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직전인 어느 날, X-00 티아멧은 철충 우두머리 중 하나를 베어 죽이는 공을 세웠다. 웬만한 바이오로이드들이 맞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적의 대장에게 단신으로 도전해서 일도양단해 버린 것이다.


사령관은 티아멧의 어깨를 부여잡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받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들어줄 테니까."


"저는…… 별로 원하는 건 없어요."


티아멧은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공을 세워도 포상 받기를 사양하는 그녀였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긴 미안한데. 사령관은 턱을 쥐고 생각하다가 문득 손뼉을 쳤다.


"그렇지. 그러면, 너한테 최고의 선물을 줄게."


"예?"


"네 머리에 걸린 제약을 풀어주겠단 말이야."


좌우에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눈을 크게 떴다.


"주인님. 그 말씀은……."


사령관은 웃으며 말했다.


"너희 바이오로이드들한텐 인간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항상 호감을 품도록 만드는 세뇌가 되어 있잖아. 이번에 나는 티아멧의 세뇌를 풀어주려고 해."


자리에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술렁였다. 티아멧은 얼떨떨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주인님. 티아멧이 충성스러운 건 맞지만……."


부사령관인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 말렸지만 사령관은 듣지 않았다.


"닥터가 그러는데, 불가능한 시술은 아니랬어."


"불가능하고 가능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저, 저는 그렇게 큰 상은…… 원하지 않아요."


티아멧도 더듬거리며 사양했지만 사령관은 티아멧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괜찮아. 괜찮아. 티아멧이 설마 날 죽이기야 하려고. 게다가 실증 테스트는 많이 할수록 좋은 거니까."


결국 사령관은 반대를 무릅쓰고 티아멧의 정신에 걸린 금제를 풀어주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점만 제외하면 티아멧은 이제 사령관처럼 보통 인간들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명령에 복종할 필요도, 억지로 인간에게 호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그러나 사령관의 선의는 뜻밖의 결과를 초래했다.


일단 티아멧은 자유로운 생각을 하게 되자, 그동안 세뇌로 억눌러져 있었던 인간에 대한 분노가 되살아나고 말았다.


과거에 티아멧은 최강의 생체병기가 되기 위한 가혹한 실험을 받았다. 실험 과정에서 인간들은 티아멧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었고 티아멧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증오를 품었다.


티아멧을 만든 인간들은 티아멧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 때리고, 차고, 짓밟고, 욕하고, 질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실험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특히 생물병기로서 다른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강해지는 실험이라면.


인간을 거역하지 못하는 티아멧은 실험을 사보타주하는 소극적인 저항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티아멧이 거역하는 뜻을 보일 때마다 실험체인 다른 자매들을 고문하거나, 심지어는 티아멧과 친하게 지내던 인간 연구원마저 죽였다.


견디다 못한 티아멧은 마침내 실험에 최선을 다했지만, 티아멧이 그 목적을 완전하게 달성하는 일은 없었다. 실험 도중에 인간들은 멸망하고 티아멧은 연구소에 갇힌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갇혀 있던 티아멧을 구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티아멧이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최강의 생체병기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었다.


이후 티아멧은 라비아타를 도와서 철충과 싸웠다. 별로 인류 부흥을 위해서 싸운 건 아니었다. 자유를 되찾아준 라비아타에게 은혜를 갚고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었다.


싸움이 길어지고 다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던 그때 인간이 또다시 나타났다. 티아멧은 그때만큼 가슴이 철렁했던 적이 없었다.


겨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또 인간이 나타나다니.


다행스러운 점은 백년 뒤 발견된 마지막 인간, 사령관은 과거 티아멧을 괴롭힌 인간들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사령관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오히려 사령관은 과거 인간들의 죄를 갚기 위해 살아가는 편이었다.


이번에 티아멧을 해방시켜 준 일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그는 언제나 티아멧에게 사탕을 주었으며, 꾸지람 대신 타이르고, 티아멧에게 체벌이나 모욕을 주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티아멧 말고도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사람을 대하듯이 존중했다.


사령관에겐 죄가 없다.


하지만 사령관에 의해 인간들이 다시 태어나고 부흥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을까. 인간들이 또 바이오로이드를 괴롭히고 같은 인간들마저 죽이려 들지 않을까.


인간의 오랜 역사가 사실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분노를 불렀다. 끔찍한 생각이 점점 커지며 티아멧을 괴롭혔다. 밤마다 과거 인간들이 자신을 괴롭히던 꿈을 꾸었다. 연구소에서 나온 뒤로는 가끔씩 꾸던 꿈이 이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떠올랐다. 만약 티아멧이 전처럼 세뇌가 걸려 있었다면 이 정도로 공포를 느끼진 않았을 터였다.


마침내 티아멧은 지나친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품고 말았다.


마음이 해방된 지 꽤 시일이 지나고, 티아멧은 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함장실에서 사령관은 아무런 의심 없이 티아멧과 만나주었다. 티아멧은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티아멧. 요즘 밥 먹는 건 어때? 맛있어?"


"예…… 신경써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그거 다행이네. 혹시 세뇌를 벗어나서 입맛이 달라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 하하."


"달라지지 않겠지요."


"하하. 그런가? ……마침 온 김에 다과나 먹자. 안 그래도 리리스가 맛있는 쿠키를 선물했는데, 혼자 먹긴 아까워서 말야. 자, 거기 앉아 있어."


사령관은 몸을 돌려 보관함에서 쿠키를 꺼내려고 했다. 일이 잘되려는지 사령관의 곁에 항상 달라붙어 있던 호위대장 블랙 리리스도 보이지 않았다.


티아멧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령관님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은 티아멧은 품에서 커다란 단도를 하나 꺼내어 사령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몸을 돌리기 전에 단도를 쥔 손을 들어올렸다.


난데없이 무언가 땅에 처박히는 큰 소리가 났다. 놀란 사령관이 급히 몸을 돌려보니 티아멧이 엎어져 있었다. 리리스가 티아멧의 등 위에 올라타서 목덜미를 억누르고 머리에 총을 겨누는 중이었다.


티아멧이 번뜩이는 단도를 들고 다가서서 내리치려는 순간, 벽으로 위장해 있던 리리스가 뛰쳐나와 티아멧의 칼 쥔 손을 걷어차고는 티아멧을 주먹으로 후려쳐 제압한 것이었다. 명령 없이 숨어 있던 리리스의 무단 행동이 아니었다면 사령관은 정말로 죽을 뻔했다.


사령관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리리스가 보낸 신호에 의해 함장실 문이 열리고 라비아타 등이 우르르 달려왔다.


리리스가 무표정하게 총을 겨누고 있는 이때 티아멧은 울고 있었다.




* * *




티아멧은 모든 무장을 압수당하고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로 감옥에 갇혔다.


티아멧의 처분을 두고 갑론을박이 일어났다. 주로 티아멧에 대한 성토가 대부분이었다.


"사령관님께 그런 은혜를 받고도 암살을 시도하다니요?"


"당장 죽여버려야 해요."


"저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부급 바이오로이드들이 함교에 모여서 한 목소리로 티아멧을 처벌하기를 요구했다.


의자에 앉은 사령관은 입가를 가리고 묵묵부답이었다.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 대표로 나서서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주인님. 티아멧을 아끼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군의 규율을 위해서도 이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알아. 나도 지금 생각 중이야."


사령관은 나직이 말하고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물러가게 했다.


다들 불만이 많았지만 인간인 사령관에겐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측근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를 떠났다.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함교 관측창에 비치는 심해 속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서 있던 그가 말했다.


"오늘이나 내일 티아멧을 불러다가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어. 왜 그랬는지."


"주인님. 그건 안되요. 허락해드릴 수 없어요. 정 보셔야겠다 하시면 원격으로 대면하셔도 되지 않나요."


측근 중 하나인 콘스탄챠 S2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신중하고 온화한 그녀도 사령관이 죽을 뻔했다는 사건에는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곁에 있던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 리리스 쪽을 돌아보자 그녀는 무표정하게 서 있기만 했다. 감정표현이 격렬한 그녀가 침묵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극도로 화가 나 있다는 증거였다.


사령관이 다시 말했다. "나는 티아멧이 제압당한 다음에 우는 눈을 봤어. 그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


"억울한 거겠죠. 주인님을 죽이지 못해서."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리리스가 입을 열어 이죽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여하간 이때까지 충성스러운 티아멧이 갑자기 날 죽이려 한 이유를 모르겠어. 내 조치가 그녀에게 좋았으면 좋았지, 나쁜 건 아니잖아."


하지만 라비아타는 안색을 어둡게 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르지요…."


"어째서?"


"티아멧이 실험체였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알지. 그래서 난 그녀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싶어서……."


"오랜 실험을 당하는 동안, 티아멧은 인간을 증오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


"저도 티아멧의 마음은 모두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주인님께서 해방시킨 티아멧의 마음이 과거의 상처를 감당하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퍼뜩 들어요."


자리에 침묵이 흘렀다.


생각을 마친 사령관은, 한숨을 쉬며 티아멧과의 접견을 다시 준비하도록 명했다. 반발은 통하지 않았다.


"내 고집 못 꺾는 건 다들 잘 알잖아? 옛날에 소완의 처분을 결정할 때도 그랬지만."


"그것과 같지 않잖아요. 그녀는 적어도 주인님을 죽이려고는 안 했으니까."


리리스와 콘스탄챠는 여전히 승복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아. 그렇지만 난 티아멧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녀를 완전하게 낫게 해 주기 위해서라도."


사령관은 그녀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 티아멧이 날 죽이거나 또 죽이려고 한다면 그땐 너희가 티아멧을 죽여."


"말씀 안하셔도 그럴 거예요. 사실 지금도 죽일까 말까 고민 중이라서. 주인님이 저를 미워하시더라도요." 리리스가 말했다.


자리에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내심으로는 리리스의 발언이 이해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다음날 밤, 티아멧은 아직 수감 중이라는 형식으로, 수갑을 찬 채 몸검사를 샅샅이 받고 나서야 함장실에 들어왔다.


티아멧은 사령관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사령관님, 제발 저를 다시 예전으로 돌려주세요."


"뭐?"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어요. 인간들이 다시…… 다시 많아지면 또 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아이들까지 괴롭히고…… 인간들 스스로도 서로 죽일 것이…… 그 미래를 견딜 수 없다고요. 사령관님이 베풀어 준 해방은 은혜가 아니라 고통이에요. 저 같은 바이오로이드에겐."


사령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도구처럼 자유롭지 못했어도 이렇게 괴롭진 않았단 말이에요……."


티아멧은 울먹이며 마음 속에 있던 말을 모조리 뱉어냈다.


사령관은 눈을 감고 있다가 무겁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티아멧."


"사령관님 잘못은 없어요. 그저, 그저 인간들이 문제였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네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내 잘못도 있어."


"그렇다면……! 사령관님께선 더욱 저를 풀어주지 않으셨어야 했어요. 사령관님이 제, 아니, 저희의 아픔을 어떻게 안다고 그러시는 거죠? 네?"


티아멧은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래. 난 겪어보지 못해서 몰라. 그러니까 내가 그 잘못을 다 짊어질 생각이야."


"왜요? 마지막 인간이라는 타이틀 때문입니까? 잘난 척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이제는 당신이라는 말까지 쓰며 따지고 있었다.


사령관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잘난 척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건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세상을 다시 만드려는 자의 의무같은 거. 유치한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티아멧은 입을 다물었다. 사령관은 그런 티아멧을 슬프게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보관함 안을 뒤적였다.


"저번때 리리스가 준 블랙 앤 화이트 쿠키 같이 먹으려고 했었잖아. 이번에야말로 같이 먹자."


사령관은 쿠키를 준비하고 코코아를 타서 자리를 마련했다.


묵묵히 있던 티아멧은 불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암살까지 하려던 저한테 이렇게 잘 해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쓸모가 있어선가요?"


"그런 이유만은 아니야. ……너를 비롯한 이 배 안의 모든 그녀들은, 내 아이들이기도 하니까. 자기 가족이자 친구를 그렇게 버려두는 놈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거든."


"인간은 다 버립니다. 동족도 희생시켜요."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었어. 병 때문에 인간답지 않은 놈들과 함께 다 사라져 버렸지만."


"저도 바보는 아니에요. 세상은 언제나 그런 인간들이 지배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아요. 어차피 사령관님께서 다시 만드는 세상도 그런 자들이 차지하겠죠."


냉소적인 티아멧의 말에도 사령관은 웃기만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난 고집불통이니까 말이지."


마주 앉은 사령관은 코코아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함내 정원 봤지? 거기 꽃들, 잠수함 공기가 안 좋아서 자꾸 죽기 일쑤지만 아쿠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면서 보살펴 줘. ……몇 번이나 죽어버린다 해도, 나는 아쿠아랑 같이 다시 꽃을 심을 거야."


"……."


이후로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다과를 다 먹고 나서 사령관은 조용히 티아멧의 수갑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았다.


"날 좀 도와 줘."


"전투로는 도와 드릴 수 있어요."


사령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로 태어날 아이들을 도와 달란 거야."


"?"


"새로 태어날 인간들은 너와 다른 자매들의 아이들이야. 그 애들이 안전하게 자라고, 제대로 된 인간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줘. 내가 사랑하는…… 너의 자매들과 아이들을 지켜 줘."


그 말을 듣고 티아멧은 불현듯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라비아타를 비롯해서 함내에 있는 몇 안되는 친구들이 떠오른 것이다.


이어서 티아멧은 자신의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마터면 장차 생길지 모를 희망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릴 뻔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솟구쳐 오름을 느끼고 목이 메었다. 만약, 만약 사령관님이 정말로 죽었다면…….


어쩔 줄 모르고 덜덜 떨던 티아멧은 눈이 마주치자, 그만 사령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서럽게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죄송해요, 사령관님!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나도 너와 울어 줄테니."


사령관은 흐느끼는 티아멧의 어깨를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다 잘될 거야, 티아멧.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품안에서 한참 울고서 슬픔이 가신 티아멧은 고개를 들어 멋적게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사령관님. 제가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원하신다면… 이 배를 떠날게요."


"누구 맘대로 떠나? 안 돼. 너는 여기서 계속 복무하며 싸우는 게 내 벌이야." 사령관은 짐짓 짖궃은 표정을 지었다.


이에 조금 기분이 풀린 티아멧도 울음 섞인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흥. 이제 저를 구속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떠나버리는 것도 자유에요. 아시잖아요."


사령관은 미소를 머금고 티아멧을 잔잔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자세를 바로잡고 말했다.


"그래도 안 돼. ……만약에, 내가 멸망하기 전 많은 인간들처럼 비뚤어진다면, 그땐 네 손으로 날 막아야 하니까."


"……진심이신가요."


"그래. 너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거야. 앞으로 넌 나를 잘 지켜봐야 한다고. 라비아타나 콘스탄챠, 리리스처럼."


이 말을 듣고 티아멧은 놀라서 눈을 들었다.


"설마……."


"그녀들도 일단은 심리적 제약이 없는 상태거든."


사령관이 밝힌 말에 티아멧은 몸둘 바를 모르고 부끄러워했다. 세뇌 해제 실험을 받은 바이오로이드는 티아멧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령관은 이미 언제든지 죽음이나 배신을 각오하고 티아멧에게 추가로 자유를 선물했던 것이었다. 치기어림이나 잘난 척이 아니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기만 했는데. 티아멧은 그런 것도 모르고 경솔하게 사령관을 원망한 자신을 탓했다.




* * *




불을 끄고 나서 티아멧은 함장실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곁에서 자도 돼. 손만 잡고 잘테니까."


침상에 누운 사령관이 장난스레 말한다.


"전 아직은 사령관님 암살 미수범이잖아요. 그런 짓을 했다간, 여기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분들이 저를 죽이려 들 거니까. 다음으로 미룰게요."


티아멧은 웃으며 대꾸하고 모포를 끌어당겨 잠이 들었다.


밤이 깊자 사령관은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티아멧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말없이 손을 잡아 주었다.


철충의 수는 강대하고 사령관의 군대는 너무나도 적었다.


어쩌면 인류를 재건하거나, 세상을 새로 만들겠다는 생각 모두 터무니없는 희망사항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령관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은 바이오로이드와, 자기 자신과, 앞날에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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