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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용 글라시아스






1부



어느 빌어먹을 이야기의 시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월이 뜬 불길한 밤이었어요.

모두가 평화로이 잠든 시각,

어느 시골마을에는 매미의 울음소리만이

한가로이 울려퍼지고 있었죠.

그러던 그 때, 

피투성이의 병사가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절뚝거리며 걸어오더니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지도록 큰 목소리로 외쳤어요.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누가 좀... 제발 도와주십시오!

여기 사람 죽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난 마을 사람들은

피투성이 상태인 병사를 보곤 크게 놀라더니

그를 마을회관으로 이끌었어요.

그리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요구했죠.

병사는 덜덜 떠는 와중에 간신히 입을 열었어요.


“저는... 실종자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고

인근 산 속을 수색하던 왕국의 일개 병사입니다.

옆 마을의 여자애들이 산에서 사라진 일로인해

폐하께서 골치를 많이 썩히신 바람에

저흰 흩어져서 산 속을 뒤지고 다녀야만 했지요.

지루한 몇 시간의 수색이 이어지던 그 때,

갑자기 한 병사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죠.

저와 다른 병사들이 급하게 달려가보니

그곳엔 왠 푸른 청발의 여인이 

한 병사의 목을 잡고 서더니 단번에...”


병사는 손을 펼쳐 목을 삭 베는 시늉을 보였어요.

그리곤 한 마을 주민이 건넨 맥주를 

쭉 들이킨 후 말을 이었죠.


“저희들이 뭘 어쩌기도 전에

그 여자는 번개같은 속도로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베어나갔습니다.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어떻게 사람 목을 맨 손으로 베어버릴수가 있는거죠?

그것도 칼날로 서걱 서걱 자른것처럼 깔끔하게!

제 옆에 선 병사의 목도 잘려나갔고

그의 피가 제 몸에 끼얹어졌을 때에는 이미

전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네, 압니다. 

적에게 살려달라 비는 한심한 놈으로 보인다는거.

하지만 여러분, 한 번 제 입장이 되어보세요.

그 여자의 푸른 사파이어같은 눈이 

저를 내려다 볼 때에 저는 맹수 앞에 선 먹잇감의 신세나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여인은 얼음장같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가까운 마을로 달려가

모든 여자 아이들을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그러지 않다간 이 곳도 자신의 손에

멸망하고 말것이라고.

만약 이 말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것을 보여주라는 말도...”


병사는 가지고있던 보따리를 

마을 사람들에게 풀어 보여주었어요.

그 안에는 세상에, 사람의 손 모가지가 

수 십개는 들어있었어요.

잘린지 얼마 안 됐는지 뜨끈한 피가 흐르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곧 혼란에 빠졌어요.


“여자아이를 바치라고? 그건 불가능해!”


“마을에 여자아이라곤... 그 애 뿐이잖아?!”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한 아이를 쳐다보았어요.


“해와 달이 겹치는 날에 태어난 저 저주받은 년!”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살아남은 병사를 따라 마을을 벗어났어요.

그녀의 귓가로 마을사람들의 당부가 흘러들어왔어요.


“저주받은 년! 먹여주고 재워준 값은 해야지?”


“그 분을 거슬리게 만들지 마라!”


“행여나 잘못됐다간 네 남동생도 무사하진 못할거다!”


마을사람들의 따뜻한 환대에도 소녀는 

그냥 느긋히 발길을 옮겼어요.

여인이 사는 산으로 가면서도 

병사는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죠.


“불쌍한 녀석... 무슨 잘못이 있다고 

괴물같은 여인의 제물이 되어선... 

아무리 의젓한 모습을 해도

속으론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울까...

부디 날 용서해다오. 내겐 다른 선택이 없단다.”


소녀는 말없이 웃고만 있었어요.

그렇게 강가를 거슬러올라가 작은 언덕을 넘어

좁고 거친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어느덧 거대한 동굴에 다다르게 되었어요.

동굴 어귀에 나뒹구는 짐승의 뼛조각들을 보며

병사는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어요.


“으... 으으...”


“들어갈까요?

그 분을 기다리게 해선 안되잖아요.”


말을 마친 소녀는 발길을 옮겨

동굴 안으로 들어섰어요.

병사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따라 들어서니

차가운 냉기와 함께

그 안에는 이미 소녀가 청발의 여인 앞에 

서있는 모습이 보였죠.

여인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발치까지 내려올정도로 길었고

색 또한 푸른 빛으로 영롱했어요.

그녀가 입고있는 펄크드라크가 

붉은 얼룩이 지어진것만 제외한다면

그녀의 미모는 세상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죠.

여인은 지친 기색으로 말했어요.


“내가... 너무... 어렵게 말했더냐...?”


여인이 저주받은 소녀를 가리켰어요.


“분명... ‘모든’이라고... 말했을텐데...?”


“허 ,허나.... 그 마을에 여자아이라곤

저 아이가 저, 전부였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넌 더는 쓸모가 없겠구나.”


그러더니 여인은 병사를 향해 

손을 휙 하고 세차게 휘둘렀어요.

날카로운 풍압이 병사를 갈라버리려는 그 때,

소녀가 병사를 옆으로 밀쳤어요.

다행히 풍압은 그 둘을 비껴나갔죠.

병사는 겁에 질려 뒤도 돌아보지않고 달아났으나

소녀는 움직이지 않고 되려 여인을 향해 따지듯 말했죠.


“저 사람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저희 마을에 여자아이는 저 밖엔 없었습니다.

마님께서 무엇을 원하셨던 저 분은 최선을 다했는데

왜 저 사람을 죽이려 드신거죠?”


여인은 가슴께를 움켜쥐더니

애써 코웃음을 치며 말했어요.


“무슨... 상관이더냐. 

저것이... 네 가족이라도...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 네가... 신경 쓸 필요도.... 없겠군.

너... 지금부터 상의를... 벗도록 해라...”


“... 예?”


여인이 소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어요.


“확인 할 게... 있다... 

상의를... 벗어라... 내가 찢어버리기전에...”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처럼 나쁜 사람의 말은 따르지 않겠어요.”


“!”


분노한 여인이 손을 들어 여인을 매섭게 노려보는 

소녀를 향해 내려치려 했어요.

그 때, 여인이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어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소녀는
순간 도망칠까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 먹곤 조심스레 여인에게 다가가 말했어요.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가요?”


“끄르륵...”


여인이 대답도 않고 가슴께를 움켜쥐고만 있자 

소녀는 여인을 조심히 일으켜 세워

벽에 기대도록 만들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등을 보았는데,

심장 부근에 큰 칼로 찔린 흔적이 훤히 보였어요.

소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죠.


“찔리셨나요? 병사들에게?”


“까불지... 마라...”


용이 간신히 말을 꺼냈어요.


“인간 따위가... 내게 상처를...? 핫...!

이건... 용살자가 내게... 남긴.... 흔적이다....”


소녀가 의아해하며 말했어요.


“정신이 나가셨군요. 용살자가 사람을 왜 건든답니까?”


“나를 너희 하찮은 필멸자들과 동급으로 여기지 마라!”


여인이 고통도 잊은채 큰 고함소리를 내질렀어요.


“크윽...! 

지금은 이런... 수치스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는 글라시아스, 위대한 북방의 용이다!”


“... 정신이 나가셨군요. 머리는 말끔한데...”


“너 이... 끄아악...!”


“얌전히 계세요. 금방 돌아올테니.”


“흐... 도망치는게냐...?”


여인이 나가려는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도망칠테면... 도망쳐봐라...

어차피... 인간의 뜀박질이야... 

내 날개짓 한 번이면... 그저...”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숨이나 고르시고 그런 말씀이나 하시죠.

다녀올게요.”


그렇게 소녀는 쌩하고 동굴 밖을 뛰쳐나갔어요.

혼자 남겨진 여인은 머리를 싸매며 중얼거렸죠.


“용살자년... 너만 아니었어도 나는...

 ... 용서해다오, 내 아가야... 

나는 정녕... 네 한을 풀 수 없다는거냐...”


여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잠시 뒤, 여인은 자신의 가슴께를 

무언가가 문지르는것을 느꼈어요.

눈을 떠보니 옆에는 소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여인의 가슴에 난 상처에 바르고 있었어요.

여인이 물었죠.


“뭘... 하는게냐...?”


소녀가 대답했어요.


“가만히 계세요. 

약을 바르는 중에 움직이면 상처가 덧나요.

뭐, 이정도 깊은 상처에 약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여인은 이해가 가질않았어요.


“왜... 도망치지 않은거지?

왜... 돌아온 것이냐, 왜...?

내 손짓 한 방이면 널 고깃덩이로 만들수 있는데... 

왜지?”


“...”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게냐...?

아님 천성이 나약해서...

못 본 척 할 수... 없었던거냐?”


“...”


“대답해!”


“... 저희 아빠가 그러셨어요.

너는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뭐...?”


소녀가 천천히 약을 바르며 설명했어요.


“저는 일식 날에 태어났거든요.

맨날 손가락질 받았어요. 

태어난게 잘못이라고, 존재 자체가 잘못됐다고.

그러더니 제가 8살때 절 버리고 떠나셨어요.

저랑 동생만 남기고. 저 멀리.”


“...?”


“다들 그랬어요. 마을사람들도 저를 두고

저주받았다고, 악마의 아이라고 부르면서

걸핏하면 욕하고 협박하고.

참 외롭고도 두려운 나날들이었어요.”


“무슨...?”


“계속 생각해봤어요. 이게 진짜 내 운명인 걸까?

난 저주받은걸까? 정말 사악한 년인걸까? 하고.

...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소녀가 약 뚜껑을 덮으며 말했어요.


“내 운명이 저주받았다고 누가 그래요?

하늘이? 부모가? 이 세상이?

일식 날에 태어났다고 다 나쁜년이에요?

말도 안되는 미신 따위가 내 운명을 정해? 흥!

이건 내 운명이에요. 내가 결정하는 내 운명.

난 내 방식대로 살아가겠어요, 이게 바로 나라고요!”


그러더니 소녀는 약병을 여인의 손에 쥐어주며

말을 이었어요.


“... 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도 살리려는

우둔하고 멍청한 년이 바로 나라고요.”


“... 그러다 살아난... 내게 살해당한다 해도...?”


“그럼 그게 제 운명인거겠죠. 난 후회 안 해요.”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어요.


“... 내가 잘못 본 것 같군. 넌 아니야.”


“... 네?”


“사람을 찾고있다. 얼굴은 모르지만

키는 너와 비슷하고 등쪽에 날개문신을 한 소녀다.”


“그 소녀를 왜 찾으시는데요?”


여인은 눈을 감으며 단호히 말했어요.


“그것까지 알려줄 의리는 없노라.”


“에이, 쫀쫀하시긴!”


소녀가 여인의 가슴팍을 팍 두들기자

여인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어요.


“아야!”


소녀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여인을 쳐다보자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가렸어요.


“아야? 위대한 용님께서 아야?”


“다, 닥치지 못할까...! 아야야...”


“... 풉! 푸하하하하!”


“닥쳐라...! 아으윽...”


동굴 안은 곧 소녀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여인의 고함소리로 가득찼습니다.

가까스로 웃음을 그친 소녀가 여인에게 말했어요.


“흐으... 저기... 오늘 여기서 자고가도 되나요?

약을 훔쳐오는 바람에 마을에서 쫒겨났거든요.”


“그것도 네가 선택한 길이더냐?

... 하아. 맘대로 해라. 지치고 피곤하구나.”


“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셨군요?”


여인은 듣는둥 마는둥 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어요.

거대한 용과 저주받은 소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답니다.









2부




다음날 아침,

조만간 다시 오겠다는 소녀의 인사와 함께

동굴 안은 다시 조용해졌어요.

그 침묵 속에서 여인은 많은 생각에 잠겼죠.


‘... 초라하구나, 글라시아스.

용살자와의 사투가 벌어진지 어언 칠 년,

달아난 그녀를 잡기위해

얼마나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던가?

얼마나 많은 터전을 불태우고 죽이고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미움을 샀단 말이냐?

만물을 향한 증오의 칼날을 뱃속에 삼킨 후

하루 하루를 독하게 살아온 이 내가,

그 소녀... 이름도 묻지 않았군.

그 소녀에 의해 칼날이 조금은 무뎌지려고 했다.

정신차려라, 글라시아스!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그 때까지 한치의 빈틈도 보여선 아니된다.

그 소녀... 저주받은 아이라...?

다시 한 번 내게 얼굴을 들이밀 때는

그것이 네 마지막 순간일것이다.’


독하게 마음먹은 여인의 귓가로 

누군가 동굴 안을 걸어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보폭음이 넓지 않은것이 어린이의 발자국 소리였으나

무거운 발소리로 보아 무언가를 짊어진듯 했어요. 

여인은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려

소녀의 목을 칠 준비를 했어요.

마침내 소녀가 얼굴이 보였을 때,

여인은 순간 굳어져 움직일 수 가 없었어요.

“약 남았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는 소녀의 뒤에는

온 몸에 두들겨 맞은 모양새를 띈 소년이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죠.

소녀의 간절한 눈빛에 여인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손아귀의 약을 건네주고 있었어요. 

소녀가 남자아이의 온 몸에 난 

상처에 약을 바르는 동안

여인은 조심히 소녀의 눈치를 보며 물었어요.


“... 전에 말했던 동생이냐?”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왜 그 모양 그 꼴인 것이냐?

... 설마 네가 그 약을 훔쳐서 그런것이더냐?”


소녀는 말이 없었어요.


“저주받은 소녀가 약을 훔친 대가로

그 동생이 마을사람들에게...?”


끄덕.


“인간들이란...”


“...“


“죽여버리고싶으냐?”


“...?”


소녀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여인을 쳐다보았어요.

호기심과 의아함으로 가득한 눈빛은

호박색으로 영롱히 빛나고 있었죠.


“누굴요?”


“누굴요? 누굴요라니? 당연한것 아니더냐?”


용이 손을 들어올려 소녀에게 뻗었어요.

덜덜 떨리는것이 아직도 아픈 것 같았죠.


“널 괴롭히는 마을 사람들, 내가 죽여주랴?”


“...”


“어차피 이 마을에 볼일도 없으니

그냥 없애버릴 속셈이었다만

지금은 이 부상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들구나. 

허나 부상이 치유가 되는 즉시...”


“싫어요.”


소녀가 여인을 노려보며 말했어요.


“그럴 목적이라면 절대로 치료해주지 않겠어요.”


용은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되물었어요.


“뭐라고? 아니... 왜지? 

왜 그들을 감싸는것이냐?

그들이 밉지도 않더냐?”


“... 밉죠. 미워요.”


“그들에게 저항하고픈 생각이 들지도 않더냐?”


“그건...”


“죽이고싶도록 증오스럽지도 않고?

넌 자존심도 없느냐?”


“...”


여인이 답답하다는듯 소녀의 동생쪽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어요.


“지키고 싶은것이 있다면 확실히 지켜라!

같잖은 동정심으로 혈육을 잃었다간 

그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가 아니겠느냐!
그 마을 놈들은 네가 뭘 하건 신경쓰지 않을게 뻔하다.

네가 어디서 굴러먹건 어느 시궁창에 

빠져 죽건 하등 알 바 아니다 싶겠지.

그런 인간들을 그래도 감싸겠다는것이냐?

네 소중한 것들을 뺏어갈 자들을 

그래도 동정하겠다는거냐!?”


여인의 말에도 소녀는 아무말 없이

남자 아이의 상처에 약을 바르기만 했어요.

여인은 지친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어요.


“이 얼마나 멍청한 계집애란 말인가...”


“다 죽이면요...? 그 다음에는요...?”


소녀가 입을 열었어요.


“그런다고 해결될건 없잖아요.

차라리 대화로 풀어나가는게...”


“대화? 흐하하하하하!”


용이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어요.


“하하... 네가 처음으로 날 웃겼구나.

대화? 대화란 동등한 두 인격이

서로간에 나누는 의사소통이노라.

네 생각은 어떠냐?

네가 그들과 동등하긴 하더냐?”


“...”


“그들에게 넌 그저 저주받은 미천한 찌꺼기에 불과하다.

그런 네가 그들과 대화? 잘도 통하겠구나!”


“...”


“멍청한 소리 마라, 어리석은 계집이여.

헛소리 말고 내 선물이나 잠자코 받거라.

널 증오하는 사람들은 모두

차가운 얼음덩어리가 되어 영원히...”


“싫어요! 절대로 안돼요!”


소녀가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제가 사람을 잘못봤군요!

그래도 선한면은 있으신줄 알았는데...

됐어요, 마님이 이런식으로 나오신다면

저도 더는 도와드리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여인이 말릴 새도 없이 

동생을 안아들고는 동굴 밖을 뛰쳐 나갔어요.

동굴에 남겨진 여인은 생각했죠.


‘나도 널 잘못봤구나, 소녀여.

어리석도록 물러터진 마음가짐에

패배자나 할 법한 생각이나하다니.

뭐, 됐다. 상처 치유야 시간이 걸리겠지만

마력을 온 몸에 순환시켜

자연 치유력을 상승시킨다면 

느려도 확실히 치료가 될터이니...

잘 가거라, 시끄럽던 소녀여!’


여인은 자세를 바로잡아 곧

온 몸의 마력을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순환시켰어요.

그리고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후

들이쉬었던 숨을 다시 내쉬니

가슴에 있던 통증이 어느정도 가라앉음을 느꼈어요.

여인의 마력이라면 몇 일 내로

상처가 아물것이에요.

... 헌데 그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 알 바 아니다. 알아서 집에 굴러들어 갔겠지.’


소녀는 가족이 없다고했죠.

어린 동생을 제외한다면 말이에요.

그녀는 여전히 혼자일거에요.


‘내 알 바 아니다. 하찮은 필멸자따위 알게뭐냐.’


어쩌면 약을 훔친 대가로 

어른들에게 맞고있을지도 모르죠.


‘... 내 알 바 아니라고 했다.

훔친건 그 녀석이니 맞아도 싸겠지.’


자기보다 훨씬 큰 어른들에게 

주먹으로 맞고 발로 짓밟히며 

피를 흘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내 알 게 뭐냐? 도와줘야 된다는 거냐?

내가 왜? 

난 그럴 의리도 감정도 그 녀석에겐 없다!’


어쩌면 실컷 두들겨 맞은 뒤

길바닥에 나뒹구르며 울고있을지도 몰라요.

너무 심하게 맞아 죽어버렸을지도 모르고요.


‘그만, 그만! 집중이 안된다, 집중이!’


더 할수도 있어요. 

동생도 심한 폭행을 받은 나머지

 그만 목숨이 끊어진 시신을 안고 

비참하게 울고있는 소녀의 모습이...


“으아아아아!!!”


여인은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어요.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누군갈 생각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하찮은 필멸자를?

...

여인은 씩씩거리며 동굴 밖으로 나가

절뚝거리며 마을을 향해 걸어갔어요.

부상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던 그녀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마을에 도달했어요.

마을은 시끄러운 고함소리로 북적였죠.

여인은 순간 가슴이 철렁였어요.

잔뜩 모여있는 마을사람들 한 가운데에서

남자들의 고함소리 사이로 

소녀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들렸거든요.


“제발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제 동생은 잘못 없어요, 그러니까 저만...!”


“카악 퉤! 

돼지 퇴비에 빠져 죽을 년같으니라고.

야 이년아, 

네가 훔쳐간 약이 얼마나 귀한 건지 알긴알아?!”


“죄송해요 아저씨!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너 오늘 한 번 죽어봐라.

안 그래도 기분 더러웠는데

남매가 쌍으로 엿같게 만드네.”


“꺄아아악!!!”


여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소녀는 건장한 청년들 사이에 둘러쌓여

수 많은 발길질을 당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소녀는 어떻게든 

동생을 지키기위해 품안에 꼭 끌어안고 있었죠.

동생만은... 동생만은... 하면서.

여인은 순간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터져올라옴을 느꼈어요.

그리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가

소녀를 패고있는 청년들에게 다가갔어요.


“꺼져라, 저리 꺼져라! 그 애에게서 떨어져라!”


“엇, 뭐야 이 년은...?”


여인이 숨결을 내뱉자

눈 앞에 청년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어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자

여인은 여전히 분이 안 풀렸다는듯

사람들을 향해 얼어붙는 숨결을 날렸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후

여인은 가쁜 숨을 내쉬며 소녀에게 다가갔죠.

쓰러진 소녀의 머리를 들어올리자

소녀가 간신히 숨을 내뱉으며 말했어요.


“동생... 제발... 살려주세요...”


여인은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어요.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죠.

그녀는 스스로를 북방의 위대한 용, 

글라시아스라고 자부해왔어요.

그런 그녀가 고작 이런 작고 

보잘것없는 소녀에게 동정심을 느끼다니.

소녀는 이어서 중얼거렸어요.


“엄... 마? 엄마에요...?”


여인의 가슴이 철렁였어요.


“엄마... 죄송해요...

나 때문에 동생이... 다치고... 피투성이가 되서...

나... 딱 한 번 나쁜짓 했는데...

다들 나... 싫어해요...”


여인은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몰랐어요.

소녀는 계속 말했죠.


“착하게 살면... 다들 좋아해줄거라면서요...

나... 그래서 착하게... 살았는데...

딱 한 번... 나쁜 짓 한 것 뿐인데...

다들... 다들 나 싫어해요...

엄마... 나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해요...?”


‘안돼... 마음을 닫아라. 이 이상은 용납할 순 없다.’


여인의 생각이 이러함에도

소녀는 계속 중얼거렸죠.


“어딨어요 엄마...? 어딨어요...? 엄마...? 엄마...”


‘안돼... 넘어가선 안된다... 넘어가선 안...’


여인은 눈을 질끈 감았어요.


‘...’


이내 여인은 입을 열었어요.


“걱정마렴 아가야. 돌아가자. 돌아가자꾸나”


“엄마...? 엄마...?”


여인이 품에 소녀와 동생을 안아 올리며

그녀가 은거중이던 산속의 동굴로 발길을 옮겼어요.

여인은 품에 안긴 소녀를 보며 중얼거렸죠.


“북방의 글라시아스는 어디로 가고...

겨우 조그마한 소녀에게 이리도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 나도 부모였던 적이 있어서일까.

지긋지긋하구나...”


여인이 떠나가고 숨어있던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며 한 마디씩 꺼냈어요.


“괴물이... 괴물이 저주받은 년을 데려갔어!”


“소문을 내야해! 괴물이 나타났다고!”


“아냐, 수비대에 연락을 해야 해!

괴물을 처치해줄거야!”


“아냐! 아냐! 그러려면 괴물사냥꾼을 고용해야해!”


“아뇨, 그럴거면 차라리...”


어제 소녀를 여인에게 데려 갔던 병사가 

사람들 틈에서 주장했어요.


“왕궁에 보고 하겠습니다. 

왕궁의 괴물 사냥꾼 리스트의 인물들이라면 

분명 저 괴물을 죽일만한 인물을 

고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3부






동굴로 돌아온 여인은 서둘러 아이들을

눕혀 놓고 그들의 가슴에 손을 올려

마력을 천천히 주입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소녀의 몸은 빠른 속도로 치유되었어요.

동생쪽은 치유되는 속도가 비교적 느렸지만 

어쨌든 몇 일이 지나고서야 둘은 건강을 되찾을수 있었죠.
비틀거리며 일어난 소녀가 감사를 표했어요.


“감사합니다 마님, 덕분에 살았어요.”


여인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죠.


“됐고, 앞으로 어찌할 것이더냐?”


소녀가 난색을 표하자 여인이 중얼거렸어요.

“마을에선 그래 쫓겨 났고, 돌봐줄 사람도 없고.

그러다 사흘안에 죽을 모습이 훤히 보이는구나.”


“....”


“나 참.”


어두운 동굴 안에서 여인이 

머리를 벽에 기대며 혀를 차자

소녀가 조심스레 여인에게 무릎을 꿇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어요.


“저... 죄송하지만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아니. 싫다.”


“드, 들어만이라도 주세요! 제발요!”


“하아... 내가 업보가 많긴 하구나.

뭐냐? 그 질문이라는게.”


소녀가 손을 꼼지락 거리며 겨우 말을 꺼냈어요.


“저랑 제 동생... 구해주신분이 마님 맞으시죠?”


“...”


여인은 말이 없었어요.

그러자 소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어요.


“하도 얻어맞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마님 곁에 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냉기가

그때도 느껴졌었어요.”


여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어요.

오히려 고개를 돌려 소녀의 눈길을 피하는 모양새였죠.

소녀는 다시 물었어요.


“사람을 죽이시는데 그렇게 자비가 없으신 분이...

도대체 왜 저랑 동생을 살리신거죠...?”


“...”


“저는 마님을 버리려했어요. 그런데도 왜...”


“... 난 어떤 사람을 죽이기위해 떠돌아다니고있었다.”


순간 동굴안이 적막으로 가득찼어요.

소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자

여인도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죠.


“전에 말했던 등에 날개 문신을 한 소녀,

그녀를 쭉 찾고있었지.”


“어... 어... 어째서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여인은 깊은 한 숨을 내쉬었어요.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더니

이내 입을 열어 자신의 오랜 기억을 되풀이했죠.


“내게도 자식이 있었다. 딱 너만한 아이였지.

귀엽고, 또 사랑스러운 모습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었어.

그 아이가 내 품에 안겨 노래를 부를 땐

언제나 속으로 되뇌이곤 했지.

누구라도 이 아이에게 해를 끼쳤다간

전심전력으로 그 자를 박살내겠다고.”


여인은 손을 들어올려 주먹을 쥐어보였어요.


“어느날 내 둥지에 사람이 하나 찾아왔다.

복면을 두르고 큰 검을 찬 소녀가.

그녀는 말없이 칼을 손에 들곤 내게 달려들었어. 

난 용을 죽여 명성을 얻으려는 또 다른 

머저리라 생각하고 가볍게 

얼어붙은 숨결을 내뱉었지.

허나 그녀는 그냥 머저리가 아니었어.

칼을 원형으로 휘둘러 내 숨결을 전부 날려버리더니

곧장 내게로 달려와 큰 칼을 휘두르자

간신히 칼날을 피한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내 아이를 뒤로 두고 전투에 임했지.

싸움은 여섯 시간이 걸렸어.”


여인이 손을 펴 아직도 자고있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치열한 싸움끝에 그 년의 칼날이 

내 가슴을 뚫고 들어오자

그 년은 호탕하게 웃었어. 

마치 승자라도 된것 마냥.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나는 발톱을 세워

그 년의 가슴을 할퀴었지.

윗 옷이 찢어지고 가슴에 큰 상처를 입은 그 년은

칼을 물리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어.

서로 입은 깊은 상처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던 그 때

갑자기 내 아이가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거야.

이 어미가 걱정이 되서 그랬던거겠지.”


여인이 슬픈표정을 지으며 말을 잠시 멈추었어요.

소녀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인을 재촉했죠.


“그래서요? 그 다음에는요?”


“... 그 아이를 향해 물러서라고 외치던 찰나,

그 틈을 노린 용살자가 내게 달려들어 내 배를 세로로 그었어.

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지.

그 년이 칼을 들어올려 내 목을 치려하자

우리 둘 사이를 내 아이가... 가로막아섰지...”


“설마...?”


소녀가 경악하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 년은 무자비하게 칼날을 내려쳤고,

내 아이는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지.

난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고 또 불러보았으나

아이는 대답을 할 기미도 보이질 않았어.”


여인은 눈을 감으며 회상에 잠겼어요.


“내 몸이 움직였었다면 그 년의 몸뚱아리를 

천갈래로 찢어발겼을터인데...

그 년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 깊었던 바람에...

허나 그 년 역시 상처가 얕지는 않았지.

더이상 칼부림을 할 만한 기력이 남아있질 않은듯

그 년은 쓰러져있는 내게 다가오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이더군.


‘용살자가 힘이 부족해 용의 목을 칠 수 없다.

자식의 원수를 갚고싶다면 이 곳으로부터

남쪽지방의 왕국을 찾아오거라.

난 그곳 어딘가에 은둔해 있을터이니.

서두르진 말거라. 

난 온전한 힘을 가진 네년의 힘이 필요하니까.’


그 말을 남기고 그 년은 내 둥지를 떠나갔지.

내가 마지막으로 본것은

그 년의 등에 그려진 날개문양의 문신 뿐...”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손으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어요.


“용살자가 떠난 후, 

난 아이의 시체를 껴안으며 한참을 울었다. 

아이의 이름을 되뇌이고 되뇌이며

다시 일어나기를 바랬지.

허나 헛수고였어.

 아이는 다시는 일어나질 못했으니.

그때부터 다짐했지.

증오스러운 용살자를 잡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가차없이 죽이고 부수고 얼려버릴것이라고.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면 무엇으로든 치룰것이라고.

그렇게 맹새했어.”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소녀가 입을 열었어요.


“그래서 지천을 떠돌아다니셨던건가요?”


“그래.”


“말씀대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시면서?”


“... 그래.”


“죄책감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글쎄...”


“그들도 가족이, 자식이 있었을텐데...?”


“...”


“...”


여인은 말없이 소녀를,

소녀는 말없이 여인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여인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죠.


“그럼 저희는 왜 구해주신거죠?

저희 따윈 마님께서 보시기엔 

구해줄 이유가 하등 없을 목숨이었을텐데요?”


“...”


“미천한 이 몸이 마님께서 마음에 들만한 

행동이라도 했던가요?”


“...”


“아니면 어느 한 순간의 변덕심이었던가요?”


“...”


“마님, 침묵은 대답이 아닙니다.

어서 말씀을... 마님?”


“... 쿠울...”


깊은 상처와 그로인한 피로가 겹쳐

여인은 앉은채로 잠에 빠졌어요.

소녀는 맥아리가 빠져서는

여인을 꺠우려고 다가갔으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까닭에 그만두고말았어요.


“깨우지 않는게 좋을거야.

깊이 잠든 용을 건드려봐야 좋을건 없거든.”


소녀가 크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소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자가

바위에 걸터앉은채 볼을 손에 걸치고있었어요.


“누, 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왔죠?

무슨 일로 찾아오신거에요?”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해줬으면 좋겠어.

그 편이 대답하기도 좋거든.”


수수께끼의 여자가 검지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어요.


“뭐 아무튼간에, 날 지크프리트라고 불러.

난 그편으로 불리는걸 좋아하거든.”


스스로를 지크프리트라 부른 여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소녀의 곁에 다가가 앉았어요.

소녀는 지크프리트를 가만히 쳐다보았죠.

소녀처럼 호박색 눈빛에 은색 단발머리 모양을 한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친근해보이면서도 

위협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시선을 느낀 지크프리트가 말했어요.


“왜? 뭐라도 묻었어?”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일로 여길 찾아오신거죠...?

이 곳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텐데...”


“의뢰를 받고 왔어. 괴물이 나타났다고말야.”


지크프리트는 싱긋 웃어보였으나

소녀는 어쩐지 조금의 다정함도 느낄수 없었어요.


“그래서 마을로 찾아오니까

사람들이 알려주던데... 다 알려줬어.

괴물도... 저주받은 소녀도. 모두.”


그녀가 소녀를 말없이 쳐다보았어요.


“저주받을 년이라던지 

은혜도 분수도 모르는 년이라던지.

용보다도 네가 더 욕을 먹고있었어.

하도 그렇게 욕을 먹는 까닭에

생긴것도 끔찍하게 생겨먹었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귀엽게 생겼네?”


소녀가 얼굴을 붉히자 지크프리트는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어요.


“한 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왜 저 용과 붙어다니는거야?”


“붙어 다닌다기보단...

제가 머무를 곳이 없어서... 그래서...”


“그래? 가족들은 어딨는데?

집은 또 어딨고?”


”...”


“흠... 그래, 사람에겐 각자의 사연이 있으니까.

... 뭐 좀 물어볼게 있다는 눈빛이네?”


"여기... 저 분을 잡으러 오신건가요...?"


소녀가 여인을 가리키며 물어보자

지크프리트가 씨익 웃어보였어요.


"그렇다고 해야하나?

아니라고 해야하나.

일단은 그렇다고 해둘게."


"왜... 잡으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되나요...?"


소녀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용이잖아. 사람 잡아먹는 사악한 용."


"사람을... 잡아먹진 않아요. 그냥 죽일 뿐..."


"그게 그거잖아. 잡을 이유라면 그걸로도 됐지."


"새, 생각만큼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에요!

저랑 동생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주신것도

이 분이라고요! 이 분이 없었으면 저와 동생은 이미..."


지크프리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쳐다봤어요.


"정말? 저 용이랑 무슨 인연을 쌓았길레?"


"그냥 대화 좀 나눈..."


"무슨 대화?"


"그냥 제가 일식의 저주를 받..."


소녀는 아차싶은 표정으로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고 말았어요.

지크프리트는 눈을 번쩍이며 말했죠.


"너도?"


"예... 예? 너도라뇨?"


"자, 잠깐 상의 좀 벗어봐. 잠깐이면 돼!"


"꺅! 왜 이러세요!"


소녀의 저항에도 지크프리트는 막무가네였어요.

강제로 옷을 벗겨 소녀의 등을 확인한 그녀는

곧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옷을 입혀주었죠.


"넌 아직이구나..."


"뭐, 뭐가 아직이라는거에요?"


"..."


지크프리트는 곰곰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어 대답해주었죠.


"혹시 생각해본적 있니?

일식 날에 태어난 아이들이 왜 천대를 받는지?"


"... 네. 항상 욕지거리를 받을 때마다 상상해봤어요.

일식 날에 태어난게 뭐 불길하다고 그러는건지..."


"불길하지. 정확히는... 불안하다고 봐야할까."


지크프리트는 몸을 돌려 소녀에게 바싹 다가가

앉아 자신이 알고있는 사실을 알려주었어요.


"태고적에 존재했던 선과 악의 전투 끝에,

대천사 밀레나가 대악마 로그니를 무찌른 일이 있었어.

모든 피조물들이 로그니의 죽음에 기뻐했지만,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

로그니의 시신으로부터 나오는 사악한 마력이

태양빛을 받을 때마다 

사방으로 사악한 마력이 발산 하는거야.

난감했지. 시신은 불에 타지도 칼에 잘리지도,

땅에 묻으면 땅이 썩고 바다에 담그면

바다를 마르게 했거든.

그러다 밀레나가 한 가지 꾀를 내었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달,

그 곳이라면 지구에 로그니의 마력이 닿지않을테니 

그 곳에 시신을 안치시킨다면?

천사들은 당장 날개를 펼쳐 로그니의 시신을

달을 향해 가져갔어."


"우와, 달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쳤네요."


"내 말이. 하여간, 밀레나의 계획대로

달에는 태양빛이 비치지 않은 덕분에

로그니의 시신은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얌전히 잠들어 있었어.

허나 밀레나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지.

바로 일식이야."


"태양과 달이 겹쳐지는 순간...?"


"그래, 개기일식. 태양과 달이 하나가 되는순간

로그니의 시신에 엄청난 양의 햇빛이 비춰지고

그에 따라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세상을 향해 퍼져나갔어.

짐승들은 미쳐버리고 식물들은 말라버리며

물고기들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아기들은..."

 

"저주에... 걸린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저주에 걸린 채 태어난 아이들이

성년기를 맞이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일식의 빛을 받게된다면 

몸 속의 로그니의 악한 마력이 깨어나

악마가 되어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해.

그래서 사람들이 일식에 태어난 아이들을 

불길하다 하는거야.

그래서 어떻게든 일식날은 넘기고

아이를 낳으려고들 하는거고."


소녀는 그녀의 말을 듣곤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어요.


"그딴거... 다 미신인데... 그런데..."


"미신이 아니야. 봐봐."


그러더니 지크프리트를 중심으로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나왔어요. 그 속에서 지크프리트는

큰 뿔과 청색 피부에 역안의 모습을 한,

가히 악마라 불려도 좋을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소녀가 경악하는 모습에 놀라자

지크프리트가 웃으며 한 바퀴 빙글 돈 뒤 말했어요.


"너도 다시 한 번 일식의 빛을 쬐면

나와 같은 모습이 될거야.

난 5년 전에 있었던 일식을 보았을 때 생겼는데

너는 그 때 어디 동굴 속에라도 있었던거야?"


허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지크프리트의 등 뒤에 그려진 문신에

정신이 팔렸거든요.

그 모양이 마치...


"날개!"


그녀의 등에는 날개 문신 한 쌍이 그려져있었어요.

소녀는 생각에 잠겼죠.


'설마... 설마 이 여자가 마님을 습격한...?

아냐, 아냐. 속단하지 말자.

저주받은 아이가 그녀 하나만 있는것도 아니고.

... 하지만 상황이 너무 딱 들어맞잖아?

하필 용 앞에 하필 날개 문신을 한 소녀가 나타나다니...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마님을 깨워야하나?'


"뭐, 어쨌든간... 너도 일식의 저주를 받았다면

이야기는 빠르겠네.

날 도와줘. 

같은 저주받은 소녀끼리 힘을 합치자고. 어때?"


지크프리트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소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어요.


"하나만... 하나만 확실히 알려주세요.

이 분... 아니, 이 용의 자식을 해친적이 있나요?"


지크프리트가 손을 내민 채 말없이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죠.


"너완 상관없는 일이야."


"아, 아뇨. 상관있죠. 상관있고 말고요."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만약 당신이 용의 자식을 해친 장본인이라면

죄없는 용을 미쳐날뛰게 만든 원인인거잖아요!

괜히 조용히 살고있는 용을 건드려선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사단을..."


"그래서 뭐 어쨌다고?"


지크프리트가 비웃음에 찬 표정으로

소녀를 향해 말했어요.


"어차피 다 죽어도 싼 쓰레기들인데."


"... 뭐라고요?"


"너도 저주받은 자의 삶을 겪어봐서 잘 알잖아?

내 가족들은 단지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살해당했어.

저주받은 년의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아버지는 돌팔매질을 당해 죽었고

어머니는 목이 잘려 죽었어.

내 오빠는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며

산채로 개들의 먹이가 되었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내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어? 

응? 넌 어때? 네 가족은 어떻게 되었지?"


지크프리트는 잔뜩 흥분한 채 떠벌였어요.

그 기새에 밀린 소녀는 잠시 주저하더니 

조심스레 말했죠.


"아버지는 절 버리고 떠났어요...

어머니는... 병에 걸려서...

누구의 도움도 못받고... 돌아가셨죠.

지금은 여기 남동생이 유일한 가족이에요."


"그것 봐! 그게 소위 저주받은 자들의 삶이야!

겨우 저주받은 채 태어났다고 

이 수모를 당해야 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내가?

왜 내 삶이 이따위로 망가져야만 하냐고?

왜?! 도대체 왜!!!"


"저, 그러다 저 분 깨어나시겠어요..."


지크프리트는 잔뜩 흥분한 채 침을 튀기며 말했어요.


"절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모두 돌려받을거야.

내 가족의 목숨, 내 인생을 망친 값,

내 빛나는 미래까지 전부!"


소녀는 난처한 얼굴로 물었어요.


"그럼 왜 하필 죄 없는 용의 자식을...?"


"용은 본디 모성애가 강해서 자식을 잃은 용은

나라 하나를 멸할 광기를 가지게 된다고하지.

만약 나라를 멸할 용의 목을 

베어 갖다 왕에게 바친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전과는 달라지지 않을까?"


소녀는 순간 소리를 지르려던것을 억지로 참았어요.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소녀를 보며

지크프리트는 계획을 이어서 설명했죠.


"나라를 멸할 용을 죽인 자...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일거야...

덤으로 꼴도보기 싫은 인간들 

몇 백 명이 죽는 꼴을 볼 수 있고 말이지. 흐흐흐..."


"어떻게... 어떻게 그런..."


"어떻게 죽일 작정이냐고?

우리가 로그니의 악한 마력을 타고난 

존재라는 거 기억나? 이렇게!"


지크프리트가 양 손에 힘을 주자

불길한 마력이 그녀의 두 손으로 응집되었어요.

그러더니 곧 주변 공간을 일렁이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이 만들어졌죠.


"이 힘... 이 마력만 있다면야...

흐흐흐, 저주받은 몸도 이럴 땐 쓸모가 있는걸?"


"... 맙소사."


"놀랄것 없어. 너도 곧 이 모습이 될테니까."


지크프리트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천문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번 주 내로 저 하늘에 개기일식이 뜬다고 해.

너도 그 빛을 받고 악마로서의 힘을 깨워!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저 용을 죽이는거야!"


"전... 전..."


"뭘 망설이는거야? 답은 정해져있잖아?

설마 저주받은 자의 지옥같은 삶에 

만족하는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그럼 내 손을 잡아! 우리 둘이 용살자가 되어

인간으로서 누릴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얻어내자고!"


"...."


소녀의 머리가 혼란으로 뒤섞였어요.

용, 악마, 저주, 그리고 명예.

그녀의 선택이 모든것을 좌지우지할 그 때,

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어요.


"그래서... 내 아이가 죽어야만 했던거냐?"


여인이 깨어났어요.


"네깟 필멸자들의 욕심 때문에?!"


여인이 곧장 지크프리트에게 달려들었어요.




4부 






마치 짐승들의 싸움과 같은 

격렬한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소녀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동굴을 빠져나오고 있었어요.

소녀는 여인이 마지막으로 외쳤던 목소리를 기억했어요.


'목숨이 아깝거든 이 동굴에서 멀리 떠나라!'


허겁지겁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소녀,

그녀는 밖에서 누군가가 떠들어대는

목소리를 들었어요.

이윽고 밖으로 나왔을 때

밖에는 마을사람들이 횃불과 쇠스랑을 손에 들고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었어요.


“그 여자 괴물 사냥꾼을 따르자!”


“괴물을 죽이자! 마을을 지켜내자!”


“마을을 위협하는 적을 물리치자!”


“다들! 이곳에 들어와선 안돼요!”


소녀가 필사적으로 외치자 

마을사람들이 그녈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저주받은 년! 어딜갔나 했더니 

여기 괴물의 소굴에 숨어있었구나!”


“귀중한 비약을 훔친 이유도

다 괴물이 시켜서 그런거였냐?!”


“아니에요! 아니, 맞는 부분도 있지만...”


소녀의 말에 마을사람들 중 하나가

소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어요.


“보나마나 이년도 그 괴물과 한패일거에요!”


“빌어먹을 년! 

감히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를 배신해?!”


“저 년도 겸사겸사 죽여서 매달아 놓읍시다!”


“죽여버려! 죽여버려요!”


성난 군중들을 본 소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동생을 꼭 끌어안았어요.

앞으로는 마을 사람들, 

뒤로는 괴물과 악마의 싸움.

어디로 가야할까요?

어느곳으로 도망쳐야하나요?

이 곳을 벗어난다고 안전한 곳을 

찾을수 있을까요?

끝도없이 피어나오는 의문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소녀의 코앞까지 다가왔어요.

소녀를 향해 쇠스랑을 겨냥하는 남자,

곧 쇠스랑이 소녀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그 때,

동굴 안에서 누군가가 던져졌어요.

그녀는 땅바닥에 요란하게 나뒹굴며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중얼거렸죠.


“크윽! 젠장... 저번엔 운이 좋았던거였나...”


바로 악마의 모습을 한 지크프리트였어요.

그녀의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아연실색을 하며 소리쳤죠.


“아,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곧 혼란에 빠졌어요.

그 모습을 본 지크프리트는 

조소를 띄우며 말했죠.


“이런 염병할...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되는데.

별 수 없군.

전부 죽여버리고 저 용 탓으로 돌리는수 밖에.”


그러더니 오른손에 거대한 칼을 소환한 그녀가

천천히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갔어요.

사람들이 겁에 질려 이도저도 못하고있자

소녀가 사람들 앞으로 나서며 말했죠.


“지크프리트! 제발 자비를!”


“지크프리트? 

그건 마을에 찾아온 괴물 사냥꾼의 이름이잖아?”


“설마 그 괴물사냥꾼이 저 악마였다고?”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자 

지크프리트는 한 숨을 내쉬며 말했어요.


“젠장할 멍청이같으니.

이제 죽일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그래.

비켜서.”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말아주세요!”


소녀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적잖히

당황한 눈빛을 띄웠어요.


“너... 미쳤어? 네가 저 사람들을 감싼다고?

저주받은 아이가 사람들을?”


지크프리트가 소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어요.


“사람들에게 오만가지 욕은 다 들어먹고

하나뿐인 가족관계도 박살난데다

너 자신의 목숨도 위협당한 주제에

저 빌어먹을 사람들을 살려달라 하는거야?”


지크프리트의 질문에도 소녀가 가만히 있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어요.

그리고 기가 찬다는듯이 말했죠.


“너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저치들을 살려준다 치자.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어쩔건데?”


“네?”


“네가 그런다고 저치들이 너한테

감사의 인사라도 할 것 같아?

아냐! 절대로 아니라고!

보나마나 내가 그냥 떠나고 나면

널 죽이겠다고 발광들을 할 걸?”


그리고 그녀는 어찌해야하나 안절부절 못하며 서있는

마을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소리쳤어요.


“분명 저 쇠스랑으로 너와 네 동생을

서슴없이 찔러죽이겠지.

마치 내 가족이 살해 당했던 것 처럼!

그런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너 바보냐?”


소녀의 얼굴에 망설임이 피어났어요.

그녀의 말에 틀림은 조금도 있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소녀는 듣지 않았어요.

오히려 다리에 힘을 주어 더욱 완고히 서있었죠.

그러자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어요.


“내가 이런 바보에게 도움을 구했다니.

나도 미쳤지...

야, 됐으니까 비켜.”


“...”


“비키라니까!? 너도 죽고싶어서 그래?!”


“...”


“마지막 경고다. 비켜.”


“...”


소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어요.

그러자 지크프리트는 칼을 

위로 치켜올리며 위협적으로 말했어요.


“좋아, 그럼. 저승에 가서 잘 생각해봐라.

네 생각이 과연 옳았는지 틀렸는지.”


그리고 단호하게 내려치려는 그 때,

동굴 입구 쪽에서 외치는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봤죠.


“그 아이에게... 손 대지마라!!!”


어느 순간 여인이 나타나 지크프리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요.

곧 여인의 몸이 냉기어린 구름 속으로 가려지고

그 안에서 뒤틀리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리고 구름속의 여인의 형체가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죠.

목도, 몸통도, 팔다리도, 그리고 날개와 꼬리도요.

더이상 냉기어린 구름은 그녀를 가리고 있지않았어요.

거대한 용은 이미 구름을 뚫고

그 거대한 체구를 사람들에게 보이고있었거든요.


“정말... 용이셨군요...?”


“빌어먹을 자식.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냈군.”


여인이, 아니 거대한 용이 큰 소리로 외쳤어요.


“더는 내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여인과 용이 싸움이 다시 시작되자

소녀는 상황을 보며 동생과 함께 달아나려고 했어요.

그 때 지크프리트가 용의 발톱을 튕겨내며 빈정거렸어요.


"도망치려는거냐 꼬맹아?

너를 지키려는 용을 버려두고서?"


"듣지 말고 도망쳐라 아가야!"


용은 차가운 숨결을 내뱉으며 지지않고 소리쳤어요.


"내 걱정은 말거라.

이깟 계집애에게 당할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으니!"


그럼에도 소녀는 우왕자왕하며 서있었어요.

자신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상황을 두고 달아나기에는

너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죠.
지크프리트는 그 상황을 꿰뚫어보고 소리쳤어요.


"꺄하하하! 참 웃기는 상황이야!

북방의 용과 저주받은 소녀가

서로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어디, 내가 그 사이로 돌이라도 던져볼까?"


그러더니 지크프리트가 칼을 거두더니

발길을 돌려 소녀에게로 달려갔어요.

용은 순간 아차싶은 마음에 

날개를 펼쳐 한달음에 지크프리트의 앞을 가로막았죠.

허나 그것도 예상했다는듯 

그녀는 재빠르게 칼을 휘둘러 
용의 가슴팍에 나있는 상처를 향해 

날카롭게 칼날을 쑤셔박았어요.

용이 피를 토하자 지크프리트가 소리쳤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걸리다니!

강대한 힘도 마력도 쓰잘데없는 온정에 무의미하구나!"


용이 상처의 깊음을 버티지 못하고 

그 육중한 몸을 옆으로 쓰러뜨리자

지크프리트가 눈물을 흘리며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어요.


"마침내... 엄마, 아빠, 오빠...

찬란한 영광을 내 손안에 넣었어요...!

내 저주받은 삶을 끝낼 때가 왔다고요!

지긋지긋하게 먹어온 쓰레기들도

돼지 분뇨속에서 잠을 자던 인생도

이제 끝이에요...!"


"그래... 끝이지... 단, 끝나는것은... 네 목숨이다!"


용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방심하던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물었어요.

당황한 지크프리트가 외쳤죠.


"끄악! 이, 이거 놓지 못해?!

으아악! 목이... 뜯어진...!"


용은 천천히, 허나 강하게 

지크프리트의 목을 물어뜯었어요.

지크프리트는 마지막 단말마를 내며 죽어갔죠.


"아파! 아파아아! 제기랄... 

죽기 싫어... 이렇게 죽긴 싫어...!

엄마... 아빠... 나 이제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지크프리트의 목이 으적! 소리와 함께

허무하게도 날아가고 말았어요.

마지막 힘까지 쥐어짠 용은 그 반동으로

힘없이 바닥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어요.


"마님! 마님!"


소녀가 용의 가슴께로 달려와 소리쳤어요.

서둘러 주머니 속 약을 꺼내 가슴에 생긴

상처에 바르기 시작하자

용이 힘없이 웃으며 말렸죠.


"어리석은... 이 정도 상처를...

그 정도 약으로... 고칠 수 있겠느냐..."


"마님... 마님..."


"그래도 고맙구나... 이런 온정을... 느껴본건...

참으로 오랜만이야... 참으로... 오랜만...

그동안... 광기에 빠져... 무고한... 이들을 죽이고

터전을... 박살냈지... 벌이야...

그동안 저질렀던... 죄에 대한 벌..."


"마님..."


"그래도... 마지막에 와서 널 만나... 

신께 감사할 따름이야...

내 아이처럼 착하고... 다정했던 너를...

구할수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에요, 마님.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리고싶을 지경이에요.

마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지금쯤..."


"... 죽었나?"


그런 둘이 나누는 마지막 대화를 방해하듯

근처에 피해있던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용과 소녀 근처를 둘러싸기 시작했어요.


"죽었어! 용과 괴물이 죽었어!"


"이젠 정말 죽겠구나 싶었는데..."


"이제 어쩌지?"


"용과 악마의 시체가 남았잖아!

왕국에 바치면 큰 포상을 주실거야!"


그들이 지껄이는 말에 소녀는 당황하여 

사람들에게 소리쳤어요.


"잠시만요! 이 용님은... 

여러분을 악마로부터 지킨분이나 다름없는데..."


"닥쳐! 저주받은년아!"


"그래! 네가 뭘 안다고 큰소리야?!

저 용은 내 친구를 얼려버렸다고!"


"내 남편도!"


"내 자식도!"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낼때마다

여기 저기서 맞장구가 오고갔어요.

그들이 외쳤죠.


"역시 저 저주받을 년, 저 용과 한패인게 분명해!"


"마을에서 내쫓아야 돼요!"


"아니, 돌팔매질을 먹여줘야지!"


"목을 잘라서 마을 앞에 꼬챙이에다 꿰어버립시다!"


그러더니 하나둘 쇠스랑을 들며 소녀와

용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어요.

절망한 소녀는 용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죠.


"마님, 마님. 마님과 용살자가 옳았어요.

제가 바보였어요. 제가 순진했다고요.

착하게살면 다들 알아줄 줄 알았는데...

다들 다르게 봐줄 줄 알았는데...

그냥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어요.

저 때문에... 제 선택때문에 동생과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말려무나...

하늘을... 하늘을 보거라..."


용의 말대로 하늘을 보니 창공에 떠오른

해와 달이 하나가 되려는  모습이 보였어요.

용이 말했죠.


"그 용살자와... 너의 대화를 엿들었다...

저주받은 이가... 한 번 더 일식을 보면...

악마의 힘이... 깨어난다지...

그 힘만 있다면 넌... 죽지 않을 수 있어...

허나..."


용이 가쁘게 숨을 쉬며 마지막으로 말했어요.


"힘은 자제력을... 잃게 만든다...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어떤 존재로도... 되게 만들수 있지...

아가야... 네가 그 힘을 얻고... 

어떤 존재가 될지는... 너의 자유다...

허나... 마지막으로... 내 이렇게 부탁하마...

나나 저 악마처럼... 추하게 살지는 말아다오...

증오에 눈이 멀어... 진짜 악마가 되진 말아다오...

그것이야말로... 정말 저주받은 소녀가 아니고... 

뭐겠느냐... 아가야... 부디... 악마가 되어선..."


용이 마지막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짐과 동시에 

하늘의 해와 달이 하나가 되었어요.

소녀에게 다가가던 사람들이 일식의 빛에

잠시 눈이 멀어 버리고 소녀의 몸은

곧 불길한 청색 안개로 휘감겼죠.

조금 지나 일식이 지고 사람들의 시력이

하나둘 돌아왔을때 쯤, 

 소녀는 더이상 그곳에 남아있지 않았죠.

모두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을때, 

동생이 조심히 그의 누나를 불렀어요.


"누나...?"


창공은 개기일식이 뜨고 대지는 피로 물든 이래 

동생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망가진 인생에 의해 악마가 된 누이를? 

혹은 용의 조언으로 본능을 억누른 누이를?

동생이 볼 수 있었던거라곤

누이의 얼굴에 핀 이쁜 미소뿐이었다고 합니다.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