈 와쳐 애들 환영식도 준비했었고.


내려오는 애들 수천 명을 한 명 한 명 다 인사해주려니 목이 빠질 지경이었다.


아랫도리도 마찬가지로. 스파토이아와 후사르, 수십 년 동안 참아온 성욕을 한꺼번에 덮쳐 오는데 버텨낼 제간이 없었다.


아마 별의 아이의 힘이 정력을 강화해주는 효과가 없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정력 강화라니. 안 어울려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별의 비극을 막을 생명 창조와 관련된 거라 그런가. 효과가 쩔긴 쩔더라.

 



여하튼, 세 번째 추기경의 작품을 보고 내 조언을 통해 정체를 파악한 닥터는 단숨에 연구에 몰두했다.


명령권 뒤틀기, 바이오로이드 신체의 극적인 강화, 부작용 완화 프로세스 개발,


여태껏 없던 발견이 하루 걸러 하루마다 발견되었고, 덕분에 내가 오비탈 와쳐에 짜여지는 동안 다른 대원들이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전부 다 생각한 대로였지. 오비탈 와쳐가 그랬던 것만 빼면.

 



물론 모든 이야기가 다 그렇게 흘러갔다는 얘긴 아니다.

 



뜬금 없이 슬레이프니르가 프로젝트 오르카 이벤트와 똑같은 옷을 입고 와서 아이돌을 하겠다고 하질 않나, 


트리아이나와 LRL을 위시한 꼬마 탐험대가 가고시마 지역의 숨겨진 코헤이 교단을 발견하질 않나.


한국에서 숨겨진 김칫독을 찾는 와중에 갑자기 장화가 튀어나와서 몽구스 애들과 한바탕 싸우질 않나,

 



정신 나갈 것 같은 일들이 여럿 벌어지긴 했지만 여차저차 잘 추스릴 수 있었다. 애초에 그리 심각한 일도 아니었었고.


게다가 장화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몽구스 팀이 잘 붙잡아 왔다. 애들이 바보도 아니고 한 명에게 당할 리가 없잖는가?

 



...아, 그래. 딱 하나 심각한 일이 있긴 했다.


‘지구’가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는 것.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원인이 짐작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 아이의 말수가 줄어들 때마다 내 몸의 혈류를 타고 흐르는 힘이 강해졌으니까.

 



그래도 그 애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다시 보자.’


그게 허풍일 리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내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인님.”

 

“응.”

 

“이제, 마지막인가요?”

 

“그래.”

 

 

 

그렇게 우리는 참 오랜 시간을 보냈고,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참, 정말로 많은 시간을.

 

 

 

“이제 돌입 준비를 하지, 사령관.”

 

“칸, 이번에 오리진 더스트 시술로 더욱 강해졌다는 건 알지만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각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뭐? 칸, 너 또 강해졌어?”

 

“반사 신경 및 근력의 수축 이완 정도가 조금 향상됐을 뿐이다, 레오나.”

 

“하, 참... ... 이러면 호드는 너 혼자 다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원래부터 그랬는데 뭐 어떠나?”

 

“자신감은...”

 

“게다가 우리 대원들도 나만큼 강해졌으니 이젠 나 홀로 싸울 수도 없을 거다.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일 텐데.”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거대한 직육면체를 앞에 두고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 대원들.

 

그 뒤로 익숙한 눈빛들이 길게 늘어졌다.

 

 

 

“오빠, 이번 일만 끝나면 진짜 다 자유라 했지? 그랬지? 나 그렇게 알고 있는다?

추기경이 만들고 간 살점 덩어리 때문에 요 근래 랩실에서 썩기만 했단 말이야!”

 

“후후, 제 몸에 오리진 더스트를 넣으실 땐 그렇게 즐거워 보이셨으면서 닥터 양도 참.

그나저나 주인님? 이번에 저희 페어리가 예쁜 정원을 꾸며봤는데 한 번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하! 부끄럼을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렇게 사령관을 데리고 가면 또 저번처럼 난교할 게 뻔한데, 저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또 가겠어?”

 

“... 대장, 우리 사령관이 바보가 아니었다면 대장은 처녀 딱지 떼지도 못했을 겁니다.

전처럼 그 커다란 가슴 그냥 들이미십시오. 제가 그렇게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넌 조용히 하고 있어 나이트앤젤!”

 

“돌겠네 진짜.”

 

 

 

교황의 직육면체를 눈 앞에 두고도 긴장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대원들.

뒤에서 둠 브링어와 스틸라인의 피닉스가 비처럼 쏟아붇는 폭탄의 후폭풍이 태풍처럼 불어 닥쳤지만 코웃음을 치며 잡담을 계속할 뿐이다.

 

콰과과광!

 

그야말로 재가 되어가는 철충 무리들.

지평선을 뒤덮고도 한 층이 더 쌓일 만큼 몰려들고 있었지만 두려움보다 안쓰러움이 먼저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물론 저들이 저렇게까지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조금만 있으면 교황의 진화가 끝이 나니까.

저들의 생애 처음으로 전능한 외신의 힘이 자신의 손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함이다.

 

차자자장!

 

그 순간, 하늘에서 돌연 거대한 칼날 수십 개가 메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거대한 사막 한 가운데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한 크기의 거검(居劍). 족히 십여 미터는 될 법한 검의 향연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행관?”

 

 

 

내 말을 들은 대원들은 마찬가지로 입술을 비죽이며 속닥거렸다.

 

 

 

“집행관이라? 그건 낙원에서 마키나 양이 다 잡은 것 아니었나?”

 

“모르지 뭐. 그 때 겨우 도망친 녀석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저거 내가 막아야 해?”

 

 

 

메이가 길게 하품을 내뱉으며 하늘의 검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검의 그림자가 점차 짙어지는 가운데, 메이의 옥좌 주변을 감싸는 역장의 잔흔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막으려 하면 얼마든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충격파가 인근 대지를 부술 것이다.

저 정도라면 교황의 직속 집행관 수준은 된다는 건데, 조금 귀찮을 지도-

 

 

 

“내가 처리하지.”

 

 

 

그 순간, 눈 앞에서 누군가의 신형이 사라졌다.

강화된 시력으로도 찰나로만 느낄 수 있는 갈색의 머리카락.

 

칸이 검의 끝자락을 향해 발을 굴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콰광!

 

그 자리에서 검이 멈췄다.

어마어마한 질량체의 속공이 칸의 발 끝에 살포시 얹어졌다.

그 다음은, 다들 생각하는 대로다.

 

 

 

“이런 선물은 사양이다.”

 

 

 

칸이 발을 오른쪽으로 굴려 검을 그대로 돌려버렸다.

너무도 가벼워 보이는 발놀림.

그 자세 그대로 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쥔 뒤, 있는 힘껏 날려버렸다.

 

쿠구구구궁!

 

다른 검과 부딪힌 뒤, 또 다른 검을 향해 날아가며 요격에 요격을 거듭하는 칼날.

누군가가 기세 좋게 날린 검의 비는 순식간에 흩어지며 직육면체의 표면에 듬성듬성 박혔다.

 

 

 

“어... 어떻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중 의문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하늘에서 은밀하게 위장막을 펼치고 숨어 있던 집행관.

녀석의 짧은 백발이 찰나의 순간 햇살에 비춰 반짝였다.

 

그게 녀석에게는 불행이었다.

 

 

 

“제, 제길, 형제들이여! 급습에는 실패했다!

피조물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에 계획의 재조정을... 커헉!”

 

“찾.았.다.”

 

 

 

순간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끼었다.

정확히는 녀석의 머리카락이 비췄던 주변으로만.

 

검은 구름 사이에선 푸른색의 스파크가 연신 튀었다.

그 속에 갇힌 집행관은 구름에 가려진 채 희미한 괴성만을 내뱉을 따름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벼락으로 가득 찬 구름은 폭탄처럼 터졌다.

그 속에서 검은 재처럼 그을러 버린 집행관에 힘없이 추락했고, 내 뒤쪽에서 거대한 무기고가 격렬한 기계음을 내며 추락의 궤적을 역산했다.

 

 

 

“플로팅 아머리 전개. 포지트론 라이플 이용 권한 승인.”

 

[확인되었습니다.]

 

“어디 보자... 저 놈이 또 살아나면 곤란하니 출력은 1800만 kW로 하지.”

 

[전력 충전 중.]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치며 나타난 아스널이 허공에 부유하는 무기고의 덮개를 열어 거대한 무언가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아머리에서 나온 기계손이 조립대를 형성했고, 그 위에서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저격총이 수십 가닥의 전선에 엮인 채 푸른빛으로 웅웅거렸다.

 

[충전 완료.]

 

그 메시지가 화면에 뜨자마자, 아스널은 익숙하다는 듯 어깨에 총을 견착하고 떨어지는 집행관을 향해 조준경을 겨눴다.

 

 

 

“발사.”

 

쿠구구구구구궁!

 

 

 

레아의 벼락 못지 않은 웅장한 굉음.

저격총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포’에 가까운 포구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이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반작용이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사막의 모래 바람을 손으로 만든 차양막으로 막던 나는 몇 분 가량이 지난 뒤에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완전한 가루로 변해버린 집행관의 몸체였다.

정확히는, ‘몸이었던 것’이었다.

 

 

 

“죽었나?”

 

“죽었겠지 뭐.”

 

“이왕이면 그 커맨드 프레임으로 생체 신호 좀 확인해줄 수 없겠나, 레오나?”

 

“이미 했어. 뒤진 지 오래라고 나오는 것도 확인했고.

다시 일어날 확률이 27.3%긴 한데, 저 꼴 나도 다시 살아나면 인정해줘야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레오나.

다른 대원들도 전부 수긍하는 듯한 표정이다.

전투 속행으로 일어나는 철충 보고 놀라는 얼굴 본 게 엇그제 같은 데 언제 이렇게 컸는지...

 

콰과과과광!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어, 통령이다.”

 

“참모총장도 온 모양이군요.”

 

“날아오는 소리는 못 들었다만.”

 

“초음속으로 날아온 거겠지. 그러면 또 펭귄 날개 타고 온 건가 보네.”

 

 

 

별 거 아니라는 듯 한 마디 내뱉는 메이.

그러자 추락 지점에서 누군가 빽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누구보고 날지도 못하는 펭귄이라는 거야! 난 제비라고!

안 그래, 통령? 이렇게 빨리 나는 펭귄 봤어?”

 

“아직 기운이 넘치나 봅니다, 슬레이프니르.”

 

“에이씨 진짜...!”

 

 

 

흩어지는 먼지 속에서 흐릿한 세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용, 라비아타, 슬레이프니르.

연신 콜록거리며 먼지 구름을 헤치는 슬레이프니르 뒤로 길게 늘어진 핏물이 보였다.

설마 저 세 명이 다친 건가?

행여나 하는 두려움에 달려가려던 나를 보며 용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 피가 아니오.”

 

 

 

먼지 구름이 다 사리지고 난 뒤에서 나는 뒤에 보이는 거대한 덩어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경단처럼 동그랗게 뭉쳐진 철충의 잔해들.

그 사이로 집행관의 검과 서기관들의 깃펜이 부러진 채 박혀 있었다.

 

 

 

“다 죽였는데도 다시 합체해서 달려들더군. 덕분에 검 한 자루가 날이 나갔소.

칼날을 다시 갈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소만, 기다려주시겠소?”

 

“... 그래, 뭐. 그래야지. 검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으니까.”

 

 

 

어느 정도 격렬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닥터의 강화 시술을 받은 용의 검이 빠질 정도면 내부의 저항도 제법 격렬했던 것 같다.

 

그래도 결과를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1회차에서 합심해 달려드는 집행관과 서기관들을 미리 처리하기 위해 나는 저 셋을 직육면체 내부로 들여보냈다.

안에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수를 줄이고 오라는 명목으로.

당연히 고작해야 다섯 여섯 마리 잡고 올 줄 알았다만, 지금 저 강철 경단의 크기를 보아하니 어느 사단을 휩쓸고 온 거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저러니 날이 빠지지.

... 아니, 오히려 하나만 빠졌다고 칭찬해줘야 하나?

 

그 경단을 향해 카르디아가 얼굴을 들이민 것은 그 때였다.

 

 

 

“생긴 걸 보니까 이 대검은 집행관 담나티오 꺼 같고, 저 책은 서기관 필레우스 꺼고...

이건 리켄티아투스 꺼... 저건 코피아 꺼...

세상에... 설마 이 많은 걸 지금 잡으신 건가요?”

 

“엣헴. 내가 조금 대단하긴 하-“

 

“역시 대단하셔요, 라비아타 님, 용 님!

두 분의 무용은 귀에 못이 박도록 들었고 팔이 빠질 만큼 많이 기록했지만 여전히 대단하시네요!”

 

“저기... 나는... ...?”

 

“이번에는 어떤 싸움을 하고 오신 건가요?! 혹시 가장 강한 집행관이 누구였는지는 기억 나시나요?”

 

 

 

뭔가 적을 꺼리가 생긴 게 좋은 건지, 카르디아는 신난 강아지마냥 눈을 깜빡이며 둘에게 연신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함께 다녀온 슬레이프니르는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뭐든 말할 기력이 있는 건 둘보단 슬레이프니르처럼 보였으나 카르디아 왈,

 

‘가장 많은 걸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지치고 힘든 자뿐이다!’

 

라고 하니 뭐 어쩌겠나. 이 꼬마 아가씨의 지론에 태클을 걸 생각은 없다.

 

나는 구체 밖으로 툭 튀어나와있는 부러진 검 하나를 손으로 쥔 채 이리저리 살폈다.

 

 

 

“흐음... 용, 이걸 써먹을 방법은 없을까? 꽤 좋아 보이는데.”

 

“이미 망가진 무구를 애써 쓸 필요는 없소.

다시 재련해보겠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들겠지. 우리에게 그럴 시간이 없다고 한 건 그대잖소?”

 

 

 

맞는 말이다. 애초에 우리가 들고 온 게 더 좋기도 하고.

 

세 번의 추기경 전을 통해 우리는 저쪽의 기술력에 대해 뼈 속까지 우려 먹고 또 우려먹었다.

물론 교황 본인의 무력은 측정 범위 외니 상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놈들이 뭘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단 얘기다.

그러니 굳이 맞지도 않는 무기 쓰느라 고생할 필요는 없겠지.

 

바스락-

 

구체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그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검을 연마하고 있던 라비아타와 용이었다.

 

 

 

“사령관!”

 

“물러나세요 주인님!”

 

 

 

죽은 듯이 구체에 박혀 있던 팔 중 하나가 움찔거리며 박혀 있던 검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경단.

무수한 강철 조각 속에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서기관이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을 나에게로 내질렀다.

 

 

 

“죽어라 이단자!”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던 건가? 몰래 나에게 다가와 암살하려는 계략?

실로 치밀한 계략이다. 의식적으로 가사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 서기관이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을 테니까.

나도 그런 녀석이 있는 줄은 몰랐다. 지난 회차에서도 그런 놈은 본 적 없었고.

여왕이 말해준 것도 아니고... 아마 서기관이 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겠지?

 

하지만 놈들이 정말로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조금은 신체 능력이 뛰어난 녀석으로 골라야 했을 거다.

못해도 집행관 수준은 되도록 말이야.

 

 

 

“어?”

 

철컥-

 

 

 

왜냐하면, 이쪽 경호대장이 강해도 너무 강해졌으니까.

 

놈의 칼이 내 몸에 닿으려는 순간, 내 시야가 푸른빛으로 감싸였다.

 

정확히 녀석의 손과 칼 사이에 솟아오른 역장.

마치 벽에 박힌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서기관이 몸을 떨며 조심스럽게 역장을 쏘아 보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륵-

 

거기에는, 자신보다 먼저 서기관이 된 선배들이 주검이 된 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스륵-

 

그리고 그걸 끌고 오는 백발의 바이오로이드는, 죽일 듯한 눈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양 손이 적의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경호대장.

 

 

 

“지금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는 거지?”

 

“아... 아아아...”

 

 

 

리리스는 가지고 오던 서기관의 시체를 발로 짓밟아 터트려버렸다.

그대로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그녀의 손등에는 섬찟한 혈관이 선명하게 보였다.

 

닥터의 강화 시술 중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바이오로이드.

지금 그녀는 용과 라비아타에 맞먹을 만큼 강력한 존재다.

그러니 아마 이 신참 서기관도 그녀의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절대 만나면 안 되는 바이오로이드 중 하나로.

 

스스슷!

 

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에 작은 먼지가 일었고, 그 순간 그녀는 이미 내 눈 앞에 있었다.

한 손으로 서기관의 뒷목을 움켜쥐면서.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니. 내가 할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목을 쥐고 놈에게서 떼어냈다.

 

별 다른 질문 없이 손에서 힘을 빼는 리리스.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자 서기관을 붙들고 있던 로자 아줄에서 푸른빛이 꺼지며 역장이 사라졌다.

 

두려워하는 듯한 눈빛.

놈의 동공에는 녀석을 내려다 보는 지휘관들의 분노 어린 시선이 비췄다.

하지만 마치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서기관은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스슥-

 

그 즉시,

 

콰직!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른 대원들이 손을 쓴 것이 아니다.

 

 

 

“보... 보라색 눈...? 어떻게 네 놈이 외신의 인장을... 커헉!”

 

“흐음.”

 

 

 

나는 손 끝에 힘을 모은 다음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했다.

 

1회차에서는 철충들의 눈이 보라색이었었지.

하지만 내가 별의 아이의 힘을 충분히 받아들인 다음에도 내 아이들의 눈 색깔은 그대로였다.

창조주가 변한다 해서 피조물이 변하는 건 아니란 얘긴데.

 

 

 

“거기서 관음하고 있는 기분이 어때?”

 

 

 

그 얘기는, 교황이 놈들의 눈을 빌리고 있었다는 것 밖에 얘기가 안 된다.

 

아마 지금도 보고 있겠지. 그리고 웃고 있을 거다.

놈의 눈으로 보기에 우리는 그저 멍청하게 희희낙락 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자신이 별의 아이로 승천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하지만 놈도 이제는 눈치챘을 거다.

 

 

 

“기다리고 있어라, 교황.”

 

 

 

이 행성의 ‘별의 아이’는 한 명이 아니라는 걸.

 

 

 

“커... 커헉!”

 

 

 

서기관의 사지가 자줏빛 기운으로 웅혼하게 감싸였다.

 

으득- 으직-

 

점차 으스러지는 녀석의 신체.

마지막으로 서기관의 눈에서 붉은 귀기가 사라졌을 때, 나는 비로소 녀석을 놓아주었다.

 

콰직!

 

내가 던진 놈의 시체가 데리고 온 경단을 으스러뜨렸다.

수천 조각의 강철로 나뉘어버린 구체.

그 속에서 데구르르 굴러오는 눈동자 하나를 손 끝으로 들어 올렸다.

 

내 손에 닿지 않아도 올라오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보라색 아우라가 흩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이야기했다.

 

 

 

“다음은 네 차례니까.”

 

 

 

대원들을 지나치며 나는 직육면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1회차.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참 오랜 시간을 보냈다.

  

오랜 시간.


2회차가 시작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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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