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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어난 곳은 푹신한 침대였다.

 

사령관이나 지휘관 정도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었던 침대.

하지만 이젠 일반 병동에서도 사용하는 침대 위 매트리스의 푹신함을 느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목에 박혀 있는 주사.

노란색 영양액 같은 것이 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 아무도 없는 건가?”

 

 

 

방금까지 사후 세계 비슷한 곳에 갔다 온 것 때문이었을까, 머리 속에서 알게 모르게 불길한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깨었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거라던가,

이 세계에 눈을 떠보니 나만 빼고 모두 사라져버렸다던가,

아무리 수복실에 올 애들이 적어졌다고 한들 평소의 시끌벅적함을 떠올려보면 그리 비약적인 망상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게 다 거짓말이라는 건 주변만 돌아봐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유리 어항 안에 가득 담긴 종이학.

누군가는 실뜨개를 하다 만 것인지, 둥그런 실타래와 끝이 뭉툭한 바늘이 선반 위에 오렬져 있었고, 그 끝엔 기다란 벙거지 모자가 절반 정도 만들어진 채 놓아져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편지 더미와 내 등 뒤의 벽을 가득 수놓은 그림들까지.

오드리가 그린 것처럼 수준급의 스케치도 있었지만, 누가 그렸는지 훤히 보이는 크레파스 낙서도 있었다.

 

끼익-

 

나는 그것들을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목에 꽂혀 있는 영양액 주사가 움직일 수 있는 거치대에 올려져 있어서 잔잔한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서 내 침대가 놓여져 있던 곳의 벽면을 보았을 때, 나는 작게 탄식했다.

 

 

 

“... 하...”

 

 

 

벽 한 쪽을 거대하게 채우고 있는 그림 더미들.

내가 자고 있는 모습, 뒤척이며 자세를 바꾸는 모습, 링거에 꽂히기 전 눈을 감고 있는 모습,

내 사진을 그대로 베껴 그린 것 같은 그림, 양 손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서 놀고 있는 그림,

 

그림과 그림과, 그림이, 하얀 꽃이 가득한 꽃밭처럼 무수하게 펼쳐졌다. 

 

 

 

“... 멋진 에필로그죠?”

 

 

 

아무도 들리지 못할 만큼 조용히 읊조렸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

 

하늘에 태양이 떠있던 탓이었을까, 그토록 많았던 별들이 이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저 햇살 바깥 쪽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텐데, 기이할 만큼 고요하다.

 

아니, 2회차를 살면서 이렇게 고요함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기이하다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덜컥.

 

 

 

“구경 정도는 해도 되겠지.”

 

 

 

링거 거치대를 손으로 밀며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문지방이 없던 터라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수복실 안쪽을 가득 채우던 그림들은 방 바깥까지 이어져 있었다.

수복실에서 걸어 나온 뒤 오른쪽으로, 벽에 걸리지 못한 그림들이 무수히 길게 늘어졌다.

 

어린 아이들이 미숙한 솜씨로 휘갈기듯 그린 낙서부터 시작해 방금 막 그림을 배운 성인의 서투른 풍경화, 숙련된 디자이너의 멋진 일러스트까지.

몇몇은 현실을 그렸고, 몇몇은 환상을 그렸다. 판타지 물에 어울리는 삽화도 있었고, 로맨스 소설 속 한 장면 같은 그림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종이 속에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게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꽤 오글거리는 일이었다.

 

 

 

“저렇게까지 잘생기진 않았는데.”

 

 

 

높은 콧대, 길게 빼어난 속눈썹, 과하지 않게 빨간 입술.

 

묘사가 사실적인 그림일 수록 내 얼굴만큼은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못했다.

 

저건 LRL이 그린 것 같고, 저건 메리가...

... 나중에 메리에겐 안과부터 가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애들은 어디 간 거지”

 

 

 

나는 복도에서 나와 꽤나 오랜 시간을 걸었다.

물론 복도의 내벽 하나를 전부 채우는 무수한 그림의 향연을 하나하나 감상하며 왔으니 멀리 오진 못했을 거다.

하지만 오래 걸은 것은 확실할 것이고, 그럼에도 복도에는 사람의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사령관 전용 수복실이 함내 으슥한 곳에 있다곤 하지만 이건 좀 신기할 정돈데.

 

그래도 뭐, 이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오르카 호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령관으로서 주변 정찰도 좀 하고, 얼마 만에 깨어난 건지도 좀 확인해보고, 할 일이 제법 많다.

 

 

 

“음?”

 

 

 

복도 끝자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저 위치라면 비밀의 방이 있는 곳인데, 저기에 누가 있는 걸까?

10년 전에 치워버리고 난 뒤, 이젠 어엿한 인류복원활동부실로 활동하고 있는 방이다.

내가 꽤 오랜 만에 일어난 거라면 저 애들도 쌓인 게 있을 테니 그런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걸어가도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스산한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

나는 오소소 돋는 솜털을 뒤로 한 채 천천히 비밀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오르카 호 전체를 덮을 기세로 있던 그림들을 뒤로 한 채 마침내 방에 도달한 나는, 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으윽...!”

 

 

 

내 몸을 격렬하게 헤집고 가는 두통. 눈 앞이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직거리더니 귀에선 기이한 소리가 재잘대듯이 들려왔다.

 

대체 뭐지?

그런 마음에 나는 방의 문을 열고 내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으아아아아아아!!!

 

가죽이 벗겨지며 괴성을 지르고 있는 더치걸과,

 

-오늘은 어디에다가 붙여요?

 

자신의 그림을 자랑하듯 들며 까치발을 들고 벽 한 쪽에 대고 있던 더치걸이 보였다.

 

... 이게 뭐지?

 

두 개의 환영이 한 순간에 겹친다.

나는 그 둘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1회차와 2회차.

원래 이 세계의 ‘선’에 새겨졌던 기록과, 그 위에 덧칠되어 있던 기록.

 

결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세계가 내 눈 앞에서 한 데 뒤섞이고 있었다.

 

-이제 구부러진 선을 다시 펼 때가 되었다.

 

별의 아이가 했던 그 말이 무심코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

 

내 개입과 두 번째 환생으로 인해 한 바퀴 원을 그리게 된 것.

나는 별의 아이가 그걸 다시 피는 모습을 보았다. 하늘을 덮을 만큼 거대한 대로(大路)를 다시 길게 늘어뜨리는 광경을 보았다.

 

그 모습이 생각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1회차, 2회차. 그 모든 순간에서 너와 함께 한 아이들은 분명히 똑같은 존재다.

 

그 이야기가 귓가에 염불처럼 공허하게 울렸다.

 

똑같은 존재. 같은 아이들.

 

 

 

“... 설마.”

 

 

 

머리 속에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구부러진 선을 펼친다.

그 얘기는 이 세계를 다시 직선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구부러졌던 곳’의 기록은 어떻게 되는 걸까?

1회차의 나는 환생-죽음까지의 과정을 선 위에 새기며 살았다.

그리고 2회차의 나는, 그 과정이 새겨진 선을 길게 뒤로 비틀며 환생했을 때의 시간대로 돌아왔다.

2회차의 이야기가 새겨진 곳은 그 다음 선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1회차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만약 별의 아이가 선을 펼치는 동안 그 때의 기록을 동기화시켰다면,

 

그러니까,

 

 

 

“주인님?”

 

 

 

만약, 아이들이 다시 1회차 때의 기억을 가지게 된다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 어떻게... ...”

 

 

 

나를 보자 들고 있던 유리컵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블랙 리리스.

코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두 팔은 허공에 얼어 붙은 듯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두 눈은, 호박색 눈동자는,

 

 

 

“흐... 흐아아아아앙!”

 

 

 

작은 물줄기를 흘리고 있었다.

 

리리스는 한 달음에 나를 향해 달려오며 내 품에 안겼다.

순간 가슴을 압박해오는 질량체에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그녀가 내가 아는 리리스가 맞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큼하고, 청명해지는 향기.

그건 2회차의 그녀였고,

 

손 끝에 묻어 있는 듯한, 지독한 피비릿내.

그건 1회차의 그녀였다.

 

찰칵-

 

그 순간, 나는 허공에서 무언가 고정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떤 선이 제 자리에 들어 맞는 듯한 걸쇠음.

 

 

 

“... 돌아왔구나.”

 

 

 

그제야 눈이 밝아진다.

내가 보았던 세계의 혼재도, 두 기억이 동시에 존재하던 비밀의 방도,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게는 벽 가득 붙어 있는 아이들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고,

나의 1회차와 함께 했던 그녀가 들어왔다.

 

 

 

“돌아왔어.

리리스.”

 

 

 

마침내,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기나긴 비극의 이야기가 드디어 에필로그를 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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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깨어난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니, 그리 많은 일은 아니었다. 일이 많았던 것은 맞지만, 그 종류가 다양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오르카 호의 관리는 나보다 아이들이 더 잘 하고, 더 이상 전시상황이 아니라 자잘한 것 하나하나까지 사령관의 결제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할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1회차 때의 기억이 돌아온 것은 맞지만 모두가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1회차의 기억이 돌아왔어도 그 정체를 모르는 애들도 있는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제가 어떻게 각하께 그런 몹쓸짓을... ...”

 

“레오나. 나 이제 무릎 아픈데 네가 발키리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돼?”

 

“내가달링한테무슨짓을한거지? 내가달링한테무슨짓을한거지? 내가달링한테무슨짓을한거지? 내가달링한테무슨짓을한거지? 내가달링한테무슨짓을한거지? 내가달링한테무슨짓을한거지?”

 

“... 저쪽이 더 심각해 보이는 구만”

 

 

 

트라우마 치료.

대원 중 1회차 때의 흑역사가 통째로 되돌아온 경우는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다.

전쟁 후 PTSD도 이렇게 세게 발현되는 적이 없다고 닥터가 그랬었지.

물론 어린 닥터가. 성인 닥터도 1회차의 미수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 때의 기억이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사령관님... 성인 여성 두 명을 양쪽 무릎에 하나씩 올리고 있는 건... 안 아프세요?”

 

“괜찮아.”

 

“조금 불편해 보이시는데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 내 몸에서 떨어지면 불안 증상만 더 격해질 거야.

그나저나 너는 괜찮은 모양이다, 카르디아?”

 

 

 

예를 들어, 저기 흑발을 찰랑이는 아가씨처럼.

 

 

 

“엣헴! 당연하죠! 제가 그 때 사령관님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게 얼마나 멋졌는데?

수만 마리 철충과 수백의 서기관, 집행관, 그리고 인공 별의 아이까지! 그 모든 걸 상대하면서 시간을 끌고는 멋지게 전사!

그 때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

 

“... 그래. 너 잘났다.”

 

“에이, 솔직히 그 정도 했으면 잘났다고 인정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이제 그 정도는 말할 수 있는 사이 됐잖아~”

 

“너 마음대로 하세요.”

 

“으흐흥~ 사령관님도 인정해줬다~”

 

 

 

내 심리 상담을 도와주러 온 녀석이 되려 지만 신나 하는 꼴이라니.

그 멋진 여왕님이 살아만 계셨다면 빨리 와서 한 번 쥐어 박아달라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각하”

 

“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달링”

 

 

 

... 아니다.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

 

반군을 이끌었던 용이나 내 목에 칼을 겨눈 라비아타도 후폭풍이 심하긴 했지만 이 둘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용의 치료를 위해 삼일 밤낮으로 세일러 복을 입고 초밀착교배프레스를 해야 했다던가,

알몸 에이프런 라비아타에게 아침을 부탁하며 저녁까지 짐승교미후배위뒤치기로 사랑을 증명해야 했다던가 하는 건 비밀이다.

 

그나저나 둘은 그 정도로 하고 넘어갔지, 이 두 명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또 저런 창의적인 플레이를 구상해봐야 하는 건가? 유아 퇴행하기 직전인 발키리, 레오나와 하는 플레이라... 역시 성교육을 빙자한 아가방압착진심피스톤상하운동을 해야 하는 게...

 

 

 

“사령관님, 응큼해.”

 

 

 

내 책상 아래에서 고개를 빼꼼 들이민 카르디아가 얼굴을 붉히며 째려 보았다.

 

 

 

“지금 엄청 야한 생각하고 있죠? 아주 그냥 보기만 해도 남사시러운 핑크색으로 ‘빤짝빤짝’하는 게 뻔해요 뻔해.”

 

“... 나 원래부터 그런 놈이었어. 평범한 라붕이였다고.”

 

“라붕이?”

 

“라스트 오리진 하는 사람들.

별 건 아냐. 그냥 하는 게임 앞글자에 –붕이를 붙이는 거지.”

 

“붕이... 붕이... 묘하게 정감 가는 말이네요.”

 

 

 

카르디아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물음표를 만들다 느낌표로 바꾸며 눈을 반짝거렸다.

 

저 아가씨 등 뒤로 일렁이는 스파크.

교황과의 일전에서 거의 다 소모되긴 했지만 아직 능력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한다.

 

 

 

“뭐 하세요?”

 

꿈뻑-

 

꿈뻑-

 

“사령관님?”

 

“으... 역시 안 되네.”

 

 

 

멀리 서랍 위에 있는 머그잔을 향해 열심히 눈을 부라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 말로 일반인.

카르디아에 비해 내 몸은 완전히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돌아와 버렸다.

 

일말의 외력도 느껴지지 않는, 깨끗할 정도로 텅 비어있는 몸.

옛날에 초능력으로 방 불도 끄고 했을 때엔 편하고 좋았는데 말이야.

 

 

 

“왜요, 이게 필요하신 가요?”

 

 

 

내 진득한 시선을 멍청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바닐라가 머그잔을 손으로 들며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그 정도 일이 있고 나면 그런 힘은 오히려 트라우마의 대상이 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마냥 편하다고 또 쓰려고 하다니, 정말이지 주인님의 정신 연령이 심각하게 두려워지네요.”

 

“... 꼭 그렇게 말해야겠니, 바닐라? 언어 모듈도 다 고쳤잖아.”

 

“이번 건 진심이었거든요.”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머기잔을 책상 위에 쿵 하고 내려놓는 바닐라.

 

그녀의 단발 머리가 들이치는 햇살에 윤기나게 반짝였다.

1회차 때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살던 게 엇그제 같은데.

 

쪽.

 

내가 방심한 순간, 바닐라의 입술이 내 입술 속으로 무혈입성했다.

내 입술 사이를 가볍게 비집고 들어온 그녀의 혀가, 약간의 타액을 선물한 뒤 내 앞니만 몇 번 두들긴 뒤 빠져 나갔다.

 

 

 

“... ... 왜요. 사랑하는 사이에 이런 것도 못해요?”

 

 

 

입에 묻은 침을 부끄럽다는 듯 닦아 내는 바닐라.

 

이렇게 보니 저 아이도 참 많이 바뀌었다 싶다.

1회차에선 키스 한 번 하는 것도 기절을 동반하지 않으면 못할 짓이었는데.

 

 

 

“수고 많았어.”

 

“... 주인님도요.”

 

 

 

바닐라는 고개를 휙 돌리며 방 밖으로 빠져 나갔다.

 

걸어나가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를 감싸 안는 모습이 스치듯이 눈에 들어왔다.

 

... 잠깐만.

 

 

 

[주인님? 콘스탄챠입니다. 혹시 동침 일정에 관해서 말씀 좀 드릴 수 있을까요?]

 

 

 

내 패널 화면 위로 콘스탄챠의 얼굴이 등장한 것은 그 때였다.

 

 

 

“동침? 심리 상담 기간에는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것도 거의 다 끝났잖아요. 어제만 해도 바닐라랑 하셨던 거 다 알고 있답니다.]

 

“그걸 너네가 어떻게...

... 탈론 페더 짓이지?”

 

[후후, 글쎄요?]

 

 

 

콘스탄챠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인류 재건 작업을 위해서라도 이젠 진지하게 논해야 할 문제란 말이에요.

현재 활동 가능한 지휘관 분들도 전부 이쪽 향방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 상황이라 계속 미룰 수도 없어요.]

 

“...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뭐 딱히 논의할 만한 게 있어?”

 

[앞으론 피임 시술을 일체 금할 생각입니다.]

 

“커헉?!”

 

 

 

순간 입에서 헛기침이 올라왔다.

 

 

 

[어제 바닐라랑 아주 찐한 밤을 보내셨었죠?]

 

“... 그, 그건 왜?”

 

[그 뒤로 페로 양, 포이 양, 펜리르 양, 

아니, 컴패니언 부대 전원과 연속으로 이어갔고요.]

 

“... ...”

 

[그 다음으로 080 기관. 

어른 닥터가 오늘 아침에 허리가 빠진 것 같다고 하더니, 그것도 주인님 때문이었고]

 

 

 

설마. 나 분명 제대로 콘돔 쓰고 했단 말이야.

 

 

 

[그저께는 캐노니어랑 호라이즌을 동시에 상대하셨고, 그그저께는 호드에, 와쳐 오브 네이쳐에, 코헤이에, 배틀 메이드... 흐흠, 이거는 저도 포함됐던 내용이니까 잠시 제외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화면 너머의 콘스탄챠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그 때 사용하셨던 콘돔.

그게 과연 제대로 역할을 했을까요?]

 

“... ...”

 

[다프네 양에게 정관 시술 받지 않은 지 꽤 된 거, 오르카 호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그게 아마... 주인님이 ‘진짜 씨앗’을 뿌려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랬었죠?]

 

 

 

... 사실 나는 일이 다 끝난 후에 정관 시술을 중단했었다.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는 명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존나 찐득하게 야쓰 하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아니, 어차피 이제 막아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씨도 없는 물만 뱉는 게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 아나?

 

애초에 이렇게 예쁜 애들이 널려 있는데 임신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게 어떻게 남자겠나!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발키리와 레오나만 봐도 아랫도리가 불끈불끈 거리는데...

 

...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콘돔만은 고집했던 이유가 있다.

 

 

 

[주인님.]

 

“... 응.”

 

[주인님이라면 충분히 멋진 아빠가 될 수 있을 거에요.]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서 나온, 나와 대원들 사이의 결실을 훌륭하게 돌봐줄 자신이 없어서.

 

-당연하지! 누구 아들인데.

 

문득 아버지와 만났던 기억이 머리 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나에게 멋진 아빠가 될 수 있을 거라 말해주셨던 아버지가.

 

 

 

[뭐, 요근래 가임 기간이었던 대원들은 없으니 주인님께서 선택해주세요.

원하지 않으신다면 동침 일정을 대원들의 월경 주기를 피해서 짜도록 할 테니까.]

 

“... 아냐.”

 

[네?]

 

“반대로 해줘. 가임 기간인 대원들로 동침 우선 순위가 잡히도록.”

 

 

 

콘스탄챠의 얼굴이 흐릿하게 부유하는 듯했다.

선명한 환희와 약간의 애절함.

그녀라면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해줄 것이다.

 

 

 

“내 생각 바뀌기 전에 해줘.”

 

[아, 알겠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계획을 전면 수정할게요! 분명 대원들도 좋아할 거에요!]

 

 

 

열의에 가득 찬 콘스탄챠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화면 너머로 사라졌다.

전화를 끊는 것도 잊은 채. 스피커 너머에서 사각거리는 볼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나에게 물어보기 전에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옆에 누워있는 레오나와 발키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처음에 비해 가히 기록적으로 좋아진 두 명.

반쯤 혼절하며 살던 첫 날에 비해 이젠 간간히 제정신이 돌아오곤 한다.

 

 

 

“... 달링.”

 

 

 

그게 자기 마음대로라는 게 문제지만.

 

 

 

“방금 한 말, 진심이야?”

 

“응. 언제까지고 내가 마지막 남자일수는 없잖아.”

 

“... ... 나, 기대해도 되는 거지?”

 

“1회차 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잖아.”

 

 

 

눈물을 울먹이기 시작한 레오나.

나는 그녀의 뒷머리를 가볍게 끌어 안으며 말했다.

 

 

 

“내 꿈은, 너희를 사랑하는 거야.

1회차에서도, 2회차에서도.”

 

“... 사랑해. 달링.”

 

“나도.”

 

 

 

조금 부끄러운 키스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내 오른쪽 무릎에 앉은 아가씨가 움찔거렸던 것은 그 때였다.

 

 

 

“일어났구나, 발키리?”

 

“... ...”

 

“그렇게 있다고 해서 안 넘어갈 거야.”

 

‘... ...”

 

“아니면 넘어간다 그냥?”

 

“아, 아아아아닙니다!”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발키리.

 

양쪽 뺨이 사과처럼 빨개진 것을 보니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모양이다.

 

부끄러움을 떨치기 위해 발키리가 선택한 것은, 내 무릎에서 떨어져 소파에 가 앉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까 했던 말이 여전히 의식되는 것인지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 웃긴 얘기잖습니까, 서로 죽이려 했던 두 사람의 아이라니.”

 

“... ...”

 

“원래라면 사라졌어야 할 제 다리도 2회차에선 각하 덕분에 자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거면 족합니다. 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자신도...”

 

“내가 임신하라 명령하면 할 거야?”

 

 

 

발키리는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닥터의 시술로 이제 함내엔 사람의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사라졌다.

아직 이곳에 합류하지 못한 바이오로이드가 없는 건 아니지만, 명령이란 개념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명령권이라는 시스템이 사라졌고, 명령을 내릴 인간도 없어졌다..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를 구분 지을 유일한 경계선이 사라진 세계에서 내 물음만큼 바보 같은 질문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지? 발키리는 이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니까.”

 

“... ...”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나한테 말해.

나는 그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그, 그럼 각하는...”

 

 

 

발키리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콘스탄챠의 얘기를 들었던 것이겠지.

아마 내가 아이를 가지길 손 꼽아 기다리고 있는 대원들의 등살에 못 견디고 그런 말을 한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 마음의 준비는 오늘까지야.”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해왔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이것이다.

나 혼자서라면 못 하겠지만, 나 혼자서 할 것이 아니니까.

오르카 호가 여기까지 왔던 것처럼.

 

그 말을 듣던 발키리가 숨을 크게 들이 마신 뒤, 다시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가, 각하께서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리고는,

 

쪽.

 

내 양쪽 볼을 부드럽게 감싸며 어리숙한 입맞춤을 했다.

 

 

 

“제 마음의 준비도... 오늘까지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나는 그런 발키리의 머리를 장하다는 듯이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사랑해.”

 

“... 저, 저도 사랑합니다. 각하.”

 

“흐흐.”

 

“왜, 왜 그러십니까?”

 

“발키리한테 그 얘기 들은 건 처음인 것 같아서.

그건 1회차에서 안 했던 말이잖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각하아아아!”

 

“아, 아닌가? 1회차에서 했던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내 무릎에 찰싹 달라붙는 발키리.

 

어쩌냐.

이거 버릇될 것 같은데.

아예 안 고치고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아주 발칙한 상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삐리리리리-

 

내 패널에서 수신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폐하. 잠시 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야, 전화가 아닌데, 달링?”

 

“폐하라... 호칭을 보니 아르망 추기경이신 것 같군요.”

 

 

 

콘스탄챠와 달리 수신음은 한 번 울린 다음 끊어졌다.

 

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전해진 것은 어느 드넓은 바다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찍힌 더치걸의 묘.

 

 

 

“갔다 올게. 정신 차리고 잘 있을 수 있지?”

 

“애 취급도 적당히 해, 달링. 아무리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곤 하지만...”

 

“어떤 기억?”

 

“... ... ...”

 

“아, 반군까지 나 데리고 갔던 기억? 그것도 아니면 막 나한테 구박하던 기억?”

 

“... ... ... ... ... 달링.”

 

“왜?”

 

“... 잠깐 달링 방 안에 들어가 있어도 될까?”

 

 

 

경련하는 아랫입술을 간신히 숨기며 억지로 웃는 레오나.

옆에 있는 발키리도 비슷한 증상이었다.

 

저 애들의 불안 증상을 낮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옆에 붙어 있는 거지만, 차선책으론 내 체향이 많이 묻어 있는 물건도 효과적이다.

 

내 방에 들어가 있어도 되냐 묻는 건 그것 때문이겠지.

평소엔 어리광이 괜히 심해질까 철저히 금했던 행동인데, 오늘 보여준 모습을 보니 허락해줘도 될 것 같다.

 

 

 

“그래. 마음대로 해. 대신 너무 난장판으로 만들고 그러면 안 된다?”

 

“누, 누굴 애로 보고 그러는 줄 알아?

그냥 달링의 방이 여기보단 더 따뜻해서...”

 

“... 미안하지만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대장.”

 

“야, 발키리! 너 어디 가!”

 

 

 

내 방으로 슬금슬금 다가가는 발키리와 대번에 그녀를 쫓는 레오나.

이렇게 보니까 정말 자매가 따로 없다니까. 나중에 트라우마가 완전히 치료돼도 저런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면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내 방 안으로 사라지는 둘을 끝까지 바라본 나는 조용히 사령관 실 밖으로 나갈 채비를 꾸렸다.

 

 

 

“... 슬슬 가봐야겠지.”

 

 

 

벌컥-

 

사령관실과 복도를 가르던 방문이 열렸다.

 

나는 조용히 복도 위를 거닐었다.

 

저벅-

 

저벅-

 

실로 가벼운 손과 발.

 

내 손에는 국화 한 송이와 작은 나무 십자가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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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가 마지막입니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