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무슨 상관이지?"


지독하게 가라앉은 눈빛과 냉랭한 어조. 명백히 바르그는 사형집행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듯 보였다.


"그러니 일단 날 풀어주겠어?"

"네가 유일한 인간인 것과 지금 네가 처한 현 상황을 벗어나는 것... 도대체 어느 연관점이 있는지 모르겠군."


그녀의 키보다 거대한 대검의 날을 세우며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의문을 갖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항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느 주인이 자신의 소유물에게 처형당한다는 말인가. 작금의 상황은 충분히 대화로 해결할 여지가 보였기에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럼 일단 칼 가는 것부터 멈춰주라... 정말 살벌하거든?"

"깔끔한 참수를 위해서 연장을 다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 그러니..?"

"그렇다."


불행 중 다행일까. 바르그는 대답은 살벌했지만 칼을 가는 행위는 멈추었다. 물론 여전히 사형집행의 의지를 꺾지 않은 것은 심히 유감이었지만, 그래도 대화의 여지를 남겨주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죄의 처벌 = 사형으로 각인되어 있기에 이것은 교정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고, 무엇보다 참수라니. 이건 좀 야만적이지 않던가.


세상에 어느 군대가 자신의 상관을 참수한단 말이야. 고대 시절도 아니고.


"일단, 나는 떳떳해! 죽을 죄를졌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공정한 재판을 요구한다!"

"공정한 재판이라.. 음, 설득력 있군. 좋아, 납득했다."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3심을 하는 것은 납득해준 모양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판을 하겠다는 것에 납득한 것 같지만.


"떳떳하다고 했나?"

"응!"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거나, 끌어안는 행위의 어디가 떳떳하다는 거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며, 턱까지 어루만지며 고민하는 바르그를 보니 그녀에게는 애정이라는 감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살기위해선 일단 그것부터 설명하는 편이 빠르리라.


"그건 바르그가 귀엽고 예쁘기 때문이야!"

"귀, 귀엽다니..."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건 상식이라고!"

"멸망전의 세상에선 그건 상식이 아니었는데."


멸망전의 세상이라는 말에 말문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한 말로 멸망전의 세상에서 통용되던 상식따위, 눈을 떠보니 세상이 멸망해 있었던 내가 알 방도도 없었거니와,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존본능은 궤변이라도 늘어놓지 않는다면 저 무식하게 큰 대검에 목이 떨어질 것이라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멸망하고 난 지금, 세계의 유일한 인간은 나니까! 내 상식이 세계의 기준이야!"

"확실히... 그건 부정하기 힘들군."

"그리고!"

"그리고?"


앞으로 할 말들이 재판의 결과를 정해줄 것이라 생각하니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으나, 지금의 난 숱한 고비를 넘고 또 넘은 역전의 용사. 망설임은 잠시 뿐이고 계속해서 변론을 시작했다.


"내 상식으로 바르그 너같이 귀엽고 예쁜 아이는 마구 쓰다듬고 마구 안아주는 게 상식이다!"

"흠... 좋아. 네 상식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 그럼..!"


몸을 꽁꽁 묶은 밧줄을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바르그는 칼을 한쪽으로 치우고 다른 연장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형집행이 멈출 것이라 기대한 나의 여린 심정을 잘근잘근 저며버리는 그녀의 행동에 내가 망연자실하자, 바르그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넌 내 가슴도 만지지 않았나?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죽어 마땅한 중죄다."

"그, 그건...!"


지금까지 본 바르그의 표정 중에서 가장 산뜻하고 개운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최종선고를 읊어주었다.


"참수는.. 포기하지, 대신."

"대신..?"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라. 팽형, 거열형, 화형, 능지형, 익수형, 압사형, 요참형."


모두 선택지의 최종 종착점이 끔살이라는 것에 격렬히 저항하며 억울함을 토로하자 바르그 역시 결국 깊은 한숨을 쉬고는 거대한 집게를 꺼내 들었다.


"하아~ 뭐, 도저히 사형이 억울하다면 어쩔 수 없지."

"후우... 고마워, 바르그."

"그것들이 싫다면 궁형으로 집행하겠다."

"차라리 죽여주세요."



글 모음

tmi : 궁형은 거세하는 형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