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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령관이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엄청난 인간이었다.

 

 평범한 중산층 집안 출신이었으나 은행과 사채, 지인을 통해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때려 부은 주식으로 세계적인 거부가 된 건 인류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 부사령관은 할아버지를 존경하였으나 그게 게임 지식으로 활용한 걸 안 뒤 황당하였지만 말이다.

 

 물론 여기가 게임 속 세계라는 걸 완전히 믿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예견한 일들은 언제나 정확히 벌어졌고, 할아버지는 그 일을 통해 최대한 이익을 취해왔다.

 

 무엇이든 못할 게 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무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조차도 원작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할애비는 이 좆망겜에 전생해서 존나 잘 살아왔다. 이쁜 마누라를 얻었고, 자식들도 좋은 대학에 대기업 보내고, 손주손녀까지 다 보았어. 그런데 이제 너밖에 안 남았구나.”

 

 냉동장치에 부사령관을 넣기 전, 할아버지는 서글프게 웃으셨다.

 

 “망할 것들, 나보다 빨리 디져서는.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이 없더구나. 그러니 너는 오래오래 살거라.”

 “할아버지는……?”

 “됐다, 아흔 넘는 할애비가 더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어? 난 오래 살았으니 괜찮다.”

 

 기계음이 울리면서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며 눈이 감겼다.

 

 “내가 전생에 250레벨까지 찍어줬는데 우리 손녀, 잘 좀 부탁한다 철남충 새끼야.”

 

 거기까지가 부사령관이 기억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기억이었다.

 

 다이어리를 열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진짜 철남ㅊ, 아니 사령관의 거기가 옥수수만한 거예요? 할아버지가 진짜로 보신 게 맞냐고요.”

 

 진짜로 다이어리에 적힌 게 사실이냐고, 할아버지를 만나 따지고 싶었다.

 

 지금껏 겪은 1년간의 행보가 부사령관의 개입으로 약간 변한 걸 제외한다면 대부분 들어맞았다. 이후에 벌어질 일들 또한 할아버지의 게임 지식에 따르면 정확할 거다.

 

 별의 왈랄루, 레몬에이드, 철의 왕자 외에도 앞으로 오르카가 겪게 될 사건들. 하나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예언서가 있으니까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언서에 적혀 있지 않은 오르카 분열 위기는 별개였다.

 

 “무리야, 무리. 이런 게 들어오면 죽는다고.”

 

 손으로 옥수수 크기를 재보고, 배에다 대보니 절로 욱신거려 얼굴이 찡그려졌다.

 

 “망할, 두번째 인간으로 발견될 거면 사령관이 자리를 완전히 잡은 뒤 발견되던가. 괜히 동시에 발견되어서 이 꼴이잖아.”

 

 거기다 하필이면 사령관의 얼굴이 반쯤 철충에게 감염돼있던 탓에 사령관보다 부사령관을 지지하는 여론이 컸었다. 할아버지의 원작 지식이 아니었다면 그녀마저도 그를 내쫓았을지도 몰랐을 거다.

 

 솔직히 원작 지식이 아니더라도 부사령관은 자신이 사령관직에 어울리지 않는 걸 알았다. 지금 부사령관직도 허덕이는 마당에 사령관이 되어 저항군을 지휘한다? 그것도 희생자 하나 내지 않고?

 

 아무리 원작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망할 좆망겜…….”

 

 부사령관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식을대로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만약 자신이 나중에 발견되었었다면.

 만약 사령관의 외견이 멀쩡했으면.

 만약 옥수수가 아니었다면.

 .

 .

 .

 “아 몰라! 일단 일이나 하자.”

 

 커피를 다 마신 부사령관은 다시 서류를 잡았다. 아무리 고민해봤자 쓸데없었기에 밀린 업무부터 하기로 하였다.

 

 “따지고 보면 철남충 네가 안 하니까 애들이 저러는 거잖아. 콘스탄챠와 제일 먼저하고 1년 동안이나 난봉꾼으로 살았다면서 지금은 왜 아다인건데!”

 

 19금 게임이면 19금 게임답게 행동하라고, 괜히 사령관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나저나 철남충, 이거 입에 착착 달라붙네. 버릇 들면 안 되는데.”

 

 그렇게 사령관을 씹으면서 서류를 정리하던 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주인님. 들어가도 될까요?”

 “리리스야? 응, 들어와.”

 

 부사령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침 잘 됐다. 리리스, 커피가 다 식었는데 새로 하나 타줄 수 있어?”

 “물론이죠. 주인님이 원하는 건 뭐든지 이뤄드려야죠.”

 “고마워.”

 

 블랙 리리스. 멸망 이후 세계에서 부사령관이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바이오로이드이며, 지금까지 그녀와 경호와 업무를 보좌해주는 측근이었다.

 

 하지만 부사령관은 유독 리리스를 아꼈는데 다름이 아니라 블랙 리리스는 멸망 전부터 부사령관을 따른 바이오로이드였다.

 

 “역시 난 리리스가 타주는 커피가 최고야.”

 “제가 언제부터 주인님을 모셨는데요. 주인님의 취향은 빠삭하답니다.”

 

 그렇기에 부사령관을 보는 리리스의 눈에는 언제나 애정이 담겨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지긴 했지만 멸망하기 전보다 과해진 리리스의 애정 때문에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었다.

 

 “그, 있잖아, 리리스.”

 “네, 주인님. 무슨 일이신가요?”

 

 한참 커피를 마시면서 밀린 업무를 보던 중 부사령관은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시 사령관하고 그, 동침해야겠지……?”

 

 리리스를 보니 조금 전 사령관이 말했던 페로의 일이 떠올랐다. 그 얌전한 페로도 주인의 모독을 듣고서 격렬하게 반응했는데 만약 리리스가 들었다면?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처음 일어난 일이지만 부사령관이 계속 관계를 피하고 있는 한 언제 또 이런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이번엔 단순히 언쟁으로 끝났지만, 그다음에는 피를 보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흠칫 몸이 떨렸다.

 

 “사령관이랑 하시는 게 내키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그가 주인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요?”

 “아니, 꼭 그런 게 아닌데. 그게 그러니까…….”

 

 부사령관은 얼굴을 붉히면서 두 손을 천천히 벌렸다.

 

 “그, 사령관의 크기가……옥수수…….”

 “………….”

 “혹시 하다가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서, 랄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래. 아하하. 일이나 하자, 일…….”

 “옥수수…….”

 

 직접 말해놓고도 부끄러워 부사령관은 다시 서류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면 리리스는 조금 전의 말을 되새기고는 두 손을 벌려──부사령관의 아랫배와 번갈아봤다.

 

 리리스는 두어번 눈을 깜빡깜빡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제가 어떻게 주인님을 모시게 되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어? 아, 그러니까 돌잔치 때 내가 너를 선택해서 그랬었지?”

 “네, 맞아요. 주인님은 저를 선택하셨고, 저는 주인님을 아기 때부터 모실 수 있었어요.”

 

 부사령관의 돌잔치 때 그녀의 할아버지는 돌잡이로 그녀의 앞에 인형 6개를 두었었다. 각각 하얀 고양이, 검은 고양이, 빨간 늑대, 하얀 올빼미, 흑백 강아지, 그리고 흑백의──형체가 일정하지 않은 무언가.

 

 『리리스는 역시 부정형 리리쮸가 커엽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인형을 보고 당시 부모는 물론이고 친가에서도 할아버지는 애한테 무슨 괴상할 걸 보이냐고 꽤나 혼났었다고 한다. 아기가 그걸 보고 울기라도 했다간 어쩔 거냐고.

 

 그런데 모두의 기대를 깨고 부사령관은 ‘부정형 리리쮸’를 딱 집었고 까르르 웃었었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는 ‘역시 손녀가 귀여운 걸 볼 줄 아는군!’ 하며 흐뭇해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1살짜리 갓난아기는 당시 1,000억이나 하던 세계최강 경호원을 갖게 되었다.

 

 솔직히 오래 봐서 귀여웠던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꽤 괴상한 디자인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오드리한테 만들어달라고 해볼까.

 

 “비록 철충이랑 휩노스 병 때문에 100년을 넘게 떨어져 있었어도 저는 악착같이 주인님을 찾아왔어요. 그리고 다시 주인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죠. 네, 맞아요. 저는 주인님이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시더라도 곁에 있을 거고, 지킬겁니다.”

 “어, 그래. 고마운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움과 기쁨에 차 있던 리리스의 눈이 빛을 잃어가는 게 부사령관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나의 주인님. 결코, 다시는 떨어지게 할 수 없어요.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주인님을! 주인님을! 그깟 발정난 암캐들 때문에!”

 “리리스? 저기, 리리스야?”

 

 리리스는 웃고 있었다. 부사령관의 앞에서 언제나 보여주던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살벌한 무언가에 부사령관의 등이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저와 컴패니언의 자매들은 언제나 준비되었습니다. 저희 말고도 주인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분들은 많답니다.”

 “어, 어 어버버…….”

 “나쁜 리리스는 주인님을 모욕하는 자의 입을 찢어버리고, 주인님을 상처입히는 자는 온몸을 부셔버릴거예요. 그것이 설령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라도, 설령 하나밖에 없는 인간일지라도──.”

 “그만!”

 

 더 이상 들었다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부사령관은 리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당장 사령관이랑 할 거니까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해!”

 “하지만 주인님!”

 “명령이야! 아무튼 명령이니까 난 퇴근한다!”

 

 도망치듯이 부사령관은 황급히 집무실에서 나갔다.

 

 옥수수고 자시고 이대로 있다간 파국이다! 피바람이다! 충격과 공포다!

 

 오르카의 평화를 위해 부사령관은 달렸다.

 

 *

 

 “뭐랄까, 엄청난 걸 봐버렸네요.”

 

 널브러진 서류와 휘청이는 문.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엉망이 된 부사령관의 집무실 내부를 보며 시라유리는 쿡쿡, 웃었다.

 

 “꽤나 흥미로운 얘기가 들렸는데 저도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리리스 경호대장님?”

 “한가하신가 보네요. 볼 일 없으시면 그냥 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럴 수가 없어요. 부사령관님에게 결재받아야 할 사안이 있는걸요.”

 “서류는 저한테 주시죠. 나중에 정리해서 주인님께 전해드릴 테니.”

 “그건 감사하네요.”

 

 리리스에게 서류를 건네준 뒤 시라유리는 응접용 테이블에 살며시 자리를 잡았다.

 

 “저도 커피 한 잔 내주실 수 있나요? 부사령관님의 취향이 어떤지 예전부터 궁금했거든요.”

 “어머나, 그쪽에게 내어줄 커피는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는데. 저어기 복도에 있는 자판기라도 이용하게 참치캔이라도 하나 드릴까요?”

 “사양할게요. 자판기 커피는 입맛이 아닌지라,”

 

 흩어진 서류뭉치를 청소하며 시라유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시라유리 또한 그녀를 보지 않고 눈을 감아 생각에 잠겼다.

 

 “곤란하다고요. 그런 엄청난 걸 들었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어요.”

 “그래서 사령관에게 바로 보고 하시려고요? 어차피 헛수고일 텐데 말이죠.”

 “흐음…….”

 

 시라유리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오르카에서 추방되고도 남을 큰 사항이었지만 부사령관이 관계되어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부사령관을 지지하는 간부는 물론이고 일반 병사들도 제법 되었다.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 그녀를 추방하자는 의견을 꺼냈다간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리리스가 말한 대로 사령관에게 보고해봤자 헛수고일 게 뻔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사령관은 웃으면서 넘어가 줄 테니까.

 

 “후우, 다음에는 멸망 전 부사령관님 얘기 좀 해주세요. 듣다 보니 재미있었거든요.”

 “쥐새끼한테 들려줄 얘기는 전혀 없군요.”

 

 후후, 그러시군요. 시라유리는 짧게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커피 한 잔도 못 받고,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인데요.”

 

 집무실에서 나가기 전, 시라유리는 문득 떠올렸다는 듯 웃으면서 가볍게 물었다.

 

 “설마 진짜 벌이실 생각이셨던 건 아니었죠?”

 “………….”

 “……아니었죠?”

 

 미묘한 얼굴로 말없이 응시하는 리리스에게 시라유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오르카의 평화를 위해 아다를 때야 하는 부사령관님! 라붕이 손녀는 평화롭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