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49543871 - 시리즈 모






“바닐라..흑..흐윽…”


“도대체 왜 그러시는겁니까. 악몽이라도 꾸신겁니까?”




당황하면서도 바닐라는 손수건을 꺼내 부드럽게 사령관의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바닐라…바닐라 맞지..?”


“제 이름을 까먹기라도 하신겁니까? 정말 가지가지 하시는군요.”




사령관의 물음에 바닐라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눈빛, 목소리, 사소한 손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녀가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 했다.




“...바닐라, 내가 왜 여기 있는거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사령관을 정말 한심하다는 듯, 동시에 걱정되는 눈빛으로 쳐다본 바닐라가 입을 열었다.




“하… 오늘의 업무 일정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르카의 이동경로 설정, 새로 복원된 대원과의 면담과 지휘관들과의 회의,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식사까지의 일정이 바닐라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외우기라도 한 듯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고 있음에도 단 한 글자도 틀리는 일이 없었다.


바닐라가 말해주는 일정을 하나 하나 들을 때마다 사령관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있었던 흰 눈의 벌판과 알파와의 대화는 꿈의 내용처럼 모호해졌고 반대로 바닐라가 말하는 일정들은 어제 있던 일처럼 선명해져갔다.


어느새 그는 자신이 울었던 이유조차 잊어버렸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알고있어. 바닐라랑 데이트하러 가는거 맞지?”


“...그것까지 까먹으셨으면 진심으로 화냈을 겁니다.”




뾰루퉁한 표정을 지은 바닐라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바닐라의 표정이 서서히 풀려갔다. 마침내 그녀의 표정이 순수한 웃음으로 바뀐 순간 또 한번 풍경이 바뀌었다.




사령관은 차에 올라타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였음에도 사령관은 그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바닐라가 있었으니까.




“주인님과의 데이트도 오래간만이군요.”


“미안해.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제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습니까. 그냥… 오늘만큼은 저만 바라보시면.. 읍?”




사령관이 달려들어 바닐라와 입을 맞추었다. 바닐라도 싫지 않은 듯 순순히 그의 행동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또 한번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니, 사령관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방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까지 바닐라와 함께 타고 있던 자동차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폭탄이 터진듯 구멍이 여러개 파여져 있었다.




"바닐라…?"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방금까지 앞에 있었던 그녀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직감한 사령관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바닐라…? 바닐라! 바닐라아아!”




목청이 터져라 그녀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령관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또한 이 상황이 익숙하게 느끼는 자신을 향해 더욱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아..”




그의 눈 앞에 붉은 색으로 칠해진 바닥이 보였다. 분명 피로 물든 바닥이었다.


그 붉은 액체는 옆으로 쓰러진 차량의 뒷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돼…"




손과 다리가 미친듯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 떨림을 이를 악물고 버텨가며 그는 조금씩 전진했다. 아기의 걸음마보다 느린 속도로 나아간 그가 차의 뒷편에 도착한 순간, 그녀가 보였다.




“으으…아아아아악!!”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죽어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 순간 사령관은 스스로 지우려했던 모든 기억과 마주했다.


불의의 습격, 바닐라의 죽음, 스틸라인과 캐노니어에서 발생한 사망자, 망가져가는 자신, 함께 망가져가는 지휘관들 그리고 대원들


그 모든 기억의 파도를 맞이한 사령관은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끓었다.



“미안해…미안해…”



반지가 끼워진 그녀의 손을 잡고 그는 그 말만 반복했다.





***




쾅! 쾅!


“벌써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건가.”




적 셀주크의 포탄이 한두개 정도 내 근처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좀더  나가서 대원들로부터 때어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후퇴는 불가능, 알바트로스는 세뇌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무것도 못하고. 움직일 수 있는건 나 혼자뿐인가.”




알파도 있지만 적 AGS는 알파 이상의 출력을 가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있어 해킹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오메가인지 감마인지 델타인지 몰라도 니들 마음대로 하게 두지는 않겠어.”




심호흡하듯 고개를 위로 올린다. 그와 함께 앵커가 날아가 땅에 몸을 고정한다. 앵커가 단단히 박혔음을 확인하며 올린 고개를 다시 아래로 내렸다.


그 순간 발사된 광선은 대지를 뒤덮은 눈을 녹이고, 남은 물기마저 증발시키며 적 군세에 쇄도했다.




콰과과과과광!!!




수십의 AGS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 뿐이다.



"뭐가 이리 많은거야!"



분명 엄청난 수의 병력이 손실되었을텐데 그게 티가 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숫자의 폭력


게다가 적은 부대를 넓게 퍼트려두었다. 이런 상황이면 아무리 내 플라스마 포라 해도 위력이 약해진다.




“이거 이길 수 있을까…아니, 내 목숨 하나 건지는 것도 무리일것 같네.”




그리 자조하는 와중에도 내 플라스마 포에 착실히 에너지가 모이고 있었다. 마치 내 심정을 대변해주듯이




“그래, 한번 죽을때까지 싸워보자! 내가 여기와서 한두번 죽을뻔 한 것도 아니고! 지금 내 몸에는 폭탄도 없다고!”




포효하며 억지로 공포를 억눌렀다. 공포를 용기로 내리찍으며 두번째 광선을 발사했다.




“죽어라!! 죽어! 바퀴벌레 같은 놈들아!”



콰과광!! 콰앙!


5번째


6번..




“크윽… 역시 무리였나.”



5번째 이후로는 더이상 에너지가 모이지 않는다. 최대출력으로, 그것도 연속해서 플라스마 포를 쏘는 바람에 몸이 과열된거겠지.




“젠장 엄청 가까워졌네.”




이제는 셀주크의 포격이 정확히 내 몸에 떨어지고 있다. 기간테스와 폴른으로 이루어진 적 주력 부대도 총알을 쏟아부을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하기 일보 직전이다.




"알바트로스, 시간은 얼마나 더 필요해?"


[지금의 5배는 있어야한다.]




뭐라도 해야한다. 저 압도적인 병력을 이미 과열된 몸뚱아리로 막아낼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젠장, 내가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머리가 아니라 몸을 굴리는 나다. 전술이고 뭐고 일반인이었던 그리고 병기인 내가 아는건 전혀 없다. 아니 알고 있었다해도 이런 극한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전술이 있을리는 없었겠지.




“제발.. 방법을 생각해야해. 머리 좀 굴려라 이 멍청아!”




땅바닥에 머리를 박아봤지만 그런다고 머리가 굴러갈리는 없었다. 그 극한의 긴장과 압박 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타이런트, 알파에요. 한가지 제안을 드려도 될까요?]


“...좋아. 말해줘. 뭐든 좋으니까 제발..”


[지금 AGS들이 돌입하고 있는 길 좌우에 있는 두개의 산이 보이시나요?]




그녀의 말대로 AGS들의 양 옆에는 거대한 두개의 설산이 있었다.




“저걸 무너뜨리자고?”


[맞아요.]




가능할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알파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있었다.




[절… 믿어주시겠어요? 제가 당신의 몸을 조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면 저 산을 무너뜨릴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지 못해 죽을뻔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그런 말은 치트키잖아.




“보안 프로그램을 해제했다. 내 몸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아.”




내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에서 자유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걷는것처럼, 그녀의 발걸음에 내가 맞춰주면 되는 부드러운 지배였다.




[고마워요. 믿어줘서]


.


그녀가 작게 속삭임과 동시에 내 모든 포문이 개방되고 모든 미사일이 한순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쾅! 쾅! 쾅!




흰색의 산에 몇번이고 폭격이 떨어진다.


한번 두번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던 산도 계속되는 미사일의 쇄도에 점점 요동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쿵! 쿠구구구구


콰광!!




마침내 거대한 벽이 무너지며 바닥을 향해 눈과 얼음과 토사가 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물결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듯 빠르게 돌진했다.


나도 포함해서




“우와아아아아악!!!”



내 키의 3배는 될 듯한 눈의 파도가 나를 향해 쏟아지는 그 광경에 나는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알파가 1초라도 늦게 내 몸을 돌리고 도망치도록 조작하지 않았다면 기절해버렸을 정도로.




콰과광!! 콰가각!


“죽는다! 이번에는 진짜 죽어어어!!!”


쿠구구궁!!! 콰앙!




뒤에서 나는 웅장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어림잡아 30m정도


20m…


10m…


5m…


1m…!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얼음덩어리들이 쏟아졌다




“우와아아악!!!”




툭..투두둑…




다만 그 크기는 고작 사람 머리만한 사이즈였다. 




[후후... 그런 귀여운 비명도 지르실 수 있었군요.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으시네요. 타이런트씨.]


“안지르게 생겼냐!”




머쓱함을 애써 누르며 나와 알파가 만들어낸 광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높고, 경사가 급한 눈과 얼음과 토사의 벽이 웅장한 자태로 서있었다.




"이 정도면 못넘어오겠네. 작정하고 뜷기 시작하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를 대피시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거에요. 우회할 길도 없고, 있었다해도 숫자가 많이 줄었으니 저희 셋이서 요격하면 해치울 수 있겠죠.]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마지막으로 벽을 한번 더 바라봤다. 높고 가파르다. 나도 이런건  못넘는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드드드드—


“흠..?”



벽 뒤에서 작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벽을 무너뜨리려는 건가? 대응이 빠르네.”




쿠구구궁.. 드드드드-





이 벽을 다 부수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다. 그때 즈음이면 분명 상황은 끝나있겠지.




콰가가가각… 콰각.. 드드드드드드—


‘...? 폭발음이 아니야?!’




소리가 커져감에 따라 더욱 확실해져갔다. 폭발음이 아니다. 이건 바퀴와 엔진 소리다.




“알바트로스! 알파! 벽 쪽에 무언가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내 감지망에는 아무것도 감지되고 있지 않다.]


[저한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둘 모두 그렇게 단언했으나 그것이 오판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눈사태로 만들어진 산 위에서 거대한 전차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목표 발견, 교전을 시작한다”




스트롱홀드의 거대한 몸이 경사로를 타며 엄청난 속도 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