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아니지만... 어쩐지 손이 가질 않더군요."


여제의 시신을 수습한 다음부터 바르그는 여러모로 변해 있었다. 일단 단답형인 딱딱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던 그녀의 어투는 존댓말과 애정이 묻어나오고 있었으며, 시간이 허락할 때면 언제나 듣고 있었던 녹음기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쩌면 사소하고 작은 변화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사소한 변화가 뜻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긴 대답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필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여제를 묻었으며, 어떤 각오로 녹음기를 내려 놓았는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이 결심을 존중해주는 편이 좋을 것이라 여겼다.


"사실... 주인님께 충성을 맹세한 날, 녹음기의 모든 내용들을 삭제했습니다."

"뭐?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물론, 그렇게 까지 할 이유는 적었지만... 저 역시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복수라는 미명에 잡아 먹혀 지낼 수 없으니까요. 여제님의 쓸쓸하고 괴로운 상처와 외로운 최후를... 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로크의 진심 어린 설득이 바르그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일견 속 시원하다는 듯 미소 짓는 바르그의 옆 얼굴로 일순 쓸쓸함이 지나갔다. 따스한 옛 주인의 목소리가 남겨진 유일한 유산을 그녀 스스로의 손으로 지워버리며, 그녀는 얼마나 큰 결심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 각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러 복잡한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앗.. 이거.. 무슨 상처야?"


탁 트인 등으로 드러난 흉터들을 조심스레 쓸어 만지며 바르그에게 질문하자, 그녀는 창피한 것을 보인것 마냥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가 하던 일들이 험한 일이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추한 몰골을..."

"괜찮아, 가리지 말아줘."


허겁지겁 흉터를 가리려는 바르그를 제지하며 상처를 조심스럽게 계속 어루만졌다. 작고 가녀린 그녀에게 남겨진 흉터들. 홀로 여제가 남긴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살아왔던 그녀의 치열한 삶의 흔적이 묻어나오는 상처를, 나는 치유해줄 수 있을까.


잠시간의 짧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간단한 것이었다. 우선 한쪽 구석에 놓인 바르그의 녹음기를 집어 들고 마이크를 세팅했다.


"주인님..?"

"쉿, 바르그에게 내가 주는 선물."


바르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홀로 외롭고 고독했을 그녀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녹음기의 힘을 빌어 전한다.


"이제 바르그는 혼자가 아니야."


항상 내가 너의 곁에 있을 테니.


"바르그, 정말 잘 해왔어. 그동안 힘들었지? 이제 푹 쉬어도 돼."


언제든 내 품은 너에게 열려 있을 테니.


"하핫, 너무 울지 마. 예쁜 얼굴 다 망가진다."


눈물을 보이며 입을 틀어막고,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오열하는 바르그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그녀 홀로 감당하기에, 그녀는 너무도 작고, 가녀리고, 외롭게 보였기에. 나는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 정말 힘들었겠지... 그럼 오늘만, 오늘만... 실컷 울자."


그녀의 지금 쏟아지는 눈물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지탱해주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도하며.


"저 하늘의 별처럼, 언제 어디서든 너에게 빛을 뿌려줄 수 있도록... 내가 곁에 있을 거야."


따스한 햇빛을 잃고 좌절하던 그녀에게 새로운 빛을 뿌려줄 수 있기를.


"바르그의 소망처럼, 이와 같은 오늘이 어제와 같기를, 우리가 함께할 내일이 오늘 같기를, 이 세상의 끝까지 함께하기를..."


언제나 작게 읊조리던 그녀의 바램에 내 마음을 담아 함께 실어 보낸다.

그리고 가녀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할 거야. 이 세상의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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