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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괜찮아요?"

칠흑 같은 거대한 동굴에서 더치의 목소리가 울린다.

"아저씬 괜찮단다. 더치는 괜찮니?"

"저도 괜찮아요. 아저씨 덕분에요."

나와 더치, 제인은 철충의 수색대를 피해서 멸망 전 블랙 리버라는 기업의 벙커로 피신하기로 했다. 그 과정 중에 제인이 철충의 총격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아저씨, 정말 괜찮은 거야?"

제인이 추궁하듯 물었다.

"정말로 괜찮아."

"내가 총에 맞았을 땐 꽤나 안 좋아보였는데."

"그야 당연하지. 사람이 총에 맞았잖아."

"난 인간이 아니라 바이오로이드야. 겨우 총알 스친 거 정도는 괜찮아."

"너흰... 사람이야.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 같은 인격체잖아."

어두운 동굴 안에 있는 벙커. 여기에도 사람이 죽었다. 죽음의 냄새가 난다.

"아저씨는 우리가 인간으로 보여?"

"인간으로 보이는 게 아니야. 너희는 인간이다. 구인류가 만든 인조인간이야. 인간이라고. 너희들은 이 지구의 새로운 인류가 될 거야."

"만들어진 우리가?"

"우리도 만들어졌다. 우리의 육체는 부모가 만들지. 종교적으로 다가간다면 신이 만들었고."

"그래... 그렇구나..."

어두운 복도에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들 사이에는 발걸음 소리만이 술렁인다. 제인이 다시 침묵을 깬다.

"아저씨는 누군가를 지킨 적이 있어?"

"난... 기억이 나지 않아."

"아저씨는 기억이 나는 게 대체 뭐야? 이름도 기억 못하고."

사실은 조금씩 가슴이 아려온다. 기억이 피어오른다. 수라지옥에선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럼에도 마음이 동요하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인의 얕은 상처엔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제인의 어깨에 피가 튀었을 때, 지킬 수 없었던 사랑했던 이의 피웅덩이가 떠올랐다. 난 그 사람을 지킬 수 없었다.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인. 너가 계속 물어봐 준 덕분에 내 이름에 대해 조금 떠오른 게 있어."

"뭐? 그래? 잘 됐네. 얘기해줘."

"이승에서 받은 진짜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수라지옥에서 불렸던 이명이 있었어. 락샤사."

"락샤사?"

"그래. 락샤사. 이 이름이 퍼져서 이 이름을 음차하여 부르는 이름도 있었어. '나찰'이나 '아타나시오스'라도고 불렸지."

"락샤사? 나찰? 아저씨 이름에는 어떤 뜻이 있어요?"

나와 제인의 손을 잡고 가운데에서 따라오는 더치가 되물었다.

"락샤사라는 건 이 아저씨가 살던 수라지옥에 있는 악귀란다. 아저씨가 수라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은 사실 엄연히 따지자면 선도, 그러니까 선한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란다. 그렇지만, 여기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 싸우기를 좋아하고, 선함과는 거리가 멀단다. 아저씨는 그런 사람들과 다르게 싸우기를 싫어하지만, 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계략에 빠져서 죽어도 무한히 되살아나 싸울 수밖에 없는 곳에 빠졌단다. 그곳에서 살다보니 사람을 죽이는 악귀라는 멸칭으로서 락샤사라고 불리게 됐단다."

"그치만 아저씨는 나쁘지 않은 걸요."

"그래서 나찰이라는 이름도 있단다. 락샤사라는 이름의 표기만 바꾼 것일 뿐이지만 뜻은 엄연히 다르단다. 싸우는 것을 싫어하고, 착하게 살기를 추구하는 일부 사람들에겐 이 이름으로 불렸지. 자신들처럼 착하게 살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강한, 법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란다. 어떤 사람은 아저씨의 강함을 보고선 수라지옥의 대장인 아수라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 나찰이라는 이름과 아수라를 동일한 신으로 보기도 했단다."

"우와. 아저씨는 그럼 신이예요?"

"신은 아니란다. 사람들이 멋대로 그렇게 부른 거지. 혹은 내가 신이길 바랬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럼 나머지 이름은 무슨 뜻이예요?"

"아타나시오스라는 이름도 락샤사라는 이름을 조금 변형한 이름이란다. 아저씨가 죽고 다시 살아나면서도 싸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절대 꺾이지 않고 절대 죽지 않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지. 불멸, 불사라는 뜻이란다."

"그래서 난 아저씨를 뭐라고 부르면 되는 거야?"

"셋 중 아무 이름으로 불러. 굳이 하나 정하라고 하면 짧고 간단하게 나찰이라고 부르던가."

"그래, 그럼 나찰 아저씨라고 부를게."

내심 호칭이 길어져 불편할 거 같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동굴의 끝에 도달했다. 벙커를 지키는 문이 옅은 푸른 빛을 낸다. 문 너머에서 죽음의 냄새가 아주 짙게 느껴졌다.

-방문자의 생체신호를 감지했습니다. 저전력모드를 해제합니다.

문에서 기계음이 들린다. 문 너머에 들어가자 수많은 침대와 침대 위에 눕혀진 많은 백골들이 보였다. 난 황급히 더치의 앞에 서 아이의 이목을 끌었다. 아이가 죽은 것을 보면 안 좋을테니까.

"제인, 더치와 함께 좀 더 내부에 들어가서 탐색해봐."

"응, 알았어. 더치, 가자."

제인도 내 생각을 알았는지 더치를 백골들이 누워있는 반대방향으로 둬서 안 보이게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직도 전력이 남아있네. 이게 발전된 인간의 기술인가?"

-저희 블랙리버 사의 벙커는 지하의 바이오테크 시설에서 수확한 농산물들 중 일부를 바이오디젤과 비료로 만들어 최대한 지속 가능한 벙커로 설계되었습니다.

"뭐야 무슨 소리야!"

갑자기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 검을 뽑아들었다. 천장에서 카메라가 달린 기계팔이 나와 나를 훑어본다.

-블랙리버 사에서 제작한 대 철충 인류 보호 벙커의 종합 관리 AI 딥 케이번, 살아남은 인간에게 보고합니다. 2114년 X월 X일, 벙커 내부의 귀빈들의 생체신호 모두 정지. 이후 벙커는 기록물 보관과 바이오테크 시설 가동을 위한 전력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차단하고 저전력 모드로 전환. 현재 시각 2176년 X월 X일을 기점으로 저전력 모드를 해제하고 정상 가동합니다.



"대략 2114년에 인간이 멸망했고, 지금은 그보다 68년이 지난 거구나."

-그렇습니다.

"여기 인간들은 전부 침대에 누운 채로 죽은 거야?"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전부 모여서 가지런히 누운 채로 죽은 거야?"

-2113년 X월 X일, 철충을 상대로 열세였던 전황을 인류는 점차 극복하여 수비진형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허나 원인불명의 수면병이 발병하고, 인류 사이에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이 수면병의 발병 초기는 단순히 수면 시간이 늘어나고 수면장애를 일으키는 수준이지만 말기엔 점차 생명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각한 수면장애, 정신착란, 환각 증세를 보이고 결국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딥 케이번 벙커의 귀빈들은 모두 이곳에서 수면병으로 깨어나지 못할 잠에 들었습니다. 결국 2114년 X월 X일, 인류 최후의 보루, 락 하버에서 마지막 남은 인간 마저 수면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철충의 공습에 이어서 역병이란 악재가 덮쳤던 거구나. 방금 그 말은, 다른 벙커와도 통신이나 접속이 가능하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전 세계의 대 철충 인류 보호 벙커 256곳 중 인간의 생체신호가 감지된 곳은 이곳, 딥 케이번 뿐입니다.

"그래, 역시 나 하나만..."

-그리고,

그리고? 난 그 말에 흠칫 놀랐다. 내리깔은 고개를 다시 들고 카메라를 봤다.

-2172년 X월 X일, 태평양 호놀룰루 남쪽의 무인도에 위치한 블랙리버 사의 인류사 보호 벙커인 앙헬 리오보로스의 무덤에 인간과 바이오로이드 다수의 출입이 감지되었습니다.

"뭐? 인간이 있어? 어디였는지 지도 같은 건 볼 수 없어?"

-현재 계신 방의 관제센터로 안내합니다.

백골이 잠든 침대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계단을 내려가니 넓은 반원탁의 한가운데에 지구본 모양의 홀로그램이 있고 벽면은 방대한 자료들이 띄워진 디스플레이가 붙어있다. 딥 케이번이 지구본 홀로그램의 여러 지역을 붉은 점으로 표시하고, 디스플레이로 이들의 주요 시설 방문 기록을 띄워주었다. 이들은 한국, 북미, 괌, 일본 등 여러 나라와 대륙을 왔다갔다 한 것 같다.

-2172년 X월 X일, 앙헬 리오보로스의 무덤을 방문한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생체신호 기록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주요 시설 방문 기록을 추적한 결과, X일 전 핵잠수함을 운항하여 도쿄에서 출항함을 확인. 현재 북태평양의 날짜변경선을 넘어 캐나다 방향으로 운항중입니다.

"그것까지 볼 수 있다니. 정말 무서울 정도로 대단하네. 그보다도 아직도 살아있다니. 많은 바이오로이드들과 핵잠수함 덕분에 살아있는 건가. 정말 고마워 딥 케이번."

관제센터를 벗어나고 백골이 있는 침실에서 더치와 제인이 간 방향으로 이동했다. 더치와 제인이 반대편 복도에서 손을 잡고 걸어온다.

"어, 나찰 아저씨. 마침 찾고 있었는데 잘 됐네."

"나도야. 나도 찾은 게 있거든. 너희는 뭐 찾은 거 있니?"

"우리는 수송용 스텔스 항공기랑 활주로를 발견했어. 이런 지하 벙커에 항공기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근데 어떻게 이용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우리가 공군 바이오로이드는 아니라서 말이야."

난 AI 딥 케이번에게 얻은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인간님이 또 있다니. 심지어 핵잠수함과 많은 바이오로이드를 데리고 다니며 약 4년 정도를 생존했다고?"

"응. 그 인간의 방문 기록과 함께 매번 다른 바이오로이드도 같이 방문한 걸 보면 우리처럼 소규모가 아닌 대규모로 움직이는 집단일 수도 있어. 이 정도의 규모라면 철충과는 당연히 조우를 여러 번 했을 게 뻔하니 군사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제인이 조금 불만있는 것처럼, 또 한편으로는 고민을 하는 것처럼 손톱을 살짝 깨물며 찡그린 표정을 짓는다.

"왜 그래. 무슨 생각해?"

"그 인간에게 합류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어."

"고민할 이유가 있어? 최대한 빨리 합류해야지."

"그치만..."

제인은 손톱을 깨물며 반대쪽 손을 잡고 있는 더치를 내려본다.

"..."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 있을테지. 특히 더치를 보기만 해도 이전의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였는지를 느낀다. 의도적으로 작은 체구의 아이로 만들어진 채광용 바이오로이드.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손과 옷에 밴 담배냄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음은 직감적으로는 알고 있다.

"그 인간이 마냥 나쁜 인간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

"그렇지만..."

"직접 만나보고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한 다음에 합류해도 괜찮잖아."

"...."

"만약 정말로 나쁜 사람이 맞다면, 내가 그 사람을 심판하면 돼."

"...."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는 더치와 제인, 너희들이 판단해."

손톱을 물어뜯는 제인의 손을 입에서 떼어냈다. 제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싼다.

"... 알겠어. 그렇게 해."