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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의 와이어가 시설의 격벽을 갈랐다.

 

가르고 갈라도 앞길을 막으며 생겨나는 차단막들. 두꺼운 티타늄 방벽도 있었고 전자기장으로 경로를 방해하는 장막도 있었다.

 

-쿠오오오오오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왔다.

 

발이 부르트는 감각. 셀 수 없이 쏟아지는 벽들의 강도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아니, 휘두르는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이리라. 목 끝까지 숨이 차오른 장화가 쥐가 온 오른손을 세차게 저으며 앞을 막는 벽 사이로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등신아! 이 정도로 멀리 왔으면 일어날 때도 됐잖아!”

 

허리 옆에 끼워놨던 드론. 그 몸체에서 튀기던 스파크가 눈에 뛸 만큼 잦아들었다.

 

전자제품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없었지만 저게 나쁜 의미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망토를 뒤집어 쓴 채 구석진 곳으로 몸을 숨긴 다음 힘없이 반짝이는 LED 등을 손으로 몇 번 쳐봤다.

 

[보---본 인공지능의---이름은---]

 

“그딴 개소리 한 번 더 하면 진짜 ‘등신’이라고 이름 지어버릴 거니까 정신 차려!”

 

오한이라도 온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떠는 드론.

 

다시 파랗게 빛나며 비행하기 시작한 드론을 보며 장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야, 저 새끼들 언제까지 쫓아오는 거야! 니가 죽이라고 한 것보다 지금 도망치면서 죽인 새끼들이 더 많아!”

 

[현재 ‘장화’님의 신체엔 호르몬 가스가 묻어있습니다. 그걸 다 털어내시면 추적을 방해할 수 있을 겁니다.]

 

드론은 장화가 힘껏 움켜쥐고 있던 망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버리십시오.]

 

“뭐? 그러면 너무 눈에 뛸 텐데-”

 

[해당 가죽 더미를 입고 계실 때 ‘장화’님의 심박수가 35% 가량 안정화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버려야 할 때입니다.]

 

드론이 레이저로 굳게 닫혀 있는 장화의 손아귀를 가리켰다.

 

손뼈가 훤히 드러날 만큼 강하게 쥐고 있던 망토. 가슴께로 모인 손은 마비된 것처럼 망토를 꼭 안은 채 동여매고 있었다.

 

앞머리까지 깊게 내려오는 망토의 모자는, 장화의 눈에 닿을 만큼 기다란 창막을 만들어주었다.

 

[불필요한 의류를 착용함으로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분석에 필요한 데이터가 극도로 부족합니다.]

 

어쩌면 그 그림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늘빛이 자신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이 불쾌했던 탓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저를 믿어주십시오.]

 

-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

 

뒤쪽에서 격렬한 짐승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잠깐 사이에 기껏 벌려놓은 거리를 따라잡힌 것이다.

 

고블린의 체액이 묻어있는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반드시 ‘장화’님을 관리자님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라곤 파란색 LED 등 밖에 없는 무당벌레 같은 기계가 있는 힘껏 제 몸을 흔들며 날개짓했다.

 

-냄새?냄새?냄새?냄새?냄새?냄새?냄새?

 

“...등신아.”

 

[네. ‘장화’님.]

 

“니 명줄이 내 명줄보다 길다고 했지?”

 

구멍 건너편에서 갈색의 유기물 파도가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거죽더미처럼 일그러진 괴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장화의 피냄새를 쫓아 서너개씩 되는 팔다리를 뻗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말 증명해야 할 거다. 내가 죽을 것 같으면 너부터 죽여버릴 테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런 몰지각한 움직임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콰과과과광!

 

이미 설치되어 있던 장화의 폭약이 고블린과 구멍 사이에 깊은 구멍을 만들었다. 땅에서 솟은 화염 폭풍에 선두에 있던 고블린 몇 마리가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비명을 저지를 새도 없이 벌어진 일.

 

장화는 입고 있던 망토를 반대쪽 구멍에 던진 다음 드론의 뒤를 따라 출구로 달렸다.

 

삐빅-

 

장화의 망토가 폭탄의 레이저 센서를 건드렸다.

 

순간 벌어진 상황에 적응할 새도 없이, 경악한 고블린의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뜨거워뜨거워뜨거워뜨거워뜨거워뜨거워뜨거워뜨거워뜨거워뜨거워!

 

고장난 라디오 같은 비명소리를 뒤로 한 채 끝없이 달렸다. 강화된 화약의 폭발력은 어지간한 강철벽도 녹여버릴 정도였고, 묽어진 철제 벽을 뚫고 폭발의 후폭풍이 거대한 숨을 토해냈다.

 

콰과과과광!

 

연구실이 한 번 붉어질 때마다 고블린들이 쓰러져 나갔다.

 

천장에서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던 붉은 카메라 아이가 다시 한 번 격리 구획을 설정하고 단단한 격벽으로 장화의 앞길을 막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스가가가각!

 

두터운 나무처럼 톱밥을 내뱉으며 갈려나가는 벽.

 

지금의 장화가 갈라버리기엔 무리인 두께였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며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목표물을 암살한 후 경호용 바이오로이드들을 상대해야 했을 때도, 몽구스 팀의 경비를 뚫고 홍련을 향해 달려들었을 때도,

 

와이어에 걸리는 모든 것이 단단한 바위처럼 느껴지던 때가 수백 번이었고, 그리하여 살아남은 임무가 수십이었다.

 

[여기서는 오른쪽으로 우회합니다! 해당 구획의 보안 프로그램이 아직 작동 중이니 오미크론 섹션에서 컨트롤하지 못할 거에요!]

 

그 모든 상황에서 혼자였다.

 

싸락눈에 뒤덮인 세상에서도, 어린 아이를 인질로 삼아 제 목숨을 연명해야 했던 광장에서도 혼자였다.

 

[경로 산출은 제가 하겠습니다! ‘장화’님은 방해물 제거에만 신경 쓰세요!]

 

“그럼 빨리 좀 해! 대가리 쓰는 것 밖에 안 하는 주제에 기다리게 하면 어쩌라고!”

 

[연산 능력에 관한 피드백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달릴 수 있다. 그럴 힘이 남아 있었다.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목숨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지금의 상황은, 적어도 그녀가 아는 한 모든 인간이 진솔해지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프사이 섹션의 경비 드론들이 시간을 벌어줄 테니 12번 입구로 돌아갈 시간은 충분해요!]

 

드론이 새차게 날개를 펄럭이며 공기를 갈랐다. 등 뒤에서 피워오르는 연기에 모터가 과열되고 있음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장화의 발에 맞춰 움직였다.

 

“더 빨리!”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렸다.

 

허나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장화는 다시 한 번 허벅지에 힘을 주고 땅을 박차 나아갔다.

 

“빨리 움직여!”

 

얼굴을 가려줄 망토가 없다.

 

하늘의 붉은 눈이 자신을 보고 있다.

 

가빠오는 숨.

 

-왜.

 

안 좋은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왜 죽였어요.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 물동이를 찰랑이며 다가왔던 어린 소녀의 음성.

 

그녀가 뿌린 피 속에 익사한 채, 지금껏 침묵을 지켜온 그 목소리가 고개를 들이 밀어 물었다.

 

-살고 싶어요?

 

[이제 5분이면 도착합니다!]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

 

[앞으로 3분!]

 

-그 날 준 돈은 제 목숨값이었나요? 그럼 그 돈은 제 고아원에 가져다 드렸나요?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살고싶어하는 건...

 

장화는 달렸다.

 

말이 나오지 않게 달렸다. 귀를 닫기 위해 달렸다.

 

침에서 단 내가 나오고 숨이 벅차 비강이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차있다는 느낌이 날 때까지. 뒤에서 쫓아오는 고블린들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마침내 다다른 입구.

 

장화는 마지막으로 숨을 몰아 쉬고는 자신의 잠수정이 있을 곳으로 세차게 달려나갔다.

 

[도착했습니다! 이제 출구로 나가는 복도 구획만 지나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곳에 있는 건, 어두운 심해로 향하는 물길뿐이었다.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장화는 파르르 떨리는 동공으로 수면을 바라보았다.

 

“왜... 잠수정이...”

 

[해당 섹션 로그 검색 중... 잠수정의 연결 부위 중 하나가 연결이 느슨했던 것 같습니다. 연결이 끊어지고 물살에 휩쓸려 나갔군요.]

 

“... 탈출할 방법은?”

 

[오르카 호로 구조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연결에 성공한다고 해도 여기까지 오는데에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얼마나.”

 

[최소 30분... 후속 부대가 준비되어 있다 해도 15분 이상 버텨야 합니다.]

 

콰직!

 

뒤쪽에서 거친 파쇄음이 들여왔다.

 

-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

 

물결처럼 밀려오는 검은 갈색의 파도.

 

붉은 눈이 알알이 박힌 고블린들의 행렬에 어느덧 입구와 연결되어 있는 안전 구역까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죽은 고블린의 유기물을 씹어 삼키는 다른 고블린들.

 

그럴수록 덩치는 배로 늘어났고, 커진 괴물들이 프사이 섹션의 경비 드론들을 짓밟아버렸다.

 

-잘 들어보세요.

 

소녀가 말했다.

 

-죽여달라고 하잖아요. 여사님이 가장 잘하시는 게 그거 아닌가요?

 

“......”

 

-기다란 와이어로 목을 감싸 일격에 잘라버리는 거. 폭탄을 터트려 무너지는 잔해 속에 묻어버리는 거. 죽는 사람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죽이는 거. 그걸 가장 잘하시잖아요.

 

[‘장화’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아직 방법은 있어요! 제가 최대한 빠른 부대에게 연락드려볼 테니...]

 

-설마 도우러 올 거라 생각하진 않으시죠?

 

흐릿한 소녀의 환영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기가 죽이려고 들어온 사람들의 도움을 바랄 만큼 약해지셨나요?

 

“아니야... 난...”

 

-저런, 약하면 죽어야 하는데. 약육강식. 그게 도리잖아요.

 

미소의 끝에서 기다란 팔이 장화의 목을 옥죄어왔다.

 

아이의 표정은 한없이 차가운 물처럼 섬찟했다.

 

-그러니까 가서 죽어.

 

“아냐... 나는...”

 

-드론의 도움이 없었으면 망토도 못 버렸을 거고 탈출 경로도 못 찾았겠지. 세상에,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네?

 

장화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전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마음을 채우던 것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기분.

 

황량한 벌판에 서 있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 불쾌감, 허전한 감각을 채우는 냉기.

 

그보다 가장 다른 점은,

 

아프다.

 

“하아... 하아...”

 

[‘장화’ 님!]

 

아픔이다.

 

느끼지 않아도 될 몽환적인 통증.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그녀를 불량품으로 낙인 찍은 이유였다.

 

달리지 않아도 호흡이 가빠지는 이는 심폐지구력의 불량이었고, 명료한 임무에서도 상념이 많아지니 정신의학적 결점이었다. 불필요한 사고가 늘어남은 명령 체계에 대한 위협이었고, 유기물 덩어리를 벨 때 주저함은 임무 수행력의 미달을 의미했다.

 

-불량품이다.

 

소녀가 웃으며----

 

쿠구구구구구!

 

입구의 물 속에서 공깃방울이 솟아오른 것은 그 때였다.

 

어두운 물들이 흩어졌다. 속에서 방울들과 함께 올라온 것은 노랑색으로 도색된 작은 잠수함이었다.

 

“이게 무슨...”

 

당황스러운 눈초리로 드론을 흘겨봤지만 드론도 마찬가지로 장화를 쳐다볼 뿐, 황당스러워하는 것은 똑같았다.

 

연락이 간 것이 5분 전. 오르카 호가 전력으로 달려온다 해도 지금 도착할 수는 없다.

 

삐릭-

 

움직이며 열리는 잠수정의 콕핏.

 

그 속에서 고개를 들이민 것은 환한 금발이 곧게 내려오는 한 바이오로이드였다.

 

“역시 이맘때쯤이면 끝나있을 줄 알았습니다.”

 

붉은 모자와 붉은 망토를 입고 있는 바이오로이드. 한 손에 들려있는 책에서는 장화의 위치를 추산하고 있는 홀로그램 영상이 투영되고 있었다.

 

“... 뭐, 뭐야...?”

 

“흐음, 상황이 좋진 않아보이는군요. 오메가 섹션의 인공지능. 지금 상황이라면 프사이 섹션으로 향하는 5개의 입구를 봉쇄해야할 것 같습니다.”

 

단호한 바이오로이드의 목소리에 드론의 눈이 규칙적으로 반짝였다.

 

[음성 패턴 확인... 확인 완료. 대상 – 관리자 알파 등급. 환영합니다. ‘아르망’ 관리자님.]

 

“프사이 섹션 인공지능과 얘기할 시간은 없으니 임무를 맡기죠. 시설을 안정화시키세요. 몰려든 고블린 개체는 우리쪽에서 처리할 테니까.”

 

[확인했습니다. 명령을 이행합니다.]

 

순식간에 지나간 일련의 대화에 어지러워졌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태도. 고블린을 여기까지 몰고 오게 한 것도 오르카 호에서 계획한 시나리오인가?

 

당혹스러운 사태에 장화가 눈을 껌뻑였다.

 

“걱정하지 마시죠. 이미 다른 입구로 대원들을 파견시켜놨습니다. 앞으로 3분 29초면 정리될 거에요.”

 

“그게 무슨...”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장화 양.”

 

책을 폭, 소리가 나게 덮은 아르망은 몸을 돌려 다시 잠수정으로 향했다. 닫힐 듯 말듯한 콕핏의 뚜껑을 손으로 붙잡으며 안으로 몇 마디 말을 건넸다.

 

뭐지?

 

이미 다 알고 왔다는 듯한 저 표정은 뭔가?

 

그 속에서 장화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온 고블린 무리를 4분 안에 처리한다는 것도, 이렇게 시간을 맞춰 도착한 것도, 전부 계획하고 행한 게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얘기는 일부로 자신을 여기에 던져놓았다는 뜻.

 

자신을 헤치려 한 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상황이 정리된 것 같습니다. 폐하.”

 

하지만 그 잠깐의 생각은,

 

“이리 오시지요.”

 

다음 순간 느껴지는 파랑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두근,

 

심박수처럼 뛰는 누군가의 숨결.

 

자신의 것도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바이오로이드의 것도 아니었다.

 

바이오로이드인 자신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파장.

 

“...당신...?”

 

“반갑구나.”

 

그건 오직 인간의 뇌파였다.

 

약간 창백해보이는 얼굴. 파르르 떨리는 팔로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인간이 조심히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장화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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