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리리스, 보고해.”

 

사령관실에 앉은 사령관은 평소처럼 리리스에게 브리핑을 지시했다. 하지만 항상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리리스가 드물게 긴장한 표정을 짓는다는 점에서 그 보고가 일상적인 내용과는 사뭇 다름을 암시했다.

 

“5시간 전, 주인님과 대면을 마치고 돌아가던 리마토르 교수가 시위대에게 집단 린치를 당해 전치 8주의 부상을 입고 입원했습니다.”

 

“거기까지.”

 

사령관은 말을 끊고 커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리리스는 긴장이 피부 아래로 올라와 살짝 몸을 떨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이 먼저 나오지 않았음에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래, 내가 분명 리마토르를 흔들어보라고 했지. 스프리건에 대한 조사가 확실히 끝나기 전까지 말이야. 이렇게까지 다치게 만들라고는 안 했는데. 지금 탈론 허브에 리마토르가 입원했다는 뉴스가 뜨자 동정표가 집결하고 있다고. 이게 리마토르를 위기 상황에 빠뜨리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관찰해서 구 인류의 성향 여부를 검증한다는 초기 목표에 부합하는 상황인가?”

 

“...할 말이 없네요.”

 

리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의 말투가 조곤조곤했기에 오히려 더 크게 그녀를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사령관은 그러지 말라고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참작할 여지는 충분해. 흥분한 집단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건 당연히 아는 일이고, 그 자리에 네가 없었으니 네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없지. 하지만 그 자리에 페로 한 명만 배치한 건 돌발 상황에 대응하기 어려웠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그 점만 책임을 져야지.”

 

“...네, 죄송해요.”


"두 가지야. 하나, 이번 공작은 여기서 중지한다. 둘, 내 다음 지시가 있기 전까지 감시 외에 다른 일은 하지 말도록."


"알겠어요, 주인님..."

 

사령관이 자신에게 맡긴 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리리스를 짓누르자 리리스는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그녀를 보던 사령관은 책상 서랍에서 티켓 한 장을 꺼내 서명을 휘갈겼다. 자신에게 전해진 티켓을 받은 리리스는 백지에 쓰인 사령관의 서명을 보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어리둥절했다. 리리스의 표정을 읽은 사령관은 미소를 지어주며 설명했다.

 

“책임지는 것과 별개로 벌도 받아야지. 침대에서 벌을 줄 테니까 내가 준 백지 동침권에 원하는 일자를 적어와.”

 

“네! 음란한 리리스가 갈게욧!”

 

사령관의 말을 들은 리리스는 언제 침울했다는 듯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벌써부터 기쁘게 웃는 리리스의 모습에 사령관은 한 장뿐이니 신중하게 쓰라고 일러주었다. 리리스가 더 노력하겠다는 말과 함께 업무를 보러 떠나자 사령관은 몸을 젖히며 쌓인 피로를 던졌다. 뭉친 근육이 뚜둑이는 소리로 초인종을 누른 후 고통을 양손 가득 들고 찾아오자 사령관은 오리진 더스트도 이런 부분은 해결해주지 못한다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칸이 직접 찾아와서 항의를 할 줄은 몰랐어. 이건 계산 밖인데.”

 

사령관은 3시간 전에 칸이 자신을 찾아와 리마토르가 시위대에게 린치를 당했다며 조치를 취해달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장면을 돌려보았다. 리마토르가 수복실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생각보다 강한 리리스의 수에 내심 놀라기도 했으나, 그래도 유감 표명만 하고 끝내려던 생각을 조각낸 칸의 항의에 그는 자신이 처음 생각한 것과 갈등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칸이 리마토르를 위해 움직일 정도면 호드가 통째로 포섭되었다고 봐야하나.”

 

리마토르의 숨통을 조이면 돌아올 반작용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점에 생각이 도달하자 사령관은 리리스의 다음 공작을 어느 수준으로 지시해야하는가 생각에 잠겼다. 일단 입원까지 할 정도이니 현 상황에서는 감시 외에 추가로 댓글공작을 지시해도 괜찮은가 고민하던 와중, 그는 문득 자신이 지나치게 한쪽 의견으로 편향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너무 한 방향만 생각하는 건가? 견제가 필요해.”

 

언제나 한 목소리만 내면 제대로 된 결론으로 가는 길이 무너지는 걸 알았기에 사령관은 두 가지 방법을 취했다. 하나는 방대한 분석으로 거의 모든 상황을 앞서보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악마의 변호인이었다. 둘 다 자신의 전속 부관인 아르망이 맡은 역할이었기에 그는 지휘패드로 아르망을 호출했다. 호출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았음에도 아르망은 바로 도착했다. 휴가를 보내고 있었기에 난데없는 사령관의 호출이 귀찮았을 텐데도 아르망은 불평 없는 얼굴로 사령관을 마주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휴가 중인데 불러서 미안해. 내 생각을 검증하고 싶어서.”

 

“폐하께서 저를 부르실 정도면 많이 큰 문제겠죠. 편하게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르망은 사령관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리에 앉더니 웃는 기색을 완연하게 띠었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아르망의 모습이 고마웠기에 사령관은 말없이 믹스커피 한 잔과 크래커를 권했다.

 

“다과가 변변찮아서 미안해.”

 

“커피에 크래커면 훌륭한 조합이지 않나요?”

 

아르망은 보란 듯이 크래커를 커피에 찍어 입에 가져갔다. 오물거리는 아르망의 모습이 흡사 다람쥐 같았기에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사령관이 긴장을 푸리라 생각한 아르망은 예상을 따라 그에게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었다.

 

“폐하, 저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금 무거운 주제인데 괜찮겠어?”

 

아르망은 사령관의 말 뒤에 숨겨진 뜻을 파악했다.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주제이니 함구를 부탁한다는 사령관의 의중을 이해한 아르망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아르망의 답변을 들은 사령관은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르망, 네가 보기에 리마토르 교수는 어떤 사람 같아?”

 

“흠... 연구자이자 현재는 칸 대장님과 열애를 이어가고 있는 사랑꾼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비상한 분이시죠.”

 

“그래. 오르카호에 합류한 지도 어언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리마토르 교수가 특이한 점을 보인다는 정황은 없었어?”

 

사령관의 말을 들은 아르망은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하나의 가능성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수백에서 수천에 가까운 수가 새로 이어졌지만 아르망은 모든 가능성을 빠르고 면밀히 살폈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될 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르망, 질문을 바꿀게. 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리마토르 교수를 두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할까?”

 

“폐하의 행동 말인가요?”

 

사령관의 바뀐 질문에 아르망은 다시 계산을 돌렸다. 방금 전에 답한 질문보다 훨씬 넓게 갈라지는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했다. 특정한 갈래로 이어지는 답을 말하려고 해도 큰 줄기를 짚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많았기에 아르망은 어떤 답을 꺼내야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평소보다 긴 침묵 끝에 아르망은 모든 답보다 한 차원 위에 있는 답변을 도출했다.

 

“폐하께서는 지도자의 책무에 따라 움직이시면 됩니다.”

 

“지도자의 책무라... 알겠어. 답변 고마워 아르망.”

 

아르망의 답변에 사령관은 손으로 턱을 짚었다. 지도자의 책무라는 말을 곱씹던 그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아르망의 뒤를 붙잡았다.

 

“아르망, 이따가 10시에 다시 여기 와줄래?”

 

“알겠습니다.”

 

방을 나가는 아르망은 내심 기대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방 안에 남은 사령관은 착잡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온갖 상념이 교차하며 머리가 점점 혼란해지는 와중에도 그는 책상에 앉아 아르망이 한 말을 입 안에서 굴리며 되새겼다.

 


“지도자의 책무...”

 

 



 

시계는 다시 몸을 돌려 숫자 10에 팔을 뻗었다. 시간에 맞추어 아르망이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로 사령관이 들어오라 말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간 아르망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둥근 원탁에 켜진 촛불과 구하기 힘든 와인을 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령관이었다.

 

“어서 와. 할 이야기가 많다고.”

 

“와인까지 준비하시다니. 폐하께서 저의 시간에 많이 투자하시네요.”

 

“자문료는 언제나 비싸야하는 법이지.”

 

위트 있는 농담을 날리며 사령관이 아르망이 잔에 와인을 따르자 아르망은 감사를 표했다. 불이 꺼진 사령관실을 밝힌 둘 사이의 촛불이 잔 너머로 어른거리자 사령관의 얼굴에 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두운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아르망은 사령관의 농담을 받아쳤다.

 

“자문이라면 알파님도 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아르망 너처럼 깊은 이야기를 막 꺼낼 정도는 아니지.”

 

사령관의 말에 아르망은 미소를 흘렸다. 찰랑거리는 와인을 따라 울렁이는 그녀의 마음은 가벼운 농담으로 전해졌다.

 

“폐하께서 저를 그만큼 신뢰하신다고 해석해도 되죠?”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사령관은 잔을 들어 건배했다. 와인이 향과 맛을 모두 들이마신 그는 식도를 따라 흘러가는 보랏빛 액체의 씁쓸한 뒷맛을 미소에 묻혔다. 그의 쓴웃음을 본 아르망은 계산을 돌려 그가 할 이야기의 무게가 차마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우리라고 생각했다. 빗나가지 않은 예측은 사령관이 먼저 입을 열면서 현실에 그려졌다.

 

“네가 말한 대로 지도자의 책무에 대해서 고민해보았어.”

 

“폐하께서 만족스러운 결과에 도달하셨나요?”

 

“그러면 좋겠지만... 솔직히 모르겠어. 그래서 널 부른 거야.”

 

안주로 꺼내둔 블루치즈를 입에 넣자 쿰쿰하면서 새콤쌉쌀한 푸른곰팡이의 맛이 혀에 감돌았다. 와인 한 모금의 향으로 거리끼는 뒷맛과 상념 모두를 쓸어내린 그는 아르망에게 자신의 의견에 적극적인 반박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일견 편안해 보이는 사령관의 얼굴 뒤편에 드리운 그림자의 무게를 읽은 아르망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령관은 입을 열었다.

 

“생각을 계속 해봤는데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전술에 밝은 이도, 외교를 잘하는 이도, 경제를 살리는 이도 아니야. 아무리 훌륭한 장군이라도 지도자로서 실격일 수 있지. 뛰어난 외교관이 행정을 잘한다는 보장이 없고, 유능한 경제 관료가 전술적 안목까지 탁월하다고 볼 수 없어. 어느 조건을 들이밀어도 지도자가 인간인 이상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지.”

 

“그럼 폐하께서는 완벽한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르망의 말에 사령관은 입꼬리를 엷게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쓸쓸해 보이는 미소였기에 아르망은 그가 무슨 말을 할까 계산을 돌려보았지만 큰 갈래를 짚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가능성이 나왔기에 예측이 되지 않았다. 사령관은 와인을 한 모금 식도로 넘긴 뒤 말을 이었다.

 

“당장 나부터도 완벽하지 못한데, 그런 잣대를 들이대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건 신밖에 없겠지. 코헤이 교단에서 말하는 빛의 의지에 따라 나아가는 신정일치 국가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폐하, 그렇지만 역사에서 정교분리는 기본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의 뜻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전하는 대리인은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죠.”

 

“맞아. 그래서 신이 직접 통치하는 게 아닌 이상 난 완벽한 지도자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럼 현실적인 지도자는 어떤 이여야 하는가? 난 완벽하든 불완전하든 모든 지도자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고 봐. 결함투성이일지라도, 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해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말이지.”

 

“모든 지도자가 따라야 하는 덕목이요? 폐하께서는 덕치(德治)와 같은 민본주의(民本主義)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르망의 말에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더 깊이 들어가야 해’라고 운을 띄워 그녀의 생각보다 한 단계 심화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걸 예고했다.

 

“덕치나 민본주의나 모두 하나의 목적을 가리키지. 휘하의 이들을 지켜라. 지도자라면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삶을 지켜내야만 한다. 이게 내가 찾은 결론이야.”

 

“정석적인 답변이군요.”

 

아르망은 사령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단순한 부족 사회에서도 족장에게 요구되었던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을 지킨다는 사상이 몇 만 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의 오르카호 사령관에게까지 전해지자 그녀는 흥미가 동했다.

 

“폐하, 제가 보기에는 그 답변이 가장 기본적이기에 가장 옳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나도 그리 생각했어. 거기서 만족했으면 지금 너를 안 불렀겠지. 이제부터가 본론이니 잘 들어주길 바라.”

 

사령관은 와인 잔을 비웠다. 분명 향기로운 와인이 몸에 들어가고 있는데 자신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 악취를 풍기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차라리 종잡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곰팡이가 피길 바라며 그는 블루치즈 두 개를 입에 넣고 어금니로 깨물었다. 짭짤하면서 톡 쏘는 향이 머리를 찔렀다.

 

“지도자의 책무는 휘하의 이들을 지키는 거야. 그들의 재산을, 행복을, 생명을 지켜야한단 말이지. 플라톤이 저술한 <국가>를 보면 생산자-방위자-통치자 3개의 계층으로 갈라지는 게 옳게 된 국가라고 나오는데, 내가 보기에 지도자는 통치자가 아니라 방위자가 되어야 해. 외부의 적이든, 내부의 적이든 자신 아래에 있는 이들이 위험할 단초를 제공해서는 안 되지.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펙스로부터, 별의 아이로부터, 철충으로부터 너희들을 보호하는 일. 전술을 통해 교전해서 승리를 거두고 오르카호 내부 갈등을 적절히 봉합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어. 이것만으로 난 잘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대단히 큰 문제에 직면했지.

 

지도자는 휘하의 이들을 보호해야 해. 그럼 휘하의 이들은 뭘 해야 하지? 지도자의 말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나? 지도자의 말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 지도자는 완벽할 수 없기에 언제나 자신이 모자란 분야에 이점을 가진 이를 곁에 두고 자문을 구해야 해. 내가 지금 아르망 너와 하고 있는 일처럼 말이지. 그렇게 해야 아래에 있는 이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 이 자문에 응하는 이들은 수동적이어서는 안 돼. 다들 적극적으로 지도자에게 의견을 내어야 지도자가 놓칠 수 있는 작은 허점도 잘 막을 수 있지. 그럼 자문에 응하는 전문가들만 능동적이면 될까? 지도자도 전문가들도 옳지 않을 경우에는 어쩌지?

 

이런 질문을 이어나가면 모든 이가 각자의 단점을 보완하며, 이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와. 그러면 지도자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이들과 비교해서 가장 우월한 이가 아니지. 여러 의견을 잘 취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일뿐. 그 능력을 갖추지 못해도 조직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조금씩 양도해서 지도자를 만들 수도 있어. 지도자는 특권이 아니라, 가장 앞에 선 이에 불과해야해.”

 

“폐하... 그 말씀은...”

 

분석해두었던 무수한 갈래의 길 중에서 사령관이 말하는 줄기를 찾아 그의 주장을 들여다본 아르망은 그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말한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왜 사령관이 리마토르를 오르카호에 들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사령관은 아르망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파악했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하지만 지도자는 자신이 가장 우월한 이라서 앞에 섰다고 착각해서는 안 돼. 언제나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명심하며 방위자의 업무를 이행해야하지. 

 

내가 사령관에 앉아있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왜 내가 사령관인가’였어. 콘스탄챠와 그리폰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능력이 출중하지도 않고, 너희로부터 신임을 받지도 못했지. 라비아타가 나한테 검을 휘두를 정도였잖아. 그런데도 너희는 날 사령관으로 추대했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말이야.

 

대체 인간이란 게 뭐길래 지도자의 자리에 덜컥 앉힌 걸까? 인간이 바이오로이드보다 잘난 게 뭐 하나 없는데, 왜 인간이라는 이유로 인류 저항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지켜야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했지? 대관절 알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서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새로운 질문에 도달하더라.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인가?

 

인간이라면 어떤 근거로, 아니라면 무슨 까닭으로 그런 걸까. 인간의 정의란 대체 무엇일까.... 그걸 알고 싶었어. 그때 마침 리마토르 교수가 나타났고.”

 

“그래서 합류를 결정하셨군요.”

 

“그 이유가 크기는 했어. 다만 그 사람이 구 인류와 같은 악을 가져서는 안됐기에 철저한 검증을 거치려고 했지.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인간의 명령권을 깨지 못한 상황에서 구 인류 같은 이가 합류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지옥이 재림되리라고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몇 번 검증해보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컴패니언이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냈지만, 아이들부터 레아 같은 고참 인원들까지 모두 리마토르 교수가 구 인류와 같은 부류라는 의견에 반대를 표했기에 나도 받아들일 수 있었지.

 

그런데.... 아르망, 그 신뢰가 흔들린다면 어떨 것 같아?”

 

사령관은 아르망의 눈을 직시했다. 아르망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초상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아르망이 긴장한 기색을 보이자 그는 고개를 돌리며 와인을 따라 홀짝였다.

 

“리마토르 교수가 구 인류와 같은 부류라는 증거가 나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말할 수 없어. 선입견이 형성된 내가 섣불리 판단하면 오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네게 자문을 구하고자 한 거지.”

 

“흐음...”

 

아르망은 생각에 잠겼다. 사령관이 객관적 판단을 듣고자 자신을 부른 만큼, 그녀 자신도 괜히 선입견을 형성해서는 안 됐기에 아르망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계산을 돌렸다. 계산량이 지나치게 많아 머리가 점점 뜨거워졌으나 아르망은 노력을 기울였다.

 

“음....”

 

한참동안 말이 없던 아르망은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이야기까지 모두 꺼내 돌아본 그녀는 현재 주어진 정보로 최선의 답을 사령관에게 전했다.

 

“폐하, 저는 처음 리마토르 교수가 합류했을 때 반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대신 주변 인물들을 포섭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폐하의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택지를 골랐다고 보았죠.

 

이 예상은 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리마토르 교수는 앵거 오브 호드의 칸 대장과 교제 중이며, 호드가 리마토르 교수의 편을 든다는 점에서 호드 전체가 리마토르 교수에게 포섭된 것으로 보입니다. 캐노니언의 아스널 대장도 리마토르 교수와 잦은 접촉을 갖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포섭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이 포섭이 단순 영향력 행사 목적이라면 언제든지 폐하께서 뒤집을 수 있습니다. 명목이든 실질이든 폐하께서 오르카호의 지도자시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우려되는 점은 기억 재생시술 결과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과 기억 재생시술 이후 리마토르 교수가 칩거했다는 점입니다. 리마토르 교수의 연구 분야가 바이오로이드의 인간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구 인류에 대한 반동으로 그런 연구를 했을 가능성도 충분하고, 자신이 일전에 구 인류의 일원이었기에 충격을 받아 칩거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입니다. 그러면 기억 재생시술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되죠.

 

결론적으로 저는 리마토르 교수가 구 인류와 같은 수준이라고 의심할 여지는 합리적인 수준에서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합류 이후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오르카호에서 리마토르 교수가 생활하는 모습과 주기적으로 폐하께 제출되는 보고서를 보면 그가 구 인류와 같은 사상을 현재도 유지하고 있는지 역시 합리적인 수준에서 충분한 의심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장황한 아르망의 말을 들은 사령관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턱을 괬다. 리마토르가 구 인류와 같은 부류라는 증거를 배제하고 순수 정황만으로 추론한 아르망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그가 구 인류의 일원이라는 가능성은 증거만 존재하면 입증된다는 의미였다. 리리스와 카엔, 제로가 가져온 증거와 정황은 리마토르가 구 인류의 일원이었음을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었기에 사령관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아르망은 현재 리마토르가 구 인류가 아닐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말했지. 리리스를 통해 흔들어본 현재까지의 결과만 보면 스프리건을 고문한 정황이 있다는 점에서 아르망의 추측이 틀렸다는 쪽이 더 우세해. 

 

그렇지만 이건 정황에 불과해. 물증이 없다고. 불안하기는 하지만 이 상태로 리마토르가 구 인류라고 확정할 수 없어. 그러니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건 리리스를 통해 더 흔들어보는 거야.

 

 

 

...생각해보면 리마토르가 여태까지 진행한 연구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부합한단 말이지. 만약 구 인류와 같은 부류라도 통제가 가능하다면 여태까지 연구한 업적을 참작해야하나?’

 

 

“아르망, 앞에서 내가 지도자의 책무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 만약에 말이야, 조직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조직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면 지도자는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할까?”

 

생각이 물음표로 끝을 맺은 사령관은 다시 아르망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르망은 몇 초 정도 답변을 고르더니 입 밖으로 말했다.

 

“폐하, 지도자가 행하는 업무가 휘하의 이들을 지키는 방위자의 업무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아래에 있는 이들이 피해를 본다면 지도자는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못한 겁니다.”

 

“그런가... 베어내야 한다는 말이지.”

 

아르망의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뜻을 굳혔다. 만약 리마토르가 구 인류의 본성을 가진 자라면, 어찌 됐든 끔찍한 결말이 있음은 확실했다. 게다가 언변이 뛰어난 리마토르의 특징을 감안하면 최악의 경우 그에게 포섭된 부대와 사령관의 진압군이 맞붙는 오르카호의 내전으로 이어질 수도 모를 일이었다.

 

“오르카호 인원들을 지켜야하는 지도자로서, 최소한의 위험도 배제할 수는 없지.”

 

사령관은 아르망에게 조언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뜻이 굳은 그를 보며 아르망은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니 감사하다고 말했으나, 한편으로는 리마토르의 정체가 정말 구 인류인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계산하려고 해도 주어진 정보가 불충분하니 신뢰할만한 답이 나오지 않아. 리마토르 교수, 당신은 대체 누구지?’

 



사건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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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나왔던 사령관의 고민과 20편, 56편에 나왔던 아르망의 예측을 이번 편에서 다시 풀어봤어. 사령관이 왜 갑자기 리마토르를 공격하는지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많아서 지도자로서 사령관이 갖는 고뇌를 드러내고자 해봤어. 오르카호 전체를 지키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리마토르가 구 인류와 같은 부류라는 가능성이 입증되는 순간 제거해야한다는 결정이 나올 수 있는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읽고 어떤지 평가 부탁할게.


이걸로 여론조작 에피소드는 끝. 다음 편에서 짧게 언급된 뒤에 일상 에피소드로 넘어갈 거야. 수위 높은 에피소드로 할까, 전체 이용가로 할까 고민 중인데 일단 칼 포퍼나 소쉬르 중에서 한 명을 설명할 생각이야. 이 둘 외에 읽어보고 싶은 사상가나 바이오로이드가 있으면 의견 제시 부탁할게.


모자람 많은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맙다. 다들 추운데 건강 조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