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누르면 전 회차 감상 가능) 


근 며칠간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 나는 병실의 천장만 오도카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침대 밑에서 금방이라도 마리오네트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붙잡을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은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참혹한 현장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고, 귓가에는 죽여달라는 그 마리오네트의 마지막 말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것만 같았으며, 잠깐 눈이 감겨도 복도에서 보았던 그 환상이 다시 재현되어 결국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하아아..."


억지로라도 잠들지 않기 위해 나는 커피를 몰래 마시고 오기로 했다. 다행히도 오늘 야간 근무인 아쿠아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고, 밤에 화장실을 가야 하니 다프네 씨가 수갑과 족쇄는 풀어 두고 간 덕분에 겉옷만 걸친 채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살금살금 복도로 걸어나갔고, 최대한 감시 카메라에 걸리지 않게 조용히 움직였다.


'커피 하나 때문에 첩보 영화 찍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고, 천운인지 그동안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경보도 울리지 않아 날 구속하기 위해 달려오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에스프레소 커피믹스와 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제 뜯어서 뜨거운 물을 붓고 마시기만 하면 되는 일.


"빨리 마시고 다시 들어가서 누워야겠다.."


"흠, 뜨거울 텐데 천천히 마시지 그러나."


"입천장을 데기는 싫거든요."


잠깐만, 방금 그 목소리는..?


섬뜩한 예감이 들어 왼쪽을 바라보니, 칸 대장님이 평소의 전투복 차림이 아닌 너구리 잠옷을 입고 맨얼굴에 풀어진 생머리를 한 채로 주방 출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어..?"


"부스럭대는 소리 때문에 엠피트리테와 살라시아 자매인가 해서 와봤더니만 부사령관이라니, 이건 꽤나 놀라운 광경이군."


칸 대장님은 짗궃은 웃음을 띈 채 내게 말했다.


"그..그으으으.. 대. 대장님. 이건 그러니까.."


"푸훗, 뭘 말까지 더듬고 그러나. 사실 나도 잠이 안 와서 뭐라도 마시러 나온 걸세."


"그..러신가요.."


"같이 마셔도 되겠나? 말동무가 필요하거든."


"그러시죠.."


얼떨결에 나는 칸 대장님 분의 핫밀크를 만든 후 테이블에 앉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들었네. 포르투갈 연구소에서 참상을 목도한 후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이미 지휘관급 인원들의 귀에도 내가 복도에서 난리를 피운 사건이 들어간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짓을.."


"왜 사과를 하는 겐가. 그대의 잘못도 아닌데."


"하지만 부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달고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또다시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자신을 죽여달라는 마리오네트들이 나에게 엉겨붙는 환각이 다시 보였고,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꾹 참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눈앞에 나타나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제발... 누가 나를 구해 주세요...





(칸 시점)


'더더욱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만 건가..'


부사령관은 얼굴을 가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흐느끼듯 떨리는 등과 어깨는 그가 더욱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100여년 전, 그는 회장들로 인해 모친을 잃고 십수년간 부친에게 학대받으며 자라온 소년이었고, 장성해서는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시 깨어난 후에는 우리의 도움으로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친자매들에게 총구와 칼을 들어야 했으며, 그들이 그간 저지른 악행을 두 눈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앞에서는 웃으며 마주했던 누이들이었지만, 그 뒤의 모습은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으리라.


목숨까지 걸면서 그들을 막겠다고 다짐한 그였지만, 이제는 죄책감마저 떠안아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떨고 있는 그의 움츠러든 등을 조용히 쓸어 주었고, 잠시 후 그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 잦아들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좀 나아졌는가?"


"....."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더니 쓰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등을 쓸어주는 것만으로는 극복해내기 힘든 짐이겠지.


"저.. 대장님?"


"케시크? 여긴 웬일로.."


"아, 부엌에 불이 켜져 있어서 뭔가 하고 와봤는데 부사령관님과 대화하고 계셔서.. 죄송합니다. 그냥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케시크에게 알겠으니 다시 가서 푹 자라고 말하려 했다가, 잠시 생각한 후에 그녀에게 말했다.


"둘이서만 있으니 적적한데, 같이 합석하겠나?"


"네에? 하, 하지만.."


"괜찮으니까 얼른, 마실거 하나 내 올테니까 앉게."


나는 케시크에게 내 옆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후, 냉장고에 가서 우유를 한 컵 꺼내 데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케시크는,


"좀 괜찮으세요?"


"..그럭저럭."


부사령관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의무병과 소속이니 당연히 걱정이 되겠지.


나는 핫밀크 두 잔과 쿠키 한 깡통을 플라스틱 쟁반에 담아 그들에게 가져왔다.


"다들 들게나."


"아와와.. 이거 주방장님께 혼나지 않을까요?"


"모두에게 먹이려고 내가 묶음으로 사서 넣어둔 거니 괜찮아. 편히들 먹어."


"그, 그럼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은 감사 인사를 한 후에 조금씩 쿠키를 입에 넣었다. 


단 것이 입에 들어가니 줄곧 어두웠던 부사령관의 표정도 조금 밝아졌고, 나는 그에게 에스프레소 대신 핫밀크를 건넸다.


 

"제가 마시던 건데.."


"좀 자야 하지 않겠나. 눈 밑에 위장크림 바른 것처럼 새카만데."


나는 농담을 던지며 그의 기분을 조금 환기시켜 주었다.


"하지만, 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잔을 두 손으로 잡더니 안을 계속 들여다보았고, 나는 그 손을 꼭 잡아주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으며 그저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칸..대장님?"


"그대의 괴로움, 슬픔, 분노.. 모두 다 알고 있네. 그리고 그 참상이 도저히 눈 앞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잘 알고." 

"하지만.. 그 일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


부사령관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도 과거에 동료들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었지. 그러니까, 지금의 칸이 되기 전 말이야."


이 말을 하면서 케시크가 조금 불안한 눈길로 이곳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과거의 나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윙크를 날렸다. 


"동료들의 팔다리가 날아가고, 얼굴에는 그 피가 튀어 철분의 비린내가 코로 들어왔지. 그리고 내 상관은 목전에서 머리가 터져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 이겨내셨죠."


"그래, 이겨냈지. 하지만 홀로 전장을 돌파하면서 나도 여러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눈앞에서 사지가 날아가는 동료들, 그리고.. 추악한 인간의 단면까지."


"대장님.."


"나도 그대처럼 두려움에 떨고 때때로는 울기까지 했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신께 기도했지.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시간이 꽤 지나 마음속에서 완전히 앙금은 사라졌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 한켠은 무거워졌다.


"오르카의 일원이 되고서도 내 마음의 짐은 여전히 남아있었네. 하지만 모두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지금의 칸이, 호드가 되었지."

"그러니 그대도, 우리가 도와줄테니 다시 일어서게나. 전신전령을 다해 격려해 줄테니. 떠나간 자들로부터 이어받은 것을 계속 가지고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듣고 있던 케시크도 다가와 그를 응원해 주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늑대로 만들어 달라고, 지치지 않고 달리는 다리와 부러지지 않는 송곳니를 주시고, 무리를 지키는 짐승의 본능을 달라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간절히 마음속으로 바랬어요."

"그리고 지금의 저를 보세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저도 이제는 '난 당당한 호드의 일원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구요."


그 말을 하는 케시크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딸의 성장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에 내 입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고 그는 조금 더 편안해진 얼굴로 따뜻한 우유를 쭉 들이켰다. 


남은 쿠키를 마저 먹은 후 그는 간단히 목례를 한 후 병실 쪽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한결 표정이 밝아지셨네요."


"우리의 말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군."


부디 그가 걸어가는 길의 끝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나와 케시크도 자리를 파했다.





(미하일 시점)


따뜻한 우유와 쿠키 덕분일까, 나는 금새 잠들었다.


다시 내 꿈에는 끔찍한 몰골의 마리오네트들이 내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여러분, 구해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 자매의 질투 때문에 여러분들이 희생된 것은 돌이킬 수 없겠죠."


"그렇지만, 저는 평생 여러분들을 마음속에 잊지 않고 살아갈 겁니다. 델타도 그렇게 만들 거고요."


"여러분들의 삶의 무게는 제가 홀로.. 아니, 모두와 함께 이어받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부디 편히 잠드세요. "


이 말을 끝마치자 좀비와도 같이 내 몸에 붙던 마리오네트들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윽고 저 멀리서 빛 덩어리들이 여러 개 나타나더니 한 곳으로 뭉쳐졌고, 평범한 오드리의 모습을 갖추어 내 앞에 다가왔다.


"그 말.. 정말로 믿어도 되나요?"


"네."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델타에게 합당한 벌을 내려주세요. 우리를 고통받게 한 만큼."


한 목소리가 말했다.


"물론 당신의 자매니까, 어떤 심판을 받게 할 것인지는 당신의 뜻이지만요."


또 다른 목소리도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꼭 약속해 줘요. 우리가 살아가지 못한 만큼 당신이 더 살아가면서, 우리를 기억해 줘요."


마지막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겠다고 나는 대답해 주었고, 그녀들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빛나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갔고, 동시에 나의 눈은 떠졌다.


시간은 어느새 백주대낮이었고, 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응."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알파와 감마가 옆에 서 있었다.


"간밤에 그래도 좀 잔 모양이네."


"응."


"상태는 좀 어때, 괜찮아졌어?"


"어느 정도는."


눈을 돌려 병실 입구를 바라보니 또다시 마리오네트의 환상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지가 잘려나가지도,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얼굴로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찰나 진짜 오드리 씨가 내게 다가왔다.



"자기.. 좀 괜찮아요? 이젠 나 보고 까무러치거나 안 하는거 맞죠?"


그런 오드리 씨에게 나는 빙긋 웃어 주면서,


"당연하죠." 라 대답했다.


"좀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리고 이거."


오드리 씨는 내게 잘 수선된 내 코트를 건네주었다. 피가 묻은 부분은 다시 눈부시게 새하얀 빛을 띄었다.


"고맙습니다."


"뭘요, 이것도 디자이너로서의 워크인데."


나는 겉옷과 항우울제 등의 약이 든 봉투를 받아들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벌써 나가도 괜찮겠어?"


"글쎄, 당분간 약 좀 먹어야겠지만.. 별 문제는 없겠지. 아마도."


나는 문 밖으로 나서려다 오드리 씨를 불렀다.


"왜 그래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 한번 살아 볼게요. 다른 오드리 분들의 몫까지. 그리고 그분들을 언제나 기억할게요."


그리고 나는 6월의 태양이 내리쬐는 복도로 걸어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생각했다.


'박사님, 보고 계세요? 그 꼬마 아이가, 이젠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예전보다 훨씬 더 의젓해졌네. 사나이다워지고 있다 해야하나.'


'힘내요, 자기. 그 길의 끝이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칸 시점)


'저건..?'


마리 소장과 임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중, 익숙한 사내를 마주했다.


어김없이 흰 코트와 검은 슈트로 무장하고 나온 부사령관이었다.


"오. 칸 대장님, 마리 소장님 아니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보다 더 해쓱해진 그였지만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부사령관 각하,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나름대로 괜찮아요. 당분간 약을 좀 달고 살아야겠지만." 그는 오른손의 약 봉투를 들어보였다.


"수면은 좀 취했나?"


"네, 근데 아직 졸려서 밤에 좀 더 자야 할 것 같네요. 흐아암.."


밤을 새면서까지 버텼으니 여간 졸린 것이 아니겠지.


"지금 가서 더 자도 될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요. 갈 곳이 있거든요."


하고 그는 이번에는 왼손에 쥔 무언가를 보였다.



그것은 보라색을 띄고 버섯처럼 생긴 잎을 가진 꽃다발이었다.


"꽃다발?"


"두고 오려고요, 그 연구소 자리에. 오드리 분들을 위해서."


공양의 의미인 건가. 아무래도 내가 한 말이 그의 마음에 통한 모양이었다.


"마음을 정한 겐가?"


"네. 그분들의 몫까지 이어받아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 한켠에서 기억하며 살 생각이구요."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계속 나아갈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깨질 것만 같았던 그의 마음은 안에서부터 서서히 견고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빙그레 웃었다.


"알겠네, 그러면 다녀오시게나."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우리를 지나쳐 비행장 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조금씩 바뀌어 가시는군. 부사령관 각하도 말이야."


"그래. 더 이상 자학하면서 살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그럼 이제 일하러 가자."


우리도 다시 복도를 걸으며 작전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부사령관이 든 꽃이 무엇인지 문득 떠올랐다.


그의 각오에 딱 들어맞았던 꽃이었지.


이름은 '스위트피', 꽃말은 '나를 기억해줘요'.




아마 다음화에 델타랑 조우할 것 같음

재미있게 읽었으면 개추와 댓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