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49543871 - 시리즈 모음








모두가 긴장한 분위기 속에서 알파와 사령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는 무전이 들려왔다. 별문제 없겠거니 하면서도 내심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 새하얀 벌판을 주시했다.


1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고


그리고 10분…




‘텍스트랑 진짜 대화는 많이 다르구나’




텍스트 몇줄 넘기면 되었던 인게임에서의 대화와 달리 현실에서의 대화는 무척 길었다.



그동안 멍하니 새하얀 눈밭을, 조금의 변화도 없는 풍경만 보고있으니 지루함은 배가 되었다. 



밑에 있는 브라우니하고 잡담이라도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라 정말 서있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만 하염없이 지나갔다.




‘게임에서는 안나박사 이야기 하고… 그러다 철충이 나타나서 알파랑 같이 해치우고… 철충?’


“알바트로스, 근처에 철충 반응은 있어?”


"아니. 이 지역에는 철충이 없다. 가장 가까이 있는 무리도 이틀동안 쉬지 않고 달려와야 도착할 거리에 있다.”


“...? 뭔가 이상한데.”




내가 알고있는 것과 달라진 흐름에 강한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이상하다니? 흠…? 가만.. 대지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고있다.”


"빈공간, 그리고.. 전파? 이건.. 비스마르크의…"




쿵! 구구구궁!




"뭐야! 이건?!"




거대한 폭발음과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새하얀 눈밭 위로 달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음. 모든 소리의 근원지에서는 새하얀 눈의 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전파장이 무력화되었다! 적의 함정이다"


“...! 사령관 각하 즉시 퇴각하십시오! 적의 공격입니다!”




하늘로 솟구친 눈이 중력에 따라 다시 땅으로 떨어지며 지하에서 솟아오른 무언가가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탑, 땅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탑이었다.


가시와 천연두 환자의 반점같은 무늬가 새겨진 그것의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아름다움이 있었다. 세상을 증오하는 조각가의 걸작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다수의 적대적 신호 포착! 전원 전투 태세로! 철충… 아니, AGS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


"적의 포격에 대비하라!"


"페로! 하치코! 주인님을 엄호하면서 즉시 후퇴해!"


"알겠습니다!"


"네!"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라 병력들이 뭉치고 흩어지며 탑을 포위하고 전선을 재구축했다. 


저멀리 있던 사령관은 어느새 페로에게 들린채로 전선에 도착해있었다.


그러는 사이 땅에서 솟아오른 탑에서는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알바트로스 저건 도대체 뭐야?"


"분석 중이다. 함정일 수 있으니 섣불리 공격하지 말도록"




그 빛 속에서도 수많은 대원들은 눈이 부시지도 않는듯 경계상태를 유지하며 탑을 향해 서있었다.


그녀들의 용맹함에 경탄하면서도 내 뒤에 있을 다소 평범한 인간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사령관! 무사해?”


“...”


"사령관?"




내 바로 뒤에 있을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답답함에 목표에서 눈을 때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뒤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젠장! 뭐하고 있…는… 사령관…?”




사령관은 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페로와 하치코는 바닥을 보고 있었다.


오르카의 병사들은 탑을 향해 서있었지만 고개는 숙인 채였다. 그녀들은 바닥을 보고 있었다.


바닥을 보는 자들의 몸이 추위에 떨리는 것처럼 진동했다. 그러나 그 떨림은 분명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시발.. 뭐야…”




이 몸으로 변한 이후로는 별로 느껴본 적 없는 감정, 원초적 공포가 등을 타고 흘렀다.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나자 바닥을 보던 이들 사이에서 이변이 시작되었다.




“다리..! 다리가!! 끄아아아악!!”




멀쩡한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브라우니. 고통에 젖은 비명이 정적을 깨고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당황할 틈도 없이 기묘한 현상은 대원들 사이에서 더욱 확산되기 시작했다.




“병장님..? 일어나주세요… 병장님까지 죽어버리시면..저는..저는 어떻게 해야해요…”


“흐으윽…으으으…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었어! ”


"사령관 각하… 제발 일어나주세요…"




아무도 없는 눈바닥을 향해 일어나라며 소리치는 레프리콘, 절규하며 바닥에 얼굴을 박아버린 워울프, 허공을 향해 손을 저으며 애원하는 발키리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내 몸이 눌려 부서질 것만 같았다.


공포에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저들을 진정시켜야하나? 그렇다면 누구부터 진정시켜야 하는가? 애초에 내가 할 수는 있는건가?


인간의 몸이라면 과호흡 증세까지 나타났을 정도의 스트레스가 내 머리를 칭칭 감아 조여왔다. 




"타이런트! 진정하고 전투 태세를 갖춰라!"




그 순간 알바트로스가 나를 불렀다. 의지할 대상의 등장과 함께 머리의 압박이 한결 약해졌다.




"… 젠장, 이게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 탑이 대원들을 세뇌하고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파괴할 생각은 말도록. 강제로 세뇌를 풀면 더 심각한 문제가 될거다."


'세뇌와 환상? 마키나…?'



너무나도 익숙한 능력에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어째서 낙원의 바이오로이드가 이곳에? 아니 그것보다 왜 우리를 공격하는거지? 왜 나랑 알바트로스는 멀쩡한거야?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며 머리가 탁해졌다.




깡!


“아윽..!”




단단한 손이 내 머리를 내려쳤다. 약한 고통이 물처럼 흐르며 탁해진 머리를 닦아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적이 접근하고 있다. 내가 최대한 세뇌를 풀어보겠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자네가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알바트로스의 손이 저멀리 지평선을 가리켰다. 지평선에는 검은 덩어리로 보일 정도의 숫자가, 오르카의 군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수많은  AGS의 군대가 보였다.




“적을 전부 해치우려고 하지말고 시간만 끌어라. 내가 어떻게든 해볼테니.”


"...실례지만, 저도 도와드려도 될까요?"




상황에 맞지 않는 미성에 고개를 돌리자 알파가 눈에 들어왔다. 이변을 눈치챈 경호원들의 공격을 받았었는지 옷은 더러워지고 심하지는 않으나 상처도 있어 꽤나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허튼 수작은..."


"알바트로스, 알파는 믿어도 괜찮아."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거지."


"지금 사건의 원흉이 알파라면 대화가 아니라 나를 해킹하려고 했겠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사정거리 안까지 다가올 이유는 없었어. "


"하지만... 아니, 됐다. 도박을 하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니."




그제서야 알바트로스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좋다. 레모네이드 알파, 발할라의 대원들을 우선하여 세뇌를 풀어라. 그리고 타이런트."




알바트로스의 몸에서 빛이 한차례 점멸하며 무언가 약동했다. 다음 순간 두꺼운 에너지 역장이 내 몸을 감쌌다.




"살아서 돌아오도록. 무리하지마라"





그의 마지막 충고와 함께 나는 적을 향해 돌진했다.






***





기계의 빛과 함께 대원들은 저마다의 풍경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사령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하얀 눈밭에서 시작하여 요정마을 그리고 오르카의 여러 시실을 거치며 그는 수많은 풍경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사령관실에 도착한 순간,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태양과도 같은 강한 빛이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빛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도 그것의 소멸과 함께 서서히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선명해져감에 따라 눈 앞에서 무언가가 형상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 형상의 주인은 녹색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었다.




“바닐라…?”


"뭔가요, 주인님. 제 이름을 까먹기라도 하신겁니까?"




그의 앞에서 녹색의 메이드 아가씨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바닐라… "


“주인님? 칠칠치 못한 표정이나 지으시고, 에…? 어째서 우시는겁니까..? 주인님?”




그가 잊고있던 여인을, 잊어야만 했던 여인이 사령관의 기억에서 다시 깨어났다.


사령관의 세계는 다시 한번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