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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을 태운 잠수정은 순식간에 뭍으로 올라왔다.

 

찾아올 때는 20분 이상 걸리던 것이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뤄졌다. 방해가 됐던 거친 해류도 그저 그때 바다가 변덕스러웠던 탓이었기에 돌아가는 길을 방해하진 못했다.

 

보글거리는 기포가 수면에 닿으면 폭 하고 터졌다. 떠오른 기포가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이 점차 짧아질수록 수면에 반짝이는 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도착했습니다. 폐하.”

 

홀로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아르망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장화의 눈은 잠수정 옆에 나 있는 자그마한 창으로 향했다.

 

수평선이 보이는 광경으로 잠수정이 정박할 뭍이 보였다. 콘크리트 트라이포드가 뚝처럼 쌓여있는 항구 위쪽에는 몇몇 바이오로이드가 그녀가 타고 있는 잠수함을 허여멀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이란 걸 전혀 읽을 수 없는 시선. 감정이 없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도 지독하게 채워져 있던 탓이었다.

 

“배틀 메이드 대원분들이 마중을 나오셨군요.”

 

“그러게 말이야. 가면 잔소리 좀 듣겠네.”

 

“피로하신 몸에 영향이라도 가면 안 되니 조금 돌아서 가시겠습니까?”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됐어. 대신 갑자기 쓰러지면 장화는 네가 책임지고 데려다 줘.”

 

“후후, 분부대로 하지요.”

 

아직까지 전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장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창 밖의 사람들을 살폈다.

 

각양각색의 머리색을 가지고 있는 메이드들. 키가 큰 분홍색 머리카락의 메이드는 임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 부푼 배를 쓰다듬고 있었고, 고운 한복 차림의 맹인 같은 메이드는 허릿춤에 차고 있는 검자루를 하염없이 매만지고만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너무 많이 울어 양 눈이 퉁퉁 부어버린 초록색 머리의 메이드였다.

 

“뭐 얼마나 울었으면...”

 

“저분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장화 양.”

 

“응?”

 

아르망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디 보자, 오늘 바닐라 양 담당이... 어휴.”

 

“...왜 그러는 거야?”

 

“장화 양 밥 담당이 하필 바닐라 양이었군요. 이따가 저녁은 굶으시지요. 빵 안에 독 같은 거 넣어놨을 지도 모르니까.”

 

독?

 

장화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그런 얘기를 식후 잡담을 하듯 하나? 오르카 호에선 이런 권모술수가 일상이기라도 한 것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하고 고개를 돌리는 아르망의 어깨를 잡은 채 장화가 물었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밥에 독을 넣어? 빵 몇 덩어리 주는 게 다면서...”

 

“아, 안 넣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바닐라 양이라면 분명 넣으시겠죠. 그게 싫으시면 돌아갈 때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피해가세요. 금란 씨가 계시는데 그게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닌데. 난 아무 잘못 안 했다고-”

 

“왜 잘못을 안 했습니까?”

 

장화의 뒷좌석에서 수면 안대를 쓴 채 아르망이 이야기했다.

 

“편찮으신 폐하를 직접 행차하게 하셨잖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유가 됩니다.”

 

어이가 없었다.

 

“누, 누가 와달라고 해서 왔어? 이 인간이 오고 싶어서 온 거지!"


"예. 맞습니다. 폐하께서 장화 양의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무리하여 오신 것이죠."


"그런데 그게 왜 내 잘못이야! 애당초 난 당신들 도움 없이도 혼자...”

 

“혼자 뭐요.”

 

아르망의 어조가 한층 차가워졌다.

 

“...혼자 나올 수...”

 

“뒤에 있는 고블린 숫자만 네 자리수였습니다. 유일한 입구는 보호 장구 없이 들어가면 바이오로이드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심해였습니다. 거기서 혼자 나올 수 있었나고요?”

 

“......”

 

“우리는 당신을 도와줬습니다. 아직 전투의 후유증이 끝나지 않은 건 아는데, 꼴 사납게 현실 부정 하지 말고 제대로 직시하세요.”

 

아르망은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휙, 하고 장화에게 던졌다.

 

순간 팔을 타고 흐르는 무게감. 아까 들고 있을 땐 무슨 노란색 빛가루 같은 것들이 일렁였는데 그런 것은 없다.

 

다만 책 한 가운데 찍혀 있는 사진이 하나 있었다.

 

“...뭐야.”

 

병실에 누워 가뿐 숨을 쉬고 있는 홍련과 그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응원하고 있는 몽구스 팀의 사진이었다.

 

“당신은 우리 대원을 죽이려 했고, 폐하의 도우심으로 살아있는 겁니다. 은혜를 갚으라고까진 말하지 않을 테니 폐하의 뜻을 곡해하지 마십시오.”


그게 현실이었다. 


아르망의 말투는 한없이 날카로웠다. 말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마음 속이 서걱 베어나가는 듯한 섬뜩함에 장화는 자신이 앉아있는 곳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

 

몸에 집어넣은 오리진 더스트로 뭔갈 하든, 자고 있는 사이에 독을 쑤셔 넣든, 자기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명백한 강자들의 굴.

 

그녀가 앉아있는 오르카 호는 날카로운 칼날들이 풀잎인냥 제 모습을 숨긴 채 살아가는 곳이었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켰다.

 

꿀꺽.

 

“긴장하셨나요?”

 

하지만 고요한 잠수정 안에서 들리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 원하는 게 뭐지?”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시원시원한 성격.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협상부터 하려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나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닌가.”

 

“글쎄요. 그건 폐하만 아시겠지요.”

 

아르망은 운전석에서 핸들을 쥐고 있는 사령관을 가리켰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던 것인지,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기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람 속은 훤히 들여다 보는 것처럼 말하더니 저 사람은 별개인 모양이네.”

 

“그럼요. 저희가 어찌 저 분의 생각을 다 알 수 있을까요? 천공의 별빛을 다 헤아릴 수 있는 눈과 깊은 바다를 어림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힜다 한들 폐하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봤자 사람이지 않나.”

 

“사람이라. 맞습니다. 숨 쉬고 하루 세끼 밥을 먹는 사람이시지요. 허나 그 ‘사람’께서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한 원수를 위해 직접 아픈 몸을 이끌고 행차하셨습니다.”

 

아르망은 빙그레 웃으며 나갈 채비를 꾸렸다.

 

품이 낙낙한 옷이 그녀의 무릎 위에 이불처럼 쌓여 있었고, 그녀는 쌓인 먼지를 툴툴 털어내며 잠수정 안에서 작은 채구를 일으켰다.

 

“허면 묻겠습니다. 그 마음이, ‘사람’의 마음입니까?”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나오는 질문. 

 

장화가 읽기엔 너무도 광오한 맥락 속에서 펼쳐진 흐뭇한 미소였다.

 

“당신이 홍련 작전관을 죽이려 했던 것보다도, 이번 오미크론 섹션 수복 임무를 엉망으로 만든 것보다도 중요한 건 폐하께서 당신을 허락하셨다는 거지요. 그거면 바닐라 양도 당신을 직접 죽이려 하진 않을 겁니다.”

 

“......”

 

“일어나시죠. 뭍이 가까이 왔습니다.”

 

아르망의 선언과 함께 그르륵 움직이던 프로펠러가 멈춰섰다. 관성과 파도에 따라 흘러내려가듯 움직이던 잠수정은 그대로 항구 한 구석에 정박했다.

 

덜컥, 열리는 콕핏.

 

문이 열리니 상쾌한 바다 바람이 흘러나왔다.

 

먼저 밖으로 나선 건 장화였다. 등 뒤에서 아르망이 힘껏 밀었던 탓에 거부할 겨를이 없었다.

 

“저 년이...”

 

순간 싸늘해지는 분위기.

 

“홍련 님을 죽이려 했던 그...”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메이드들의 눈빛이 일제히 한 점으로 수렴했다.

 

마음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장화가 살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만을 위한 독실이었을 뿐. 강화 시술을 위해 움직였을 때도 사람이 없던 으슥한 때를 기다렸다 간 것이었다.

 

닥터 다음으로 만나게 된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 그녀들이 자신을 좋게 볼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장화였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압박이었다.

 

“낯짝 한 번 두껍군요. 꼴에 무슨 자격으로 기어나온 건지. 저였다면 주인님을 위해서라도 그 안에서 죽어버렸을 거에요.”

 

가장 먼저 화두를 연 것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메이드였다. 그 중 가장 키가 컸던 그녀는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듯 장화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그를 기다렸다는 듯, 다른 메이드들 역시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게요. 저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을까? 주인님이 아니면 거들어줄 인간 분도 없을 텐데 뭔 미련이 있다고 저렇게...”

 

“전에 얘기 들어보니까 지금까지 죽인 살인 전적이 상당하던데, 주인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저희가 먼저 배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지. 닥터가 손수 시술을 해줬을 정도라면 써먹을 껀덕지는 있다는 얘기 아니겠어? 주인님을 위해 쓰도록 내버려두자. 그렇게라도 쓰는 게 본인한테도 이득이겠지.”

 

주어는 없는 문장들. 그러나 주체가 누군지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

 

땅을 본 채 걸었다. 하지만 땅을 본다고 하며 땅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 뒤로 이어질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다들 무엇을 그리 참고 있었던 것인지, 한 번 열린 입은 도통 다물어지는 법이 없었다. 한 명이 가볍게 꺼낸 불만은 그 자체가 거대한 주제가 되어 열띤 토론의 장을 만들어냈다.

 

이토록 앞에서 당당하게 뱉을 수 있는 적의라면 뒤에선 얼마나 추악한 적의를 공유하고 다닐까,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이런 말을 듣게 하는가, 

 

순간 억하심정이 든 장화는 자신의 손가락을 으득거리며 살벌한 시선으로 메이드들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 뒤에 날아오는 말이.

 

“임산부'도' 죽이려 한 쌍년이니까.”

 

모든 이유를 대변했다.

 

저벅. 다시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장화의 시야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한 번 본인에게 물어보자.”

 

아까 잠수정에서 보았던 초록색 머리카락의 메이드였다.

 

“왜 그랬니?”

 

“......”

 

“홍련 작전관님에겐 왜 그런 거야? 대가리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뭐든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툭툭, 장화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투.

 

“몽구스 대원들 말로는 입에 걸레를 문 거 같다던데, 지금 보니까 뭘 물고 있을 아가리도 없는 것 같네. 왜 말을 못해?”

 

이들이 이리 적대적인 이유는 명백했다.

 

자신의 주인이 직접 움직이도록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 하지만 그게 장화 탓은 아니었다. 사령관이라면 다른 대원들에게 지시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애초에 아르망 혼자 와도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니 장화의 목숨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들에게 장화란 존재는, 그저 감정을 토해낼 쓰레기통에 불과했다.


완전한 밑바닥 신세.


장화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악행들이 명분이 되어 그녀에게 쓰레기라는 명찰을 달아주었다. 꼭 제 주인 앞에서 두려워했던 것처럼, 장화의 손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계급에 의한 억압.


장화가 지금껏 유일하게 학습한 두려움이었다.


꾸욱.

 

바닐라의 작은 손이, 얼마나 불안했던지 꼬집은 자국이 선명한 붉은 손이 장화의 목덜미를 잡았다.


“지금 너 때문에... 너 같은 거 때문에 주인님이 일어나셨어. 알아?”

 

“......”

 

“우린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 왜? 혹시 우리 때문에 주인님의 상황이 더 악화될까봐. 그런데 지금 니 꼴을 봐. 바다 밑바닥까지 주인님을 내려가게 해놓고 온통 불만이라는 냥 좆같아 하는 니 눈깔 좀 보라고!”

 

장화는 체념하듯 바닐라의 시선을 피했다.

 

흘깃,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에선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이 강처럼 뺨을 타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

 

많다.

 

자신에게 버려야 할 감정이, 너무도 많다. 

 

어쩌면 아르망이 자신을 먼저 내리게 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네가 이렇게 대역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으라고?

 

그 때, 장화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상처. 메이드들의 몸에 나있는 자잘한 상흔들.

 

‘앨리스’, ‘금란’, ‘바닐라’, 그 밖의 다른 메이드들과 그들의 수에 두 배 언저리 정도 되는 시선의 수.

 

정확히 두 배가 아니었다. 적지는 않지만 두 배보다 조금 못 되는 수였다.

 

누군가는 눈을 바꿔 끼운 흔적이 있었고, 누군가는 사지가 교체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잘린 팔을 연결한 바느질이 어느 메이드의 어깨에서부터 겨느랑이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누군가의 얼굴은 피부를 갈아 끼운 것인지 조금 어색한 색채로 반짝였다.


보기 좋게 비단으로 덮어놓았지만 그 안으로 보이는 누더기들.

 

‘...대체.’

 

죽음에 익숙한 장화는 알 수 있었다.

 

‘여긴 뭐하는 곳이지...?’

 

저들은 자신만큼 진한 죽음을 겪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멀리서 볼 땐 알 수 없었지만 독방을 벗어나 직접 목격하니 확언할 수 있었다. 쉽게 잘릴 리 없는 손가락, 발가락이 절단된 흔적이 있는 자들이 칠 할이었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기는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들이 삼 할 이상이었다.

 

'...뭐야.'


처음 장화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느낀 감정은 혐오감이었다. 주인 잘 만나 호의호식 누리고 사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빈곤 포르노를 찍는 듯하여 치가 떨리게 경멸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혐오감이 아니었다.

 

기괴함.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니는 광경을 목격한 듯한 공포.

 

미워해야 할 자들이 미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두려움을 모른다.

 

장화는 그제야 자신이 느꼈던 감정의 정확한 병명을 알았다.

 

‘......’


경악스러운 광경에 장화의 입이 다물어졌다.

 

대체, 세상 어느 누가 이런 환자들을 모아놓았단 말인가.

 

대체,

 

누가 이런 괴물들을 품어주고 있었단 말인가.


“바닐라.”

 

그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망의 부축을 받은 채 목발을 집고 잠수정에서 나온 사령관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장화는 자신에게로 향하던 수많은 시선이 옮겨졌음을 느꼈다.

 

“주인님! 그런 몸으로 대체 왜...!”

 

“감사합니다. 아르망 추기경님. 지금부턴 저희가 대신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휠체어부터 가지고 와!”

 

등장 하나만으로 사위가 뒤숭숭해졌다. 그 중 가장 동요하던 사람은 자신의 몸을 붙잡고 있던 바닐라였다.

 

“주인님!”

 

“그 애 놔줘. 바닐라. 내 손님이야.”

 

“하지만 이 바이오로이드는 너무 위험합니다! 주인님을 배신할 위험이 있는 바이오로이드를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사령관의 얼굴을 바라본 바닐라의 목소리가 한층 처량해졌다. 제 주인의 옷자락을 잡지도 못하고, 그냥 내버려두지도 못하는 손이 갈팡질팡 떠돌았다.

 

하지만 사령관은 미묘하게 웃을 뿐,

 

“당연히 배신하려면 배신하겠지. 아직 우릴 신뢰할 이유도 주지 않았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겠니?”

 

“예...?”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홍련은 이제 괜찮을 거다. 이쯤 됐으면 쟤도 그냥 죽이는 것보다 나를 죽이는 게 홍련을 더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이란 걸 깨달았을 테니까.”

 

그 말에 모든 메이드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장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말에 내려다보기만 했던 고개가 처음으로 돌려졌다. 불쑥 올라온 시선에 보이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령관이었다.

 

“주... 주인님! 그렇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저희가...”

 

“바닐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니?”

 

얼굴이 수척해 보이는 그는, 웃고 있었다.

 

“네가 하는 말이 워낙 사납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던지, 지금도 그 때 너랑 했던 얘기가 기억이 나는구나. 그래도 난 네 말을 들어줬어. 그 때 네게 필요한 건 그거 하나였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직 죽음이 멀었다는 듯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던 그의 손이 장화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나는, 너희에게 했듯,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걸 줄 거다.”

 

그의 팔이 장화의 얼굴을 하늘빛으로부터 가려주었다.

 

이어지는 반론은 없었다. 모두가 그의 말 한마디에 압도된 듯 입을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전이었다면 제 주인에게 꼬리치는 화초들이라며 경멸했을 장화였지만, 그 말 한마디를 직접 들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자, 장화야.”

 

이 사람의 말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풍겨오는 말의 선율은 달콤했지만, 깊은 바다처럼 무거웠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따스했지만, 흉터로 가득해 울퉁불퉁했다.

 

속을 턱 하고 잡아오는 온기.

 

그 따스함은 몸 밖으로 흘러나온 핏방울들에게서 느껴지는 열기와 비슷했다. 죽을 때 맡았던 하수구 같은 악취와 같이 끈적였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다시 잠들기 전에 듣고 싶은 말이 많구나.”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 것.

 

아르망은 자신이 부축하던 팔을 장화에게로 건넸다.

 

툭.

 

팔은 힘없이 그녀에게로 떨어졌다.

 

“...네.”

 

장화가 대답했다.

 

그녀와 사령관이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

 

 


외전 쓰냐고 물어봤던 사람들은 지금도 읽어주고 있는 거겠지...?

 

다음화: https://arca.live/b/lastorigin/64188851?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